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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의 경제학

[김운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6>

제 5 장 골프의 경제학

□ 골프를 쳐야 사람대접을 받지


요즘 한국에서는 골프(Golf)를 치는 것이 유행입니다. 그래서 골프를 치지 못하거나 관심도 없는 저 같은 사람들은 사람 축에 제대로 끼지도 못합니다. 한국에서 골프는 유명인이나 상류 계층의 사람이 되는 하나의 신고식과도 같습니다. 그래도 퇴폐적인 룸살롱에서 정치나 협상을 하는 것보다는 골프가 건전한 편이라고 생각은 합니다.

골프는 공기 좋고 물 맑은 대자연 속에서 잔디밭을 거닐면서 운동도 하고 담소도 하기 좋은 고급 스포츠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골프가 과연 좋은 운동인가가 의심스럽습니다. 적어도 한국에서는 말입니다. 골프장을 흔히 CC(컨트리 클럽)라고 하는데 넓은 평원이 없는 한국에서는 골프장을 만드는 일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국토의 70%가 산이요 나머지는 겨우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운 농토 정도가 있는데 그나마 골프장을 만든다고 난리를 치니 더욱 문제지요.

미국, 호주, 뉴질랜드와 같이 사람도 별로 살지 않고 땅은 넓고 끝없이 펼쳐진 벌판이 있는 나라는 골프를 국민 산업으로도 키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 큰 땅을 놀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한국과 같이 인구밀도도 높고 벌판이라고는 눈을 씻고 봐도 찾기 어려운 곳에서 골프장을 만든다니 참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골프장을 만들려고 하면 일단 야산에서 나무를 베어야하지요. 그러니 홍수나 산사태의 위험이 상존합니다. 그리고 잔디구장을 조성해야하니 지하수를 무제한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 여기에 잔디를 가꾸기 위해서는 농약을 마구 뿌려대니 수질이 오염됩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에서 골프를 즐긴다는 것은 아무래도 바람직하지는 못한 듯합니다. 물론 "그것은 취미의 문제잖아?"라고 하신다면 할 말이 없겠습니다. "나는 돈도 많아서 다른 사람들이 노는 것처럼 놀 수가 없잖아? 당신은 무명의 인사이니 아무 곳에 가도 되지만 나는 어디를 가겠어?"

물론 옳은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몸에 좋은 운동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은 나라의 사정을 같이 고려해야 될 문제입니다. 골프를 치면서 심장사(心腸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하니 골프는 대자연을 즐기면서 하는 운동만은 아닌 듯도 합니다.

이런 저런 사정을 봐도 골프는 우리에겐 적당한 운동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조금이라도 지위를 가진 사람들이 골프를 친다고 이 난리를 치는 지 의아합니다. 국가의 지도급 인사가 국가적 재해가 발생했는데도 골프장에 있어서 말썽이 된 적도 있지요. 이 물음에 대해서 가장 확실한 대답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베블렌(Thorstein Veblen, 1857∼1929)입니다.
▲ 베블렌(Thorstein Bunde Veblen)

(1) 된장녀와 명품족 : 천민 자본주의의 대표 주자, 한국

요즘 한국이나 일본의 젊은이들이 명품을 사기에 열을 올려 수많은 신용불량자를 양산하고 있습니다. 분수에 맞지 않게 수 백 만원 짜리 옷이나 핸드백, 보석을 사서 가계에 주름을 지우지를 않나 그 빚을 갚으려고 매춘(賣春)에 나서는 등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의 명품 국내 시장은 2010년을 기준으로 무려 5조 원 대라고 합니다.(1) 도대체 한국의 자동차와 TV 등 전자 제품을 얼마나 팔아야 이를 충당해낼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런 류의 제품들은 우리 생활에 반드시 있어야할 상품도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 한국 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런 과시 소비입니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많은 부채를 지고 있는데 주로 학자금(학비)와 이런 류의 과시소비가 그 원인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 안타깝습니다.

아마도 한국 사회는 집단주의(Collectivism)가 워낙 강하고 베네딕트(Ruth Fulton Benedict, 1887∼1948)가 제기한 수치(shame)의 문화가 전통적으로 내려왔고 타인의 눈과 전체 조직의 눈이 모든 가치판단의 기준이 되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일 것입니다.(2) 그래서 집은 월세를 살아도 남의 눈을 의식하여 고급 차를 타고 다니고, 임시직으로 살면서도 명품 가방을 들고 다닙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청소 일을 하면서도 명품(名品) 패션으로 갈아입고 퇴근합니다. 그렇게 해야 사람대접을 받는다고 믿는 것이 한국 사회입니다. 골프장에 가도, 호텔에 가도 타고 온 차가 시원찮으면, 고객대접 받기도 어려운 사회가 한국입니다.

