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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일방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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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일방주의'

미래전략연구원 '지구촌, 분석과 전망' <31>

***1. 일방주의란 무엇인가: 미국 대외정책의 예**

***(1) 정책 전달 및 추진 방식의 문제**

일방주의는 거의 항상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다.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는다는 것은, 일방주의가 이성보다는 감성의 영역에서 처리되는 경향이 강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도 일방주의가 감성의 영역에서 처리되는 이유는 일방주의 안에 담기는 내용보다 그 내용이 전달되거나 추진되는 방식이 일방주의를 결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아름다운 일도 일방적으로 하게 되면 스토커가 되기 십상이고, 또 어른이 좋은 도덕과 예절을 가르쳐도 일방적으로 하게 되면 권위적이고 강압적으로 느껴지게 된다. 따라서 일방주의에 대해서는 그 반작용으로 '반감'이 생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일방주의의 한쪽이 너무 강하면 다른 한쪽이 눌리기도 하지만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그렇게 눌리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의사표시를 할 수 있도록 제도적, 문화적으로 보장되어 있기 때문에 권위주의나 독재정치의 시대와 다르게 '반감'이 상당히 용감하게 표출된다. 그 '반감'은 특별히 활동적이지 않은 사람에게서는 '짜증'의 형태로 나타나고, 활동적인 사람에게서는 종종 '저항'의 형태로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의 '일방주의'와 '반미감정'이다. 미국의 일방주의는 부시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보다 강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부시와 네오콘들의 의사전달 방식이 매우 고압적이고 일방적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클린턴 행정부나 그 이전의 카터 행정부에서도 미국의 이익과 가치관이 최우선시되는, 내용적인 면에서의 일방주의적인 대외정책 행태가 있었으나 그 내용을 전달하는 방식이 설득과 상대방을 인정하는 모양새를 보다 많이 취함으로써 '반미감정'이 지금보다는 상대적으로 약했다. 과거 미국은 레이건 행정부 때의 이러한 일방주의적 '반감'의 문제를 느꼈는지(추측컨대), 그의 뒤를 이은 부시 대통령(현재 부시 대통령의 아버지)은 매우 흥미롭게도 "Kinder and Gentler America(더욱 친절하고 더욱 신사적인 미국)"라는 모토를 내걸었었다.

현재 한국에서 다양한 비체계적인 여론조사에서 나타나는 반미감정은 내용이 주가 되는 '반미주의(anti-Americanism)'이기보다는 감성의 영역에 속하는 '반미감정(anti-American sentiment)'이다. 왜냐하면 반미감정의 형성이 주로 미국의 일방주의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우리 김동성 선수의 금메달 취소 사건이 미국의 우월감에서 비롯된 일방주의로 인식되었고, 효순이ㆍ미선이 사건의 판결도 미국의 일방주의로 인식되었다. 이라크 전쟁도 마찬가지였고, 북한에 대한 미국의 강경책도 그러하였다. 여론조사의 대상이 되었던 사람들에게 미국의 일방주의의 내용에 관하여 물어보았다면 아마도 자세하게 그 내용을 숙지하고 있었던 사람은 한 자리 숫자의 비율에 불과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들은 주로 미국의 일방주의적 '태도'가 못마땅한 것이고, 이것이 '반감'으로 표출된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 일반인의 미국에 대한 태도는 매우 다중적이다. 즉 사안에 따라서 동일인이 '반미'와 '친미'가 같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반미감정은 이러한 의미에서 일방주의적 '방식'과 '태도'가 사라지면 상당부분 소멸될 가능성이 크다. 부시 2기 행정부의 비교적 조용한 외교 이후 반미감정이 상당히 수그러드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민주주의 체제나 무정부적인 체제에서는 일방주의에 대한 '반감'을 강압적으로 통제하기가 쉽지 않다. 우선 강압적 통제 자체가 민주주의 원칙에 어긋나며, 국제질서와 같은 무정부적인 체제에서는 각각 주권국가이기 때문에 비교적 남의 눈치를 덜 본다. 아마도 무정부 상태의 국제질서가 민주주의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으면 이러한 '반감'의 표출은 더욱 자유로워질 것이다. 이것이 소위 말하는 '민주평화론'에서 국제적 여론이 중요시되는 메커니즘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민주평화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에게 있어서 도외시되는 부분이다.

