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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영화프로그램, 죽어야 산다"

오동진의 영화갤러리<45>저널리즘 정신의 실종

텔레비전의 영화정보 프로그램들이 저점을 치고 있다.

KBS MBC SBS 등 공중파 3사가 내보내고 있는 영화프로그램들이 시청률의 덫에 걸려 인기 연예인들을 앞세운 버라이어티 쇼 프로그램으로 둔갑한 지는 이미 오래. 그러나 최근 들어 그 같은 '찰라적' 경향이 더욱더 심화되고 있다.

예컨대 SBS TV <접속 무비월드>의 경우 최근 프로그램 구성을 메인MC 체제에서 코너별 진행으로 전면 개편하되 진행자들로 가수 옥주현을 비롯, 개그맨 등 인기 연예인을 기용해 기존 MC였던 영화배우 김서형이 나머지 녹화분의 출연을 거부하는 등 물의를 빚기도 했다.

진행자 교체를 둘러싸고 벌어진 단순한 잡음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작금의 영화정보 프로그램들이 방향타를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로 꼽힌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 프로그램들이 시청률을 의식하면 의식할수록 정작 시청률은 점점 더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KBS의 <토요 영화탐험>을 비롯, MBC의 <출발 비디오여행>, SBS의 <접속 무비월드> 등이 모두 시청률 4~5%선에 머무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까지만 하더라도 이들 프로그램들의 시청률은 평균 8~12%선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왜 이렇게도 시청률의 강박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이유는 제작구조에서 나온다. 모두 외주 제작사들이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제작사들이 시청률을 의식하지 않고 영화 프로그램을 문화예술적 프로그램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각각의 본사로부터 시시때때로 가해지는 계약 해지라는 위협을 감수할 자신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작금의 우리 방송 환경에서 그렇게 '간이 큰' 외주 제작사는 있을 수가 없다. 본사에서 끊임없이 시청률을 가지고 '달달 볶고' 있는 상황에서 외주제작사들은 좀 더 쉬운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 곧 인기 연예인을 대거 등장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또 확대발전한다. 전문성이 취약한 진행자들을 내세우다 보니 프로그램 내용도 보다 가볍고 쉽게 가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는 것이다. 이들 공중파 프로그램들이 대동소이하게 개봉영화의 줄거리를 매우 상세하게 소개하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영화계 전문용어로 '스포일러(spoiler)'가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는 곧 애초부터 영화에 대한 단순 소개 외에는 저널비평이 불가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다 보니 이들 프로그램이 종종 방송위원회로부터 간접광고라는 지적을 받게 되는 일까지 발생한다.

***'저널리즘'이 아니라 '너절리즘'을 추구하다**

지상파 본사로부터 프로그램을 안정적으로 수주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청률이라는 토끼를 잡아야 하며, 시청률을 위해서는 대중적인 인지도가 높은 혹은 높다고 착각하는 연예인들을 대거 출연시켜야 한다는 논리는 작금의 영화 프로그램들을 질곡의 늪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하고 있다. 이들 프로그램에서 현재 저널이 갖추어야 할 공격적인 비평과 비판의식을 찾아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공중파 3사 영화 프로그램의 제작 모토는 거의 한결같다. 좋은 얘기는 많이 하되, 나쁜 얘기라면 아예 하지 말자는 것이다. 이른바 '거론하지 않음으로써 비판한다'는 소극적 비평 기능만으로는 방송의 영화 저널리즘이 올바로 세워질 수 없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당연하게도 영화 프로그램들이 저널리즘의 원칙을 포기하면 할수록 거꾸로 영화사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커지는 경향을 보인다. 영화 프로그램들이 저널의 기능성을 가지고 영화 문화를 선도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영화사가 영화 프로그램 제작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행위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지상파 TV 영화 프로그램에서 자사의 영화를 친절하고 상세하게 홍보해 주고 있는 마당에 100% 협조가 전제되지 않는 한 케이블TV나 위성TV의 영화 프로그램들에게까지 영화사들이 관심을 가질 리 만무하다. 그런 영화사들의 가장 큰 무기는 자료협조를 하지 않는 것이다. 방송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영화 그림 자료들의 공급을 중단하는 것이다. 영화사들의 이 같은 비협조적인 행태는 때에 따라 해당 영화에 대한 현장 취재나 감독이나 배우들에 대한 인물 인터뷰를 전면 통제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한마디로 영화에 대해 좋은 말만 하도록 강요받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결국 자승자박의 결과다.

이제 영화 프로그램에서 뉴스와 논평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영화 프로그램의 내용은 사전에 머릿속에서 기획된 것이지, 현장에서 벌어지는 뉴스를 뒤쫓아서 이에 대한 사실을 전달하고 논평을 추가하는 형식이 아니다. 산업이나 정책과 관련한 정보가 완벽하게 사라진 것도 그 때문이다. 어떤 영화 프로그램에서도 스크린 쿼터 문제나 영화 심의 문제, 투자 환경과 관련한 문제, 제작 스태프들의 처우 개선 문제, 메이저급 배급사들의 전횡 문제 등등이 상세하게 거론되는 적이 없다.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딱딱하다, 재미없다, 시청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취재조차 이루어지지 않는다. 영화 프로그램 제작진 가운데 산업과 정책 분야에 관해 전문적인 식견을 갖추고 있는 인력들이 거의 없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프로그램의 연성화에 대해선 백번 양보할 수 있는 문제라 하더라도 소개되는 영화들조차 철저하게 상업영화 위주로만 짜여진다는 것은 국내 영화 문화의 장기적 발전을 놓고 볼 때 치명적인 요소가 될 가능성이 크다.

비상업영화라고 불리는 이른바 작가주의 영화 혹은 예술영화는 이들 영화 프로그램들이 관심을 가져 주면 그저 감지덕지할 뿐이다. 비상업영화관이라 불리는 <씨네 큐브>나 <하이퍼텍 나다>, <씨어터 2.0> 등에서 상영되는 영화가 지상파 영화 프로그램에 집중적으로 소개되는 적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지금의 영화 프로그램들은 국내 영화 산업의 독점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하는 데 크나큰 역할을 하고 있는 셈이다.

***영화 프로그램이 죽어야 영화 프로그램이 산다**

대다수의 영화 프로그램들은 '저널리즘'이 아니라 '너절리즘'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 3~4년 사이에 영화 관련 프로그램들은 급속도로 늘어났다. 하지만 이들 프로그램들이 저널로서 올바로 기능하지 못함에 따라 영화문화는 여전히 하위문화 취급을 받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프랑스의 경우 매년 5월 칸 영화제가 열리면 TF1 등 각 방송사들이 영화제 소식을 헤드 뉴스로 다루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권을 대표한다고 해도 프라임 타임대 방송 뉴스에서 단신 정도로 처리되는 것이 고작이다. 그게 지금의 우리 영화 문화의 현실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기까지는 어찌 보면 지금의 영화 프로그램들이 그 같은 결과를 만들어 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파리 1대학 철학교수 이브 미쇼는 <예술의 위기>라는 저서에서, 현대 예술이 대중으로부터 완전히 유리된 무의미한 형식을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예술'이 죽어야 '진짜 예술'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브 미쇼의 말대로, 우리의 방송 영화 프로그램들은 현재, 무의미한 형식과 내용을 고집하고 있다. 그렇다면 '영화 프로그램'들이 죽어야 '진짜 영화 프로그램'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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