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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아 시대의 동반자, 고려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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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동북아 시대의 동반자, 고려인'

김봉준의 '유라시아 문화기행' <5> 우수리스크

'고려인'은 러시아에 사는 한인동포를 오래전부터 부르던 이름입니다. 연해주로 이주한 구한말 조선인은 조선 땅을 떠나면서 자신의 정체성을 옛 나라 고려로부터 찾고자 스스로 그렇게 불렀습니다. 조선 말기 사대주의와 당파싸움으로 허학(虛學)과 가렴주구에 여념이 없던 지배층은 백성들에게 더 이상 희망이 되지 못했습니다. 칠년대한 왕가뭄에 굶주린 백성들은 이 거리 저 거리에서 떼거지가 되었습니다.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동냥하러 거리를 힘없이 떼지어 다녔습니다. 지금도'떼거지를 쓰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서 나온 말입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 양식에 연좌농성이 많은데 아마 이것도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유습일 것 같습니다. 더는 나아갈 수도 물러설 수도 없는 처지에 마지막 평화적 저항수단입니다. 동학혁명마저 실패하자 나라를 버리고 떠났던 유랑민이 연해주에 모여듭니다.

고려인, 이 글에서도 조선인, 한인, 재러 동포라고 부르지 않고 그들이 사용해온 말을 존중해서 고려인이라고 씁니다. "우리는 조선인도 한인도 아닌 고려인이다." 고려인이라는 말에는 남과 북을 모두 포함하고 싶어 하는 통일된 민족을 바라는 마음이 있는 것 같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난 8월26일은 잔뜩 흐렸습니다. 우스리스크로 가는 길 중간에 있는 라즈돌레나 역을 찾았습니다. 1937년 고려인이 강제이주 당하던 현장입니다. 68년이 지난 오늘은 지난 역사를 까맣게 잊은 듯 조용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곳에서 우리는 묵념만 하지 않고 미리 준비한 대로 고사를 지냈습니다.

묵념이 약식의 기독교 의례라면 고사는 동아시아 전통의례입니다. 동북아의 아시아족 전체에 걸쳐 있는 샤머니즘의 의례가 과장할 것도 없이 고사의례입니다. 동남서북으로 신을 부르는 것이나 고시레로 젯술을 신령에게 뿌리는 것이나 장승과 솟대를 세워 신물로 삼거나 모두 같습니다. 생명의 영험함을 모시고 살리려는 의례입니다. 됫박에 쌀을 붓고 초를 꽂아 불을 밝히고 손빔을 하던 풍속은 할머니들이 지금도 장독간이나 큰바위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의례입니다.

나는 옛 시절 1976년 임실군 갈담면 필봉굿을 접하면서 고대부터 내려오는 겨레의 의례가 우리 방식으로 존재해 있음을 알았습니다. 집과 마을과 산천 어디를 가나 펼쳤던 손빔은 일종의 전천후 미사입니다. 생활 전체를 성소로 보았으니 특별한 성지 공간이 따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생활공간이 기도터일 수 있었고 살아 있는 모든 시간이 의례일 수 있었습니다. 동북아시아는 생활신앙이 깊은 성배족들의 땅같습니다. 한반도 뿐만아니라 만주와 시베리아 전역에 걸쳐 내려오는 샤먼의례와 장승·솟대가 성배문화를 침묵으로 전합니다.

사진1 라즈돌레나역에서 행한 고려인 위령의례.

우리는 동북아의 성배문화 계승자답게 길 고사로 고려인의 한을 추념하였습니다. 라즈돌레나역 기차 길에서 풍물 고사반을 했습니다. 스탈린은 이곳에 고려인을 총 집합시켜 기차에 태웠습니다. 이 역전 광장에 모아놓고 총으로 위협을 가하며 시베리아 행 기차를 강요했을 겁니다. 반항하는 고려인은 총을 쏴서 죽였습니다. 1937년 9월 11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스탈린의 명령서가 최근에 공개되었습니다. 주민의 의사에 반하여 가장 빠른 시일에 가장 많은 인구를 강제로 이주시킨 사상 최대의 강제 인구이동작전일 겁니다. 이것은 피난민 수송이 아닙니다. 살던 집 가재도구, 농토와 추수 알곡 다 빼앗긴 채 떠나야 했습니다. 명령서에는 점잖게 주민을 배려한 것처럼 쓰여 있으나 사실은 다릅니다. 여기 그 명령서 일부를 소개합니다.

