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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의 '즈믄 江에 뜨는 달'…비구니 열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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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옥의 '즈믄 江에 뜨는 달'…비구니 열전 <3>

보광암 보명 스님

***소쩍새 울던 그 해 봄밤**

딱, 딱, 딱, 따그르르르….

저물녘 산사의 빈 도량이 법당에서 울리는 맑은 나무 목탁 소리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한다. 아궁이에 지펴져 도량의 낮은 땅으로 포복하며 흐르는 마른 콩대 연기만 향기로울 것인가. 소리에도 향기가 있다. 도량을 서성이며 목탁 소리에 마음을 기울이자니, 그 소리의 향기 끝에 알 수 없는 설움도 한 가닥 얹힌다. 이 시간, 혼자 누리기 아까운 청복(淸福)이다. 아니, 어디 객이 혼자 누리는 것일까보냐.

경주시 산내면 대현리 보광암, 낙동정맥 흐름 속의 고헌산 자락, 그 산이 거느린 단석산, 백운산 따위, 그것들이 어깨를 겯고 펼쳐내는 화장(華藏) 세계 속 숨태인 것들이 한 권속으로 누린다. 산세를 따라 절 뒤로 펼쳐지는 너른 밭, 지붕 얹힌 집 기둥에 목줄이 매인 신세라고 깔보였나, 눈 앞에서 파드득거리는 새 한 마리를 진도개 반야가 껑, 하고 짖어 쫓는다. 금낭화, 하늘매발톱, 꿀풀, 원추리, 방풍, 백리향 지고 난 자리에 감국, 구절초, 용담꽃, 우유빛 차나무 꽃 같은 가을 꽃들이 피어나고, 이미 유순해진 산색을 배경으로 산수유가 붉게 익기 시작했다. 법당 앞 수각의 대통 관에서 나는 찻물 따르는 듯한 소리도, 절을 휘감고 흐르는 계곡 물 소리도 한결 속이 깊어졌다.

보광암 보명(普明) 주지 스님, 분주했던 십 년 동안의 도심 포교원 살림을 접을 생각은 없었다. 그저 고단해진 육신을 잠깐이나마 쉬어 갈 요량으로 1997년에 이 곳에 자그마한 터를 마련했다가 아주 옮겨 앉은 곳이다. 거사 한 분과 동네 사람들의 손을 빌기도 하지만, 틈만 나면 그는 땅에 엎디어 흙을 일구었다. 십 년 세월 다 되어가는 지금, 여름 한 철 보내고, 이 땅에서 거두는 것은 적지 않다. 꽃을 보자고 심기 시작했다가 이제는 오백 그루쯤으로 늘어난 매화나무에서 거두어진 3톤 가량의 매실과, 고사리, 곤달비 따위도 수확량이 적지 않고, 이 가을, 고추도 300근쯤은 좋이 거두게 되리라. 적잖은 양의 팥과 콩도 그의 손을 기다리고 있고, 오가피나무의 열매도 후리어 엑기스를 내주어야 한다. 가을이 깊어지면 고사리나 곤달비는 포기를 나누어 겨울나기 준비를 시켜야 하고, 절 주위로 울창한 숲에서 간벌해 낸 나무를 패어 땔감 마련도 해야 한다.

거두는 것은 적지 않으나, 그저 이곳을 찾는 신도들과 나눠먹는 정도라고 했다. 남는 것은 울산 청과물 시장에 내다팔기도 한다지만, 콩의 경우, 심고 거두는 데 드는 삯이 파는 값의 대여섯 곱은 된다. 그렇다면 애써서 그 목숨들을 왜 거두시는가. 그 옛날 부산 선암사의 천진불 혜월 스님은 멀쩡한 옥답 닷 마지기를 판 값으로 자갈밭 세 마지기를 일구어 놓고는 매우 흡족해 하셨더라 했다. 어이없어 하는 제자들에게, 닷 마지기는 그대로 있고 세 마지기 밭이 새로 생기지 않았느냐고 천연스레 셈해 보이셨다니, 혜월의 미욱한 제자처럼, 객은 보명 스님의 셈속을 알 수가 없다.

"그대는 누구요."

"…"

"그럼 (우리가 지금 이 밭에서 뽑고 있는) '배추'라 하시오."

