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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3차 방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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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이즈미, 3차 방북할까?

미래전략연구원 '지구촌, 분석과 전망' <32> 총선 후 일본 (1)

9.11 총선은 일본 국내적으로 의회의 지배구조 및 정당 간 관계, 선거과정 및 선거행태 등에 중요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며, 일본정부의 대외정책에도 영향을 미쳐 일본의 동북아정책에도 일정한 변화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고이즈미 수상이 총선 승리 후 기자회견에서 자신의 임기 중에 북한과 국교정상화를 이룰 수 있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하겠다고 밝혀, 빠른 시일 안에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이 재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글은 9.11 총선 이후 일본의 대북정책 및 북일관계, 특히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이 어떠한 전개양상을 보일 것인가를 분석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1. 1990년대의 북일교섭**

2005년 9월, 북일 국교정상화에 모처럼 청신호가 켜졌다. 9.11 총선에서 압승을 거둔 고이즈미 수상이 "북한과의 국교정상화에는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많지만 임기 중 할 수 있는 노력은 다 하겠다"고 북한과의 관계정상화에 의욕을 보였으며, 19일에는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제4차 6자회담이 공동성명을 채택하고 폐막하였는데, 공동성명에서 '북일은 평양선언에 따라서 양국관계를 정상화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로 승낙했다'고 명문화됨에 따라 북일 수교교섭 재개의 계기가 마련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난 1990년대 및 그 이후의 북일 간의 교섭과정과 북핵문제, 그리고 납치문제에 대한 일본의 강경한 국내여론 등을 고려한다면, 북일관계 개선을 낙관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다. 납치문제와 평양선언 등의 2000년 이후의 변화는 2장에서 기술하기로 하고, 먼저 지난 1990년대에 행해진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의 경과와 쟁점을 살펴보기로 하자.

탈냉전 이후 북일 양국은 국교정상화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북한은 북일수교를 통해 북미관계 및 남북관계를 개선한 후 국제무대에 복귀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으며, 일본에게 경제지원 및 대미교섭을 위한 중재자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은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미해결의 전후처리를 북일수교를 통해 종결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양국의 필요에 의해 1990년 가네마루 신(金丸信) 자민당 부총재를 단장으로 하는 방북단이 김일성과 회담한 후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이 시작되었다.

1990년 11월에 북경에서 3차례의 예비회담이 있은 후, 양국은 1991년에서 1992년에 걸쳐 8차례 회담을 가졌다. 회담에서 일본정부는 북일 국교수립이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에 기여할 것이며, 한일 우호관계를 손상하지 않는 형태로 전개될 것이라고 입장을 밝혀 북일수교에 반대하고 있었던 한국정부를 설득하려 하였다. 한편 북한에 대해서는 일본의 식민통치에 대해서는 성실히 대응하나 전후보상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명확히 전달했다. 8차례의 회담에서 북일 양국은 자신의 의견만을 일방적으로 주장하여 합의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1993년 북핵문제를 둘러싼 북미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북한이 NPT(핵비확산 조약)를 탈퇴하고 노동미사일을 시험발사 함으로써 북일교섭은 결렬되었으나, 북미 간에 제네바 핵합의가 이루어지고 남북관계가 진전됨에 따라 북일 간에도 국교정상화 교섭을 재개하기 위한 접촉이 이루어졌다. 북일 간의 접촉의 결과로 북송되었던 일본인 처의 고국방문이 실현되었으며, 이에 대응하여 일본정부는 WFP(세계식량지원계획)을 통해 2,700만 달러의 대북식량 지원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화해 분위기 속에서 1999년 회담이 재개되었다. 북한은 1991년의 회담에 비해 보다 유연한 자세로 회담에 임해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이나 전후 배상은 요구하지 않겠으나, 넓은 의미에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1999년에 재개된 회담 역시 일본이 제기한 일본인 납치의혹 및 한국의 반대 등으로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1990년대 북일 간의 교섭과정에서 논의된 주요한 교섭의제는 전쟁 및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 및 사죄, 청구권문제, 조약의 관할권, 일본인 납치의혹 등이었으며, 주요 교섭의제에 대한 양측의 입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2. 고이즈미 수상의 방북과 평양선언**

새천년을 맞이한 후 일본의 적극적인 노력에 의해 북일 관계정상화가 다시 모색되었다. 당시 일본은 한일관계 및 북미관계의 진전에 의해 한반도에서의 영향력이 약화되는 것을 방지하고, 고이즈미 수상은 자신의 정치적 위상 제고를 위해 북일교섭을 추진하였다. 한편, 북한 역시 자금지원과 국제적 고립에서의 탈피를 위해 재협상에 임하게 된다.