파란글씨로

<명령번호 1428-326. 소비에트사회주의연방공화국 인민위원회 및 중앙위원회는 아래와 같이 명한다. 일본의 간첩행위가 극동지방에 침투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조치를 취한다.

* 연해주 극동국경지역에 거주하는 모든 한인들을 카자흐스탄과 아랄해, 발하쉬 호수 및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으로 이주 시킨다.

* 지체 없이 추방을 시작하여 1938년 1월1일까지 추방작업을 종결한다.

* 한인들이 재산, 농기구 및 가축을 갖고 이주하는 것을 허락한다.

* 이주자들이 남기고 가는 동산 부동산 및 파종된 종자에 대해서 보상이 이루어질 것이다.

* 추방시 발생하는 무질서를 방지하기 위하여 조치를 취해야 한다.

* 카자흐스탄 공화국, 우즈베키스탄 공화국 인민위원회는 한인들의 거주 지역과 주거지를 결정하고 이주자들이 경제적 적응을 할 수 있도록 협조하는 등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 국가철도는 한인들을 극동지역에서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으로 옮기는데 있어 적시에 기차 편을 제공한다.

* 이주경로, 출발하는 이주자 수, 도착하는 이주자 수, 그리고 해외로 이주하는 이주자 수를 10일마다 전보로 보고해야 한다.

* 한인들이 이주해가는 지역 경비를 강화하기 위하여 국경수비대를 3000명으로 증원한다.

* 인민위원회는 한인들이 비운 곳에 국경 수비대가 주둔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1937년 9월 11일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장 스탈린>

이 문서의 공개로 그동안 확실한 이유를 몰랐던 1937년 한인 강제이주의 전모가 일부 드러났습니다. 스탈린 정권이 고려인을 강제이주시킨 이유가 러·일간 전시 상태에서 한인을 일본의 첩자로 의심했습니니다. 한국인과 일본인의 얼굴을 구별하기 힘들었던 슬라브인들은 이참에 토착 아시아인들을 몰아내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인종적 편견, 동아시아 종족에 대한 슬라브인의 뿌리 깊은 불신이 작용했습니다. 더 힘이 커지기 전에 뿌리를 뽑는 것이지요. 러시아는 역사적으로 몽골제국의 오랜 지배를 당한 경험이 있어 동아시아족의 세력화를 경계해 온 측면도 있습니다. 아무튼 스탈린 정부는 고려인을 쫓아내고 그 빈 자리를 국경수비대 군인과 군속 가족들로 채웠습니다. 슬라브인들의 동방진출을 적극 권장한 결과 오늘날 연해주에 가면 노랑머리에 코 큰 서양인이 대다수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우스리스크에는 커다란 중국 시장이 있습니다. 연해주의 생활필수품들은 중국상품으로 공급됩니다. 값 싸고 풍부한 물량으로 다른 나라 상품은 경쟁이 안됩니다. 소련 사회주의 멸망 이후 생필품 생산이 침체한 틈을 타고 중국인들의 상권은 날이 갈수록 커져 연해주 생필품시장을 거의 장악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하지도 않고 놀기를 좋아하는 러시아인은 중국인과 시장경쟁에서 이길 수 없습니다. 여름과 겨울 두 달의 휴가를 갖기 위해 열달을 참고 일한다는 러시아인들은 가난해도 놀기 좋아합니다. 식당은 음주가무를 함께하는 사교장입니다. 애인이나 부인 생일날이면 한달치 급료 수준이 넘는 옷가지도 마다하지 않고 선물을 한답니다. 아이들 생일날도 잘 챙겨 주지만 그걸 핑계로 잔치 날에는 어른들이 더 즐깁니다. 연극관람, 오페라, 전시 등 예술 감상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러면서도 급하게 서두르지 않고 매사 줄서서 잘 기다립니다. 사진2 환영나온 우스리스크 시민들

