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다 끝난 영화제를 뒤늦게 거론하는 것은 참으로 소용없는 일이겠으나 지난 주에 끝난 제5회 '서울유럽영화제'에서 상영된 주옥 같은 영화 한 편을 얘기하는 것으로 이번 주말의 영화를 시작할까 한다.
또 혹시 아는가. 이 영화제에서 상영된 작품을 일반극장에서도 만나게 될지. 하지만 그건 결국 꿈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문화적 통념, 상업적 통념으로 볼 때 지금 말하고자 하는 영화는 당분간 극장에서 만날 수 없거나, 아니면 심하게 훼손된 상태로 보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 주인공은 바로 마이클 윈터바텀의 <나인 송스>다. 영국 출신의 이 감독 작품은 1996년 <쥬드>가 상영된 이래 그 이후 만든 숱한 걸작들이 우리나라 극장에서 제대로 걸린 적이 없다. <광기>와 <원더랜드> <더 클레임> <24시간 파티피플>, 그리고 <인 디스 월드> 등등.
이중에서 <인 디스 월드>는 가까스로 예술영화전용관을 통해 전국적으로 단 1개관에서 상영됐을 뿐이다. 그의 영화가 이토록 외면받는 것은 지나치게 비상업적이라는 이유 때문인데 그 이유가 뭐가 됐든 우리 관객들로서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올해 그가 내놓은 작품 <나인 송스>는 표현 수위가 높아 만약 일반개봉이 이뤄진다 해도 국내 심의과정에서 상당 부분 필터링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18세이상 관람가를 받기 위해 장면의 상당 부분이 삭제돼야 한다거나 혹은 모자이크 처리돼야 한다면 이 영화는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낫다. 그럴 경우 영화 전체를 정서적으로 이해하기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통념상 표현 수위가 높은 영화이긴 하다. 인터코스(intercourse)는 기본이고 남자의 사정 장면까지 비교적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가리켜 '포르노(porno)적'이라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 영화가 포르노는 아니다. 움베르토 에코가 얘기한 것처럼 포르노의 특징이 '지루함'에 있는 것이라면 윈터바텀의 <나인 송스>는 전혀 지루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우리는 윈터바텀이 왜 이런 얘기를 영화로 찍었을까에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런던에 유학 온 미국 여학생 리사가 영국남자 매트와 벌이는 내밀한 애정사가 이 영화의 기둥 줄거리다. 이들은 두세 가지 일밖에는 하지 않는다. 섹스와 록콘서트에 가는 것, 그리고 음식을 먹거나 가끔 마약을 하는 일이다. 추측컨대 윈터바텀은 디지털 6mm 카메라를 손에 쥐게 되면서부터, 영화라고 하는 것이 매우 '사적인' 공간을 담아낼 수 있는 것이며 그렇다면 이른바 대중과의 소통이라는 기존의 영화적 모토, 그 강박증에서 자유로울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나인 송스>가 두 남녀 배우의 리얼 섹스를, 그 신음소리까지 담아낼 만큼 구체적으로 표현해 낼 수 있었던 것은 감독의 '사적인' 카메라만이 이 둘의 '사적인' 공간에 들어갈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인 송스>는 한마디로 개인의 자유에 대한 극단적이면서도 끝없는 주장을 담아내고 있는 셈이다. 영화 속에서 리사는 이렇게 얘기한다. "섹스와 자유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어!" 영화가 끝나고 나서도 리사의 대사는 한참의 울림으로 남는다. 이 영화의 국내상영을 고대한다.
***<윌레스와 그로밋>, 절대 고수의 애니메이션 미학**
이번 주에 개봉된 작품 가운데 사람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할 작품은 의외로 극영화가 아닐 수 있다. 영국 아드만 스튜디오 제작의 클레이 애니메이션 <월레스와 그로밋 : 거대 토끼의 저주>야말로 많은 관객들이 기다려 온 작품일 수 있다.
다소 푼수끼가 있는 주인 월레스와 그의 똑똑하고 착한 강아지 그로밋의 활약은 이 영화를 만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윌레스와 그로밋>에서 주인공은 명백하게 강아지 그로밋이다. 주인인 월레스가 엉뚱한 생각을 하거나, 바보 같은 행동을 할 때, 그리고 잘못된 방향으로 일을 처리할 때, 톨스토이의 책을 읽는 이 지성파 강아지 그로밋은 주인의 모든 행동을 용서하고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를 끝까지 돕는다.
세상을 살아 가면서 이런 신뢰를 사람들 사이에서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두 눈동자로만 말하는 그로밋의 표정연기 또한 일품이다. 이건 아드만 스튜디오만이 가지고 있는 절대 고수의 클레이 애니메이션 미학이다. 이 작품 한편이 가지고 있는 가치와 의미는 웬만한 극영화에 비해 수십 배, 수백 배에 이른다.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지지를 받지는 못하겠지만 브라질 페르난도 마르렐레스 감독이 만든 <시티 오브 갓>은 우리가 생각하는 통상의 세상의 질서라고 하는 것이 어떤 지역, 어떤 세대에서는 전혀 통용되지 않는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여 준다.
