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일요일은 서리가 내린다는 상강(霜降)이었다. 이제 겨울의 문턱에 선 것이다.
이 맘 때면 으레 가을의 들판에 나가 그 한 복판에 서야 한다. 봄부터 지은 농사는 9월 20일의 추분부터 거둬들이기 시작해서 상강 무렵에는 모두 거두게 된다. 그러면 가을 들녘은 텅 비워진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커다란 공간이 생겨나는 것이다.
공간은 그 무엇을 비움으로써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 비움은 그냥 비움이 아니라 다시 때가 되면 또 다른 무엇들을 채우기 위한 것이다. 세상은 이처럼 때가 되면 채우고 또 때가 되면 비우는 것의 순환이다.
봄부터 시작해서 여름 내내 작열하는 태양 아래에서 이삭이 영글었다가 그 소기의 일을 다 하면 비워지는 것이다. 비웠으니 당분간 그 곳은 허허로운 공간으로 남게 되고 대지는 비로소 긴 숨을 내쉬며 커다란 휴식을 얻는 것이다.
세상은 이처럼 끊임없는 순환 속에 존재한다. 새로운 것이 생겨나 자리를 채웠다가 어느새 자취를 감춘다. 그러다가 좀 지나면 다시 새로운 것이 생겨나 그 공간을 가득 메운다. 하지만 엄밀히 보면 이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고, 사라져가는 것도 없다. 그저 반복일 뿐이다.
하지만 그 반복은 그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창조적이다.
우리의 삶도 동일하다. 노인은 사라져가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난다. 그런데 그들은 모두 생명이라는 같은 뿌리에 근거를 두기에 사라지는 것도 생겨나는 것도 없다. 그저 반복될 뿐이다. 그러나 그 반복 역시 창조적인 것이다.
이 세상에 새로운 얘기는 없다. 주제와 모티프는 언제나 동일하다. 하지만 늘 새로워 보이고 새롭게 들려오는 얘기들로 세상은 채워지는 것이다.
올 10월 술(戌)월의 상강(霜降)에는 생각해볼 것들이 실로 많이 쌓여있다.
이번 상강은 올 한해의 마무리일 뿐 아니라, 지난 1997년 정축(丁丑)년부터 생겨나서 내년 2006년 병술(丙戌)년 상강에 이르러 마무리될 일들이 어떤 모습일는지 그 윤곽이 드러나는 때이기 때문이다.
다시 얘기지만 10월의 들판은 큰 공간이라 했다. 우리는 그 허한 공간 앞에서 그동안 거기에 있었던 것들이 무엇이었는지를 반추(反芻)하게 된다. 반추는 다시 곰곰이 씹어본다니 것이니 바로 철학이며, 그 철학적 사색을 통해 우리는 교훈을 얻는다.
그렇기에 오늘은 상강이 들어있는 10월, 술(戌)월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 이어서 1998년부터 생겨나 내년에 마무리될 일들이 우리의 삶에 어떤 자국을 남겼으며 또 남기게 될는지를 알아보는 글을 준비했다.
음양오행이란 바로 그 순환에 대한 정교한 통찰이다. 자축인묘...,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12지(支)란 그 순환에 대한 일련의 순서이고 설명이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마디를 만드는 것은 진미술축(辰未戌丑)이라는 네 개의 코드이다.
한 해의 순환에서 진미술축 월은 저마다 지난 3개월간의 종합이다. 좀 더 얘기하면 1월, 축(丑)월은 시작의 준비이고, 4월 진(辰)월은 시작이며, 7월 미(未)월은 완성이며, 10월 술(戌)월은 완성의 마무리이다. 그렇기에 한 해의 일들은 이 달 술(戌)월로서 사실상 종합 정리되는 것이다. 가을걷이가 끝나듯이 말이다.
그리고 좀 더 길게 보면 진미술축이라는 코드가 붙는 해가 12년의 순환을 이루는 주요한 마디들이다.
그렇기에, 내년 병술년은 지난 1997년 정축(丁丑)년에 단서가 생겨나 2000년 경진(庚辰)년부터 구체화된 일들이 정리되고 종합되는 해인 것이다. 바로 술(戌)의 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의 병술(丙戌)월은 내년에 마무리될 일들의 단초들이 미리 고개를 내미는 달이기도 하다. 그래서 후각을 발동하여 예민하게 그 냄새를 맡아보고자 한다.