연해주 우스리스크는 우리 민족에게 특별한 곳입니다. 조선후기 두만강 넘어 핫산에서 시작한 한인 이주민, 고려인은 북으로 올라갑니다. 벼농사 북방 한계선을 개척하며 올라간 것입니다. 우스리스크 넘어 지금은 우정마을이 있는 곳까지 드넓은 초원을 논으로 밭으로 개척하면서 올라갔습니다. 추운 지방이라 벼농사가 불가능한 곳이라는 이 동토를 스이픈 강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종자를 개량하여 누런 황금 벌판을 만듭니다. 이곳 개척지를 고려인은 '한마당'이라 이름 붙였습니다. 우스리스크는 고려인들이 동토를 옥토로 만든 땅 위에서 펼진 한인들의 집결지였습니다.

최초로 임시정부가 있던 곳도 우스리스크입니다. 상해 임시정부는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못하게 되자 다시 이주한 곳입니다. 우스리스크는 이준 열사와 함께 헤이그 밀사로 떠났던 이상설 선생의 해외 활동무대이고 유허비가 지금 이곳에 세워졌습니다. 서쪽으로는 중국 동녕인 국경지대이고 남북으로는 시베리아 철도가 이어지는 교통의 요지이기도 합니다. 발해의 솔빈부가 이곳에 있었습니다. 말을 방목하던 부서인데 지금도 목장이 있어 말 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습니다. 이상설 유허비를 지나 스이픈 강을 건너면 언덕이 생기는데 이곳을 넘으면 고지가 높아 사방을 관망할 수 있는 천혜의 요지입니다. 이곳에 발해는 솔빈부라는 지방도읍을 두었습니다. 말 사육을 대규모로 하던 곳입니다. 발해의 말은 일본에까지 수출을 하였습니다. 발해는 일본과 해상무역을 하며 선진 문물을 전했습니다.
사진3 우스리스크 광장에 구경나온 아이들

사진3-1 스이픈 강이흐르는 초원 한마당

우리 일행은 우스리스크시 광장에서 유라시아대장정 환영식을 했습니다. 시에서 공식 행사를 준비했는데 부시장 환영사와 2차대전 승전 용사, 건국 공로자들이 훈장을 달고 나왔습니다. 2차대전에 참전한 재향군인회 회장의 인사말이 귀에 들어옵니다.

"보다시피 여기 나온 어린 학생들은 여러 민족의 어린이이다. 피부가 다르고 풍습이 달라도 이제 우리는 서로 화목하게 산다. 더 이상 전쟁 없는 세상을 후손들에게 물려주자."

숱한 전쟁과 동원으로 20세기를 보낸 노병의 회한어린 말입니다. 말에 진정성이 있었습니다. 우스리스크 예술단의 춤과 고려인 아리랑 가무단의 춤 공연이 함께 광장에서 있었는데 이것이 평화축제입니다. 광장의 동상은 혁명가들로 세워지고 사회주의 혁명을 고취하던 국가 행사를 펼치던 곳에 한국민이 고려인과 함께 국제적인 평화문화행사를 펼치니 격세지감입니다. 전쟁은 한시적이었고 평화는 영원하리라는 의지가 서려 있습니다.

