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화 100년에 관한 박노자ㆍ허동현 교수의 서신논쟁의 3부 연재를 시작한다. 근대화 100년 간의 역사적 사건들과 한민족의 대외인식 및 해외열강의 대 한반도 인식을 다룬 1,2부에 이어 3부에서는 이광수가 지닌 두 개의 얼굴, 무속을 통해 본 전통문화, 신여성, 신민지시대의 영화, 일제시대의 기생, 개화기 시대의 불교 등 생활사ㆍ미시사적인 접근을 통해 한민족의 지난 100년을 되돌아본다. <편집자>
***이광수의 2개 얼굴**
허동현 교수님, 안녕하십니까?
청년 도스토예프스키가 "인간이라는 수수께끼를 풀고 싶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대로 모든 인간들이 다 수수께끼이지만 저에게 한때 가장 큰 수수께끼 중의 하나로 보였던 사람은 "한국 근대소설의 아버지"(주요한)나 "최대 최고의 작가"(구인환)로 받들어지기도 하고 "친일적인 위선자이며 자기밖에 모르는 소부르주아"(김동석, <부르조아의 인간상>, 1949)로 매도되기도 했던 이광수라는 작가입니다.
왜 수수께끼냐 하면, 다작으로 유명했던 이광수가 써놓은 글에서 서로 너무나 다른 작가의 두 모습이 동시에 보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애정문제 탐구에 몰두하기도 하고 부처의 자비, 예수의 사랑을 애써 본받으려는 과민한 구도자의 모습이고, 또 하나는 힘과 살인과 "황인종의 단결"을 예찬하고 친일적 파시즘의 특색이 강했던 국가주의자의 모습입니다. 이 두 모습의 공통분모는 그 근대적 성격이지만, 어떻게 해서 한 사람이 상반된 두 자세를 취할 수 있었는지 저에게는 수수께끼로 보일 뿐이었습니다.
혹시 이광수가 최초로 쓴 소설로 추정되는 <愛か(사랑인가)>(1909)라는 글을 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나이가 겨우 18세밖에 안된 이광수가 유학 중에 메이지학원의 동창회보에 일본어로 발표한 작품입니다. 어린 나이에 근대적 형식의 문학작품을 외국어로 써서 발표할 수 있었다는 것 자체는 천재적인 어학적, 문학적 재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저로서 그 작품의 내용은 더 재미있었습니다.
주제는 조선소년 문길이 일본 미소년 미사오에 대해 느낀 동성연애적 감정이었고, 이것이 뛰어나게 묘사됐습니다. 일찍 고아가 돼 남의 도움으로 어렵게 유학을 가서 고학했던, 그리고 동경에서 대단히 외로웠던 문길은 작가 이광수의 분신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문길의 동성연애적 감정이 이광수 자신이 누군가에 대해서 느꼈던 감정이었고, 이광수는 그런 감정을 소설을 통해 고백했던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동성연애가 터부시됐던 유교적 사회 출신이 자신의 섹슈얼리티를 과감하게 탐구한 데 대해 찬사를 보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지금이라 해도 동성연애자의 커밍아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작품을 읽으면 문길, 즉 이광수의 고독과 마음의 상처들, 친구에 대한 그의 사모의 감정과 사랑의 탐색 등에 대해 저절로 나름대로의 동감을 느끼게 됩니다. 이역생활에 지친 과민한 조선청년의 자아탐구에 독자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흡인되는 것입니다.
이광수의 '소프트'한, 그리고 번민과 고독에 지친 인간적 얼굴은 <어린 희생> (<소년> 제14, 17호, 1910)이라는 초기 작품에서도 보입니다. 그 줄거리는 러시아 군인들에 의한 손자의 죽음을 복수하기 위해 그 할아버지인 폴란드 독립투사가 러시아 군인들을 독살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정치적인 측면에서 이 작품을 최근의 한 연구자처럼 '백인호랑이 러시아'에 대항하는 '황인종 국가' 일본과 한국의 연합(즉, 한일합방)에 대한 예찬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요(이경훈, <이광수의 친일문학 연구>, 태학사, 1998, 24쪽).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 구절에서 할아버지가 본인이 죽인 군인들의 시체를 보면서 자기 손자와 같은 나이인 그들의 죽음을 탄식하고 인간들이 서로를 죽여야만 하는 이 무자비한 세상을 개탄하는 대목입니다. 인종주의에 일찍 물들었던 이광수이지만, 그도 역시 근대적 살육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겼던 셈이 되지요?