2000년 4월에서 10월에 걸쳐 3차례의 회담이 이루어졌으며 북한은 상대적으로 유연한 자세로 협상에 임하였다. 그러나 회담과정에서 일본은 일본인 납치문제와 미사일문제를 수교의 전제조건으로 제시하였으며, 이에 대해 북한은 식민통치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한편 납치문제는 회담의제에서 제외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일본은 과거청산 및 납치의혹 등의 모든 문제를 포괄적으로 처리하자고 주장한 것에 반해, 북한은 '선 과거청산, 후 현안문제 해결'을 주장하여 양국은 합의점을 도출할 수 없었다. 이러한 와중에서 북한의 제2차 핵개발 의혹이 터져 나오면서 협상은 중단되었다.

재차 중단된 북일교섭의 물꼬를 다시 튼 것이 2002년 고이즈미 수상의 방북이었다. 북한이 납치자 문제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보이자 고이즈미 수상은 전격적으로 방북을 결정하였고, 북일 양국은 2002년 9월 17일 평양선언을 발표하였다. 평양선언에서 북일 양국은 1990년대 이래의 교섭현안의 많은 부분에 대해 합의하였다.

먼저 일본은 식민지 지배에 대해 사과하며, 경제협력방식으로 청구권 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합의는 1990년 이래 북일교섭의 최대쟁점이었던 전쟁배상 및 식민통치 문제, 전후 보상문제 및 청구권문제를 해결하는 기본원칙에 북일 양국이 동의하였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또한 핵문제의 포괄적 타결을 위해 국제합의를 준수하며, 핵문제, 미사일문제 등의 안전보장상의 제 문제에 대해서는 관계국간의 대화를 통해 문제를 해결한다고 명시하여, 북미 핵협상 및 6자회담을 통한 북한 핵문제 처리에 합의하였다. 한편, 일본의 북한에 대한 경제협력의 시기에 대해서는 북일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진 후로 평양선언에 명문화 되었으나, 경제협력의 규모에 대해서는 양국이 합의하지 않았다.

평양선언에 의해 2002년 12월 북일교섭이 재개되었으나, 평양선언은 실제 협상의 장에서는 이행되지 않았다. 일본에서는 납치자 문제의 해결이 국내여론의 강한 반발에 의해 북일 국교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급부상 하였으며, 이러한 국내여론을 배경으로 일본은 납치자 문제 및 핵, 미사일문제 등의 안전보장상의 문제의 우선적 해결을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북한은 납치자 문제에 대해서는 성의 있게 대응하겠으나 북일 경제협력이 수교의 핵심임을 강조하여 합의를 도출하지 못했다. 결국 고이즈미 수상의 방북으로 협상은 재개되었지만, 북한의 우라늄 핵개발 문제에 대한 미국의 압력과 일본 국내여론의 악화 등으로 협상은 다시 중단되었다. 2004년 5월 고이즈미 수상이 두 번째로 방북하였으나, 북핵문제의 미해결과 국내여론의 악화로 더 이상 협상은 진전되지 못했다.

고이즈미 수상의 두 차례의 방북과 평양선언이란 큰 틀의 합의에도 불구하고 북일협상이 난항하게 된 것은 북핵문제의 미해결에 의한 북미관계의 악화와 납치자 문제에 의한 일본여론의 악화가 주된 원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북미관계 정상화 이전의 북일 국교정상화는 미국은 물론 일본 역시 바라지 않고 있었으며, 납치자 문제로 인한 일본인의 대북감정은 절정에 달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정부가 북한과의 교섭에 적극적일 이유는 없으며, 북핵문제 및 납치자 문제의 해결추이를 보며 협상의 속도를 조절하였던 것이다. 즉 일본으로서는 동북아 주변정세 및 국내여론의 반응을 지켜보며 북일 국교정상화를 적절히 이용하고 있었던 것이며, 이러한 점은 역설적으로 북핵문제 및 납치자 문제의 해결 없는 북일 국교정상화는 요원하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3. 9.11 총선 이후의 북일관계 전망**

9.11 총선에서의 고이즈미 수상의 압승은 북일 국교정상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고이즈미 수상 자신이 임기 내 북일 관계정상화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겠다고 언명하기도 하였지만, 9.11 총선으로 자민당은 절대안정 의석을 확보하였으며 고이즈미 수상의 임기가 끝난 후인 2007년에 참의원 선거가 있기 때문에 최소한 향후 1년간 고이즈미 수상은 선거에 대한 부담 없이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을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로 출범한 고이즈미 3기 내각은 국내개혁을 마무리 지으면서 외교문제 특히 납치자 문제의 해결을 통한 북한과의 수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해 대북외교에서 주도권을 행사할 가능성이 커졌다.