시가에서 태극기와 러시아기를 꽂고 차량 행진을 했습니다. 우스리스크에서 펼친 유라시아 대장정 행사는 이곳 고려인들에게 자부심이 생기기에 충분했습니다. 올가을에도 한국에서 <연해주길마중 2005 - 다시 피는 꽃>이 합동순회공연을 합니다.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나 종교단체의 초정으로 순회공연을 다닙니다. 러시아 라두가 민속무용단과 한국의 또랑광대가 합동창작한 소리 춤굿입니다.(동북아평화연대에 문의)

우리는 동북아의 국제문화교류 하면 대체로 일본, 중국간의 문화교류만 생각하지 연해주와의 문화교류는 아직 염두에도 두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북방 대륙문화교류의 관문은 연해주가 될 것입니다. 연해주와 한국예술인들이 함께 만들어내려는 국제적 문화교류가 동북아류로 발전할 것입니다.
사진4 우스리스크 광장에서 펼친 고려인 가무단 아리랑의 춤공연

올해는 한인이 연해주로 이주해 첫 정착촌을 시작한 지 14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한인 이민사는 연해주 이주사로부터 시작합니다. 이를 기념해서 큰 규모의 고려인 자치센터를 세우는 계획이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려인의 꿈이 서린 이 계획이 위기에 놓였습니다. 정부 지원금과 민간 모금으로 세울 계획으로 추진 중인데 부지만 확보했지 모금이 어렵습니다.

한국정부의 주무부서인 외교부는 민간 모금이 잘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예산 집행을 마냥 미루고 있습니다. 재외동포를 지원하는 정부의 원칙은 그곳 현지 동포들의 민간 모금이 절반은 되고 나머지 절반은 정부가 지원한답니다. 그러나 연해주에서 고려인 동포가 모금을 해서 10억 이상의 자금을 만들기란 불가능한 일입니다. 기금마련은커녕 자기들도 정착을 못해서 유랑인 처지입니다. 고려인의 특수한 처지를 이해하고 정부는 이왕에 도와야 하는 사업이라면 미루지 말고 지원 해주기를 바랍니다. 지원금이 늦어지면 계약파기가 되어 원소유주로 넘어갈 위기입니다. 올겨울 난방시설도 안 되어 있는 폐교의 낡은 실내를 보수할 예산도 준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진5. 고려인들, 기념관 추진이 늦어지고 있다.

우스리스크에는 고려인 정착촌 우정마을이 있습니다. 대한주택공사 후원으로 집을 짓기 시작해 지금 20여 가구가 모여 삽니다. 서울에서 간 동북아평화연대(이하 동평) 김현동 사무처장도 이곳에서 삽니다. 고려인을 돕기 위해 아예 서울에서 이곳으로 가족들과 이주를 와서 살고 있습니다. 동평은 고려인이 땅을 갖고 농업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확실한 정착이라고 판단하고 우정마을뿐만 아니라 프랭코 농장도 재건하여 정착을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고려인 이주 140주년 기념관이 도심지에서 동포들이 만나고 교류하는 장소라면, 우정마을과 프랭코 농장은 고려인의 농업과 농산물 직거래 장터가 있는 삶의 터전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스리스크 북단에 위치한 항카 호수가는 항카군이 있는 데 이곳에는 대순진리회가 만든 대순농장이 있습니다. 대순농장은 연해주 곳곳에 모두 총 8만 정보의 땅을 50년 임대로 구입해 대규모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대순농장의 농장경영은 독특합니다. 100% 자기자본금으로만 경영하며 신도들이 들어와 살면서 직접 농사를 짓습니다. 고려인과 러시아인을 고용하여 약 7000명이 종사한답니다. 현지 러시아인은 인건비가 100~150달러, 북한 노무자는 500달러랍니다. 북조선 노동자를 고용하고 싶어도 임금 격차가 너무 많아서 어렵답니다. 이곳에 콩, 보리, 밀, 귀리, 벼, 채소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콩은 메주로 만들어 국내 신도들에게 공급한답니다. 북한에 식량원조도 합니다. 러시아와 합작으로 농장 경영을 했던 프랭코 농장은 고려합섬의 부도로 망해서 지금은 은행에 저당을 잡힌 상태인 반면 대순농장은 연해주 진출에 성공한 농장이 되었습니다. 종교의 힘이 경제 외적인 동력이 되었습니다.

