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유도계의 텃세로 일본에 귀화할 수밖에 없었던 재일교포 추성훈 씨의 스토리를 담은 지난 13일 <KBS 스페셜 : 추성훈 혹은 아카야마 이야기> 편이 시청자들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정희준 동아대 체육학부 교수가 우리 사회의 배타성과 폐쇄성을 그대로 드러낸 유도계와 체육계의 현실을 비판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한국과 일본을 오갈 수밖에 없었던 그의 이야기**
2004년의 마지막 밤 일본에서 열린 종합격투기대회에 처음 출전했을 때 그는 자신보다 40킬로그램이 더 나가는 K-1의 강자 프랑소와 보타를 1라운드에서 가볍게 보내버렸다. 그리고 관중을 응시하며 두 팔을 번쩍 든 그의 모습은 휘황찬란한 경기장을 압도한다. 이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 고생하고 이제 성공했으니 앞으로 서쪽은 쳐다보지도 않겠지…."
그 때 그가 남긴 이미지는 너무나 강렬했다. 그의 출신배경과 한국과 일본을 오갈 수밖에 없었던 지난 이야기들, 그리고 은발 짧은 머리에 얼음칼날의 강인함이 녹아든 격투사로서의 이미지는 나를 사로잡았다. 고백컨대 이 세상 어느 여성도 나를 이처럼 한 방에 매료시킨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그가 경기장에 입장해 링에 오르던 모습은 또 다른 방식으로 독특했다. 다른 선수들은 위풍당당한 위압적 기세로 걸어가고 저만치 뒤에 세컨드들이 양동이를 들고 종종 걸음으로 따라간다. 그러나 그는 그의 세컨드들과 양손 꼭 잡고 함께 들어갔다.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4번타자 기요하라 가즈히로는 뒤에서 추의 어깨를 꼭 잡고 네 명이서 한 덩어리로 입장했다. 기요하라 역시 같은 오사카 출신의 한국계.
***"여기 가슴 안에 들어 있는 피는 완전 한국이예요"**
어쨌든 그 뒤 나의 짝사랑을 전할 방도가 없어 그를 잊고 무념하게 지내던 차 그의 소식이 들렸다. 히어로즈 서울대회에 한국출신 선수단의 주장으로 나와 마지막 경기에서 KO승을 거두고 관중들에게 일본으로 귀화했다고 밝히면서 이렇게 인사했다고 한다. "여기 가슴 안에 들어 있는 피는 완전 한국이예요. 더 열심히 해갖고 다시 한국에 돌아오겠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지난 일요일 <KBS 스페셜>에 소개되면서 세상의 작은 소란으로 변해갔다. 시청자 게시판의 의견이 무려 400여 개에 이르는데 '공영방송의 본때를 보여줬다', '울었다', '재방해달라', '다섯 번 봤다' 등등 위기의 한국방송을 구출할 기세다. 그리고 시청자들은 유도를 위해 한국에 온 그에게 편파판정으로 시련을 준 대한유도회의 홈페이지로 달려가 게시판을 초토화시켰다. 그를 울게 만든 또 다른 주역인 용인대에도 그에 못지않은 난리가 났을 터인데 아뿔사, 그 학교 홈페이지에는 게시판이 없네! 현재 용인대는 무사한 것 같다.
세 살 때 유도를 시작한 재일교포 4세 추성훈. 그는 한국 국적을 포기하지 않아 일본대표로 국제대회에 출전할 수가 없었다. 세계 최고가 되고 싶었던 그가 그 때 선택한 것은 할아버지의 나라 한국이었다. 그의 여동생 정화도 같이 부산에 와 유도를 하기 시작했다. 1998년 스물넷 나이에 생전 처음 찾은 할아버지의 나라에서 그는 한국말과 문화를 배우면서 일취월장 유도 81kg급의 최고수로 성장했다.
문제는 국제경기에선 연이은 한판승으로 우승도 하는데 유독 국내대회, 특히 가장 중요한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한게임 선발전에서 항상 판정시비 끝에 고배를 들어야 했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추성훈에게는 '좋은 대회' 출전권은 줄 수 없다는 '그 분들'의 심보 때문이었다.