***<시티 오브 갓>, 브라질 청소년들의 충격적인 '마약판매구역 전쟁'**
다소 잰 체 하는 표현이라 염려스럽긴 해도 영화광의 스타일을 빌어 이 영화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래리 클락의 <키즈>란 영화를 브라이언 드 팔마 감독의 <언터쳐블> 형식으로 만든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두 영화를 모두 안 보신 분들을 위해 풀어서 설명을 하자면 10대, 그것도 12세에서 14세에 이르는 어린 청소년들의 갱조직 이야기가 바로 이 영화 <시티 오브 갓>이다.
지나치게 영화적 상상력이 높다고? 브라질 빈민가에서는 지금 현재 12~14세의 청소년들이 자신의 손보다 큰 권총을 쏘아 대며 마약판매 구역을 장악하기 위한 전쟁을 벌이고 있다. 이 영화는 지금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겠다는 의지를 선보인다. '씨네마베리떼'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페이크(fake) 다큐멘터리인 셈이다.
그래서 영화는 어떤 사람들에겐 매우 거부감을 불러 일으킬 것이며 또 어떤 사람들에겐 매우 강한 흡입력을 나타낼 것이다. 세상의 진실을 외면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도 있고 그 진실과 맞붙으려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결국 자신이 세상을 살아가는 의지대로 만나고 관람하는 것이다. 그걸 보통 우리는 '취향'이라고 부른다.
이번 주 극장가도 비교적 다양한 메뉴들로 채워져 있다. 앞서 얘기한 <월레스와 그로밋> <시티 오브 갓>외에도 소리소문 없이 개봉되는, 아마도 수입사가 곧바로 비디오숍으로 보내려다가 잠깐 극장을 거치겠다는 요량으로 상영하는 마크 포스터 감독의 <스테이> 같은 스릴러도 있다. <몬스터 볼>과 <네버랜드를 찾아서>를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마크 포스터 감독의 작품 치고 푸대접도 이만저만한 푸대접이 아니다.
우리나라 자본이 투자됐지만, 그 과정이 워낙 지난했던 터라 제작에 들어간 지 근 4년만에 완성된 나카다 히데오 감독의 <라스트 씬>같은 일본영화도 감칠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1960년대 한때 전설이었던 배우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인생과 사랑을 회고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영화란 무엇인가, 무엇보다 사랑이란 무엇인가를 일본 특유의 고즈넉한 화법으로 묻고 있는 작품이다.
***<사랑해 말순씨>, "이제 앞 세대와의 '단절 강박'에서 벗어나자"**
이번 주 박스오피에서 다크 호스로 등장할 작품은 박흥식 감독의 <사랑해 말순씨>가 아닐까 싶다. 데뷔작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와 두번째 작품 <인어공주> 모두 완성도 면에서 평단의 지지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업적으로는 그다지 성공하지 못함에 따라 다소 '불운한 감독'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는 박흥식 감독은 이번 세번째 작품을 통해 자신이 작가주의와 상업주의의 경계를 오가는 뛰어난 스토리텔러라는 것을 충분히 입증했다.
전작인 <인어공주>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박흥식은 자신의 얘기를 털어 놓을 때에 스크린으로 펼치는 이야기의 세공력이 빛을 발한다. 작가들 역시 자기가 아는 얘기를 할 때에 비로서 자질을 드러내는 법이다. 영화는 1979년을 시대배경으로, 한 중학생 남자 아이의 눈을 통해 우리가 30년 가까이 앓고 있는 정신적 트라우마의 근원을 찾아 나선다. 그건 바로 어머니 세대와 애써 단절하려 했던 강박증에서 기인한다고 박흥식은 말한다.
<사랑해 말순씨>는 1979년을 얘기하는 듯 하지만 실제로는 바로 지금의 우리를 얘기하려는 작품이다. 어머니 세대와의 새로운 화해를 통해 지금 우리의 세대들끼리도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 나가자고 한다. 그 무엇은 어쩌면 희망일 수 있다. 우리가 잃었던 것, 애써 잊고 살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
이 영화는 앞선 세대와의 단절만이 능사라고 생각했던 386세대에게 지금의 사회적 혼란을 극복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그건 바로 인간의 얼굴을 한 이데올로기다. <사랑해 말순씨>는 늦가을같지 않은 늦가을에 불쑥 나타나 마음 속 깊이 따뜻함과 슬픔을 전한다. 이런 작품을 종종 만날 수 있다는 건, 갑작스럽긴 해도 매우 기분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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