어떤 일이든 한 가지 일을 30년 넘게 걸어온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죠. 영문외교월간지 〈 디플로머시 〉의 임덕규 회장 역시, 지난 30여년 동안, 영문외교월간지 발간이라는 길을 걸어온 분입니다. 변변한 영자지조차 없던 지난 70년대에 영문잡지를 창간해, 그 동안 수많은 대통령과 왕 등 세계적인 지도자들을 인터뷰 해 온 임덕규 회장. 때로는 민간 외교관의 역할도 해야 했고, 그래서인지, 세계 각국의 정치 지도자와 최고 권력자에 대한 수많은 일화들을 가지고 있는데요.
집중인터뷰 오늘은, 임덕규 회장이 만나본 세계적인 정치지도자와 권력자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들어보고, 왕과 대통령만을 고집했던 〈디플로머시〉 커버스토리에 얽힌 이야기들을 함께 합니다.
오늘 박인규가 주목한 이 사람은 영문외교잡지 〈 디플로머시 〉의 임덕규 회장입니다.. 임덕규 회장은 동국대 법정대를 졸업하고 1968년부터 70년까지 신아일보 논설위원과 동화통신 논설위원 겸 출판국장을 지냈습니다. 1975년 영문 외교잡지 〈 디플로머시 〉를 창간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11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습니다.
박인규 : 임 회장님, 안녕하십니까?
임덕규 회장 : 안녕하십니까?
박인규 : 〈디플로머시〉를 창간하셨을 때가 지난 75년, 그 당시라면 제대로 된 영어잡지도 없었을 때인데…어떻게 해서 영문외교잡지를 내시겠다고 마음먹으신 겁니까?
임덕규 회장 : 그 때는 영문잡지 월간지는 전혀 없었습니다. 최초의 월간지인데요. 제가 63년부터 임병직박사님이라고 1919년부터 독립운동을 하시고, 해방 후에는 2대 외부무장관도 하시고, UN대사를 10년동안 하시고, 63년에 돌아오셨어요. 미국에서…그 때부터 개인적으로 보수도 없이 봉사하는 차원에서 모셔 드렸습니다.
박인규 : 말하자면 임병직선생의 비서역할 같은 일을…?
임덕규 회장 : 그렇죠. 개인 보좌를 해 드렸는데 조건없고, 보수없이 해 드리면서 독립운동을 하는 어른들을 많이 뵙게 됐어요. 이철기 장군, 이범석장군, 윤채영박사님…여러 어른들을 자주 뵙게 됐는데 제가 그 때는 논설위원을 하고, 서강대에서도 70, 71년에 강의를 했어요. 그런데 임병희회장님께서 저에게 " 밥만 먹고 살지 말고…나라를 위해서 영어잡지를 만들어서 미국 사람을 설득하면 나라에 도움이 많이 될 것이다…"그런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그 때는 외교라는 것이 대미외교 뿐이었죠. 그 말씀을 듣고 보니까 그런 어른들은 평생 동안 독립운동을 조건 없이 하신 분들이니까…무언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막상 하려고 보니까…그 때 막 유신직후였거든요. 제가 신청을 해서 하려고 하니까 그 당시 이원경차장께서 저를 불러서 "이렇게 어려운 것을 지금 하려고 하느냐…"고 하셔서 제가 설득을 했죠. "독립운동보다는 쉬울테니까 한 번 나라를 위해서 겸사겸사 시작을 하겠다."고 취지를 말씀드리고 하게 됐습니다. 여러 분들에게 하지 말라는 권유도 많이 들었습니다. 글 쓰는 사람도 없고 하니까…
박인규 : 임병직선생이 이승만대통령과 미국에서 같이 주로 활동하신 분이시죠?
임덕규 회장 : 네. 독립운동을 하실 때…유일하게 상관도 없고 부하도 없는…미국에서는 그렇게 많이 알려지셨죠.