반산 보적(盤山寶積)은 저자에서 상대와 드잡이를 하다 말고, 맞서 싸우던 사람이 정신을 차려 '면목 없다'고 하자, 그 말을 듣는 순간에 문득 깨치었다. 한 생각 일으키기 전의 상황(본래면목)으로 돌아가는 것이 보명 스님의 화두라면 화두다. 즐거울 것도, 괴로울 것도 없는 그 지경에 가 이르는 것이 이 곳에서 땅을 일구고 있는 그의 화두다.

1954년에 충남 예산에서 태어난 보명 스님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는 바로 입산했다. 그 때가 1974년이니 산문에 든 지도 벌써 서른 해가 넘었고나. 수행에 승속이 따로 있겠는가. 제 몸이 어디에 처해 있든지 수처작주(隨處作主)의 태만 잃지 않으면 될 일이라 생각하기는 한다. 그러나 혼인도, 그래서 인연 지어질 자식 같은 것도, 세속적 욕심 같은 것은 도무지 없더니, 그러다가 '소리 없이, 바람 없이' 같은 수필이나 노천명의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같은 시가 마음에 간절히 얹히던 어느 날에 남쪽 땅 끄트머리의 절을 향해 길을 떠났었다. 불영사, 산이 좋고, 그 산을 감고 흐르는 물의 자태가 원융하니 '산태극, 수태극'이라 할 만한 곳이었다. 일휴 노스님의 상좌인 지문 스님이 그의 은사 스님이 되어 주셨다.

여섯도 되었다가 셋도 되는 절 대중들과 함께 낮에는 보리, 율무 따위 자라는 밭에 엎디어 땀을 흘렸다. 그 때에 절에서 치고 있던 누에 뒤치다꺼리도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밤에는 곤한 몸으로나마 법당에 앉았다. 산문에 들기는 했으나, 어찌 수행을 해가야 할지 앞이 보이지 않아 그저 관세음보살만 수도 없이 불렀다. 지금에까지 이어지는 그의 기도행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초창의 기억 사이로, 일휴 노스님이 벗어 주신, 울력하기에 썩 편했던 까슬한 삼베 옷의 촉감이 서른 해가 넘는 지금까지도 생생히 살아남아 있다. 그 첫겨울은, 머물 수도 절을 떠날 수도 없는 갈피잡지 못할 마음이 이어져서 죽음 같은 것도 간절히 품어 보던 참으로 길고 어두웠던 시간이었다.

이듬해 초파일을 지내고 절을 나와 상주 관음사라는 곳에 잠시 머물었다. 아직 가슴앓이는 끝나지 않았던지, 이후로 그가 다시 들을 수 없던 피를 토하는 듯한 울음 소리, 새벽 예불을 할 즈음이면 들리던 소쩍새 소리는 참말이지 가슴을 에이는 것이었다. 다시 양진암으로 옮아가서 공양주 노릇을 자청해서 한 철 살았다. 그 때 그 곳에는 날마다 삼천, 또는 사천 배씩 절을 올리며 기도하는 스님들이 적잖았다. 공양간 일을 맡고 있는 몸으로 그리 하지는 못하고, 천 배씩만 올리며 지내다가 성타 스님으로부터 큰 질책을 받았다. 추석날, 어디서 시줏물로 들어온 동부 콩이 너무 맛나 보여, 그저 스님들께 맛난 공양 지어 올리려는 마음만 급해서, 차례 올리는 밥을 잡곡밥으로 지어 버린 것이다. 성타 스님의 호된 꾸지람을 듣고는 다시 그곳을 나갈 수도, 있을 수도 없이 힘들었던 기억이 또 난다. 옛기억이로고나, 성타 스님이 구석진 곳을 찾아 훌쩍거리며 우는 그를 불러 따라 주신 한 잔 송차는 또 얼마나 훈훈했던가. "마음이 어지러우면 법화가 '구르고'(心迷法華轉), 마음을 깨달으면 법화를 '굴린다'(心悟轉法華)"<육조단경> 했다. '지혜로운 사람은 환경을 만들어 가며 살지, 그에 휘둘려 살지 않는다'는 어떤 노스님의 격려도 그 때에 힘들기만 했던 그가 크게 기댄 바, 오늘에까지 따스하게 품고 있는 말씀이다.