▲ 베네딕트와 그녀에 대한 기념 우표

특히 명품은 워낙 고가(高價)이기 때문에 일반인들이 탐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품으로 치장할 수밖에 없는 어떤 환경을 전통적 집단주의(集團主義)와 결합한 한국 자본주의가 키우고 있는 것이죠.

원래 부자들의 과시적 소비 즉 자신의 부(富)를 과시하기 위해서 고가품이나 명품 소비에 몰두하는 것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은 베블렌입니다. 사실 얼마나 자랑할 것이 없으면 돈 자랑을 하겠습니까? 이것은 베블렌이 자본주의 상류층 사회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의미에서 제기한 것인데 한국의 경우는 확실히 이상합니다. 왜냐하면 이 같은 과시적 소비가 만연해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과시적 소비는 처음에는 일부 부자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어 이것이 다른 사람들도 흉내 내면서 점차 확산되는데 이를 모방효과(Bandwagon Effect)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 속도가 너무 빠르다는 것이 문제지요. 이렇게 모방속도가 빠른 사회에서는 부자들은 또 다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아예 다른 사람들이 흉내를 못 내도록 옷도 한 벌만 제작하거나 아예 일반인들이 구매하기 힘든 상품들로 다시 뽐내기 시작합니다. 이를 스놉효과(Snob Effect)라고 합니다.(3) 한국은 이 세 가지 효과가 만연한 사회입니다.

이 같은 현상들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베블런효과(veblen effect)입니다.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이른 바 명품족이나 된장녀를 설명할 수 있죠.(4) 일반적으로 상품의 가격이 오르면, 수요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가격이 올라도 수요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아가 경기는 불황으로 치닫고 있는데 고가품이나 명품의 소비는 줄어들지 않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바로 이런 현상을 말하죠. 사태가 이 지경이 되니, 많은 대기업들이 명품 시장을 유치하거나 아니면 그 유통에 직접 개입하여 최대한 이익을 얻으려 합니다. 악순환이 지속됩니다.

뿐만 아닙니다. 건실하게 공부하고 노력하여 자신의 자질이나 능력을 통해 사회적 성공으로 가려하지 않고 오로지 얼굴과 피부를 가꾸어 육신을 불살라(?) 돈 많은 사람과 결혼하려고 드는 수많은 청춘 남녀가 있습니다. 한국에 연예인이 되고 싶다는 아이들이 절반을 넘는다고 합니다. 무서운 일입니다. 요즘 유명 코미디언의 말로 "그러면 도대체 소는 누가 키웁니까?"(5)

사회 전반에 만연한 된장녀와 명품족은 장기적으로 한국 자본주의의 위기를 부채질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경제의 주체들이 부채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올바른 창의력과 산업경쟁력, 생산력이 나올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 젊은이들이 하는 행동들은 사회의 가치관이 만든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집단주의적인 전통과 결합된 한국의 자본주의는 그래서 근원적으로 천민성(賤民性, vulgarity)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싸구려 신발을 신은 아이들이나 임대 아파트 사는 아이들, 저층 아파트 아이들과는 놀지 말라는 이야기가 무슨 생활의 지혜나 원칙처럼 준수됩니다.

물론 이 같은 현상이 한국만의 모습은 아닙니다. 대부분 자본주의 국가들에는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거의 유사한 형태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인간 내부에 어떤 불합리하고 부조리(不條理)한 요소가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자연계의 수많은 동물 들 가운데 신(神)을 가진 유일한 존재는 인간일 것입니다. 그것은 어떤 카리스마가 없으면 인간 사회를 통치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음을 보여줍니다.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인간을 가장 괴롭힌 것은 바로 인간이었습니다. 베링 해(Bering Sea) 가까운 곳 극한의 오지(奧地)에도 사람이 삽니다. 그들이 그 지역으로 이동해 간 것은 아마도 다른 인간이 자신들을 노예화(enslavement)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서로 협력을 하지 않으면 살 수가 없는 존재이면서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끊임없이 계급화(classification) 시킴으로써 사회를 유지하려는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들로부터 구별 지우려 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 더 좋은 의식주 생활이 가장 일반적이겠지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즐기는 오락도 타인과 구별지우는 것일 수 있습니다.

