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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0월 "내 몸이 식으면 세상에 봄은 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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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10월 "내 몸이 식으면 세상에 봄은 오는가?"

김민웅의 세상읽기 <143>

대통령은 유신을 결행한 일이 매우 흡족했다. 역시 지도자는 결단의 용기가 있어야 해. 아니었다면 지금쯤 비상시국을 어떻게 감당하고 있을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아무리 좋게 봐주어도 세련미는 떨어졌지만 자신을 최선을 다해 섬기는 차를 불렀다. "임자, 18년이면 너무 기나?"

대통령의 의중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한 차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른지 잠깐 망설였지만 이내 빙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각하, 무신 말씀입니까? 이제 막 시작인데예. 18 가보 아닙니까? 대운이 들어오는 깁니다. 대운이." 대운이라, 거 오랜만에 듣기 좋은 말이다.

그래 사실 이제 막 시작이다. 1972년 유신을 선포하고 어느 새 7년이 지났다. 7이면 괜찮은 수 아닌가. 이 해만 잘 넘기면 그야말로 대운이 시작된다. 물론 그해 5월 한강을 넘었을 때 이미 자신은 천하의 권세를 얻은 셈이긴 했으나 그간의 시련이 결코 간단치 않았다. 당시 나라꼴이 어디 나라꼴이었던가? 입만 살아가지고 애국 운운하던 자들이 판을 치던 정국은 실로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배를 곯으면서 무슨 민주주의인가? 먹고 살 게 없는데 민주주의가 밥을 주나 떡을 주나 말이다. 우린 그 때 아프리카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일본처럼 될 것인가, 그 기로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나를 공격하는 자들은 다 나를 시기하는 까닭일 뿐, 나의 성과마저 부정할 수는 없는 노릇일 터이다. 대통령은 차를 다시 불렀다. "이봐, 임자. 오늘 준비는 다 된 기가?" 차는 기묘한 웃음을 흘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차는 대통령의 집무실을 나서면서 잠깐 멈추어 섰다. 요즘 영감이 좀 감상적이 되는 눈치다. 이럴 때 잘 해드려야 한다. 바깥이 사실 좀 시끄럽다. 서울 시내 곳곳에 다음과 같이 격렬한 구호가 적혀 있었다. "고마 해라, 마니 묵었다 아이가?" 이제 겨우 18년 정도 가지고 뭘 많이 먹었다는 건가? 차는 기분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순식간이었다. 한참 주흥이 오르던 때에, 참으로 졸지에 일어난 일이었다. 번개처럼 총성이 울리는 순간부터 대통령은 온 몸이 무섭게 식어가는 것을 느꼈다. 일본도를 기세 좋게 옆에 차고 말 달리던 만주벌판의 엄동설한도 이보다 더할 것인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말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이내 다른 음성이 들렸다. "칼로 선 자, 과연 끝까지 편할 건가?" 대통령은 점점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한사코 잡으려 했지만 그건 무망한 노릇이었다.

"아, 내 몸이 식으면 세상에는 봄이 오는가?" 자신도 모르게 떠오르는 예기치 않았던 생각이었다. 대통령은 붉게 물들어 가는 눈자위 위로 지난 세월이 주마등처럼 지나는 것을 보았다. 그렇구나, 길었다. 18년은. 피곤이 엄습해 왔다. 내가 손을 놓을 때를 놓쳤던 것이로구나. 후회가 밀려 왔지만, 그보다는 슬펐다. 내가 이렇게 생을 마치는구나. 이건 내가 결코 바라지 않았던 초라한 죽음이 아닌가?

대통령은 더 이상 남지 않은 시간의 급류를 절감하면서 마지막 긴 숨을 몰아쉬었다. 역사여, 부디 나를 기억해다오. 나처럼 불행한 군인은 다시는 없기를 말이다. 밤은 한없이 적막했고, 10월의 가을바람은 소슬했다. 역사는 구름이 흐르는 달빛에 서서히 젖어가고 있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센타'(오후 4-6시/FM 104.5, www.ebs.co.kr)의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에 연재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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