박인규 : 영문잡지라는 것이.. 70년대라고 하면 영어가 많이 보편화가 되지 않았고, 영어기사를 쓸 사람도 없다고 하셨지만…중요한 것은 잡지라는 것은 돈이 없으면 못 만드는 건데…순전히 혼자 시작하신 겁니까?
임덕규 회장 : 제가 돈도 모아놓은 것도 없이 갑자기 하게 돼서…그런데 다행히 전화 값이 굉장히 비쌌어요. 전화를 잡히니까 300만원을 얻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굉장히 비쌌던 거예요. 300만원을 빌려 무교동에서 조그마한 7평짜리 방하나 빌리고 또 집을 잡혀서 창간호를 냈습니다. 그 전에는 빚을 얻는 다는 것은 있어본 일이 없었기 때문에…아주 비장한 각오를 하고…저는 집을 돈을 벌어서 산 것이 아니고…시골에서 부모님 유산으로 집을 20평짜리를 서울에서 가지고 있었는데…그 집을 잡혀서 굉장히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그 당시 분위기는 잡지라면 모두 망한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에…잘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이런 각오로 하고 만약에 풍비박산이 되면…새마을운동에서도 보면 지게일을 해도 하루에 1만원씩은 벌 수 있었습니다.
박인규 : 먹고는 살 수 있다…?
임덕규 회장 : 네. 제가 그런 각오를 하고 했는데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창간호가 나온 것이 75년 몇 월입니까?
임덕규 회장 : 8월 입니다.
박인규 :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경제적이라든가,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임덕규 회장 : 어려움은 늘 있기 마련이고, 어려움을 푸는 재미로 하는 거죠. 제가 정주영회장님께 그분이 75년에 조선산업을 하고 있을 때…"금년에 어렵다는데…힘드시겠어요…?" 하니까 정주영회장님 말씀이 "힘든 건 사실인데…힘든 것을 푸는 맛으로 하는거라고…"그런 분들의 말씀을 많이 들어서 제가 옆에서…
박인규 : 75년 8월호가 창간호라고 하셨는데…창간호 표지인물은 누구였습니까?
임덕규 회장 : 그 때는 제가 처음 준비를 2~3년 했어요. 저는 동국대 법과를 나왔는데…제가 영문을 전공한 사람도 아니고, 지금도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 때는 더 대단하지 않을 때 시작했고 뜻으로 시작했기 때문에 몇 년 걸렸습니다. 준비 과정이…그래서 그 당시 주한 미국대사가 그런 영어잡지를 만든다고 말을 하고…이런 저런 일이 있었는데…창간호는 미국특집을 하겠다고 언약을 한 일이 있어서…지켜야 하니까 창간호는 미국 특집을 했습니다. 포드대통령.
박인규 : 제가 듣기로는 〈디플로머시〉의 표지 인물은 항상 왕 아니면 대통령…말하자면 국가 원수만을 하셨다고 하는데…그렇다면 그 당시에 포드대통령과도 인터뷰를 하신 겁니까?
임덕규 회장 : 하지는 못했고요. 그런데 제가 처음 시작은 말씀 드린대로…미국지도자들을 설득하면 나라에 도움이 된다…그런 말씀도 드렸지만 미국만 계속 특집 할 수는 없으니까…그래서 생각하기를…어차피 전 세계인구가 50억…지금은 60억 됐습니다만…50~60억되는 인구를 전체 상대하는 언론은 어차피 불가능하니까…그럼 대표적으로 각 나라 국가 원수들을 해야 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현재까지 대통령이나, 왕만 계속 하고 있습니다.
박인규 : 지금까지 〈디플로머시〉의 커버스토리로 다뤄진 국가지도자가 몇 분이나 계십니까?
임덕규 회장 : 한 350명 가까이 되죠. 이제…
박인규 : 그러면 세계 주요한 나라들은 모두 거치고…여러 번 거친 나라도 있겠네요?