베블렌(Thorstein Veblen,1857~1929)은 자신의 역저 『유한계급론(Leisure Class)』에서 이 문제를 파헤치고 있습니다. 베블렌에 의하면, 인간의 역사는 사회제도 진화의 역사라고 합니다. 베블렌은 인간을 제작정신(생산)의 본능이 주가 되는 그룹과 약탈본능(착취)이 주가 되는 그룹으로 나눕니다. 무계급 사회는 제작정신의 본능이 사회를 지배하며 계급사회는 약탈본능이 제작본능을 지배하는 사회라고 합니다. 베블렌은 인간의 역사와 사회를 보는 관점을 약탈정신과 제작정신의 대립(사회심리학적 관점), 영업과 산업의 대립(경제적 관점), 유한계급과 일반시민(사회학적 관점) 등의 대립적 이분법으로 보았습니다.

베블렌에 있어서는 결혼조차도 약탈본능이 지배하는 계급사회의 산물이라는 것입니다. 계급사회의 본질인 약탈본능(instinct of predatory exploit)의 지배체제는 제작본능(instinct of workmanship)이 재출현하여 약탈정신을 지배할 때만이 해결된다는 것입니다.

(2) 약탈 본능의 시대 : 영업은 이윤을 위해 산업을 사보타지 한다

베블렌은 유한계급(Leisure class)의 출현은 소유(private ownership)의 시작과 일치한다고 보았습니다. 유한계급이란 주로 영업자 그룹으로 이른 바 일하지 않고 놀고먹는 그룹들을 말합니다. 일하는 신데렐라(Cinderella)는 천시 받는 사회입니다. 부잣집 여자들이 일반 부인들이 하는 가사일이나 산업적 노동을 하는 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남들이 하는 일을 다 하면 안 될 일이죠. 이들은 일반 시민들과 구별하기 위해 각종 소비를 합니다. 하루 밤을 자도 수십 만원하는 호텔에 들며 남들이 감히 넘볼 수 없는 명품으로 몸을 치장하거나 일반인들이 즐기기 어려운 레포츠(leports, leisure sports)를 함으로써 끊임없이 자기들은 다르다고 강변합니다. 그래서 옷이 좀 시원찮다거나 값비싼 가구를 사들이지 못하거나 돈이 많이 드는 레포츠를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을 경멸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여성들은 열심히 일하기보다는 몸매를 잘 가꾸고 꾸며서 부자와 결혼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사회일수록 <백만장자와 결혼하기>, <억만장자와 친구 되기> 등의 프로그램이 빅히트를 치게 됩니다. 공부를 잘하거나 일(work)을 잘 하는 것보다는 쌍꺼풀 수술이나 때로는 생명을 담보해야하는 위험한 양악수술(兩顎手術, maxillofacial surgery) 등과 같은 성형수술을 해서 외모를 뜯어고치는 일이 더욱 중요하게 됩니다. 얼굴을 고치고 난 후에도 몸이 돋보이도록 가급적 명품으로 몸을 감싸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철없는 아이들도 명품 타령을 합니다. 분수에 맞지 않게 돈을 탕진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합니다. 여기서 소비지상주의(consumerism)가 형성되어 모방적 소비를 끝없이 부추깁니다. 이것은 결국은 자원의 탕진을 초래합니다. 예를 들어 겨울에 밍크코트를 입지 않은 여자를 경멸하는 풍토가 조성되니 어찌 되었습니까? 밍크가 거의 멸종하다시피하지 않습니까?

영업자들은 약탈본능 - 영업자 - 영업정치 - 유한계급(leisure class) 등에 이르는 일련의 고리 속에서 존재하면서 제작본능 - 산업자 - 일반 시민(common people) 들을 억압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도 이들은 애국심(patriotism)을 부추깁니다. 이들의 원래 목적은 초과이윤을 얻으려고 해외를 침략하는데도 엉뚱하게도 애국심을 부추겨서 위대한 국기(國旗) 아래 목숨을 걸고 죽지 않으면 책임기피자에 비겁자라고 매도합니다.