***(2) 정책 우선순위 설정의 문제**

반면 일방주의에서 항상 일방주의의 형식과 태도만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형식과 태도의 문제가 필요조건이라면 충분조건은 '우선순위 설정(priority setting)'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우선순위 설정의 문제는 일방주의의 '내용' 문제를 건드리는 것으로서 이성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사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 부분 역시 상당히 감성적인 부분이다. 흔히 우리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우선순위를 말할 때 "머리에 와 닿는" 문제가 아니라 "피부에 와 닿는" 문제라는 말을 쓴다. 즉 우선순위는 가장 많이 '느끼는' 문제여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일방주의를 비판할 때 사람들은 미국이 추진하는 일방적인 정책이 진정 국제정치의 우선순위인지를 의심한다. 이라크를 꼭 군사적으로 점령할 필요가 있었는가? 지구온난화를 방지하자는 쿄토의정서의 비준을 일방적으로 거부할 필요가 있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국의 정책을 "피부에 와 닿게" 느끼지 못한다. 이라크의 점령도 그 정책을 반대하는 초기의 논리가 상당히 감성적인 것으로 대부분 '음모론'을 인용한다. 미국의 대 중동정책이 '음모론'을 증명하는 경향이 강한 것은 사실이나 일반인들은 자신들의 '음모론'을 뒷받침할 만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증거와 논리 없이 "미국이 중동의 석유와 건설업을 노리기 위하여 욕심을 부린다"라는 '음모론'적 반감을 갖게 된다. 쿄토의정서의 경우에도 일반인은 과연 지구온난화가 실제로 위험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는가, 그리고 쿄토의정서가 정말로 가장 좋은 대안인가라는 대단히 과학적이고 전문적인 내용을 의심하지 않고(실제 전문가들의 견해를 들어 보면 이는 아직 확실히 결론이 나지 않은 문제다), 미국이 자국의 이익만을 챙긴다는 '감성적' 반감을 갖게 된다. 따라서 일방주의의 내용도 상당히 감성적인 부분이 그 수용도를 결정한다고 볼 수 있다.

여하튼 일방주의는 그 정책 혹은 내용을 전달하고 추진하는 '방식과 태도'에 "피부에 와 닿지 않는" 내용이 결합되면서 상대방으로부터 반감과 저항을 만들어낸다. 남녀간의 관계를 예로 들자면 한 남자가 일방적인 방식과 태도로 사랑을 고백하더라도 그 고백의 내용이 여자가 "피부로 느끼지 못하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이라면 여자는 짜증이 나고, 그 정도가 심해지면 화를 내거나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로 발전할 것이다. 국제정치의 영역이건 국내정치의 영역이건 이러한 방식과 내용으로는 상대방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 없으며 오직 짜증과 저항만을 만들어낼 뿐이다. 학술적으로 간단히 표현하면 자연스럽게 나를 따르게 하는 '소프트 파워'를 가질 수 없다는 의미다.

***2. 한국의 일방주의**

***(1) 일방주의와 과거 권위주의**

위에서 이렇게 '일방주의'와 '반감'의 문제를 국제정치의 예를 들면서 장황하게 설명한 이유는 사실 한국의 국내정치 문제를 지적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지난 역사는 상당히 오랜 기간 '일방주의'에 의해 지배되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국내의 일방주의는 나름대로 오랜 역사를 가질 이유가 있었다고 판단된다. 한국 국내의 일방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닌 권위주의적 통치제도와 통치구조 및 문화, 그리고 상당히 적절한 우선순위의 설정에 의해서 유지된 측면이 있다. 조선시대의 경우도 이러한 이유에 부합하는 사례라고 짐작은 가나 이 부분에 대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므로 감히 언급하지 않겠고, 박정희 정부 이후로 상당히 최근까지 한국의 국내적 일방주의를 보면 상대방을 억압하고 억누를 수 있는 공권력과 위계구조로 짜여진 통치구조, 제도, 문화를 중심으로 소수의 지도자나 엘리트가 일방적으로 자신의 아젠다를 전달하고 추진해나갔다.

