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장가 박스오피스에는 몇 주 계속 한국영화들의 고공행진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주만 해도 <새드 무비>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 <너는 내 운명> 등이 각각 1위부터 3위까지 차지했다. 그렇다고 한국영화가 1,2,3위를 나란히 차지하는 일이 드문 일만은 아니다.
요즘 몇 년 사이엔 이런 일이 흔한 일처럼 돼버렸다. 하지만 이것이 반드시 좋은 일이기만 한 것일까? 아이러니한 것은 박스오피스 상위권 세 작품이 비슷비슷한 경향의 한국 멜로영화라는 것이다. 가을이 멜로의 계절이어서 그런가, 아니면 극장가가 관객들에게 멜로의 계절이라고 강요해서 그런 것일까.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스러운 것은 세 작품 모두 완성도 면에서 그리 떨어지지 않는 깔끔한 상업영화들이라는 것이다. 이제 한국영화들은 상업영화든 예술영화든 허투루 만나는 작품들은 거의 없다. 다만 개봉 첫 주에 단박 1위로 진입한 <새드 무비>는 세 작품 가운데 가장 '팬시(fancy)'한 작품이어서 스크린 속 눈물마저 '인공적'이라는 느낌을 준다.
같은 멜로드라마라 하더라도 오히려 <새드 무비>보다는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 진정성이 강하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건 다분히 영화 속 두 사람의 역할, 곧 성원(김수로)과 창후(임창정)의 캐릭터 때문이다. 한 사람은 전직 농구선수에서 지금은 악랄한 채권추심업자로 전락했고 또 한사람은 갓 결혼했지만 변변한 직장이 없어 하루하루 날품팔이로 지낸다. 한 사람은 우리사회의 경제적 강자 편에 서 있는 사람, 또 한 사람은 거의 밑바닥에서 지내는 사람을 대변한다.
현대 자본주의는 있는 자와 없는 자의 피 터지는 싸움 때문이 아니라 '조금 더 생긴 자'와 '아주 없는 자'의 대리전으로 종종 비극적인 일이 발생한다. 성원은 자신이 인정사정 없이 닥달하는 바람에 결국 한 남자가 지하철에 몸을 던져 자살하게 만들었으면서도 바로 그날 그 남자의 아내에게 전화해 채무는 상속된다고 말해야 했다면서 그런 자기가 인간이냐며, 세상이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냐며 훌쩍인다.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 빛나는 건 영화 속에서 보여지는 낯간지러운 멜로풍경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이런 장면들 때문이다.
이번 주에 새로 개봉한 작품들은, 지난 몇 주 내내 그랬지만, 국적도 다양하고 장르도 다양한 작품들이 대거 걸린다. 헝가리의 명감독 이스트반 자보가 오랜만에 내놓은 장편드라마 <빙 줄리아>는 주연을 맡은 아네타 베닝이 지난 2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후보에까지 오른 작품이긴 하지만 국내에서는 전국적으로 단 1개관에서만 상영되어 찬밥 대접을 받고 있다.
극장에서 그리 오래가지도 않을 것이다. 영화광이라면 이런 작품일수록 만사를 제쳐두고 상영관을 찾아서 봐야 할 일이다. 케빈 코스트너라고 하면 이미 할리우드에서는 한물간 스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 이번 주에 새로 개봉된 그의 주연작 <오픈 레인지>는 지나치게 뻔한, 그렇고 그런 서부극이어서 이 주의 추천작으로 거론할까 말까 한 작품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서부극이 어딘가,라는 생각이 들면 주저없이 선택할 만한 작품이다.
솔직히 케빈 코스트너의 영화로는 이 <오픈 레인지>말고 그 다음 작품으로, 국내에서도 개봉될 것으로 예상되는 <업사이드 오브 앵거>를 권하고 싶다. 케븐 코스트너가 이제야 자신의 진정한 자리를 찾은 듯한 느낌을 주는 영환데 그 영화에서 코스트너는 한때 전도가 유망했던 프로야구선수였지만 지금은 술에 찌들어 사는 알코올중독자이자 삶의 패배자로 나온다. 어쩜 지금의 자기 모습을 그토록 솔직하게 연기해 낼 수 있는지, 이 할리우드 배우는 종종 사람을 감동시킨다.
아마도 이번 주 박스오피스의 순위를 뒤바꿀 영화는 류승범 신민아 주연의 <야수와 미녀>이기 십상이겠으나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지금 세상의 젊은 친구들이 온통 자신의 외모 가꾸기와 여자 꼬시기에만 혈안이 돼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살짝 기분이 나빠진다. 주류 충무로는 왜 끊임없이 이런 영화를 기획해서 사람들을 현혹하는가. 왜 세상의 진실에서 벗어나 그저 웃고 즐기게만 하려고 하는가.
이번 주 가장 주목할만한 작품은 여배우 출신인 방은진 감독의 데뷔작 <오로라 공주>다. 살해 현장마다 경찰을 비웃듯 오로라 공주 스티커를 붙이며 연쇄살인극을 펼치는 여자 정순정(엄정화)의 기구한 얘기를 담았다. 영화에서 정순정은 도합 6명의 남녀를 살해하고 한 명의 남자는 시간을 끌다가 죽이지 못한다. 죽이는 방법도 잔인하고 다양한데 한 여자는 포크로 머리를 짓이기고, 또 한 여자는 석고를 코속에 들이부어 질식사시키며, 어떤 남자는 독살하고, 또 어떤 남자는 가위로 남자의 심볼을 잘라 죽이며, 또 다른 어떤 남자는 면도날로 목의 대동맥을 그어 죽인다. 이 모두가 원한 때문이다.
영화는 이들을 누가 죽였는지, 살인자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미스터리 스릴러 구조가 아니라 영화 첫 부분부터 살인자인 정순정을 드러낸 채 이 여자가 왜 이처럼 끔찍한 살인 행각을 벌이게 됐는지, 죽음을 당하는 사람들 간에는 도대체 어떤 연관이 있는지, 그 동기와 원인을 추적해 가는 서스펜스 드라마의 기법을 취하고 있다. 관객들은 단순하게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아니라 주인공의 생각과 행동에 동화되기를 요구받는다.
관객들이 그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영화의 이야기가 촘촘하게 잘 짜여서 있어야 함은 물론, 그 이야기의 개연성이 충분히 받아들일 만한 것이어야 한다. 또 한가지는,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는 여자 주인공의 역할이 영화의 성패를 전적으로 좌우하게 되는데 그만큼 그 역을 맡은 배우의 연기력이 출중해야 한다.
방은진 감독은 데뷔감독답지 않은 숙련된 솜씨로 이 두 가지를 깔끔하게 마무리 지었다. 드라마를 속도감 있게 잘 엮어냈을 뿐만 아니라 엄정화에게 발군의 연기력을 발휘하도록 독려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세상의 진실에 대해 무기력하게 반응하는 이 땅의 숱한 남자들을 향해 여성들이 복수와 응징의 칼날을 들이민다는 점에서 우리 사회의 변화를 반영해 내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속 정순정이 실제로 죽이고 싶은 사람은 원한관계의 7명이 아니라 그 7명을 방치한 어떤 남자(스포일러여서 밝히기가 어렵지만), 그리고 경찰로 대변되는 이 사회의 공권력이자 제도와 시스템이다. 방은진은 이번 <오로라 공주>로 진정한 여성의 반란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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