임덕규 회장 : 네. 그렇게 되죠. 재선 된 분들은 2번한 일도 있지만…거의 한 번 하게 되면…민주주의 제도라는 것은 바뀌게 마련이고, 민주주의 제도가 아닌데도 바뀌게 마련이니까…계속 선거에서 또 나오면…어떻게 보면 우리 〈디플로머시〉를 위해서 자꾸 바뀌니까..(웃음)…
박인규 : 그 350명이나 되는 국가 원수 중에서 혹시 인상적이랄까? 기억에 남는 분은 어떤 분이 계십니까?
임덕규 회장 : 그런 질문을 때때로 받을 때는…마치 어느 꽃이 가장 예쁘냐고…(웃음) 어려운데…저는 어쨌든 그런 어른들의 뜻을 나라 위해서 하자…평소에 국제법을 전공하고 정치에 관여한 것은, 민주주의 발전과 우리 나라의 통일을 하는데 기여를 해야겠다는 생각에서 그런 운동 중에 하나로 시작을 했거든요. 그런 각도에서 많이 인터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인터뷰가 끝나면 그런 대화를 따로 많이 합니다. 통일에 대해서…평화 정착하는데 도움이 되도록…
박인규 : 아무래도 일반 사람들은…아까 말씀하신 미국이라든가, 일본이라든가, 중국이라든가…강국 지도자들에게 관심이 많을 것 같은데, 그런 분들과도 인터뷰를 하신 경험이 있으십니까?
임덕규 회장 : 있습니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과는 82년에 잠깐 만난 일이 있고, 일본에 수상들은 많이 만나봤죠.
박인규 : 혹시 요즘에 관심이 되고 있는 고이즈미총리와도 만나보셨습니까?
임덕규 회장 : 고이즈미총리와는 직접 만나지는 않고요. 인터뷰는 서면으로 한 일이 있고, 후쿠다수상 같은 분은 재미있는 부분들에 대해 대화를 많이 했는데…그 분이 친한파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분들에게 "왜 정치를 하게 됐느냐…"고 물어 봤더니, 자기가 대장성예산실장을 했었답니다.
박인규 : 지금의 재경부죠?
임덕규 회장 : 그렇죠. 예산실장을 할 때…어머니 말씀이…"이제 공무원으로서는 최고의 직위에 올랐으니 이제는 정치를 해서 나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에 공감해서 정치를 했다고…그래서 "무슨 보람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일본이 제 2차대전후에 전후에 폐허였는데 인류국가로 만드는데 정치인으로서의 뒷받침을 많이 해서…그것에 기여를 한 바가 있기 때문에 보람을 느낀다."고 자신 있게 얘기를 하더군요.
박인규 : 올해 8월호가 말하자면, 창간 30주년 기념호인데, 8월호 표지 인물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새국왕 압둘라왕이었거든요. 그 전에 파드국왕이 돌아가신 것이 8월 1일인데…8월호에 바로 신임국왕이 커버인물로 올라 왔어요? 그래서 굉장히 발빠르다…무슨 예견을 한 것이냐…라는 말도 있었던 것 같은데…어떻게 해서 새 국왕을 그렇게 빨리 커버스토리로 올릴 수 있었습니까?