그렇다면 이해가 안되는 것은, 살육을 개탄하고 자신의 은밀한 동성연애적 감정의 탐구에 몰두한 문학소년 이광수가 어떻게 해서 일본의 '힘'을 찬양하고 전쟁준비를 "인류 최고의 수양"으로 신격화시키는 1930년대의 이광수로 변신할 수 있었나 하는 점입니다. 파시즘에 매몰된 1930년대의 이광수는 물론이거니와 "거의 청도교적인 도덕성"의 계몽적 지도자 이형식을 이상형으로 그린 소설 <무정> 시절의 계몽주의자 이광수도 초기 작품에서 보였던 부드럽고 개성적인 문학청년 이광수와 너무나 거리가 먼 것으로 보입니다.
서로 모순적인 사상과 이념의 혼재라고 해야 하는가요? 아니면 표피적으로 내세우는 지적인 장식품들과 이념적인 중심 사이의 거리라고 이야기해야 할까요? 이미 파시스트로서의 이광수의 면모가 다 자리 잡힌 1931년에 이르러서 이광수는 자신의 오래된 톨스토이주의적인 화두인 '비폭력'을, 적어도 외피적으로는 계속 붙들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예컨대 그는 위대한 비폭력 반제 저항의 영웅 간디를 두고 다음과 같이 비폭력 저항의 장점을 찬양합니다:
"간디가 인류의 역사에 끌어들인 비폭력이라는 민중운동의 전술은 전세계 민중혁명운동의 전선을 혁명할 운명을 암시한다. 비폭력이라는 전술의 이익은 (1) 생명의 희생이 적은 것 (2) 운동 전선에 선 자 이외의 인민에게 해를 미치지 아니함으로 민력(民力)의 피폐가 적고 따라서 민원(民怨)을 아니 받는 것 (3) 비폭력인 고로 희생자의 형기(刑期)가 짧아서 곧 운동선(運動線)에 복귀할 수가 있는 것 (4) 운동의 상대자인 지배계급 또는 민족에게 심각한 적개심을 안 일으켜 언제나 의사와 감정의 소통을 도모할 수가 있는 것 (5) 형량(刑量)이 적기 때문에 다수인(多數人)이 겁 없이 몸으로나 재산으로나 참가할 수 있는 것 (6) 지구적(持久的), 침투적일 수가 잇는 것-이것은 무력을 진압수단으로 가진 지배계급이 가장 고통으로 하는 바이다 (7) 최후에 비폭력적(非暴力的) 해결 상대자에게 원한을 끼치지 아니함으로 해결 후의 적개심과 따라서 전쟁의 위기를 포장하지 아니하는 것 등이다."("비폭력론", <동광>, 제20호, 1931년 4월)
이 정도면 벌써부터 조금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같은 해에 <힘의 찬양>같은 작품을 발표하여 일본군의 힘, 그리고 힘이라는 "생명의 에너지"가 발휘되는 전쟁을 사회진화론적인 어투로 찬양한 사람이 갑자기 상대방에게 원한을 끼치지 않는 투쟁방법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부터 범상하지 않은 일로 비치지요? 거기에다가 이미 반일운동의 전선을 떠난 지 거의 10년이 된 전향자가 민중투사들의 형기, 형량, 민중에 지구적인 영향을 끼칠 가능성 등을 이야기해주니 <민족개조론>(1922)에서 조선의 민중을 그 "민족성"이 형편없이 나빠 현명한 "지도자"와 "개조단체" 등의 엘리트에 의해 구제되지 않고서는 역사에서 빛낼 수 없는 우둔하고 무력한 존재로 그려 민중의 주체적 운동의 가능성 그 자체를 부정한 이광수와 다른 어떤 동명이인(同名異人)이 쓰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 지경입니다.