▲ 1차 대전 당시 신병모집 전쟁 포스트. 왼쪽은 영국 "누가 오지 않았지? 그게 바로 자네인가?". 오른쪽은 미국 "미국은 그대를 원하고 있어"

▲ 약탈본능의 종합선물세트, 전쟁. (1917년 오스트리아 군대가 포로로 잡힌 세르비아인들을 처형하고 있다. 세르비아는 전쟁 전의 인구의 25%에 해당하는 8만5000 명이 살해당했다.

경제문제에 있어서 베블렌은 경제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일반적인 노동자들과 분리하여 영업자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노동자들의 생활습관은 창조적이고 건설적인데 반하여 영업자들은 자기 이윤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로 그들의 생활습관은 파괴적입니다. 이들은 정부와 재판소를 자기편으로 가질 뿐만 아니라 치명적인 폭력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베블렌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근대 자본주의의 정치를 영업정치(Business politics)라고 합니다. 영업이라는 것은 약탈정신의 경제적 표현이죠. 정부는 이들 영업자들의 대표평의회(Soviet of Business Mens Delegates)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산업을 발전시키기 보다는 이윤이 되면 어떤 짓이라도 서슴지 않기 때문에 산업발전을 오히려 저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합니다. 이것을 베블렌은 "영업은 이윤을 위해 산업을 사보타지 한다."는 재미있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베블렌의 견해는 다른 학자들의 견해와 비교해 볼 때 매우 예리하고 타당합니다만 영업과 산업이 생각보다 쉽게 분리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의 시각에서 보면 자본가들에 대해 지나친 견해이기도 합니다. 현대 경제에서 돈놀이가 아닌 실물 생산에 주력하는 자본가들은 사실상 사회의 가장 중요한 제작정신의 소유자로 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베블렌의 견해는 다소 일방적이고 근대 자본주의에 대한 지나친 편견을 가진 것은 분명하지만 일부 내용들은 크게 틀린 말이 아니죠. 베블렌이 비판했던 영업자(Business Men)들이란 자본주의에 광범위하게 존재하는 악질적인 돈놀이꾼들이 바로 그 실체입니다. 이들은 국제금융(international finance)이니 글로블 금융(Global banking)하는 거창한 말을 사용하지만 그들이 마음대로 세계 금융시장을 움직이면서 경제적 약자들에게는 치명적인 결과들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들에게는 산업의 발전은 애초에 안중에도 없는 일입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버는 일밖에는 없지요. 그러다보니 세계 전체가 투기장(arena)으로 되어 버린 것이지요. 물론 이 상황을 바로 잡을 수 있는 방법은 현재로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여기저기 아무렇게나 싸질러 놓은 분뇨(糞尿)들을 치워야 할 상황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다 치우자면 아마 세계경제가 파탄나고 말 지경입니다.(이 부분은 다음 장에서 좀 더 상세히 분석해드립니다)

국제금융이니 세계 금융이니 헷지펀드(hedge fund), 선물거래 등등 온갖 미사여구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국제 금융시장이라는 것은 결국은 악질적인 약탈주의적 중상주의적(重商主義的) 중금주의(重金主義)에 불과합니다. 이런 성격을 가진 대표주자가 과거 스페인(Spain)이었습니다.

스페인이 세계를 제패하던 시기에, 스페인 정부는 각종 건달들 이른바 콘퀘스터도르(Conquistador)들을 총동원하여 라틴 아메리카 등 전세계를 돌아다니면서 금은(金銀)을 약탈합니다. 이 시기에는 이른바 엘도라도(El Dorado :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강변에 있다고 상상되었던 황금의 나라)의 전설도 팽배했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 라틴 아메리카에 번성했던 문명들이 대부분 파괴되고 금은보화들이 스페인으로 갑니다. 금과 은은 다른 재화와는 달리 바로 화폐의 구실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금은 보화는 실물 생산이 없을 때 이내 물가로 나타나게 됩니다. 즉 금은의 유입은 이내 인플레이션(inflation)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물가고로 인하여 경제가 파탄이 됩니다. 이것이 유럽 경제를 마비시킨 가격혁명(價格革命, price revolution)입니다. 이것은 결국 고정 수입을 가졌던 봉건지주를 몰락시키고 상공업자들이 세계를 장악하는 새로운 계기로 작용을 합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가 헤게모니를 상실하게 됩니다.