프랭코 농장은 1000만평 넓이입니다. 프리모리에 - 연해주와 코리아를 합성한 조어입니다. 고려합섬이 연해주의 협동조합과 51대 49로 합자한 농장인데 고합의 부도로 청산이냐 재매입이냐 기로에 있습니다. 중앙 마을 끄레모바, 프랭코 지대에는 모두 800채의 집이 흩어져 있는데 지금도 고려인이 10가구 살고 있습니다. 도시로 떠나고 비어있는 집이 많습니다. 한국의 시민단체 동평에서는 프랭코 농장 살리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습니다. 텃밭이 딸린 집 한 채를 고려인과 함께 구입하는 것입니다. 100만원~150만원 정도면 고려인과 함께 문패를 단 집 한 채를 50년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드넓은 초원이 있고 앞에는 맑은 냇물이 흐르고 말과 소가 노니는 아주 한적한 곳, 그곳에 집 한 채와 텃밭을 갖고 싶은 분은 동평(02-959-7050)에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하면 다시 정착 벨트가 형성되고 휴가철만 되면 고려인과 한인이 서로 돕고 사는 방법도 찾아질 겁니다. 이곳에 한인이 주축이 되어 예술인촌도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만 앞섭니다. 드넓은 초원에서 동아시아 문화예술인들이 모여 동아시아평화예술제를 벌이는 겁니다.

우스리스크 북단에 위치한 항카 호수가 있는 항카 주는 벼농사 최북단지역으로 곡창지대입니다. 항카 주지사는 우리에게 환영 인사말을 하면서 한국인의 농업투자가 많아지기를 희망했습니다. 러시아가 중국인과 일본인에는 5년 한도로 땅을 임대해 주면서 한국인에게는 50년 동안 임대할 수 있게 특혜를 주고 있습니다. 한국이란 나라가 중국과 일본처럼 위협적인 강대국도 아닐 뿐만 아니라 고려인의 이민역사를 볼 때에 농사를 잘 짓기로 이미 정평이 나 있는 덕분입니다. 항카 호수는 중국과 러시아를 국경으로 하는 거대한 호수입니다. 수심은 얕아 깊은 곳이 고작 9미터 정도입니다. 충청북도 크기만 한 큰 호수가 있어 물 걱정이 없고 비옥한 땅이 지평선을 보이며 펼쳐져 있습니다. 누런 황토물이 그대로 흘러들어 거대한 수평선을 이루고 이 호수는 다시 아무르강으로 흘러 태평양으로 갑니다. 항카 호수 남단에서 최근에 발해 유적지를 발굴 탐사를 하였다고 하는데 결과가 궁굼합니다.

고려인은 고분질이란 농사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철따라 지주와 계약 농사를 지어서 수확을 분배해 가는 고려인식 농사를 말하는데 씨를 뿌려 새순이 나면 갓처럼 종이로 묘종을 씌워서 어린 싹을 보호합니다. 웃자라게 하여 옮겨 심으면 뿌리도 강해지고 적합한 거름을 적시에 주고 가지를 솎아서 수확을 많이 올립니다. 심어 놓고 별로 손을 안대는 러시아인 농사와 다릅니다. 같은 품종으로 지어도 고려인 농사가 훨씬 수확이 많으니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과거 사회주의 소련시절 농업공동체의 성공적인 모델이라고 자랑하던 대표적인 콜호즈들은 고려인이 앞장서서 건설한 농장이 많았습니다. 부지런한 농사와 남다른 기술로 고려인 농사가 러시아인에게 부러움이 된 것입니다. 고분질 농사하면 고려인, 고려인 하면 고분질이 생각 날 정도로 농사 잘 짓는 민족으로 고려인은 러시아인에게 각인돼 있습니다.사진6. 우정마을에서 다시 농사업을 시작하는 고려인들, 왼쪽 끝은 동북아평화연대 사무총장

