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정사업 민영화에 대한 집권 자민당 내 반발이 빌미가 돼 실시된 일본의 9.11 총선에서 고이즈미 총리의 자민당이 압승을 거둠에 따라 일본의 우정사업 민영화는 거의 기정사실이 됐다.
보유자산 300조 엔(약 3000조 원)의 세계 최대 금융기관인 일본우정공사의 민영화에 대해 고이즈미 총리는 방만한 공기업의 구조개혁, 우정공사 자금의 민간경제 유입에 따른 일본경제의 활성화 등을 그 이점으로 꼽고 있다.
그러나 일본과 미국 등의 일부 경제전문가들은 이같은 고이즈미 총리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우정공사 자체가 흑자기업이라는 점에서 그 구조조정에 따른 국민경제적 혜택은 미약하며, 특히 일본 민간기업의 자금수요가 미약한 상황에서 자금의 추가 투입이 경제활성화의 요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과잉자금의 상태에서 대출할 곳을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일본의 민간 금융기관들을 더욱 위축시킬 것이라고 이들은 경고한다.
이들은 우정사업 민영화에 의해 생겨난 막대한 여유자금의 향방에 주목하면서 결국은 이 돈이 투자수익을 좇아 미국의 국채시장, 유럽의 채권시장 등으로 향하게 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특히 이 돈이 미국으로 향하게 될 가능성에 이들은 주목한다.
클린턴 행정부 시절에 어렵사리 이룩된 미국의 재정수지 흑자는 부시 행정부의 대규모 감세 및 이라크 전쟁 등으로 인해 불과 4년만인 지난해에는 5500억 달러 적자로 반전했다. 게다가 비슷한 규모의 경상수지 적자까지 안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매년 수천억 달러 규모의 외부자금을 조달하지 않고는 경제 및 나라살림을 지탱할 수가 없다.
일본의 우정사업 민영화는 바로 이러한 미국의 재정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 이들 경제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일본은 고이즈미 출범 이후 지난 4년여간 엔화 환율 안정을 이유로 4천억 달러 이상의 미국 국채를 사들였지만 이제 더 이상 외환시장 개입을 명분으로 한 일본 정부의 미 국채 매입이 어려워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민영화 이후 일본우정공사는 수익률이 저조한 일본 국내의 국채와 공채 등을 처분하고 수익률이 높은 외국의 금융상품에 투자할 것이라는 전망이 높다. 미국 시티그룹의 추산에 따르면 민영화된 일본우정공사의 새 경영진은 일본우정공사가 보유하고 있는 일본의 국공채 중 최대 1조3000억 달러 어치 이상을 처분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일본 국민의 피땀 어린 저축이 엄청난 규모로 외국으로 빠져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 돈의 상당 부분이 미국으로 향한다면 미국으로서는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떡'이 되는 셈이다.
물론 세계경제의 대들보인 미국경제의 안정을 위해 일본자금이 투입되는 것을 반드시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본우정공사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일본 국민들이 불안해할 이유는 충분히 있다. 바로 플라자 합의의 악몽 때문이다. 지난 1985년 9월 레이건 행정부는 미국 뉴욕의 플라자호텔에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의 중앙은행 총재들을 불러모아 일본 엔화 및 독일 마르크화의 대규모 평가절상(결국은 미국 달러화의 평가절하)에 합의했다. 현 부시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감세 및 군비증강으로 심각한 재정 및 경상수지 적자에 허덕이던 레이건 행정부는 이같은 방법으로 탈출구를 찾았던 것이다.