이러한 통치 메커니즘 덕분에 권위주의가 1990년대까지 이어질 수 있었지만 사실 한국 권위주의 국가의 정책 우선순위 설정도 나름대로 "피부에 와 닿는" 것으로 설정되고 조작된 것이 일방주의적 정치가 유지되는 데 충분조건이 되었다. 정책 우선순위가 "북의 위협", 즉 '반공'과 "잘 살아 보세", 즉 '경제발전'으로 설정된 것은 국민에게 피부로 와 닿는 의제의 설정 및 조작이었다는 것에 우리는 큰 의문을 갖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이때까지의 일방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일방주의이기보다는 '유사 일방주의'였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방식은 일방적이나 의제의 설정은 피부에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서 어느 정도 경제성장이 이뤄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냉전이 무너지면서 기존의 정책 우선순위에 감성적으로 짜증을 느끼고 저항을 하게 되는 세력이 커졌으며, 특히 정치인과 국가의 일방주의적 '방식'과 '태도'가 거기에 결합되면서 진정한 의미의 일방주의에 대한 저항이 중산층과 일반시민으로까지 확대됐다. 이러한 과정이 결국 일방주의(권위주의)를 물리치는 민주적 정권교체로 이어져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민주화가 된 지금의 대한민국에서는 '일방주의'가 통치력에 상당히 치명적인 손실을 가져오게 된다. 즉 정책의 전달과 추진방식 및 태도, 그리고 우선순위의 설정이 일방주의적이면 국민은 등을 돌리게 되어 있고, 그렇게 되면 정부나 지도자는 더 이상 지도력을 발휘할 수 없다. 한때 사상 최고의 지지율을 경험하던 대통령들도 집권 후반기에 가면서 국민과 유리된 일방주의적 행태로 통치력을 잃고, 거기에 감성적인 '부패 스캔들'이 겹치면서 국민은 급속도로 지지층에서 이탈했다. 국정의 최고 책임자들은 임기가 조금 지나면 고급정보와 제도화된 권력 때문인지 국민을 자신의 '혜안'과 '구도'로 일방적으로 몰고가려는 경향이 강해지고, 그러다 보면 정책이나 아젠다의 설정과 추진이 일방적인 '태도'와 '방식', 그리고 상당히 '집권 엘리트 지향적'으로 바뀌는 경향을 볼 수 있다.

