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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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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22>

강과 음악이 흐르는 산 - 밀양 만어사

산의 정상 근처에 널따란 강이 흐르고, 그 강에 수천 수만 마리의 물고기가 뛰놀고, 구름이 몰려오면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리는 곳…… 그곳은 만어산(萬魚山)이다.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에 있는 만어산은 멀리서 보면 평범한 토산이다. 삼랑진읍에서 북쪽으로 4km 정도 들어가서 산의 초입에 서면, 경운기 한 대 다닐 수 있을까 한 좁은 길이 산 위로 나있다. 그 길을 2km 남짓 구불구불 올라가노라면 심상치 않은 구경거리가 하나 나타난다. 길 옆에 검붉은 빛 바위 덩어리들이 마치 산 위에서 흘러내리다가 멈추어 선 듯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곳을 지나면 음식점이 몇 채 모여 있는 작은 산동네가 나오고 조금 더 가면 만어사 절이 나온다. 주차장으로 쓰이는 널찍한 마당이 있고 거기서 층계를 오르면 다시 마당인데, 그 한쪽 편에 고려시대에 세워진 석탑이 하나 얌전하게 서 있다. 그 뒤로 높지 않은 석단 위에 대웅전이 있고 또 산신각인가 하는 전각이 하나 더 있다. 여기까지는 우리나라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그렇고 그런 절집 풍경이다.

그러나 석탑이 있는 쪽으로 마당을 가로지르다 보면, 전혀 예기치 못한 광경과 마주치게 된다. 바로, 수천 수만 마리의 물고기가 뛰놀고,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린다는 강이 펼쳐지는 것. 흔히 너덜 또는 너덜겅이라고 불리우는 그 강은 길이 약 1km, 넓은 곳의 폭이 100m에 이르는 장관을 이루며 산 아래쪽으로 흐르고 있다. 너덜을 이루는 수많은 바위덩이들이 마치 물고기 떼가 수면을 향해 머리를 쳐들고 있는 듯하다고 해서 만어석이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이 풍경의 내력이 『삼국유사』'어산불영(魚山佛影)'조에 나와 있다.

"만어산은 옛 자성산(慈成山), 또는 아야사산(阿耶斯山; 이것은 마땅히 마야사摩耶斯라고 해야 할 것이다. 즉, 물고기를 말한 것이다)이니, 그 이웃에 가라국이 있어 옛날 하늘에서 알이 바닷가로 내려와서 사람이 되어 나라를 다스렸으니 이가 바로 수로왕이다. 이때 나라 안에 옥지(玉池)라는 못이 있었고 못 속에는 독룡이 살고 있었다. 만어산에 다섯 계집 악귀가 있어서 독룡과 왕래하면서 사귀었다. 그 때문에 때때로 번개가 치고 비가 내려 4년 동안 오곡이 익지 못했다. 왕이 주문(呪文)으로도 이것을 금할 수 없어서 머리를 숙이고 부처에게 설법을 청하였더니 계집 악귀들이 다섯 계율을 받아 그 후로는 재앙이 없어졌다. 때문에 동해의 용(龍)과 물고기들이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이 되어서 각각 종과 경(磬)의 소리가 났다."

일연이'어산불영'조에서'고기(古記)'를 비롯한 여러 문헌들을 번다하게 인용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인즉, 북(北)천축의 절에서도 독룡과 계집 악귀들이 부처의 교화로 행패를 멈추었는데, 부처가 계셔야 다시 행패를 부리지 않을 수 있겠다고 하여 부처가 굴 속에 머물면서 설법을 하였다는 것으로, 만어사는 바로 북천축에 있던 그 절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 동해의 용과 물고기들이 골짜기 속에 가득 찬 돌이 되었다는 귀절은 다시 하나의 전설로 태어난다.

"부처가 계집 악귀들과 독룡을 교화시켰다는 소문이 멀리 동해 용궁까지 전해지자, 용왕의 아들이 물고기 수만 마리와 함께 부처를 찾아와 제자 되기를 간청했다. 부처는 이들을 위해 불법을 폈고, 그러던 어느 날 화엄경 법회를 마치고 용과 물고기들이 바다로 돌아가려 하는데, 짙은 구름과 안개 때문에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만 바위로 변해버렸다. 그래서 용왕의 아들은 미륵바위로, 나머지 물고기들은 모두 돌로 변하여 골짜기를 그득 메우게 되었다. 이때부터 산 이름과 절 이름을 만어산과 만어사로 부르게 되었으며, 부처가 돌로 된 물고기들을 발로 차면 금과 옥의 소리가 났다는 데에서, 구름이 떠올라 산꼭대기에 이르면 돌이 된 용과 수많은 물고기들이 구름 속에서 음악소리를 내게 되었다."

일연은 또, 독룡과 계집 악귀들을 교화시킨 후 그들을 위해 굴 속에 자리잡고 설법을 하는 부처의 모습이 가까이에서는 보이지 않고 멀리 떨어져서야 보이곤 했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렇지만 만어산의 경우, 그 굴이 어디에 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지 않다. 나는 혹시라도 그 굴을 찾을 수 있을까 하여 만어사 근처를 여기저기 돌아다녔으나 찾지 못했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을 뒤적이다가, 거기 밀양도호부'고적'조의 '만어산 경석(磬石)'항목에서 이런 기록과 마주쳤다.

"산중에 한 골짜기가 있는데 골짜기 안에 있는 크고 작은 바윗돌에서 모두 종과 경의 소리가 난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동해의 물고기와 용이 돌로 변했다고 한다. 세종 때에 이를 채굴하여 악기를 만들었으나 음률이 맞지 않아서 폐지하였다."

그렇다, 골짜기. 나는 고지식하게 『삼국유사』 기사에 얽매여, 부처가 굴 속에 있으리라 짐작하고 굴만 찾았던 것이다. 그러나 밀양 땅 만어산에서 부처가 자취를 남기고 있는 곳은 굴이 아니라 바로 너덜 또는 너덜겅이라고 불리우는 그 상상의 강이었다. 상상의 자유로움이 가져다주는 즐거운 배반.『삼국유사』를 읽다 보면, 때묻은 일상의 틀에 갇힌 상식이 이렇게 허를 찔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일연은 '어산불영'조에, 부처 그림자가 멀리서 보면 보이고 가까이 다가가면 보이지 않는 것, 구름 속에서 음악소리가 들리는 것 등을 자신이 직접 확인했다고 쓰고 있다. 그랬을 것이다. 범인(凡人)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런 것을 일연은 심안(心眼)으로 보았을 테니까.

그랬기에 눈먼 사람들이 보면 그냥 바위만 그득 찬 너덜이 수천, 수만 마리의 물고기가 뛰노는 강으로 변하고, 구름이 피어오르는 예사스러운 풍경이 수많은 물고기들이 일제히 악기가 되어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광경으로 변했을 것이다. 보이기도 하다가 보이지 않기도 하는 부처는, 만어산에 계시면서 북천축에도 계시고, 굴 속에 계시는가 하면 구름 속에 계시기도 하고, 만어산 너덜에 강과 음악으로도 계실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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