동학사 강원을 다니다 말고, 이만하면 기도나 하면서 경을 봐도 되겠고나 싶어져서 이후로 기도만을 위한 행각을 시작했다. 천일 기도는 마장이 생기기 쉬우니 백 일씩 끊어서 해라, 노장님의 그 말씀 받자옵고 시작한 기도는 그러나 또 토막이 나고 마는 것 같아서, 오대산으로 가서 기도만 잘하게 해주십사 하는 '기도를 위한 기도'를 올렸던 적도 있다. 남해 보리암에서 올렸던 기도에는 깨달음도, 주지 같은 소임살이 따위의 아무런 원력도, 바램도 없었다. "그림자나 제가 남기는 발자국이 두려워 달아나고자 한다면 그럴수록 바짝 따라붙을 것이나, 단정히 나무 그늘 속에 앉아 있는다면 그림자도 발자국도 사라지고 만다"(망명) 하였거니와, 그저 기도를 하지 않으면 안될 것만 같은 절박한 마음뿐이었다.

함께 기도를 올리는 대중들마저 묵언으로 따돌리며 지어올린 기도, 지어 주는 밥 먹고 잠깐 눈 붙이면 되었으니, 법당을 소제하는 일이야 일 같지도 않은 것이었다. 하루 여덟 시간, 사분정근으로 기도를 해도 시간이 남았다. <금강경>을 하루 네 편씩 읽다가 속도가 붙으면서 외는 편수가 늘고, 그리고 글이 외어졌다. 날로써 달을 잇고, 달로써 해를 이어가면 공부는 쌓이어 넓고 깊어진다더니, 그렇게 이루어갈 도의 첫걸음은 그렇게 미약한 것이라더니, 과연 처음에는 글자만 보이던 것이 차츰 뜻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존이 물었다. "수보리여, 여래가 (이것이 바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이라고 할 어떤 법이 (따로) 있는가." 수보리가 답하였다. "제가 깊이 아는 바로는, 이것이 위없는 바른 깨달음이라고 할 만한 그 어떤 법도 없으며, 여래는 그러한 어떤 법도 설하지 않으셨습니다. 여래께서 설하신 법은 잡을 수도, 설명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법도 아니요, (그러나) 법이 아님도 또한 아니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성자들은 (의도적 행위나 현상계를 뛰어넘는) 무위(無爲)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금강경>의 가르침, 무아법(無我法)을 통달해야 보살이 된다는 가르침이 수도 없이 되풀이되어 그에게 다가왔다. 솟구치는 기쁨을 누를 수가 없었다. 자신 또한 이런 가르침을 알지 못하고 산문에 들었거니와, 과연!! 삼천대천 세계를 칠보로 꾸미는 공덕보다도 <금강경>의 사구게(四句偈)만이라도 외어 지니는 공덕이 더 수승함을 가슴에 품게 되면서 그는 원력 하나를 품게 되었다. 부처의 뜻을 널리 전해야겠다. 그 때가 1978년이었다.

***홍법(弘法)의 원을 세우다**

그의 홍법에 대한 뜻은 보리암을 나와 소록도로 다녀온 뒤에 다시금 다져졌다. 원불교를 비롯한 다른 교 소속인들이 상주하면서 뜻을 펴고 있었지만, 불교의 법을 전하는 사람은 없었다. 품은 뜻이 작지 않더라도 뜻만으로 될 일은 아니었다. 그가 그 곳을 포교의 장으로 삼으려면, 능력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자격증' 같은 것이 있어야 했다. 그의 은사 스님을 비롯하여, 그 무렵 그가 친견한 경봉, 월산, 구산 큰스님들은 한결같이 그의 '외도'를 마뜩치 않게 여겼으나, 1980년도에 그는 경주 동국대 한문학과를 입학했다. 그리고는 제가 처소로 삼았던 법장사에서 학교 수업을 해나가는 한편으로 어린이반, 중고등부, 그리고 청년회 법회로써 본격적인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두 해쯤 지나면서 은사 스님과 함께 경주 시내에 안심사를 창건하여 좀더 안정된 포교터를 마련했다. 그 무렵, 지방에는 물론 없었고, 서울의 불광사 같은 큰 절 정도에서 활동하고 있던 어린이 합창단을 만들고, 그리고 어머니 합창단도 만들었다. 그리고, 1984년, 불국사에서 펼쳐진 어머니 합창단의 공연은 초파일 특집 프로그램으로 KBS 전파를 타기도 했었나 보다.