임덕규 회장 : 제가 7월 중순에 사우디 정부 초청으로 갔습니다. 저희는 원래 왕만 특집을 하니까…국가 원수만 하니까…왕을 특집 하려 했죠. 그 당시 파드국왕을 하려 했는데…거기에는 강광원 주 사우디 한국대사가 계세요. 그 분이 하시는 말씀이, "이미 왕은 10년전에 병이 나서…사실상 왕 노릇을 하고 있는 왕 동생…왕의 셋 째 압둘라왕세자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을 하셔서, 제가 "우리는 왕이 아니면 안하는데…우리 강대사님 말씀 듣고 보니까…우리 강 대사님의 외교에 도움이 된다면 예외 없는 법은 없다는 말도 있으니까…이번에는 예외적으로 왕세자를 한 번 합시다." 해서 인터뷰를 하게 됐습니다. 만나고 돌아 오면서 7월말인데 강 대사님께 우리 큰일났다고, 왕 밖에 안하는데…국왕이 빨리 되셔야 할텐데요. 그러면서 돌아 왔는데 8월 1일에 전 국왕이 돌아가시고, 8월 2일에 압둘라 왕이 취임이 됐어요. 이번호를 준비하는 중에 왕이 되셨기 때문에 8월 5일자로 압둘라 새 왕을 특집으로 하게 됐습니다. 그래서 저를 초청한 사우디장관도 너무 좋아하고, 강대사는 더 좋아하고…아주 굉장히 인기 품목이었다고 얘기를 들었습니다.
박인규 : 아주 창간 30주년 기념호를 멋있게 장식하신 거군요?
임덕규 회장 : 네.
박인규 : 2003년도에 알제리의 부테플리카대통령이 방한을 하셨는데 그 분이 방한을 하시는데 임회장님께서 역할을 많이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임덕규 회장 : 네. 지금 한국과 제일 먼 나라가 사실은 알제리였습니다. 왜냐하면, 김정일위원장과 제일 가까운 분이 부테플리카 알제리 대통령입니다.
박인규 : 이 분이 김정일위원장과 가깝습니까?
임덕규 회장 : 아주 가깝습니다. 2001년에 정부 초청으로 인터뷰를 하게 됐어요. 그런데 그 분 말씀이 내가 김일성주석과 아주 가까웠다고…자신들이 독립운동 할 때 많이 도와줘서 가까운데…북한을 많이 도와줬단 말이죠. 그러니까 대한민국에서는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그 분이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아주 좋은 소식이라고 했더니, 왜 그러냐고 물으셔서, 우리는 김정일위원장과 친한 분이 필요하다. 우리가 한반도에 평화정책을 해야 하는데 그 분과 친한 분이 역할을 해 줄 필요가 있다고 했더니, 그러냐고 하셔서 대통령께서는 김정일위원장과 만나서 남북평화정책을 하는데 서로 협력하도록 하고 또 경제 협력은…알제리의 경제발전에는 제가 역할을 할 테니까, 한국 기업인들이 알제리에 투자를 많이 하도록 할 테니까 알제리의 경제 발전은 대한민국의 기업인들과 지원 받아서 하면 되는 거고, 평화정착은 대통령께서 김정일위원장과 같이 하면 얼마나 좋겠냐고 그랬더니, 제 손을 잡으시면서 할 수 있다고 한 번 해보자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제가 국빈방문을 할 수 있도록 한국에서 노력을 할 테니까 여러 번 자주 오셔서 한 번 하자고 말씀 드렸더니, 자기가 하겠다고 하셔서 제가 돌아와서 김대중 대통령이 계실 때부터 제가 방한 노력을 했죠. 결과적으로 2003년 12월 초순에…
박인규 : 노무현 대통령 임기 중에…준비는 그 전부터…
임덕규 회장 : 네. 준비를 미리 하다가…노무현대통령 임기 중인 2003년 12월 초순에 방한을 하셨죠. 이번에 UN의장까지 지내신 분이고...
박인규 : 아직은 모르겠지만, 그 분이 이제 한국도 왔다 가셨으니까 남북간의 관계 개선에도 역할을하실 수도 있겠네요?
임덕규 회장 : 네. 그런 계획을 하고 있습니다. 또 저도 갈 계획으로 있습니다.
박인규 : 민간외교관의 역할을 톡톡히 하신 것 같습니다.
임덕규 회장 : 우리의 제일 큰 문제가…평화 정책부터 해야 하니까…해야죠.
