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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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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17>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

구한말 나라가 망했을 때, 우리 민족의 기개를 만방에 알린 이가 안중근 의사(義士)였으니 실로 민족의 영웅이다. 또 반대편에 서서 일본으로 하여금 제국주의 침탈로 나서게 만든 이가 이토 히로부미였고 그 또한 일본의 영웅이었다. 두 사람은 필연적인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다. 안 의사는 쏘았고 이토는 그 총에 맞고 쓰러졌다.

나라가 망하는데 아무런 저항이 없다면 그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는가! 고려가 망하자, 정몽주가 고려를 위해 울어주었고, 조선이 망하자 안 의사가 분연히 떨쳐 일어나 그 분함을 다소나마 풀어주었으니 천만다행한 일이다.

필자는 구한말의 우리와 일본, 중국의 동향에 대해 평소 늘 많은 관심을 가지고 책을 보고 있다. 며칠 전 서가에서 '건건록'을 빼어들고 읽다가 문득 재미난 생각이 들어 오늘은 안중근 의사와 이토 히로부미의 삶과 죽음에 대해 얘기해보기로 했다.

먼저 이 두 사람의 사주를 보기로 한다.

안중근 의사

연 기묘(己卯)
월 신미(辛未)
일 무자(戊子)
시 ---

안 의사의 생시(生時)를 몰라 아쉽지만, 능히 사람됨을 알아볼 수 있게 한다. 무토(戊土)가 미(未)월에 났으니 기가 충실하고 월간(月干)에 신금(辛金) 상관이 있어 용기와 담력이 충분하다는 것을 일러주기 때문이다.

안 의사는 본관이 순흥으로서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며, 고려 말의 유학자 안향의 후손이다. 조선조에서도 순흥 안씨는 뛰어난 인물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강직한 성품의 인사가 많았다.

조부는 진해 현감을 지냈고, 부친 안태훈 역시 예사 인물이 아니었다. 안 의사는 나면서부터 가슴과 배에 검은 점 일곱 개가 박혀 있어 북두칠성에 응한 것이라 하여 이름을 안응칠이라 했다고 한다.

부친 안태훈은 동학혁명 당시 동학군이 황해도의 여러 고을을 다니면서 약탈을 거듭하자 의병을 모아 용감히 맞서 싸워 전공을 올렸다.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하고 힘이 장사인 안 의사 역시 부친을 도와 선봉장으로서 용감하게 싸워 큰 공을 세웠다. 이 때, 안 의사가 붉은 옷을 입고 있었기에 동학군이 달아나면서 천강홍의장군, 즉 하늘에서 내려온 홍의장군이라 불렀다 한다.

당시의 일 중에 재미난 점은 김구 선생 역시 동학군의 해주성 공격에 선봉으로 나섰다가 안 의사의 부친 안 태훈의 의병에 패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안 의사의 부친 안태훈은 김구를 불러 위로도 하고 많은 가르침을 베풀었다고 한다. 이 때 김구 선생은 열아홉이었고 안 의사는 열여섯이었는데, 만나서 교우를 맺었으니 민족의 두 영웅열사가 상봉한 것이다.

안 의사는 천주교의 영세를 받아 도마(토마스)라는 세례명을 받았고, 홍석구 신부로부터 프랑스어와 새로운 지식을 배웠다. 1905년, 27세 때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일본의 불법침략을 세계에 알리고자 상해로 건너갔다.

그 이후 부친상을 당하자 고향으로 돌아온 뒤 가산을 기울여 돈의학교와 삼흥학교를 세워 구국의 인재 양성에 전력했다. 하지만 점차 나라가 어려워지자 1907년에는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대한의군 참모중장 겸 특파독립대장의 타이틀로서 무력항일항쟁을 시작했다.

다음 해 1908년 무신(戊申)년, 30 살 나던 해에는 의병 300여명을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와 경흥과 회령에서 일본경찰과 격전을 벌였다. 일간이 무토(戊土)인 안 의사에게 있어 무신(戊申)년은 같은 기운의 해이니 사실상 이 때부터 평생의 사업을 시작한 셈이다.

다음 해, 1909년 기유(己酉)년에는 결사의 동지들과 손가락을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 넉자를 혈서하고, 드디어 10월 26일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삔 역에서 격살한 후 체포되었다.

그럼 이쯤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사주를 보기로 하자.

이토 히로부미

연 신축(辛丑)
월 무술(戊戌)
일 계축(癸丑)
시 을묘(乙卯)

두뇌가 우수하고 재주가 있으며, 특히 관운이 좋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명치유신의 아버지라 불리는'요시다 쇼인'의 제자로서 스승의 발상과 포부를 그대로 실천하고자 조선병합을 선도했던 효웅(梟雄)이다.