어린이 법회를 꾸려가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른 좀더 효율적인 포교의 대안이 유치원을 운영하는 일이었다. 어린이 포교도 시급했지만, 유치원을 운영하다 보면, 자모 모임도 저절로 유치가 될 터였고, 교사라는 도반도 든든히 얻게 될 터였다. 지금에야 스님들이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운영하는 일이 꽤 대중화된 형편이지만, 그때만 해도 그런 생각을 품고 실행에 옮기는 이가 드물었다. 넉넉치 않은 사중 살림 때문이었으리라, 그의 이런 선진한 마음은 은사 스님마저 탐탁찮아 했었다. 규모를 갖추자니 없는 살림은 더욱 째이어, 신도들에게는 유료 법문을 자청하기도 했던 구차한 나날이었고, 피아노를 마련하려고 이불 장사를 하기도 하고, 부산 시장을 돌며 탁발을 하기도 했다. 그런 뒤에 시로부터 유아원 경영을 위탁받아서 경주에서는 처음으로 어린이집을 운영하게 된 것은 그 노고가 거둔 보람된 열매였다.

통도사 장밧뜰이란 곳에서 군과 총무원과 통도사의 지원을 받아 청소년 수련대회를 개최한 것도 그 무렵이다. 남현 비구 스님이 주관하고, 그가 총무 소임을 맡아 진행했던 그 대회에 전국에서 모여든 학생 수효만도 이천 명이었다. 운문사 등, 강원의 학인 스님과 재가 자원 봉사자도 오백 명이 넘어서, 쉰 명을 수용하는 군용 텐트를 쉰 동이나 쳐야 했다. 이천오백 명 규모의 대회란 그때로서는 초유의 일이었고, 그 이후로는 알 수 없으되 아마도 흔치 않은 일이었으리라 그는 짐작한다. 수련 대회가 그것으로 끝나 버리고 다시 지속되지 못했던 것은 큰 아쉬움이었다. 그러나 그 '아쉬움'이란 것이 그에게 또 다른 힘이 되어 주었던 모양이다.

어린이, 청소년, 그리고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대중 포교의 새로운 거점, 이사를 한 속가가 있는 서울과, 그가 들렀던 소록도도 떠올려 보았으나,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은 부산이었다. 1987년, 동래 지하철역 입구 건물에 40평 규모의 방을 세 얻어 '동래 관음 포교원' 현판을 달았다. 교통의 요지인 데다가 근처에 부산대학교가 있는, 막 대규모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기 시작한 새로운 '가능성'의 땅이었다. 기독교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에는 어떻게 하나, 그에 관한 책들도 숱하게 구해 읽었다. 서울에서 막 천막 법당을 시작한 정우 스님(현재 구룡사 주지)과, 서초동에서 열성적으로 법회를 이끌고 있는 지광 스님(현재 능인선원 원장)도 찾아뵈면서 도심 포교에 관한 이런저런 조언을 얻어들었다. 도시인의 삶의 주기에 맞추어 주말 법회 형식을 취했고, 법문을 듣는 자리를 벗어나면 까마득히 잊고 마는 식이 아니라, 불법을 생활의 축으로 삼게 한다는 이른바 '생활 불교'의 실천을 힘주어 강조했다. 몸 빼어내기 힘든 형편이기는 했으나, 경주 안심사 시절에 서울을 오가면서 동국대 대학원 한문교육학 과정도 끝내 둔 터였다. 그의 열정을 눈여겨본 교수들이 그에게 학업을 이어나갈 것을 종용하기도 했지만, '학문을 위한 학문'은 그의 길이 아니었다. 한문 교육 과정을 익힌 그가 펼친 것은 동네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어린이 한문 교실이었다.