그러나 극단적인 반(反)민중적인 친일 매문업자 이광수가 인도의 민중적 반영(反英) 투쟁의 영웅 간디를 찬양하는 것으로 수수께끼가 끝나지 않습니다. 1939년, 이광수가 평소에 열심히 찬양한 '야마토 민족의 힘'의 화신, 즉 "무적황군"이 중국을 짓밟고 무수한 중생들을 도륙하고 있을 때 "총후보국(銃後報國)", 즉 제국주의적인 강제 총동원의 최전선에서 활약한 이광수는 부처님의 자비심에 대한 장문의 글을 발표합니다. 나 자신을 잊은, 이기심이 없는 나눔 등이야말로 불교의 본질이라고 밝힌 다음에 그는 불교의 수행 도리인 6바라밀에 대한 감동적인 설명을 덧붙입니다. 예컨대 보시(布施)라는 불자의 가장 중요한 덕목에 대한 이광수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지요.
"보살의 기쁨은 줌에 있습니다. 그에게는 이기욕(利己慾)이 없기 때문에 받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습니다. 받기를 바라는 것은 거지의 심사(心事)입니다. 보시심(布施心)을 두루 갖춘 이는 우주를 다 내 소유로 한 것과 같은 대부자(大富者)입니다. 부자 (富者)에게는 줄 일뿐이오 받을 일이 없는 것입니다. 아(我)가 공(空)이오 아소(我所)가 무상(無相)이기 때문에 아(我)에 대한 현(願)은 공(空)입니다. 오직 중생을 제도하려는 대원(大願)과 대욕(大慾)이 있을 뿐입니다. 그는 (…) 한없이 주는 데서 한없는 희열을 느낍니다. 배고파 하는 아기에게 줄 젖이 있는 동안 어머니에게는 부족이 없습니다. 어머니의 슬픔은 오직 줄 것이 없는 때에만 생깁니다. 아기에게서 받고 싶어하는 생각은 터럭끝만치도 없기 때문에. 받고 싶어하는 자가 있을 때에 내가 줄 것이 있는 것이 보살의 유일한 기쁨입니다."
살인 그 자체를 "힘으로 돌아가는 우주"의 필연적인 부분으로 생각하고 "황군"이라는 살인자의 한 무리를 찬양하고, 자신의 고용주이기도 했던 <동아일보> 재벌의 주인 김성수라는, 결코 보살처럼 욕망 없는 존재가 아니었던 사람에게 "조선의 거인, 겸양, 의리, 명민함의 화신"이라는 '사모의 말씀'을 바치는 등 현실적으로 폭력과 탐욕의 세계에서 너무나 편안하게 지내고 있었던 이광수의 입에서 도저히 나올 것 같지 않은 이야기같지 않습니까?
그 당시의 불교가 아무리 친일화하여 제도권에 잘 편입되었어도 '나눔의 윤리'를 들먹였다면 바로 그 윤리에 입각한 새 사회를 건설하려고 목숨을 내던지고 있었던 공산주의자들을 생각했을 법도 했는데, 텍스트에서는 오늘날의 진정한 보살정신의 소유자인 그들에 대한 언급이란 당연히 한 줄도 없지요. 이광수와 한때 가깝게 교류했다가 그의 친일행각이 절정에 이르러서야 그와 드디어 절교한 만해 한용운은 바로 불교와 사회주의를 겸한 인물이었으니 이광수도 '불교 사회주의'를 몰랐을 리 없는데, 놀랍게도 철저하게 반공주의적인 입장을 고수하면서도 이렇게 '나눔의 도덕'을 설교하는 겁니다. 하기야, 비폭력 이론과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는 불교의 또 다른 덕목, 즉 '인욕(忍辱, 모욕을 참고 폭력이 아닌 사랑과 베풂으로 응수하는 마음과 행위)'에 대한 이광수의 이야기는 정말로 압권입니다.
"자기 중심인 생각을 없애고 불태울 때 화냄은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분노란 남이 내게 좋지 못하게 할 때에 일어나는 범부의 반응입니다. 사랑하는 아기가 어머니의 뺨을 할퀼 때에, 머리카락을 잡아 뜯을 때에 어머니가 성을 냅니까? 원심(怨心)을 품습니까? 전도(顚倒)한 중생이 나를 욕하고 구타하고 피해를 끼칠 때에 내가 진정한 불자일진대 나는 분노의 마음을 일으키기 전에 번민(憐憫)하는 자비심을 일으켜서 그를 제도하기만 힘쓸 것이니, 내가 분노의 마음을 일으키지 아니한 때에 나는 벌써 그 중생을 제도한 것입니다."('대성석가, 석가여래(大聖釋迦, 釋迦如來)의 가르치심', <삼천리>, 1939년4월)
자신을 때리는 아이까지도 사랑해주는 어미의 정신, 즉 인욕(忍辱)과 박애의 정신으로 돌아가자고 독자들에게 역설하는 이광수는 그러나 3년 후면 "남아의 숙원이란 군대에 자원 입대하여 용약 출정해 역투해서 전사(戰死)하는 일"('병역과 국어와 조선인', <신세대>, 1942년 5월)이라고 쓰고 조선인들을 침략전쟁에 적극적으로 동원하게 됩니다.