***(2) 현 집권세력의 일방주의**

현재의 한국정치와 관련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노무현 정부는 기존 일방주의 세력(언론이나 일반 담론에서는 이를 '보수'세력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시대적 맥락과 구속성을 인정한다면 기성 혹은 기존 일방주의 세력으로 부르는 것이 맞을 듯하다)에 짜증을 느끼고 저항한 상당수의 지지층이(비판적 지지층을 포함하여) 기존의 일방주의를 없애기 위하여 밀어준 정부다. 따라서 이들이 원하는 개혁은 기존 일방주의에서 나온 폐해를 없애고 개선하는 개혁이었다. 자신들만이 원하는 우선순위를 일방적인 태도나 방식에 의해서 밀어붙인 그러한 일방주의적 세력(재벌가, 기존 권위주의 정치인 및 엘리트)과 구조를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기존의 일방주의적 세력에게는 이들을 개혁하자는 노무현 정부가 역시 '일방주의적'으로 보이게 되어 있다. 즉 이들에게 일방적인 태도와 방식(문화혁명적, 홍위병 방식이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으로 이들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 우선순위를 설정하여 밀어붙인 것이 된다. 따라서 이들은 대단한 짜증을 느끼고 저항을 하게 되며, 또 이들의 저항이 그 양이나 질로 보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대통령은 "못해 먹겠다"는 심정을 가질 정도로 통치력의 허무감을 느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시대적 흐름은 기존의 일방주의적 세력보다는 이들을 개혁하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기존 일방주의 세력에 못지않은 지지층을 노무현 정부는 확보할 수 있었고, 그것이 탄핵정국 이후 여대야소를 만들어준 힘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노무현 정부도 기존 일방주의 세력이 아닌 국민 전체에게 상당히 '일방주의적'이 되어가고 있다. 정책이나 의제를 전달하는 방식이나 태도에 있어서 상당히 일방적이고, 또 그 내용 역시 국민 전체의 "피부에 와 닿지" 않는다. 국민이 뽑아준 대통령은 국민을 위하여 끝까지 국정을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일방적으로 대통령직을 던지거나, 일방적으로 야당에게 국정을 맡기고자 하거나, 아니면 일방적으로 자신이 옳다고만 주장한다. 그리고 그 내용이 국민들에게 현재 피부로 가장 와 닿는 내용이 아니라 갑자기 뜬금없이 '지역주의'가 되어버렸거나 점차적으로 상당히 친재벌적이 되어버렸다.

지역주의가 있었음에도 평화적인 정권교체가 있었고, 지역주의가 있었음에도 기존 일방주의 세력을 개혁하고자 하는 구도가 만들어졌었다. 오히려 가장 피부에 와 닿는 문제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에 의한 양극화의 문제, 삼성가 공화국(삼성공화국과 삼성가 공화국은 다르다)의 문제 등을 장기적인 비전에 의해 극복해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양극화가 현 정부에서 시작된 문제가 아니고, 그렇다고 현 정부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도 아니라는 변명은 미래에 대한 책임감이 결여된 매우 무책임한 소극적인 변명이 아닐 수 없다. 만약 더 좋은 아이디어와 정책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대신 한번 해보라는 것도 매우 무책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국민에 대한 국정 최고 지도자의 '일방주의'는 짜증과 저항을 낳고, 그렇게 되면 과거 일방주의 세력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국민의 지지도가 하락할 수밖에 없다. 즉 소프트 파워가 떨어져서 국정운영이 매우 어렵게 된다. 그렇지 않아도 벌써 레임덕 얘기가 나올 정도로 세상이 흉흉해졌는데 대통령이 왜 자꾸 일방주의적으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과거 운동권의 방식 역시 민주주의의 제도와 문화에서는, 그리고 그것이 권력과 합쳐질 때 금방 일방주의적으로 바뀔 수 있다. 왜냐하면 자신들만이 옳고, 또 그것을 운동이라는 방식과 같이 몰아붙이려 하는 유혹을 강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대화와 타협과 설득의 과정이다. 일방주의적 세력은 살아남을 수 없다.

현 한나라당 역시 과거 일방주의 세력이라는 이미지와 또 그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 집권세력의 일방주의적 행태에 대한 반사이익이 얼마나 오래갈지는 바로 한나라당의 일방주의가 어느 정도인지에 달려있다고 본다. 일방적인 권위주의적 방식과 태도에서 벗어나고, 또 국민의 피부에 와 닿는 문제를 미래의 비전에 담아서 열심히 뛰어다니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권력은 주어지면 쓰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방적으로 쓰여지면 그 권력을 쥐어준 국민이 등을 돌리지 않겠는가? 오래가는 권력은 필시 문제가 있는 권력이거나 아니면 국민이 자발적으로 오래 쥐어주는 권력일 것이다.

현 집권세력은 초심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나라당 역시 스스로가 일방주의에서 얼마나 벗어나고 있는지, 또 벗어날 수 있는지 자문하고 노력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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