처음에 네 명으로 시작된 한문 교실은 다음달에 열 곱으로 학생이 늘었고, 청소년 수련 대회에 참석했던 지도자들이 그를 찾아오면서 그 해 겨울부터 수련 대회도 열 수 있었다. 어느 해 여름, 절에서 수련 대회 장소를 허락받지 못하여 계곡에 가까이 텐트를 쳤었다. 한밤중 쏟아진 폭우에 떨다가, 장작을 구하지 못하면 훔칠 각오를 하고 내려간 절에서 나무와 초를 얻어 한기를 눅인 적도 있었고나. 어느 때에 큰 절 근처 여관방을 얻어 치른 수련 대회 때는 새벽 두시 반에 아이들을 깨워 관세음보살을 부르며 절까지 달리게 했다. 얘들아, 달리면 몸에서 열이 난단다, 그렇게 어린이들을 데리고 수련 대회를 치르기도 했다. 청년들과 함께 늦은 시각 도착한 오대산 중대암, 상원사로 가서 라면이라도 얻어먹고 허기를 끄려는 배고픈 아이들에게는, 하룻밤을 못 견디겠더냐! 절을 찾아가려는 그 힘으로 기도를 해라, 야단을 치기도 했었다.

누가 처음으로 마음을 내느냐에 딸린 일이기는 할 터였다. 리틀 엔젤스나 선명회 같은 합창단이 불교계에서 결성되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는가, 부산일보에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내어 공개 오디션을 보아 가려 뽑은 아이들로 '범음(梵音) 어린이 합창단'을 조직하고, 주부들을 대상으로 '해조음'이라 이름 붙인 크로마 하프단을 만들어 KBS 부산 홀에 세웠다. 대불련 부산 지부 문화패들의 사물놀이와 한동희 스님의 범패와 나비, 바라춤 공연 등이 곁들여진 장엄한 무대, 관음 포교원을 개원한 지 세 해 만인 1990년 4월이었다. 어린이 대상 한문 교실로 시작한 '법회'는 집안의 가장을 끌어들이는 부부 법회 개설로 확대되었고, 어느 해에 그가 이끈 가족 단위 동계 산사 수련 대회는 교계에서 처음으로 치러지는 것이었다.

어쩌면 저를 잃고 말지도 모를 열정적 포교행, 이런저런 '기록'을 갱신해 가던 그가 밑살림으로 삼은 것은, 혼자도 가고 신도들과 동행하기도 했던 기도행이었다. 낙산사 홍련암, 보문사, 김천 수도암 남해 보리암, 오대산 중대암 등 전국의 이름난 기도처는 다 다니며 철야 기도를 했다. 염불이든 기도이든 포교이든, 무엇을 간절히 지어가다 보면 눈이 뜨이는 것이 아닐까요, 부처님, 그는 때로 그리 물었다. 기도로써 제 밑자리를 다지면서, 포교라는 것을 화두 삼아 간절히 붙들고 가다 보면 바로 그 사사무애(事事無礙), 이사무애(理事無礙)의 경지가 열리는 것은 아닐까요, 부처님….

오백만 원에 월세 35만원, 그 세도 버거워 다시 오백만 원을 꾸어서 보증금을 올려 달세를 줄여 가던 곤궁한 살림이었지만 두려울 것이 없었다. 작고 볼품없는 콘크리트 구조물에서 장판도 없는 합판 바닥 위 전기 장판으로 버티던 때, 부엌도 없이 베란다에 싱크대를 놓고 다섯 해를 버티었다. 부처님의 뼈만 남은 고행상을 걸어 둔 곳, 두터운 좌복도 없고 방도 차가운 그 곳, 얻어 온 전기 난로에 밥을 지어먹는 나날이었지만 보리수 나무를 지붕 삼고 풀을 엮어 만든 자리를 좌복 삼아 도를 닦던 저 부처도 끝내 정각을 이루지 않았던가. 그에 견주면 나는 얼마나 풍족한가. 비를 가리는 지붕도 있고, 눕고 싶으면 누울 수 있는 잠자리도 있다. 밥이 하기 싫은 날은 주문만 하면 먹을 것이 배달되니, 이보다 더 풍족한 살림을 꿈꾸면 그것은 죄일 터였다. 그 때에 그는 도무지 두려울 것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되돌아 보니 울며 기도하지 않은 때가 없었고나. 그저 한용운의 '지칠 줄 모르고 타오르는 마음'과도 같았다. 대불련 학생들, 노조위원회 사무장, 교원 노조 사람들 등, 그가 넉넉히 끌어안았던 사람들과 함께 서면에 나가 데모도 했던 시절. 그러나 그들에게 늘 타일렀던 말, 죄는 미워하더라도 사람은 미워하지 마라. 삼십대 중반부터 사십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이 그러했다.