박인규 : 약간은 실례될 수 있는 질문 일지 모르지만, 저는 국제부 기자를 해서 〈디플로머시〉라는 잡지가 있다는 것…그리고 한 두 번 본 기억은 납니다. 그러나 일반인들은 잘 모르는 거 같아요. 대략적으로 소개를 좀 해 주시죠?
임덕규 회장 : 저희는 지금 말씀 드린대로 대중화하기는 어려운…
박인규 : 일반독자들이 보기 어려운…주로 외교관들이 보시나요?
임덕규 회장 : 주한외국대사들은 물론이고, 우리 나라 대통령은 비롯해서 중요한…물론 각 장, 차관들…중요한 국장들, 정치인들, 대기업의 중역들…이런 분들이 주로 보는데…지금은 고시 보는 분들이 많이 봅니다.
박인규 : 왜 그렇죠?
임덕규 회장 : 제가 가끔 중앙관사에 가 보면, 모르는 분들이 저에게 인사를 해요. "어떻게 아시나요? 누구시더라…?" 라고 하면, "저를 모르실 겁니다. 임회장님…", "그럼 어떻게 아시죠?", "〈디플로머시〉를 요즘 봐야 고시영어 보는데…고시를 치를 수 있습니다. 〈디프로머시〉로 영어 공부해서 고시 합격 했습니다…" 그런 인사를 여러 번 받았어요. 그런 대학가 서점에는 들어갑니다.
박인규 : 외교 관련 쪽으로 일하시거나, 공부를 하시는 분들은 많이 알고 계시죠.
임덕규 회장 : 네. 그리고 전 세계에…우리 나라의 국회도서관에서 사서, 전 세계 국회도서관으로 보내고…또 국립도서관에서 사서 교환도서로…영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박인규 : 제가 발행 부수가 몇 부나 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임덕규 회장 : 글쎄요. 특집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박인규 : 잡지라는 것이…30년이 되셨으면 나름대로 권위도 생기고 그렇다고 보여지는데요. 〈디플로머시〉를 30년간 만들어 오시면서, 어떤 편집의 원칙이라든가, 커버스토리의 인물을 선정하는 원칙…그런 것이 나름대로 있으실 것 같은데요?
임덕규 회장 : 첫 번째는 창간호에 제가 썼습니다만, 우리 〈디플로머시〉는 장점따라 삼만리 하겠다…모든사물이나, 국가나 모두 장단점이 있기 마련인데…일일이 남의 나라에 가서.. 갑자기 독재하는 나라에 가서 민주주의 하시오! 임덕규가 말해서는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현실에 있는 것을 가장 정확하게, 진실을 알리자…하면서 친교도 하자는 말이죠. 우리 나라를 좋게 만들자…이런 것을 생각하면서 늘 하기 때문에 저희는 인물선정은 그런 전제하에 모두 하고 있어서 다른 나라의 국가원수들이 안심하고 만날 수 있는 분위기가 있어요.
박인규 : 대략 350명 되는 국가지도자들을 만나셨으니까 리더쉽학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지도자 하시는 분들의 어떤 덕목이랄까? 특징이랄까? 장점 같은 공통적인 것이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떤 것을 느끼셨습니까?
임덕규 회장 : 일반적으로 공통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애국심이 아주 강렬합니다. 자국의 국민들을 굉장히 사랑하고, 물론 표현의 방식은 다르지만 어떤 지도자가 훌륭하냐고 얘기한다면, 며칠 전에 인도네시아대통령이 다녀가셨는데 그 장인분과 제가 친합니다. 요도요노대통령의 장인이 주한 인도네시아 75, 75년에 대사를 지냈어요. 저하고는 그런 관계로…가족적으로 알고 지내기 때문에…대통령은 처음 만났습니다만, 영부인은 그 전에도 만났던 사람이에요. 이번에는 같이 만났어요. 나중에 이런저런 인터뷰를 끝낸 다음에, 저에게…"어떻게 하면 위대한 대통령을 할 수 있느냐…"
박인규 : 자문을 구하신 거군요?