분주한 중에도 나는 러시아 시골집을 방문했습니다. 말로만 듣던 러시아식 전통사우나 경험은 참 흥미롭습니다. 이를 반야라고 부르는데 이전에 생각했던 사우나가 아니었습니다. 한국식의 사우나 구조는 스팀 파이프가 열을 내서 실내를 데우는 방식인데 여기는 다릅니다. 장작불로 달군 쇠로 된 난로가 사우나 실 한 모퉁이로 들어와 있는데 달궈진 철판위에 바가지로 물을 부으면 칙지직하며 갑자기 온 방안이 뜨거운 수증기로 덥힙니다. 수증기가 사우나실 작은 방을 순식간에 감돌게 하는 것입니다. 갑작스레 뜨거운 수중기가 온 몸의 피부를 뜨겁고 질펀하게 달구는 겁니다. 순식간에 뜨거운 스팀을 쐬게 되니 온몸 살갗이 순간 아리도록 짜릿합니다. 그리고는 흠뻑 젖은 알몸을 곁에 있는 동료가 자작나무가지 잎사귀로 때려줍니다. 뜨거웠던 몸은 다시 시원합니다. 그렇게 몇 차례 한 후 나와서 양동이 물로 샤워를 하고 수건하나 걸친 채 밖으로 나가 바람에 몸을 말립니다.

반야의 경험에서 몇 가지 소중한 문화를 발견합니다. 물 몇 바가지와 장작 몇 개로 에너지를 아주 절약하는 사우나라는 점과 자작나무로 서로 쳐주면서 알몸으로 우의를 나누는 데 이 방식도 독특합니다. 이 방식은 원래 모스크바 풍습이 아닙니다. 시베리아의 전통인데 고아시아 전통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짐작합니다. 자작나무 가지 잎으로 몸을 탁탁 두드리는 행위는 단순한 행위 이전에 시베리아 샤먼의식과 관련이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자작나무 잎으로 나쁜 액을 털어주는 의례로부터 유래한 풍속이라고 여겨집니다. 진도 씻김굿에서 하는 망자의 한을 달래주는 이슬털이 의식이 생각납니다. 솥단지 모자에 짚단으로 몸체를 만든 망자의 넋을 비로 쓸면서 노래하는 의례는 애간장을 쓸어내는 굿입니다. 저 아메리카에서 잉카제국을 세웠던 인디언들도 태양제 하는 데 나뭇가지로 사람의 액을 털어내 맑은 영혼이 깃들게 하는 의례를 합니다. 올해 서울숲에서 펼친 통과의례 페스티벌에서 에콰도르 인디오예술단이 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연의 신들에게 이렇게 빕니다.

물, 이물로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소서
나무, 누구도 뽑아버리지 못하는 이 나무처럼 더러운 영혼을 깨끗하게 할 수 있는 힘을 주소서
돌, 이 돌로 우리에게 오랜 세월 견디어 온 강인함과 견고함을 주소서
플룻, 이 플룻으로 우리에게 바람소리같은 연주를 할 수 있는 힘과 기쁨을 주소서
(남아메리카의 태양제 인티라미 축제 의례소리에서)

분명히 동아시아의 고대문화는 태평양 너머 아메리카 인디언까지 서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1~2만년 전부터 아메리카 인디언은 동아시아에서 베링해협을 건너갔으므로 문화적 공통점은 넓게 퍼져 있습니다. 고아시아인의 목욕에는 정화의 의례가 숨어 있고 그 의례에는 신화가 숨어 있었습니다. 내가 20년 전 북아메리카의 그랜드캐년 고원지대를 여행했을 때 일인데 그곳 현지박물관에서 출토한 유물을 보고 깜짝 놀란 일이 있습니다. 허리 잘록한 통나무 절구가 있었고, 수수 짚을 꼬아서 만든 신발이 우리의 짚신모양과 똑같았습니다. 너무 똑 같아 놀란 적이 있습니다. 우연히 문화적 유사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고대의 태평양문명은 고아시아 문화를 문화원형으로 공유하고 있습니다. 비언어적 기록에서 공통의 신화소를 발견하는 일은 고대아시아문명 연구에 중요한 방법론이 될 것입니다.