플라자 합의에 따른 엔화의 급격한 평가절상으로(85년 9월 달러당 260 엔이었던 엔화 환율은 95년 4월 80엔대까지 떨어졌다) 일본은 심각한 위기를 맞았다. 우선 수출단가의 급격한 상승으로 수출이 어려움에 봉착했다(일본이 인건비가 싼 동남아 지역으로 생산기지를 옮긴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보다 직접적으로는 미국의 주식, 기업, 부동산 등에 대거 투자했던 일본의 투자자들은 앉은 자리에서 투자금액의 절반 이상을 날리는 아픔을 맛봐야 했다(예를 들어 미국내 자산을 달러당 200엔을 주고 샀는데 졸지에 달러가 100엔으로 폭락했다고 상상해 보라). 1929년 대공황 때보다 더 큰 낙폭을 기록했던 1987년 10월 뉴욕증시의 '블랙먼데이' 사태도 사실은 달러화의 가치 폭락에 실망한 일본 투자가들이 미국내 투자를 대거 회수하면서 촉발된 것이었다.
만일 민영화 이후 우정공사의 자금이 대거 미국으로 항하고 그 후에 미 달러화가 폭락한다면 일본은 20년 전의 악몽을 다시 한번 맛볼 수밖에 없게 된다. 대규모 감세, 이라크 전쟁에 이어 카트리나 피해까지 겹쳐 재정수요가 갈수록 늘어가고 주택시장 거품 붕괴가 초읽기에 들어간 현재 미국의 상황에서 이같은 시나리오는 결코 비현실적인 것이 아니다.
대미 추종외교에 정치적 운명을 걸고 있는 고이즈미의 우정공사 민영화 도박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두고볼 일이다. 다음은 일본우정공사의 민영화가 초래할 국제정치경제학적 결과에 대한 일본 아사히신문 하라 마나부 기자의 글이다. 이 글은 '일본우정공사의 돈은 어디로 갈까?: 돈의 행로와 개혁의 미래(Where will Japan's postal funds end up?: The money trail and the future of reform)'라는 제목으로 9월 14일자 IHT/아사히신문에 게재됐으며, 미국의 진보적 웹사이트 <ZNet>에 재수록됐다. 원문은 http://www.zmag.org/content/showarticle.cfm?ItemID=8840에서 볼 수 있다.
***'일본우정공사의 돈은 어디로 갈까?'**
지난 9.11 총선에서 집권 여당인 자민당이 압승을 거둠에 따라 우정사업 민영화법안의 국회통과가 거의 확실시된다.
그러나 우정사업 민영화가 일본의 일반국민들에게 진정한 혜택을 가져다줄지는 여전히 매우 불확실하다.
총선 선거운동 기간 동안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우정공사(일본의 우정사업은 지난 2003년 4월부터 '일본우정공사'의 공사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종사자가 26만 명이나 된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민영화에 따른) 인원 감축은 대단한 구조조정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들의 임금은 국민 세금이 아닌 우정사업 자체의 수익금에서 지급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우정 종사자의 숫자를 줄인다고 해서 일본의 치솟는 재정적자를 줄이는 데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한편 선거운동이 시작되기 이전에 고이즈미 정부는 우정사업 민영화가 경제활성화에 도움이 된다는 주장을 마치 주문처럼 외워댔다. 우정사업이 민영화되면 우정공사가 보유한 300조 엔 이상의 자금이 민간 경제부문에 흘러들어가 경제를 활성화시킬 것이라는 주장이다.
수많은 일본인들이 고이즈미의 이 하찮은 계획을 지지한 것은 바로 이 계획이 경제적 축복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데이코쿠 데이터뱅크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1만 566개의 일본 기업 가운데 64.1%는 우정사업 민영화가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일부 전문가들은 우정공사의 막대한 자금이 민간부문으로 흘러들어갈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거나, 나아가 부정하기까지 한다. 이들은 많은 일본 기업들이 풍부한 여유자금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막대한 외부자금의 조달이 필요치 않다고 말한다.