그가 그의 표현대로 "천황의 방패"가 되는 사람이 정말로 모욕을 참고 중생을 제도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요? 특히 말년의 이광수를 읽으면 읽을수록 그 종교적인 수사의 화려함과 정치적인 입장의 비열한 잔인함 사이의 간극은 아주 넓어보이기만 합니다. 그러면 간디와 톨스토이와 석가와 예수에 대한 이광수의 설교문들을 단순히 위선 내지 일종의 종교적 현학(衒學), 자신의 '수양' 수준에 대한 고도의 자랑으로만 보고, 이광수의 실체를 오로지 집단과 집단주의적인 폭력에 대한 찬양, 위로부터의 계몽주의에 대한 엘리트적인 신념만으로 정의해야 할까요? 과연 종교적인 '구도(求道)'와 정치적인 파시즘 사이에 어떤 상관관계가 없었을까요?
이광수가 지닌 두 얼굴의 수수께끼를 저에게 약간 풀어준 것은 <그의 자서전>이라는, 이광수가 말년에 쓴 자서전적 작품(<조선일보>, 1936년 12월 11일부터 1937년 5월 1일까지 연재됐음)입니다. 1910년대 초반 동경유학 시절의 이광수는 톨스토이의 가르침에 심취하고 일본의 기독교적 사회주의자들과 교제했습니다. 그의 동경 친구들 중에는 인류애의 입장에서 러일 전쟁을 비판했다가 급우들에게 심한 이지메와 구타를 당한 기독교 청년들이 있었습니다. 감수성이 예리한 천재 이광수에게는 톨스토이가 자애와 상부상조 지향의 새로운 세계를 열어준 셈이었지요.
그러나 톨스토이가 갈망했던 바와 달리 1914년부터 유럽 국가들이 인류사상 최대의 살육극인 제1차 세계대전에 들어갔고, 힘 없는 조선이 힘 있는 일본의 통치 밑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이와 같은 '대세'를 관망하던 와세다대 학생 이광수가 1915~18년에 사회진화론을 새로이 발견해 "힘이 있는 자만이 자유와 개성을 논할 수 있다"는 입장에서 "패배주의자"인 톨스토이를 저주하게 됐습니다.
그때부터 말년까지 이광수의 주된 신조는 바로 사회진화론의 '적자생존', '약육강식"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린 시절에 익혔던 '인류애'의 이상을 완전히 폐기처분하지는 않았습니다. <사랑>(1938년)과 같은 작품을 보면 톨스토이주의와 불교적 자비론이 얽히고 설켜있지 않습니까?
명실상부한 일본형 파시스트가 된 1930년대에 이광수가 '사랑과 섬김'의 이야기를 내팽개치지 못한 것이 단순히 아직 매문업자가 되기 전의 순수했던 청년시절에 대한 향수 때문만이었을까요? 자신의 이런 '뿌리'에 대한 의식도 어느 정도 남아있었겠지만, 파시스트 이광수에게 "사랑을 통한 자기 극복" 등 '구도자' 투의 이야기도 역시 중요한 담론적 역할을 해주기도 한 것 같습니다.
예컨대 우리로서 이해가 되지 못하는 부분인, 그의 간디에 대한 애착을 봅시다. 그는 간디의 반전(反戰) 논리, 그리고 꾸준한 독립 지향이나 민중적인 면모 등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지만, 간디라는 카리스마적인 지도자를 구심점으로 한 인도 민족주의자와 민중의 '단결'에 대해서는 감동을 합니다.