연해주 우스리스크를 달리면서 고대의 동해문명과 태평양문명을 짐작하는 것이 엉뚱한 생각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행하면서 직관으로 느끼는 예감은 실증주의 고고인류학과의 수준과 무관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게 합니다. 특히 동북아 고대문화에 대한 연구가 전무하다시피 한 게 오늘의 인문학 수준입니다. 고대에 수 만년에 걸쳐 이주하고 교류한 태평양권의 인류사를 어떻게 해명하는가는 우리의 또 다른 정체성입니다.

시베리아 아시아 부족들이 슬라브 러시아제국에 의해 침략 당한 것처럼, 아메리카 인디언도 유럽제국들로부터 생존을 빼앗겼으며 문화적 마녀사냥을 당했습니다. 아직도 신비주의와 야만주의를 덧씌워놓은 것입니다. 고대 아시아문화가 아시아를 넘어 아메리카 인디언의 문화에 이르기까지 태양신을 섬기고 하늘을 우러르며 모든 생물 무생물에 이르기까지 영혼이 깃들고 있다는 생각, 살고 있는 땅을 신성한 대지로 보는 생각, 더러운 영혼을 자연으로부터 정화 받는다는 생각, 이 모든 자연 범신사상은 우주생명문화라는 점에서 같습니다. 범황인문화의 정체성을 밝히는 인문학의 출현을 기대합니다.

항카호수에서 우정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탄 3호차가 대형 사고를 저지를 뻔 했습니다. 빗길에 미끄러져 한바퀴를 돌며 기우뚱 엎어질 뻔 하다가 중앙선을 넘어 섰습니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손잡이만 붙들고 외마디 소리만 질렀습니다. 우리는 운전을 교대로 하였는데 이번 운전자는 운전이 서툴러 돌발사항을 잘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급커브 길에 속도를 미리 낮추지 않다가 돌 모래가 깔린 갓길로 들어서서 그 때서야 급제동을 거니 차는 구슬 위에 달리는 널빤지처럼 주우욱 미끄러졌습니다. 천만 다행으로 마주 오는 차량이 없었습니다. 죽고 사는 게 한순간입니다. 간담이 서늘한 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고국을 떠날 때 차 고사를 정성들여 지낸 덕분이라고 좋아 했습니다. 이제 갈 길은 점점 더 험한데 유라시아대장정 단원들은 모두 새롭게 마음을 다졌습니다.사진7. 솔빈부외성에 오르는 단원들

사진8. 우스리스크에 유라시아대장정을 환영 나온 고려인 여인들

우리는 우정마을에서 고려인이 텃밭에서 심어 기른 신선한 토마토, 오이, 상추로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우정마을에서 2박을 하면서 짐을 재정비 하였습니다. 앞으로 닥칠지도 모를 위험에 대처하여 조직을 다시 정비하였습니다. 지금까지는 도로사정도 좋고 숙박 시설도 비교적 괜찮은 편이지만 하바로브스크를 지나면 야영에서 텐트를 치고 자야 하는 미지의 길입니다. 길사정은 더 나빠지고 답사도 가보질 않은 곳입니다.

연해주는 앞으로 대륙으로 관문을 여는 곳입니다. 동북아에서 가장 다양하게 국제적 문화가 이루어질 수 있는 곳이 바로 연해주입니다. 그곳은 60여 인종이 모여 사는 곳일 뿐만 아니라 대륙에너지의 공급지이며 대륙 실크로드를 여는 길목이기도 합니다. 그중에서도 우스리스크는 벌써 중국, 남한, 북한, 고려인, 사할린동포, 러시아인들의 국제교류가 활발한 국제적인 도시입니다.

우스리스크의 밤은 깊어 가는데 상념은 잦아들지 않습니다. 대륙의 웅지를 품는 청년들이라면 연해주에 가보라고 권합니다. 거기는 서로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경제 활력을 얻으면서 새로 접촉하면서 국제적인 동북아류가 새로 탄생할 곳이랍니다. 그리고 고려인의 숱한 수난의 경험은 한국인이 대륙의 관문을 여는 데 소중한 길 안내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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