그렇다면 지난 1997년에 있었던 일은 무엇이고 그것들이 2000년에는 어떤 모습으로 구체화되었던가? 또 그 일들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어떤 경로를 밟고 있는가를 살피면 그것의 최종적인 모습들을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지난 1997년에 있었던 대표적인 일은 그 치 떨리고 지긋지긋한 IMF 사태였다. 그 일은 우리의 모든 삶을 바꾸어놓았다. 그 전만 해도 직장에 들어가면 정년까지 잘 다니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풍토였다. 그런 것이 어느 날부터인가 구조조정이라는 무시무시한 어휘가 등장하면서 툭하면 생계의 터전에서 밀려나오고 잘려 나오는 일이 다반사가 되고 말았다.
말이 구조조정이지 그 얼마나 겁나는 뜻을 품고 있는가! 우리 인체로 따지면 팔 다리를 자르거나 척추를 수술하는 등 엄청난 외과적 수술이 바로 구조조정인 것이다. 정축(丁丑)대란이라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니다. .
그러니 우리의 모든 삶의 양태는 엄청난 변화를 강요받았고 또 그렇게 변해버렸다. 이태백, 삼팔선, 사오정, 오륙도와 같은 말들이 유행하였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직장에서 언제 그만 둘지 몰라 전전긍긍하며 살아간다. 그러니 우리가 받은 정서적 상실감은 실로 엄청날 수밖에.
IMF 이후 3년간 우리는 간신히 그 여파로부터 벗어난 것 같았지만 다시 2000년부터 그로 인해 신용카드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1997년은 축(丑)의 해였고 2000년은 진(辰)의 해였다. 사실은 IMF 사태의 여파가 더 깊숙하게 우리의 생활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200조원의 공적 자금이 투여된 은행들은 구조조정과 함께 영업 방식에 있어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카드 사태는 사나워진 은행들이 공격적으로 영리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일이었다.
그런가 하면 반가운 일도 있었다. 남북정상회담이 2000년, 경진(庚辰)년 6월에 있었으며 그로서 남북간의 긴장은 크게 완화되었다. 이는 지난 1994년 갑술(甲戌)의 해에 있었던 북핵 문제의 길고 긴 귀결이었으며 한 마무리였지만 여전히 북핵 문제는 수면 하에서 또 다른 갈등을 빚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북한은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는 와중에서 안전을 담보하기 위한 마지막 수단으로 1998년 무인(戊寅)년부터 핵 개발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이 다시 한 마디를 이루는 2003년 미(未)의 해에 급기야 위기로 치달았고 그를 타개하기 위해 6자 회담이 마련되었다.
다행히도 북핵 문제는 금년 가을 들어 최종시한을 남겨놓고 기본적인 타결을 보았고 내년 술의 해로서 그 실무적인 합의도 이루어질 것이다.
지난 1997년 이래로 우리 사회가 맞이한 근원적인 도전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IMF 사태가 가져다주었다. 그 이후, 신자유주의, '노사정'위원회, 보수와 진보, 이런 어휘들이 중요한 이슈로 등장하게 되었으니 이는 우리 사회가 IMF 이후 크게 불안정해진 사회 문제를 놓고 각자가 자신의 소신에 따라 치열한 갈등과 타협, 협상을 진행하고 있는 일련의 과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 모두 우리가 변화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놓고 벌어지는 진지하고도 치열한 모색들인 것이다.
또 한 가지는 북한이다.
살기 어려워진 북한에게 있어 우선적인 대안은 일단 남한 측에 손을 내미는 길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긴장완화를 통해 통일에 접근하고자 하는 남한에게도 새로운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남한과의 접근을 비롯한 개방흐름은 김정일 체제를 위협할 수 있는 가장 위험한 길이었으니 상황은 대단히 어렵고 반전에 반전이 거듭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으론 남한을 비롯한 국제 사회로부터의 경제 원조, 한 편으론 핵을 통한 협박, 북한이 들고 나온 두 개의 카드였다.
두 장의 상반된 카드는 사태를 지극히 어렵게 만들었고 이런 상황은 우리의 생각을 갈래갈래 나뉘도록 만들었다.
결국 우리는 1997년 이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 또 북한이라는 과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지를 놓고 사상, 정치, 사회, 모든 면에서 지극히 다양한 색채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 두 가지 과제에 대한 해법에 대한 큰 윤곽이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내년 병술(丙戌)년이며, 그것의 단초가 이 달 병술(丙戌)월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내년으로서 우리 사회의 치열한 분열 양상은 큰 대목에서나마 정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세세한 마무리 부분은 또 다시 2007년부터 2009년이라는 3년 동안에 최종적으로 정리될 것이며 그 결과 내지는 바탕 하에 우리의 역사는 또 다른 라운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정리하면 내년은 IMF 문제와 북한 문제라는 두 가지 도전에 대한 우리의 선택과 대응이 커다랗게 귀결을 보는 해가 된다. 2007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는 그런 바탕 위에서 치르게 되는 또 한 번의 선택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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