노무라연구소의 수석연구원 리차드 구는 "이미 자금대부자가 지나치게 많아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터에 우정공사까지 (민간 경제부문에 대한) 자금대부자로 나서게 되면 문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것은 물론, 민간 금융기관들을 더욱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HSBC증권의 수석연구원 피터 모건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정공사가 보유한 금융자산의 재배치에 따른 혜택은 제한적일 것이다. 예를 들어 우정공사가 민간 금융기관과 똑같이 자산배분을 할 경우 148조 엔을 추가 대출할 수 있다. 문제는 현재 민간은행들이 자신들의 대부능력보다 훨씬 적은 자금만을 대출하고 있다는 점이다. 대출수요가 기본적으로 약하기 때문이다."
우정공사의 막대한 자금이 민간부문으로 흘러들어가지 않는다면 이 돈의 최종 기착지는 어디가 될까?
전문가들은 비금융 기업들로부터 막대한 대출수요가 일어나지 않는 한 민영화 이후의 우정공사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일본정부의 국채나 국영기업의 공채를 사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같은 시나리오는 민영화 이후의 우정공사가 더 이상 국채나 공채에 투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악몽이나 다름없다. 이들은 우정공사의 자금이 자금을 허비하기만 하는 공기업에 계속 흘러들어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있는 일본의 국가부채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을 원치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가 정부 공채를 사주지 않는다면 나라 빚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공채 값은 떨어지고, 이에 따라 공채의 이자율은 치솟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또 다른 가능성은 일본 국내냐 국외냐를 가리지 않고 일본 정부 공채보다 수익률이 높은 금융상품에 투자하는 것이다.
이같은 가능성은 이미 지난 달 미국의 <월스트리트저널>이 보도한 바 있다. 이 신문은 8월 26일자 인터넷판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티그룹은 일본의 우정사업 개혁이 성공할 경우 최대의 수혜자는 미국 재무부, 유럽의 채권시장, 그리고 일본 및 외국의 주식시장이 될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어 이 신문은 우정사업이 민영화될 경우 새로운 경영주체는 보다 수익률이 높은 투자처를 찾아 일본 국채 및 지방자치단체, 공기업의 채권 등을 포함하여 1조3750억 달러(약 130조 엔) 상당의 공채를 털어낼 것이라고 전망했다.
물론 일본 우정공사의 돈이 외국으로 빠져나간다고 해서 그것이 일본경제에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어쨌거나 일본으로서는 심각한 재정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경제의 안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경제학자 사이토 스스무는 미국 재정당국과 민간 금융계의 입장에서 보자면 3조 달러의 금융자산을 보유한 일본우정공사의 임박한 민영화는 대단한 축복이 아닐 수 없다고 지적한다. (부시행정부 출범 이후) 당초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불어나고 있는 미국의 재정적자 및 무역적자를 메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지난 2000년 1590억 달러 흑자였던 미국의 재정수지는 2004년에는 5536억 달러 적자로 급격히 악화됐다. 대규모 감세 및 이라크전쟁 등으로 재정수요가 엄청나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물론 (잇단 금리인하와 같은) 미 금융당국의 매우 느슨한 통화정책과 대규모 국채 발행에 의한 팽창적 재정정책이 2000년 주식시장 거품붕괴로 침체에 빠졌던 미국경제를 되살려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이토 씨는 최근 미국경제의 활황이 미국의 연간 경상수지 적자를 8000억 달러 수준까지 확대시켰으며, 이에 따라 이만한 액수의 자금을 외국으로부터 끌어들이는 것이 과제라고 지적했다. 그런데 일본 정부는 이미 고이즈미 집권 이후 지난 4년 동안 참 마음씨 좋게도 4000억 달러 이상의 미 재무부 채권을 사주었다.
막대한 자금의 대외투자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리 헤지를 한다 하더라도 환율변동에 의해 대외투자 자금의 가치가 엄청나게 감소될 수 있다는 점이다. 만일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일본의 유권자들은 지난 9.11 총선의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겨볼 수밖에 없을 것이며, 나아가 어찌하여 고이즈미의 이 하찮은 계획을 지지했는지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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