***추성훈의 쓰디쓴 '일본 귀화'…"일본보다 한국의 차별이 더 가슴 아파"**
2001년 결국 그는 '(국적을) 바꿔야지. 말을 해도 안 됩니다. 여기는'이라는 쓰디쓴 독백과 함께 일본으로 가 귀화한다. 당시 그는 인터뷰에서 조인철 선수가 은퇴하면 기회가 있지 않겠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제 체급에 용인대 선수가 몇 명 있어서 힘들다"고 대답한다.
당시 같이 부산 어느 대학에서 유도를 하던 여동생도 역시 한국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돌아가 오빠와 함께 귀화한다. 가족도 말리지 못했다고 한다. 바로 다음 해 일본대표로 출전한 아시안게임에서 그는 한국의 안동진을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건다. 그 때 할 말은 한다는 어느 신문사는 '조국을 메쳤다'는 기가 찬 제목을 뽑아 다시 한번 나를 씁쓸하게 만들었다.
그는 일본에서의 차별보다 한국에서의 차별이 더 가슴 아프다고 했다. 또 "나는 한국인도 일본인도 아니었다"고도 했다. 작금의 상황을 둘러보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4대에 걸쳐 한국국적을 지켰을 때는 한국 쪽에 끼지 못했는데 일본 국적으로 바꾸고서야 한국사람 대접을 받고 있으니 말이다.
어느 사회나 소수집단의 미래는 막막하기만 하다. 주류사회에 진입할 수 없으니 변방을 떠돌게 마련이다. 미국의 경우 소수의 중산층 흑인가정을 제외하고 흑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미래상으로 생각하는 역할모델(role model)은 연예인, 스포츠스타, 갱단이다.
일본의 최대 소수집단인 재일교포 청소년들의 역할모델은 이 셋 중 하나만 다르다. 연예인, 스포츠스타 그리고 야쿠자. 일본에는 실제 많은 수의 한국계 스타들이 있지만 본인들이 먼저 입을 열지 않으면 일본 언론도 굳이 먼저 까발리지 않고 비밀 아닌 비밀로 남겨둔 채 인정해준다.
***한국인의 '지독한' 배타성**
확실히 우리사회는 폐쇄적이다. 같이 미군정을 경험했으면서도 외국인에 대한 차별은 우리가 훨씬 더 심하다. '야수' 밥 샙도 일본에서는 최고 인기인 중 하나다. 그러나 우리 경우는 혼혈이라는 사실만 밝혀져도 어느 여자 탤런트의 경우처럼 자신의 피의 색깔에 대해 울면서 고백하는 기자회견 쇼라도 해야 통과된다.
외국인에 대한 민족적 경계는 서양인에 국한되지 않는다. 세계에서 차이나타운 없는 유일한 거대도시가 바로 서울이다. 노골적 차별을 서럽게 버텨내던 70년대, 이국에서의 애환을 나누고 재한화교들의 구심적 역할을 하던 명동의 어느 중국집이 ㄹ호텔 때문에 헐리게 되자 그들은 미련 없이 떠났다. 그때 중국집주인이 이 땅만은 못 판다고 버티니까 호텔 지으려던 재벌기업은 청와대로 달려갔다지 아마. 요즘 인천이 자장면축제도 하며 차이나타운 살리기에 나섰다 한다. 그러나 이도 관광객 호주머니나 긁어내려는 지자체의 상술일 뿐이다.
이러한 배타성은 같은 피조차 구별짓게 한다. 그 대상은 바로 슬픈 역사 속에 고국을 떠야 했던 재일교포들이다. 우리는 이들에게만큼은 '귀화'라는 잣대를 막무가내로 들이밀고 이를 지키지 못하면 집단린치를 가했다. 비이성적이리만큼. 재일교포의 90%는 일본서 태어나 일본말밖에 모르고 80%는 일본인과 결혼하며 그 대부분이 일본서 죽을 것이다.