또한 이러한 국면전환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이 9월 19일 발표된 제4차 6자회담의 공동성명이다. 공동성명에서 '북일은 평양선언에 따라서 불행한 과거와 현안사항의 해결을 기초로 하여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고 명문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북일 양국은 제4차 6자회담 기간 중에 5차례 이상 회담하여 정부간 협의를 다시 시작하기로 합의하였으며, 이러한 북일접촉에 미국이 반대하지 않았다는 점도 향후 북일교섭이 긍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또한 공동성명이 명시한'불행한 과거'는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을, '현안사항'은 납치자 문제를 시사한다는 점에서 북일 양국이 평양선언에 입각한 관계정상화의 의지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현재 북일 간에는 교섭재개를 위한 실무자 접촉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북일 양국은 빠른 시일 안에 회담이 개최되기를 기대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북일 국교정상화 교섭이 재개되어도 북일 양국이 쉽게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우선 제4차 6자회담에서 북핵문제의 해결을 향한 주요한 합의들이 이루어졌지만, 이러한 합의들이 구체적으로 실행될 수 있을 것인지, 혹은 합의의 실행과정에 북미간의 혹은 기타 참가국간의 이견이 발생하여 합의의 실행이 연기되는 등의 변수가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북핵문제가 원활히 해결되어야만 일본정부는 미국의 압력과 국내여론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롭게 북일교섭에서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이 국교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있는 납치자 문제의 해결전망도 그다지 밝지만은 않다. 일본은 북한에 대해 미해결 상태의 납치자에 대한 정확한 정보와 해명을 요구하고 있으며,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요코다 메구미 유골의 진위문제도 아직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고 있지 않다.

한편, 이에 대해 북한은 북일 수교교섭에는 언제든지 임하겠지만, 납치자 문제는 이미 해결되었으며 납치문제를 국교정상화 교섭에서 논의하지는 않겠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어, 일본의 국내여론을 잠재울 수 있을 정도의 합의가 북일 간에 가능한가 하는 점이 아직 미해결의 과제로 남아 있다.

또한 일본측에도 문제의 불씨가 남아 있다. 지난 1년 간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자제해 온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만약 고이즈미 수상이 다시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참배하게 되면 한일관계 및 중일관계는 물론, 북일관계도 악화될 것이며, 이는 양국의 협상에도 악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한국정부와 마찬가지로 북한도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과 조선중앙방송 등을 통해 고이즈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참배를 강력히 비난하고 있으며, 신사참배 문제는 새로운 현안문제로 대두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이 전혀 보이지 않는 것도 아니다. 북한은 납치자 문제에 대해 납치자 가족을 일본에 영구 귀국시키는 등 이미 상당한 정도의 양보를 하였으며, 일본이 만족할 정도의 새로운 정보의 제공이나 양보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북한은 일본과의 수교를 통한 경제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며, 또한 북일 관계정상화를 통해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도 탄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납치자 문제해결에 새로운 돌파구가 마련될 가능성은 여전히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고미즈미 수상의 야스쿠니 신사참배 문제 역시, 고이즈미 수상의 개인 성향이나 현재까지의 행적으로 판단하건대 수상이 야스쿠니에 참배할 개연성은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변국들과의 마찰을 최소화하기 위해 공식참배가 아닌 사적 참배 등 새로운 형태의 접근 역시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북일 양국은 국교정상화를 위한 최종단계에 접어들어 있으며, 동북아 국제환경이나 양국의 국내환경 역시 북일 국교정상화에 불리한 상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9.11 총선과 9.19 공동성명을 계기로 고이즈미 수상의 3차 방북이 이루어진다면 북일 양국은 의외로 빠른 시일 안에 국교정상화에 도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경제협력 자금의 규모나 한일합방의 합법성 문제, 북일 국교정상화 조약의 관할권문제 등 아직 미해결의 쟁점들이 남아 있지만, 중요한 큰 틀의 합의는 이미 2002년의 평양선언에서 이루어진 상태이기 때문이다.

북핵문제가 다시 동북아지역 및 북미간의 갈등을 야기하지 않는다면, 나머지는 북일 양국이 교섭타결을 위해 어느 정도의 성의를 가지고 회담에 임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북핵문제를 위한 6자회담에서 한국정부의 중재자 역할이 긍정적 평가를 받았듯이, 북일 국교정상화를 위한 북일 양국의 교섭과정에서도 우리 정부의 긍정적 역할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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