스님, 그 때가 힘들었어도 참 좋았어얘. 연세가 드시면서 쇠해지는 몸 따라 마음도 부쩍 허해진 어머니를 모시고, 스무 해 가까운 세월이 넘는 지금까지 그와 인연해 오고 있는 여자 사람, 오늘도 보광암 법당에서 절을 올리는 서른 살 허 씨도 어린 시절에 제가 함께 했던 포교원 시절을 그렇게 회상했다. 무엇보다, 맑고도 힘있는 스님의 염불 소리에 환희심을 내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글쎄, 그랬답니다, 그림자도 밟을까봐 가까이 다가가기 힘든 스님이었어요, 했다. 그렇게 십 년 세월 보내는 동안에 그때는 알지 못했던 그 무엇이 씨로 남아 그들을 움직였을까. 수련 대회에 참가했던 아이들 가운데 출가를 한 이도 여럿 되었더라 했다.

***작은 키, 큰 뜻**

우연히 지나치다가 무엇에 끌린 듯 마련했던 자그마한 땅은 십 년 세월 동안에 일만여 평으로 늘어났다. 길을 가다 별나게 이뻐 보이는 꽃을 사와서 옮겨 심었는데, 알고 보니 야산에 흔하디흔하게 자라고 있는 인동초였다. 그렇게 서툰 눈속으로 가꾸기 시작한 이 곳에는 봄에서 가을까지 온갖 꽃들이 피어난다. 좀 쉬고 싶어져서 이런저런 인연을 다 끊었다지만, 이 곳 보광암에서 한 달에 한 번, 두 번째 일요일에 열리는 법회에는 부산, 창원, 울산, 대구, 경주 등지에서 적으면 쉰 명, 많으면 일백 명쯤의 신도들이 모여 든다. 청신녀보다는 청신남들이 더 많다.

"바람 불어 좋고, 비가 와도 좋고, 눈 내리면 더욱 좋지마는, 꽃 피고 새 우는 날, 벗과 함께 차 마시면 더욱 좋겠소." 그렇게 적힌 보명 스님의 초대장을 받고 이곳에서 첫 모임을 갖게 된 스님들이 있었으니, 스무 명쯤으로 구성된, 한 해에 두 번 모임을 갖는 '마하회' 회원들이다. "한데 모여 경전을 읽고 함께 공부하라"(<열반경>)는 부처의 가르침을 잊지 않고, 번다한 삶 속에서도 그것을 몸소 실천하려는 어여쁜 도반들이다. 그가 부산 관음사 포교원을 운영하던 때부터 '불심회'라는 이름으로 뜻을 나누어오던 도반들이 있었는데, 그가 이곳으로 터를 옮기면서 동지들을 더 모으고, 모임의 명칭도 바꾸었다.

육신의 키는 그렇지 못하더라도, 품은 뜻마저 옹졸하고 싶지는 않아서 '마하회'라고 이름을 고쳐 지었다. 40대 후반에서 50대 초반, 스무 명쯤의 회원, 연회비 120만원, 일부는 회원의 애경사비로 쓰이기도 하지만, 회비는 한 해에 두 번 있는 회원들의 모임과 자체 수련회를 통한 재교육비로 쓰이고, 적잖은 액수가 승가대학, 동국대학 등에 교육 및 역경 지원비로 지출된다. 적다고 할 수 없는 액수의 불참 벌금은 다른 구성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위해서 기꺼이 결정한 강제 조항이다. 마하회는 이밖에도, 차츰 불교적 사회 복지 실현을 위한 실천 사업에도 동참하여 활동 영역을 넓혀 보려 한다.

이곳으로 옮겨온 첫해에 3박4일 일정으로 열린 첫 번째 공부 모임에서는 비구 도법 스님과 학담 스님을 모시고 강의를 들었으며, 그 뒤로 성주의 중암, 기림사, 봉선사 등지에서 월운, 지안, 무관 스님 들을 모시고 <능엄경>, <금강경>, <기신론>, 계율, <증도가>와 <사산비명(四山碑銘> 따위를 다시 새기는 기회를 가졌다. 올 가을에는 덕민 스님을 모시고 선시를 곁들인 <증도가>를 다시 읽는다.