"비폭력운동에 있어서는 강제라는 것이 전혀 없기 때문에 오직 굳은 단결만을 힘으로 하는 것이다. 만일 수만의 다수 민중의 굳은 단결이 있고 그 단결이 비폭력으로 불복종, 보이콧 운동을 개시한다고 하면 그것은 동수(同數)의 민중이 무기를 가지고 폭동을 가지고 폭력을 일으키는 것보다 효과가 클 것이 상상된다."(<비폭력론>)
간디의 비폭력 운동이 '단결에 의한 집단의 힘'으로 나타나기에 힘과 집단의 숭배자 이광수가 거기에 흥미를 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파시스트로서의 그의 '선언문'이라 할 <지도자론>(1931)에서 그는 간디를 스탈린이나 무솔리니와 같은, 의지력과 가시적인 용감함으로 비겁한 대중들을 단결시키고 이끌어주는 '지도자'의 반열에 올립니다.
'사랑'에 대한 향수도 있었겠지만, 1931년쯤이면 이광수가 종교나 도덕 등이 얼마나 강한 대중적인 영향력을 가지는지, '박애와 봉사'의 수사가 얼마나 엘리트에 의한 '대중 단결'에 주효한지를 깨달은 것이었을 겁니다. 전통주의적 색깔이 강하고 계급문제의 해결보다 '민족문제'의 해결을 우선시한 간디의 운동이 인도에서 아래로부터의 혁명의 가능성을 봉쇄했다는 사실까지도 이광수가 과연 알고 있었을까요? 알고 있었다면 그것은, 반(反)혁명 사상이 철저한 그가 간디를 좋아할 만한 또 하나의 이유가 됐을 것입니다.
이광수와 불교의 인연도 '박애정신'에 대한 순수한 갈망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고, 오히려 사회진화론적인 집단주의에 바탕을 두는 그의 총체적 사상구조와 연결시킬 수 있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1920년대부터 <법화경>이나 <화엄경> 등 후대에 성립된 방대하고 추상적인 대승경전을 이미 탐독하고 습선(習禪)도 즐겼던 이광수를 본격적인 '법화의 행자'로 만든 것은 아들의 죽음(1934)과 우파적 민족운동의 좌절 등 여러 가지 개인적, 사회적 상처들이었지만, 이미 파쇼화된 이광수의 정신세계에서 불교의 '보시' 논리는 곧 '봉공(奉公)', 즉 '천황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중심으로 한 '제국에의 봉사'로 해석되는 것 같습니다.
위에서 언급했던 <대성석가, 석가여래의 가르치심>과 같은 설법(說法) 성격의 글에서 그는 "임금의 은혜"를 부처나 부모의 은혜, 그리고 뭇중생의 은혜보다 더 높은 위치에 올리고 그 은혜에 대한 "사심(私心) 없는 보답"을 "인간 수행"의 중심으로 삼으라고 합니다.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일 아닙니까? 초기 불교의 경전 같으면 임금이라는 것이 단순히 인간들 사이 다툼의 조절자, 일종의 '사회적 계약'에 의해 그 역할을 맡아 하는 한 중생일 뿐이지 중생 위에 서는 자는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광수의 불교 이해가 승단(僧團)이 아쇼카왕의 절대권력 구조와 타협한 이후의, 왕권신수설 (王權神授說)의 색깔이 다소 짙은 대승경전에 입각한 데다가 동시대의 일본과 조선 제도권의 '황도(皇道) 불교', 즉 어용화된 반(反) 불교적인 사이비 불교를 절대시한 결과로, 가히 독신(瀆神)이라 할 수 있는 '불교적인 전체주의' 세계관을 수립합니다.
그에게는 노예적인 조건 하에서 고생하는 노동자와 그들을 대표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정당한 처우개선 요구가 이제는 "안락에의 욕심"(<인간수행론>, 1941), "나 자신만을 내세우려는 잘못"(<오복(五福)을 얻는 길>, 1940), "구복 (口腹)의 욕심만을 내세우는 자본주의 내지 공산주의 등 물질 만능 체제의 망상"(<신시대의 윤리>, 1941)으로밖에 안 보이는 반면, 전범 히로히토나 일본 및 조선의 재벌들을 위해 부림을 받았다가 전선에 죽으러 끌려가는 것은 "나 자신의 진정한 극복, 탐욕의 극복"(<근로와 문화–근로삼매에 대하여>, 1941), "나 자신을 죽임으로써 관세음보살이 되는 길"(<인생과 수도>, 1941)로 찬양됩니다.