금융과 관련해서 유의할 점은 화폐의 유입은 반드시 실물 생산(실제 상품생산)이 그 만큼 성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물 생산은 동일한데 만약 화폐만 많아지거나 아니면 화폐로 인한 수익이 증대했다면 그것은 경제의 어떤 부분이 반드시 사단이 나게 되어있습니다. 폐쇄 경제(closed economy)일 경우에는 화폐로 인하여 인플레이션이 심해질 것이고 만약 오늘날과 같이 개방 경제(open economy)일 경우에는 무역적자가 증가하고 돈 가치가 떨어져서 구매력은 지속적으로 감소합니다. 결국 그 화폐 이익이라는 것은 오래가지 않아서 상쇄될 것입니다.

이 점을 아주 간단한 경제 수식을 통해 알아봅시다. 국민소득(Y)은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데 가장 간단히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화폐와 실물과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이 만큼 쉽고 간단한 수식도 없습니다)

Y = PQ (P는 가격, Q는 생산된 재화나 서비스의 총량) ………………… ①

즉 국민소득은 그 나라의 총생산물(Q)을 시장가격(P)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재화나 서비스의 생상량에는 변화가 없는데 시장가격(P)만 증가한다고 해 봅시다. 그러면 결국 국민소득(Y)은 감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장가격(P)이 늘어나면 명목 소득(名目所得, nominal income : 화폐 액수로만 측정한 국민소득)은 늘어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 소비할 수 있는 실물은 변화가 없으니 결국은 소득이 감소한 것이지요(실물의 가격만 올린 셈이지요). 실질 소득(實質所得, real income)은 결국 감소하게 됩니다. 너무 어려우시면 이해를 못하셔도 상관없습니다. 어쨌든 실물 생산이 변화가 없을 때, 화폐량이 증가하면 그만큼 실질 국민소득은 감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기업들이 돈 놀이에 맛을 들이면, 다시 실물생산과 같은 힘드는 일에는 관심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에 하나 돈놀이가 잘못되었을 경우에는 기업이나 경제가 소생하기가 매우 힘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이 현재의 자본주의의 위기를 촉발한 것이기도 합니다.

최근의 국제 금융문제와 관련하여 본다면 이른바 주주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 : 주주의 이익만을 극대화하기 위해 기업을 경영함)가 팽배하여 기업들은 실물의 제조와 생산보다는 금융 투자 수익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재화나 서비스를 생산하고 유통하는 실물 경제의 영역을 구경제(舊經濟, old economy)라고 하여 몰아내고 금융시장의 불확실성을 이용해 돈놀이에만 몰두하고 이를 아예 신경제(新經濟, New economy)라고 부릅니다. 대표적인 예가 에너지 개발 업체인 엔론(Enron)과 세계 최대 자동차 메이커인 제네럴모터스(GM)이었습니다. 결국 이들은 모두 파산했습니다. 특히 제네럴모터스(GM)는 자동차 생산을 등한시하고 돈놀이(할부 금융)에만 몰두하더니 한때 수익의 절반 이상을 금융업에서 얻어서 아예 금융회사로 변신하기도 했지만 단기 수익 올리기에만 집중하여 각종 금융 파생상품에 손대다가 결국 파산하고 말았습니다(2009) 엔론(Enron)의 경우 유명 경제 잡지인 『포춘(Fortune)』으로부터 수년간 "미국에서 가장 혁신적인 기업"이라고 극찬을 받았고, 2000년에는 일하기 좋은 100대 회사에 꼽히기도 했던 기업입니다. 엔론(Enron)은 각종 특허·영업권과 에너지 자원을 기초자산으로 복잡한 파생상품을 만들어 영업을 하다가 막대한 손실을 입었지만 이것을 교묘하게 회계처리로 감추다가 결국 파산(2001)했습니다.

국제금융의 대명사인 헷지펀드나 각종 금융 파생상품(돈놀이 상품)이 오늘날처럼 번성한다는 것은 전체 세계 경제로 봐서는 매우 심각한 파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만큼 실물생산이 펑크가 나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모래위에 성쌓기가 될 수밖에 없고 그 규모가 전세계적으로 확대되면 결국 전세계 경제가 파탄이 나는 것이죠.

세계경제가 살아나려면 베블렌의 말대로 영업이 이윤을 위해 산업을 사보타지 할 수 없는 환경과 패러다임을 강력히 구축해야 합니다.

베블렌의 견해는 자본주의가 가진 위험한 속성을 가장 알기 쉬운 말로 표현한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른 이론가들의 저작과는 분명 다르게 느껴집니다. 유한계급론이나 산업의 발전을 사보타지(sabotage)하는 영업의 존재라는 것보다 더 적확하게 자본주의를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요?