임덕규 회장 : 네. 그래서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만, "제 생각에는 첫째로 청렴해야 하고, 애국심이 강해야 하고, 진실로 자국의 국민을 사랑해야 하고, 그런 것들의 전제하에 노력을 많이 해야 하고, 물론 좋은 인재를 등용하는 능력도 있어야 하고, 비젼이 물론 있어야 하고…이런 장기적인 안목에서…또 전 세계의 나라가 지금은 따로따로 하는 시대는 지나지 않았습니까? 전 세계의 나라들과 관계없는 나라는 없거든요. 하나하나가 다 잘 되기를 바래야 하는…이런 얘기들을 …전 인류는 어떻게 잘 살 수 있는가…이런 것까지 아주 거시적인 안목에서…자국과 세계를 늘 생각하면서 열심히 노력하면 잘 할 수 있다…"고 주제넘게 참고하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박인규 : 350여명을 만나 보셨으니까 충분히 조언 하실 수 있죠.
임덕규 회장 : 네.(웃음) 코스바나대통령이라고…아프리카 남아공 바로 위에 있는…그 분이 옥스포드대학 출신인데…아프리카는 아시다시피…대통령제도라고 해도, 내각책임제처럼 운영하는 나라가 많습니다. 당선만 되면 계속하는…이번에 봉고대통령도 37년이 됐는데도 또 당선 됐지만 세 번째 당선이 된 후에 서울에 와서 저와 인터뷰가 끝나 다음에, "이제부터는 내가 인터뷰를 해야겠다."고 그래서 "말씀하세요" 했더니 "대통령은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고 있지 않느냐, 그렇게 많이 만났으면 알고 있지 않겠느냐."고 하셔서, 약간은 전처럼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있는데 남의 나라 국가 원수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 고 얘기하면 건방지니까 조심스럽게…
박인규 : 30년동안 외국의 지도자들을 만나셨으니까 우리 나라의 국제적 위상도 많이 달라진 것을 느끼실 것 같아요? 어떻습니까?
임덕규 회장 : 굉장히 많이 달라졌죠. 제가 처음 시작할 당시의 75년은 우리 수출이 50억불이었거든요. 77년에 100억불, 그 후에 지금은 수출만 2500억불이 넘었죠. 70년대, 80년대까지만 해도 제가 만날 때 한국이 어떻다고 설명을 많이 하고 다녔는데 지금은요. 제가 만나서도 가만히 있으면 한국에서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하면 굉장히 짧은 기간에 많은 기적을 이룬 나라라고 자기들이 얘기를 많이 해요. 삼성전자, LG전자, 포스코 조선산업, 현대자동차…이런 부분들을 모두들 얘기 합니다. 제가 가만히 듣고 고맙다는 말만 합니다. 요즘에는…
박인규 : 우리 나라 외교를 위해서 많은 인적 자산을 가지고 계신데요? 앞으로 계획 같은 것이 있으십니까?
임덕규 회장 : 저는 우리 조국이 위대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제가 한국에 태어난 것을 굉장히 영광스럽게 생각하면서 지금 한국이라는 이미지는 세계적으로 대단합니다. 국내에 들어오면 약간은 구름이 낀 듯한 느낌도 더러 보이지만 세계에서 보는 코리아는 대단합니다. 한국사람들은 전부 불가능은 없다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앞으로도 이런 국위선양을 하면서 한국과 자꾸 친하게 만들고 평화정착에 기여하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박인규 : 영문잡지 〈디플로머시〉가 계속 50, 100년 번성하시길 기원하고요. 민간외교관 역할도 많이 해 주시길 부탁 드리겠습니다.
임덕규 회장 : 감사합니다.
*〈박인규의 집중인터뷰〉는 매주 월-금요일 오후 2시30분에서 3시까지 KBS 1라디오(97.3MHz)에서 방송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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