조계종의 경우, 현재 강원이나 기초 선원의 일정 과정을 이수하고 비구(니)계를 받고 나면 정식 승려가 되는데, 그 뒤로 종단 차원에서 배려하는 승려 재교육의 내용은 빈약한 편이다. 정식 승려가 되고 난 뒤에 재교육이란 틀로 다시금 자신을 다잡는 일이란, 개인의 수행의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기본 교육 기간 동안 받은 교육이 실답지 못한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평생을 통하여 다시금 각성하는 일은 '중생 구제의 계단'으로 삼아야 할 필수 과정이다. 그런 과정이 없다면, 불교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다고 보명 스님은 생각한다.

한데 모여 함께 공부하라 하신 석존의 귀한 말뜻을 그는 몸으로 깨우친 적이 있었다. 초발심의 시기에 '얼치기'로 익힌 '마른 지혜'는 얼마나 되는 것일까. 자신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 천, 몇 만 번 독송을 해왔던 <금강경>, 좌복을 펴고 앉아 드는 화두는 아니었다 하더라도, '이것'이 무엇인가, 거울을 보듯이 날마다 읽으며 자신을 성찰하는 시간을 가지려 애를 쓰기는 했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 진실되이 만난 말씀은 몇 마디나 되었던가. 봉선사에서 능엄경 강의를 듣다말고 벼락 같이 만난 귀절, "아난아, 비파는 어떻게 소리를 얻게 되었느냐!!", 묘공(妙工)의 묘지(妙指)가 없었더라면 비파는 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연기(緣起)의 뜻이었다.

옛사람이 이르시기를, "홀로 선하면 그 몸을 잃지 않음이요, 함께 선하면 그 희망을 잃지 않음"(智圓)이라 하였으니, 새롭게 다진 바, 홍법은 이생에서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대상을 두고 베푸는 것이 아니라 돌이켜 법문을 듣는 것이니 저를 위한 것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이 회광반조의 실다운 뜻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강의를 위해서 <육조단경>과 <선가귀감> 등에 이어 곧 나오게 될 <기신론>, 그것들을 풀어 보이는 내용을 담은 카셋 테이프로 제작하고 배포하는 뜻도 그런 마음에서 도모해 보는 것이더라 했다.

어떤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도(道)입니까?"

운문 문언(雲門文偃)은 대답했다.

"가거라(去)!!"

가거라, 운문의 그 외자 가르침 속에는 '버려라' 또는 '덜라'는 뜻도 담기지 않았을지. 번다해진 인연을 어지간히 거둬 버리고 이곳에 스며든 뒤로도 다시 다가오는 인연은 또 마다지 못했으니, 그래서 또한 운문은 "파도에 제 몸을 맡기고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隨波逐浪)" 하셨던가 보았다. 부산 동의대 철학과 겸임교수로서 철학과 3, 4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불교 철학을 강의하고, 부산과 울산의 서넛 불교 대학 강의를 맡고 있는 일말고도, 그가 교육국장 소임을 맡고 있는 불국사에서 운영하는 불교문화회관에서도 강의를 한 지도 이태째가 된다. 운문의 '가라(去)'는 말씀 속에는 '나누라'는 뜻도 있었던가 보다. 승속을 가릴 것 없이 한데 모여 살면서 체온을 나누고 함께 공부하는 곳, 오래 전부터 그가 꿈꾸어 오던 일의 첫 발걸음으로, 이곳에는 곧 천 평의 대지 위에 350평 규모의 노인 복지 시설이 들어서게 된다. 그를 위한 대지 증여 절차가 막 끝났다.

처마 끝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니
섬돌 앞의 땅이 젖네.

-설두 중현(雪竇重顯)

문을 열면 달빛이 방 안 깊숙이 들어온다는 방, 그러나 간날 밤에 누운 객을 찾은 것은 달빛 대신 밤을 도와 내리시는 가을비 소리였다. 법이 눈앞에서 이루어져도 사람들은 보지 못하는구나! 옛사람이 탄식한 대로 섬돌 앞 땅이 법우(法雨)로 젖는 줄도 모르고, 새벽녘에 들려오는 보명 스님의 독경 소리를 이불 삼아, 객은 놓쳐 버린 잠 끝만 맹문이로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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