분명한 것은 세상에 놀고먹는 사람보다는 일하는 사람이 주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놀고먹는 산업이 만연하면 결국은 그 사회를 지탱하고 있는 하드웨어(hardware) 즉 하부구조가 붕괴되고 맙니다. 실제로 경제 위기가 오면 레포츠나 실생활에 당장 필요가 없는 많은 산업들이 붕괴됩니다. 따라서 패러다임도 이 유한계급을 옹호하는 형태로 구성이 되면 장기적으로 그 사회는 매우 위험한 사회가 됩니다. 바로 한국이 그렇습니다. 한국 사회는 일 잘하는 사람보다는 "화합을 잘 하는 사람", 부지런한 여성보다는 화장 잘하고 성형에 목숨을 건 여성을 회사나 조직이 선호합니다.

나아가 영업적인 생각이 사회적으로 팽배하게 되면 시장 구조(market structure)도 왜곡됩니다.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들도 이 같은 상태입니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임금이 떨어지는 것이 당연합니다. 임금이 떨어지면 이전의 화이트 칼라(White Collar)들도 블루 칼라(Blue Collar)의 일이나 3D 업종의 일을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그 분야의 생산성도 향상되고, 다시 임금이 올라가서 시장이 제 자리를 찾게 됩니다. 그러면 블루칼라의 일을 하던 사람들도 다시 화이트 칼라의 일로 회귀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차라리 "돈을 빌려 주식 투기나 한건 해야지.", "그렇게 일해서, 언제 차도 사고 집도 사겠어."라고 하면서 조금이라도 어려운 일을 기피하고 "놀더라도 생산 공장에는 안 간다."라든가, "취업 자리가 없어도 지방에는 안 간다."든가, "노숙(homeless)을 해도 서울(Seoul)에 있어야지"라는 식이 되면 시장이 경직화(rigidity)됩니다. 지방에는 일자리가 없지도 않는데 "지방에 가느니, 차라리 서울에서 아르바이트(part time job)나 해야지."라는 식의 88세대가 등장합니다.(6)

실업은 만연한데 지방의 기업들은 구인란(求人難)에 허덕입니다. 그러면 그 자리를 결국은 불법 체류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메우게 됩니다. 꼭 한국의 상황만 그런 것처럼 느껴지시죠? 아닙니다. 대부분의 선진국들도 거의 같은 상황입니다. 그러면 시장이 파편화되고 서로 단절됩니다. 한 국가 안에 시장이 서로 떨어져 이중 삼중 구조를 가지면서 시장의 유기성(organic relationship)이 떨어집니다. 그러면 경제정책(economic policy)도 제대로 작동을 못합니다.(사실 자본주의 경제학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은 이제 노동시장에서는 찾아보기 어렵죠) 관련 부분의 제조업의 파탄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정부도 이를 묵인합니다. 그러다 보니 한국처럼 외국인 노동자 1백만 시대가 되는 것이죠. 경제가 이렇게 꼬이면서 독일(Germany) 등 유럽의 여러 국가들처럼 외국인에 대한 혐오시대가 열립니다. 이른바 신나치주의(neo-Nazism)가 만연합니다. 애초에 그 3D 업종을 포기한 사람들도 그 국민들인데 이제는 공연히 외국인들 때문에 직장이 없다고 난리입니다.

그러므로 미래의 패러다임은, 베블렌의 표현을 빌어서 말해 보면, 제작 정신이 주체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형태로 구성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일하는 사람이 많아야 그 사회가 건실해지고 일하는 사람이 우대받는 사회경제적 환경이 사회전체적인 이데올로기로 형성이 될 때 그 사회는 번영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정학유착(政學癒着)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학문이 진정으로 인간에 봉사한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의심이 듭니다. 인간의 기나긴 역사 가운데 불과 1백 년 전까지만 해도 일부 지역을 제외한다면 대부분은 인간이 인간을 노예(slave)로 부리는 사회였다는 것이 답답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괴롭히는 것이 어쩌면 인간이 가진 근본적인 한계는 아닐까요?