그런데도 재일교포의 4분의 3에 가까운 65만 명이 남한 또는 북한 국적을 유지하고 있다. 재일한국인의 귀화율은 미국에 사는 한국계나 유럽에 사는 알제리, 모로코계 등에 비해 비정상적으로 낮다. 이런 이들을 친일파, 매국노, 쪽바리라고 매도하는 게 우리다.
***히딩크의 귀화에 '열광', 박세리 귀화엔 '저주'?**
우습다. 우리는 히딩크의 '귀화'를 외쳐댔다. 국내 프로리그의 외국선수들이 귀화하면 이를 호의적으로 보도했다. 일화의 사리체프도 김치찌개 좋아하고 한국말 열심히 배우고 귀화시험준비 한다며 넉넉한 화면에 담아 흐뭇하게 내보냈다. 이와 대비되는 소동이 있었다. 당시 영어도 짧던 박세리가 미국기자의 질문에 별 고민 없이 의례적으로 "미국영주권을 고려해 볼 수도 있겠다"고 한 것을 두고 매국노, 양키의 딸이라 몰아붙이고 저주까지 하며 온 국민이 단번에 나락으로 내동이친 전력이 우리에겐 있다.
이 난리에 삼성전자도 기겁을 해 이미 찍어 놓은 미방영분까지 포함해 박세리가 출연한 모든 광고를 폐기처분하고 그 대신 가장 '안전한' 모델 안성기로 바꾸고 급하게 인어까지 모셔와 출연시켰었다. 도대체 어느 귀화는 즐거운 것이고 또 어느 귀화는 저주해야 할 것인가.
박세리의 경우야 성공해서 돈 벌러 미국에 간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대한의 딸'로 포장됐던 특별한 경우니까 그렇다 치자. 아픈 마음 부여안고 일본으로 건너가야 했던, 그리고 그나마 지금은 평범하게 사는 재일동포들에게 우리는 왜 유독 이리도 엄격한가. 우리는 귀화에 대해 이중적이다.
한국사회에서 귀화는 '시민권 취득'이나 '국적 변경'과 같이 가치중립적인 단어가 아니다. 사실 이제까지 귀화라는 단어가 언론에 등장하며 논란이 됐던 경우는 재일교포가 일본 국적을 취득할 때뿐이었다. 누구 말대로 여기엔 일본에서의 차별에 떳떳이 맞서 한국인으로 남아주길 바라는 민족적 강요가 스며들어 있고 따라서 '조국'과 '배신'이라는 단어와 직결되는 것이다.
***'하나됨'에 대한 이상한 강박**
우리는 '하나됨'에 대한 이상한 강박이 있다. 월드컵의 광기에 질려 소곤대다 끝났지만 우리가 목격한 '전국민의 붉은악마화'는 섬찟했다. 전체주의의 냄새에 국수적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누가 꼬집었다. '닫힌 우리'의 모습이었다고. 외국언론으로부터 "월드컵에 월드는 없고 한국만 있었다"는 비아냥도 들었다. 같은 해 부산아시안게임은 북한응원단 단독공연으로 만들어버렸고 당시 외국 선수단과 언론의 불평과 이의 제기는 민족의 자존심으로 무시했다. 그러더니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라는 국제행사를, 역시 북한선수단과 응원단 때문에 또 단숨에 동네잔치로 전락시키는 괴력을 발휘했다.
'하나' 되는 데에 있어서 우리에게 선택의 여지는 이제까지 없었다. 강요됐을 뿐이다. 느닷없는 구호에 잽싸게 동참하지 않으면, 그래서 그 '하나'에 끼지 못하면 거기에 억압과 차별이 싹튼다. 인간이 영리해지면서 인간을 분류하기 시작했다. 분류하고 갈라놓는 버릇이 소멸하면 대립도 차별도 없을 것이라고 어느 역사가가 쓰고 있다.
세계화를 외쳐대면서 우리 안은 왜 이리도 복잡한가. 우리는 '소수 정예'로 세계를 상대할 것인가. 왜 엄연한 우리편을 나 싫다 하는가. 그러니 일본에서 조선학교 다니는 학생이 그러지 않는가. "우리는 어디를 가도 손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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