1841년, 하급 무사 가문에서 태어났다. 안 의사가 1879년생이니 두 사람은 대략 40년의 나이 차가 있다. 이토는 1863년 계해(癸亥)년에 영국 대사관 방화사건을 일으켰는데 이 일로 인해 오히려 자질과 기개를 인정받게 된다. 계수(癸水) 일간인 그가 계수의 해에 인생 항로를 출발한 셈이다.

서양 열강의 위력을 실감한 그는 개국파로 전향한 후, 1873년 계유(癸酉)년, 또 한 번 계수의 해에 가서 서양 열강과 맺은 불평등조약의 개정건의서를 제출한 것이 인정을 받아 출세가도에 오르기 시작했으며 그를 높이 샀던 오쿠보 도시미치가 1878년 무인(戊寅)년에 암살당하자 그를 이어 내무경(내무부 장관)의 중책을 맡았다. 관운의 해에 관직을 받은 것이다.

그는 프로이센 헌법에 기초하여 일본 제국의 헌법을 만들었고, 추밀원 의장이 되는 등 고속 출세를 거듭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뛰어난 인재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일본 명치유신의 주도세력인 조슈 번의 인물이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일본은 명치유신으로 열강으로부터 먹이감이 되는 신세를 면했지만, 국력을 기르자 어느새 열강의 침탈 방식을 흉내 내어 한반도를 노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이토의 스승 요시다 쇼인의 생각을 충실히 따른 것이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통해 한반도에서 중국의 세력을 제거했지만, 또 다시 러시아가 문제가 되었다. 그러자 그는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만주까지는 용인하는 한편, 일본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러시아로부터 인정받고자 노력했다. 우리의 운명이 러시아와 일본의 흥정 대상이 되었던 시절의 얘기이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이미 우리의 운명은 결정이 나버렸으니 그 결과가 바로 1905년의 을사보호조약이다. 일본인들이 그들의 영토나 다름없게 된 한반도를 보호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번역하면 이제 일본 땅이니 다른 놈들은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 그 내용이라 하겠다.

조선의 초대 통감인 된 이토는 1907년에 가서 조선의 내정권을 박탈하고 군대마저 해산시켜 버린다. 조선을 확실한 일본의 식민지로 만드는 데 있어 러시아의 다짐을 받을 필요가 있다고 여긴 이토는 이리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갔다가 1909년 10월 26일 아침 9시 반에 안 의사로부터 4발의 총탄을 맞고 현장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이 사건이 일어난 날의 음양오행을 보자.

연 기유(己酉)
월 갑술(甲戌)
일 기미(己未)
시 기사(己巳)

안 의사는 일간이 무토(戊土)이고 이토는 계수(癸水)이다. 날을 보면 온통 기토(己土)가 천간을 차지하고 있으니 이토로서는 살(殺)운에 해당된다. 특히 날과 시는 모두 기미와 기사이니 살기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월의 갑목(甲木)이 있긴 하지만, 지지(地支)구성이 모두 금의 기운을 강하게 지녔으니 사실상 무력하다.

무토 일간인 안 의사의 입장에서 보면 기유(己酉)년이니 동지들과 결맹하여 거사를 하는 운임을 알 수 있고, 날과 시 모두 기토(己土)이니 담력이 충분했음을 말해준다. 결국 이토는 죽을 운에 가서 죽은 것이다. 숱한 우리 백성들을 죽인 그가 받아야 할 마땅한 응보였다.

안 의사는 이토를 격살한 후, 총을 내던지고 대한제국 만세를 세 번 외친 다음 흔쾌히 러시아 헌병에게 포박 당했다.

그 이후 안 의사는 만주의 여순 감옥에서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굽히지 않았으며 옥중에서 자서전과 동양평화론 등을 집필했다. 그는 이토가 죽어야 할 열다섯 가지 죄목을 들어 의거의 이유를 늠름하게 밝혔다.

그리고 법정 최후진술에서도 "오늘날 인간은 모두 법에 따라 생활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가 벌을 받지 않고 살아남을 도리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법에 의해 처벌돼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아 있는데, 이에 대해 나는 한국의 의병이며 지금은 적군의 포로가 돼 있으니 당연히 만국공법에 의해 처리돼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기개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가 교수형으로 순국한 날은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였고, 향년은 32세였다.

연 경술(庚戌)
월 기묘(己卯)
일 경인(庚寅)
시 신사(辛巳)

순군의 일시를 보건대 안 의사는 죽는 순간까지 전혀 흔들림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경금과 신금이 모두 들어와 있으니 최후의 순간에서도 용기와 여유를 잃지 않고 결연히 죽음을 맞이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으로서는 영웅이겠지만 우리에게는 원수가 되는 이토란 사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금전적인 면에서는 무척 깨끗했으며 많은 여자들과 가까웠는데 정을 준 것이 아니라, 국사에 지쳤을 때 스트레스 해소 정도로 즐겼다고 한다. 어느 일본인의 말을 빌면 이토는 여자를 여름철 꽃 정도로만 여겼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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