요즘은 그런 게 어디 있어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보기엔 다른 형태로 많은 변용이 일어나 있을 뿐이지 인간이 인간을 괴롭히는 많은 요소들이 그대로 상존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지식인의 옹호와 찬사 속에서 나타난 사회주의는 이 점을 많이 완화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지도층은 건강성을 상실하고 과거의 봉건왕조나 다름없이 사회를 통치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회주의에 대한 희망을 없애버리고 말았습니다.

한편으로 자본주의는 전체 세계인들이 굶지 않고 각자가 골고루 산업을 발전시켜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것 따위는 애초에 안중에도 없습니다. 영업자들은 황제의 권력과 부를 가지는데만 관심을 가집니다. 또 그것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경유착(政經癒着)은 기본이고 정학유착(政學癒着)을 도모하여 사회전체의 자기정화(自己淨化) 기능을 상실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부도덕한 사회적 구조를 가진 곳에서는 학문과 언론이 자기 정화에 몰두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학문이라는 것은 많은 요소들이 결국은 사회의 특정 세력에 봉사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마치 공자(孔子)의 유학이 수천년간 봉건권력에 봉사했듯이 말입니다. 그러면서도 공맹지도(孔孟之道)를 모르면 사람 대접을 못 받는 사회적 환경을 수천 년간 견고히 만들어 두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의 중세 사회도 오직 교회와 이에 영합하는 정치권력에 봉사하지 않는 어떤 학문도 이단으로 몰아서 씨를 말리는 일을 천년 이상 했습니다. 오늘날 경제학도 어이없는 일이 많습니다. 경세제민(經世濟民)이 아니라 국민경제 전체를 왜곡하기도 하는 각종 투기업의 모사꾼 양성학, 기업을 위한 탈세전문가, 악질적인 돈놀이 전문가들을 양성하고 있기도 합니다. 세계적 금융 위기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명문대학들의 천재들이 월스트리트(Wall Street)로 몰려갔습니다.

학문은 기본적으로 물리력을 가지지 못하므로 설령 진리를 발견했다고 한들 그것이 당시의 사회적 환경 속에서 살아남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조금은 다를 수도 있습니다. 사회의 문제를 직시하고 종합적인 해결책을 모색해야합니다. 좀 어려운 말로 진실과 진리에 즉자적(卽自的, An sich sein)일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자본주의를 구성하는 패러다임이 잘못되었으면 이제는 좀 더 적극적으로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고쳐나가야 하는지 또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드는 노력을 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진보적이라고 자처하던 지식인들은 마르크스주의 몰락 이후 거의 망연자실(茫然自失)한 상태로 십 수 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승리한 자본주의는 그 승리를 경축하기에 너무 문제가 많습니다. 단적으로 본다면 가장 큰 문제는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입니다. 이 지역은 여러 가지 복잡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빈곤의 해결 기미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슬람 지역은 나름대로 견고한 블록이 형성되어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미국과 서유럽 등의 영업자들로부터 일정한 정도는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라틴아메리카는 해가 갈수록 모순이 심화되고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런 곳은 마약과 납치가 산업화된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가령 멕시코에서는 2006년에 실시된 마약전쟁 이후 5만 5000명 이상이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미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저개발의 개발(Development of Underdevelopment)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지요.(7) 이 말은 사회의 저개발을 자꾸 개발한다는 의미입니다. 즉 가난을 점점 더 확산시킨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중남미를 중심으로 나타난 종속이론(Dependency theory)의 기본 내용입니다.

자본주의는 부도덕하지만 그것이 워낙 강하게 움직이고 있으므로 현재로서는 막아낼 방도가 없는 형편입니다. 대부분의 학자라는 사람들도 이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일단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고 "어떻게 하면 우리는 살아남을까?" 라는 문제에 골몰하고 있는 형편이지요. 현재 한국의 처지만을 생각한다면 나쁜 것이라고만 할 수 없지요.

그러는 가운데 패러다임은 바뀌고 있습니다. 현재 전세계적으로 나타나는 광범위한 패러다임의 변화는 향후 더욱 심각한 불평등을 예고하기도 합니다. IT 산업이라는 것은 이 같은 불평등을 심화시키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보부문과 관련해서 이런 현상을 디지털 디바이드(Digital Divide : 정보의 불균등한 배분현상)이라고 합니다.

