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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80년대는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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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80년대는 무엇으로 남아 있을까

오동진의 영화갤러리<49> <소년, 천국에 가다><이터널 선샤인>

이번 주 개봉작 <소년, 천국에 가다>를 판타지 멜로영화의 틀로만 설명하는 것은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내용은 그렇다. <소년, 천국에 가다>의 주된 줄거리는 13살짜리 소년이 서른세살이 되어서 동네 만화가게 아줌마와 사랑을 나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런 얘기를 들으면 이 영화가 다소 엉뚱하고 황당하며 불편하게 느껴진다. 무엇보다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13살 소년이 어떻게 서른세살로 변할 수 있겠는가.

추측컨대 아마도 이 영화가 만들어진 처음 시작은, 어른인 여자에게 성적 환상을 키워 나가는 13살 소년의 발칙한 이야기부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는 과정에서 주인공의 육체가 '영화적'인 어떤 계기를 통해 순식간에 20년을 성장하는 것으로 바뀌게 됐을 것이다.

13살 소년이 서른세 살 남자로 변하는 그 진짜 의미를 알아차리기 위해서는 이 영화의 시대배경이 1982년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60년대생인 윤태용 감독은 자신의 주변이 가장 격렬했던 시기의 풍광을 가장 격렬하지 않은 방향으로, 그래서 흔히들 얘기하는 것처럼 다분히 키치적인 감성이 넘쳐나는 모습으로 그려내려 했다. 그건 이 영화의 주된 공간 중의 하나가 만화가게라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명랑하고 쾌활하며 심지어 과장이 심하고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윤태용에게 있어 1980년대 초반은 반드시 엄숙하게 기억될 필요는 없는 시대다. 극단적으로 폭압적인 상황이긴 했어도 어쨌든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살아남기 위해 애쓰던 시대였다는 것이다.

영화 속 주인공인 13살 소년 '네모'는 지나치게 조숙하다.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정신병원에 들어가 있고 그런 아버지가 없이 혼자 살아가는 엄마의 모습은 아이의 눈에 늘 위태위태하게 보인다. '네모'는 이용복의 노래 가사 '어머니 왜 나를 낳으셨나요'를 흥얼거리며 자신의 가정이 처해 있는 불편한 상황을 조소하고 비난한다. 그런 그의 성정은 어머니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삶의 근본적인 문제, 그 어려움에 보다 가깝게 접근한다. 13살 소년에게 현실은 너무 가혹하다.

하지만 그가 서른세 살이 되고나서는 분위기가 180도 달라진다. 이제 '네모'는 오히려 너무 미성숙하다. 동네사람들에게는 '네모'의 아버지라고 둘러대긴 하지만 그는 여전히 아버지를 대신할 수 없다. 육체만 바뀌었을 뿐 정신연령은 여전히 조숙한 13살에 머물러 있다. 당연히 '소년' 네모와 만화가게 아줌마 '부자'와의 연애는 어색하고 황당한 일 천지가 된다.

그런데 윤태용은 아마 바로 이 대목에서 자신의 얘기를 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80년대의 우리들은 정치적으로, 이념적으로 지나치게 조숙했던 시대였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20년을 뛰어 넘은 지금 우리들의 모습은 그와는 정반대로 지나치게 미성숙하다는 것이다.

윤태용 감독은 주인공 '네모'의 두 가지 모습을 통해 성장은 했으되 실제로는 전혀 성장을 이뤄내지 못한 우리들의 자화상을 그려내려 했다. 우리는 여전히 80년대 어디쯤에서 멈춰 있으며 갑자기 몸만 커버려 정신적 아노미 상태에 빠져 있을지도 모른다고 윤태용은 얘기하고 있다. <소년, 천국에 가다>는 따라서,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상당히 중의적으로 읽힐 수 있는 텍스트다.

윤태용은 왜 20년전으로 돌아갔는가. 왜 우리를 20년전으로 끌고 가고 있는가. 정신적으로, 사회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지금 우리의 문제는 20년 전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점에 동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물론 보는 사람들의 몫이다. 그리고 바로 그 대목에서 이 영화의 상업적 흥행이 좌우될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가장 영화화하기 힘든 것으로 유명한 찰리 카우프먼의 시나리오를 미셸 공드리 감독이 멋지게 완성해 낸 <이터널 선샤인> 역시 이번 주 극장가에서 놓치기 아까운 작품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깊이 사랑했던 두 남녀가 잦은 싸움 끝에 서로에 대한 기억을 삭제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다. 두 사람은 우연히 기차 안에서 다시 만나게 되지만 자신들이 한때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다시 한번 서로에게 강하게 끌리는 자신들을 발견하고 혼란에 빠진다. 홧김에 자신의 기억회로에서 상대에 대한 기억만을 골라 삭제하긴 했으나 사랑의 감정만큼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은 기억이 아니라 마음이고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상대에 대한 불필요하고 불행했던 기억만을 골라 지워낸다는 설정은 다분히 사이버 펑크적이다. 거기에다 서정적인 멜로 드라마의 이야기 구조를 얹혀 냄으로써 독창적인 이종교배의 문법을 펼쳐낸다. <이터널 선샤인>은 그래서 이야기를 따라가기가 다소 어렵게 느껴진다. 영화속 시간의 흐름이 마치 우리 뇌속의 복잡한 기억회로마냥 과거와 현재, 과거 속의 또 다른 과거로 종횡무진 오가기 때문이다. 영화의 오프닝 크레딧이 영화가 시작된 후 한참이 지나서야 뜨는 것이 좋은 예다. 이야기의 순서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가 당황스러운 건 낯선 데서 오는 어려움일 뿐이다. 그 대신 정서적인 공감과 울림은 상당한 진폭을 그려낸다. 무엇보다 아무리 지금의 시대가 첨단에 첨단을 거듭한다 한들 우리의 마음 속에 담겨져 있는 순수한 무엇은 변질되지 않고 남아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순수의 시대로의 회귀를 강렬하게 욕구하게 만든다. 가장 낡은 소재의 이야기, 곧 두 연인의 러브 스토리를 가장 새로운 방식으로 전해주고 있는 작품이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연인 클레멘타인(케이트 윈슬렛) 때문에 방황하고 좌절하며, 사랑의 기억으로 고통받는 조엘 역의 짐 캐리 연기가 압권이다. 사랑은 고통이든 행복이든 그 모든 시간과 또 그에 대한 기억 자체가 소중한 것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이터널 선샤인>은 외형상으로는 매우 복잡한 지식체계를 동원하고 그래서 오랜만에 만나는 매우 지적인 영화처럼 보이지만 그 이상의 서정적 질감이 돋보이는, 11월 늦가을에 만나는 최고의 이색 멜로드라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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