결국 태평양전쟁 시절의 이광수에게는 자유주의나 개인적인 권리인식, 개인주의, 계급인식이나 계급대립 등이 바로 "우리와 태생적으로 이질적인 백인문명의 주술(呪術)"이 되고, "아시아 민족들의 이상"은 집단에의 몰두로 해석된 "불교적 무아(無我) 사상", 그리고 "천황과 민족을 위해서 자신을 기꺼이 죽여주는" 것으로 해석된 보시, 인욕(忍辱) 등 6바라밀의 수행으로 정리됩니다.
톨스토이와 예수는 거의 팽개쳐지고, 붓다가 "우리가 절대적으로 사랑하고 목숨을 바쳐야 할" 대(大)가부장, 즉 천황의 다른 이름이 되는 것입니다. "구도, 비폭력, 사랑, 박애, 종교 정신"은 다 전체주의적인 몽상 안에서 왜곡, 포섭되고 맙니다.
이광수라는 한국 근대문학의 천재의 마음 속에서 한때 그 논쟁을 벌였다가 결국 "야마토 민족과 천황"의 이름으로 통합되고 말았던 두 개의 이념, 원칙상 비폭력적인 불교와 스펜서의 잔인한 사회진화론. 불교의 수행이 "우리 모두의 생존과 번영"을 책임진다는 천황을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자리매김됐기에 결국 스펜서가 붓다를 포로로 잡았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임금과 민족"을 무엇보다 대상으로 하는) '사랑'이 개인의 주체적인 인식을 완전히 해체시키고 제국을 위한 살인기계로 만드는 하나의 기제로 전락되고 어떤 긍정적 의미도 다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청년시절에 폭력의 추악함에 대해 나름대로 진지하게 고민하고 불교경전을 탐독하여 자비의 논리에 꽤나 정통하게 된 식민지 시대의 이 천재가 제국주의적 살인의 '정당성'을 이렇게도 열렬하게 받아들인 것은 약간이나마 의아하게 느껴지지 않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한때 종교적인 구도와 민족주의 사이에서 머뭇거리기도 하고 인생과 우주를 포함한 모든 것에 대한 그 나름의 진지한 회의도 해본 이광수를 결국 파시스트의 전형(典型)으로 만든 중요한 요인 중의 하나는, 그가 근대를 배우면서 독립적인 개인의 존엄성과 권리, 개인의 생명과 자존 같은 부분을 거의 처음부터 제외시켰다는 점입니다. 초기(1910년대)에 '민족'과 '문명'에 부속화됐던 '개인'은 나중(1920년대)에 '민족 개조', '인간 수행' 등의 거대한 프로젝트에 또 다시 부속됐다가 결국에는(1930년대에) "황도(皇道)"의 한 '부품'이 되고 만 것입니다. 개인이 아닌, 개인을 한 부속적 부분만으로 하는 거대 담론으로부터 출발한다면 이와 같은 비극적 결과가 거의 필연적이지 않나 싶습니다.
이광수에게 파시스트가 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어준 것은 '개인의 부재'와 함께 그가 끝내 해체시키지 못한 '국가의 신화'였을 것입니다. 그가 도쿄에서의 학창시절에 유학생 잡지나 최남선의 <소년>에 첫 논설들을 실었을 때(<조선사람인 청년에게>, 1910) 그에게 '국가'란 '단군이 창조하신 조선'이었고, 1930년대에는 그것이 '대일본제국'으로 바뀌었지만, 초기에나 말년에나 소수의 착취자들이 대다수를 분류, 통제, 착취, 우민화하는 폭력단체인 국가가 그에게는 당연히 존재해야 할 '문명의 단위', 즉 '국민'이 당연히 충성해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한때 그의 우상이었던 톨스토이야말로 저명한 국가 해체론자였지만, 이광수에게서 톨스토이 찬양은 발견돼도 국가해체론적 경향의 글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역시 엘리트에 의한 대다수 '국민'의 계몽, 교화, 개조 등을 늘 세상의 당연한 순서로 알고 살았던 것입니다.