제가 지금부터 드릴 말씀은 자본주의 패러다임에 대한 전반적인 분석을 위한 기본 지식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선 또 다른 형태의 패러다임을 구축할 수 있도록 지적인 기반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필자주석

1. 2010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5대 백화점 명품 매출은 1조1507억 원으로 전년대비 17%나 늘어나 연간으로는 2조3000억 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2005년 8670억 원에 불과했던 5대 백화점의 명품 매출이 5년 만에 세 배 가까이 성장하는 셈이다. 이것은 수입 자동차와 화장품 향수 수입가구는 제외한 수치다. 면세점에서 판매되는 명품 매출도 1조 8800억 원으로 전년 대비 12.8% 늘어났다. 즉 백화점과 면세점에서만 연간 4조원이 넘는 명품이 팔려나가는 셈이다. 여기에 인터넷 쇼핑몰 등 여타의 명품 매장의 매출을 합치면 한국의 국내 명품시장 규모는 5조 원이 넘을 것으로 업계에서는 추산하고 있다. (『한국경제』2010.7.5)

2. 베네딕트는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 1946)』에서 일본 문화는 타인의 의식하는 수치의 문화라고 한 바 있다. 즉 타인의 눈을 의식하여 자기 행동을 규제하는 문화로 개인의 의지와 신과 개인 간의 관계를 의식하는 서유럽 문화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이 문화적의 전통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큰 차이가 없다.

3. 스놉효과란 1950년 미국의 하비 라이벤스타인(Harvey Leibenstein)이 발표한 이론으로 특정한 제품에 대한 소비가 사회적으로 증가하게 되면 그 제품의 수요가 줄어들기 시작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 현상을 스놉효과라 한다. 일부 소비자들을 중심으로 다른 사람과는 차별화된 고가의 명품이나 일반인들이 구매하기 힘든 상품들에 대한 소비가 늘어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4. 네이버의 지식백과(www.naver.com)에 따르면, 된장녀란 2006년 야후 코리아가 조사한 인터넷 신조어와 유행어 1위에 오른 단어라고 한다. 된장녀는 해외 명품 소비를 선호하지만 정작 자신은 경제적 활동을 하지 않기에 부모나 상대 남성의 경제적 능력에 소비 활동의 대부분을 의존하는 젊은 여성을 비하하여 일컫는 말이다. 된장녀란 말의 유래는 젠장이 된장으로 전이되었다는 주장, 실제 좋은지 나쁜지도 모르면서 무조건 해외 명품을 선호하는 여성들을 똥과 된장을 구분하지 못한다고 비꼬기 위해 된장녀라 부르게 되었다는 주장, 아무리 명품으로 치장을 해봤자 정작 자신들은 순수 국산으로 된장 냄새에 익숙한 존재라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는 주장 등이 있으나 모두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5. 한국의 유명한 코미디 프로그램에서 나온 말로 실질적인 생산 업무는 누가 담당하는가라는 말을 코믹하게 표현한 말.

6. 88세대는 최근에 등장한 신조어로서 월평균 88만원을 받는 20대 비정규직(아르바이트, part-time job)을 말한다. 최저 임금인 한시간당 약 3570원씩 하루 8시간 동안 한 달간 일한다고 가정할 때 약 88만원을 모을 수 있기 때문에 이를 88세대라고 한다. 의료보험, 연금, 퇴직금이 안 되는 일거리이며 그나마 언제든지 해고당할 수 있는 열악한 환경이다.

7. 프랑크(A.G. Frank)는 현체제의 자본주의는 제3세계 국가들에 있어서 저개발을 개발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고 주장하였다. 즉 제3세계 국가들에 만연한 빈곤과 가난을 자본주의가 더욱 확대시킨다는 의미이다. 나아가 서구의 발전은 제3세계에 대한 착취를 통하여 가능했으며, 제3세계는 서구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므로 저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자본주의의 발전과정에서 생겨난 것으로 지속적으로 만들어 지고 있는 현상이자 발전과 저개발은 모두 자본주의 자체의 내적 모순의 결과라는 것이다. A.G. Frank, Crisis in the Third World(New York : Holms and Meire, 1981), A.G. Frank, Latin America : Underdevelopment or Revolution(New York : Monthly Review, 1969), 저개발의 개발이라는 이 표현은 지금까지 보통 후진성을 주요내용으로 하던 저개발의 개념을 달리 파악하여 세계자본주의 발전을 구성하는 하나의 부분이라고 보고 이것을 저개발의 개발이라는 역설적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이 부분은 A.G. Frank, The Development of Underdevelopment, in Rhodes, R.I. (ed) Imperialism and Underdevelopment (New York : Random House, 19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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