국가의 물신화(物神化)가 반드시 파시즘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결과론은 펴고 싶지 않지만, '개인의 부속화'와 '국가의 신화'가 서로 합쳐지면 파시스트로 자란다는 말을 하기는 쉬운 것 같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는, '민족'과 '국가'에 계속 매달리는 상태에서 '종교'와 '연애'를 탐구했던 1910년대의 이광수에 파시즘의 씨앗이 이미 내재돼 있었다고 보면 지나친 비약일까요?
이광수가 한때 몰두했던 '황인종 단결론'이나 '황도(皇道) 불교'란 이미 역사의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광수를 붙잡아 포로로 만든 귀신들이 우리를 가만히 놔두었다고 볼 수 있을까요?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수많은 한국인들이 지금도 불살생(不殺生)을 제1계율로 삼는 불교를 믿는 것과, 군에 가서 살인훈련을 받거나 권투나 이종격투기와 같은 살인에 가까운 극단적 폭력의 장면을 눈으로 즐기는 생활 사이에서 별다른 괴리를 느끼지 않으면서 살지 않습니까?
사실, 학벌 카스트 체제와 아이들에게 '목숨을 거는 공부'를 요구하는 입시제도란 군이나 이종격투기와 진배없는 폭력이지만, 사찰에 가서 '입시기도'를 하는 것은 우리 불교의 수준이지 않습니까?
초기 불교의 사회경제관으로 봐서는 재물을 모으는 유일한 정당한 근거가 '남에게 나누기 위함'이고 주인이 재물이 모아지는 대로 고용인들과 이웃, 수행자 등에게 그대로 베풀어야 하는 것인데, 일본의 유명한 불교학자 나카무라 하지메가 아주 정확하게 "일종의 전통사회형 사회주의"라 불렀던 그 논리대로 살고 있는 자칭 '불자 기업인'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될까요?
아나키즘과 사회주의적인 지향, 즉 국가폭력과 재물 모으기에 대한 부정적 시각으로는 붓다보다 한수 위였던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과 불자들을 합친다면 대한민국의 인구 중 절반이 넘겠지만, 국가와 이윤추구를 중심으로 한 폭력이야말로 이 사회의 기본적 현실로 남아있는 이유는 그렇다면 무엇입니까?
이광수의 '황도(皇道) 불교'의 오류야 우리가 지금 환히 볼 수 있지만 왜곡될 대로 다 왜곡돼 건전한 부분 하나 남은 게 없는 우리들의 기독교나 불교 신앙양태에 대해 후손들이 뭐라 할 것 같습니까?
불교든 기독교든 사회주의적 실천이야말로 두 종교의 원래적 현실론인데, 지금 대한민국의 주류 종교들이란 자본주의적 기업, 그것도 투명성도 합리성도 없는 후진 기업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광수는 미사여구를 엄청나게 좋아하지 않았습니까? "고상한 인격", "자아의 극복", "아집을 버리고 자아의 진정한 실천을 이루자"…. 선호되는 단어들이 약간 바뀌었지만 지금도 웬만한 종교적 에세이집을 보거나 법문 내지 설교를 듣는다면 "나누기", "베풀기", "돌봐줌의 이상", "맑고 향기로운 삶" 등은 넘쳐나지요. 그런데 국가와 자본이 존재하는 이상, 맑고 향기롭고 섬기는 삶이란 과연 어느 정도까지 가능한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우리가 종교적 차원에서 국가와 자본을 퇴치, 해체시키는 방법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대개 빠져 있습니다.
진정 우리 종교계가 이광수의 수준을 넘었던가요? 과문의 탓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종교계의 '주류'는 그 충성의 대상이 일본제국에서 대한민국이라는 아류 제국주의적인 재벌국가로 교체됐을 뿐이지, 그냥 그 자리에서 그대로 머무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캄캄해지는 오슬로에서, 박노자 드림
***도움이 된 문헌**
Ann Sung-hi Lee, "The Early Writings of Yi Gwang-su", <Korea Journal>, Vol. 42, No. 2, 2002, pp. 241~279.
양문규, "이인직과 이광수 문학에 나타난 식민지 근대와 민족 문제", <민족문학사연구>, 제13호, 1998, 50~73쪽.
윤명구, "이광수 문학의 평가" <한국문학사의 쟁점>, 집문당, 1996, 635~645쪽
권보드래, <한국 근대소설의 기원>, 소명출판사, 2000.
이경훈, <이광수의 친일문학 연구>, 태학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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