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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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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20>

가락국을 위한 희락사모지사(戱樂思慕之事) - 가락국기와 허황옥

"저는 아유타국(阿踰陁國)의 공주인데, 성은 허(許)이고 이름은 황옥(黃玉)이며 나이는 16세입니다. 금년 5월 본국에 있을 때 부왕과 모후께서 저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어젯밤 꿈에 상제(上帝)를 뵈었는데, 상제께서 가락국 왕 수로(首露)는 하늘이 내려보내 왕위에 오르게 하였으니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사람이다, 그가 새로 그 나라에 군림했으되 아직 배필을 정하지 못했으니 그대들은 공주를 보내서 그 배필을 삼게 하라. (…) 너는 여기서 우리와 작별하고 그에게로 가거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다를 건너 멀리 남해에 가서 찾기도 하고, 방향을 바꾸어 멀리 동해로도 가 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이제 보잘것없는 얼굴로 감히 용안(龍顔)을 뵙게 되었습니다."

허황옥은 이렇게 『삼국유사』에 등장한다. 허황옥이 자기 자신을 수로왕에게 소개하는 기이편 '가락국기'조의 이 대목은 『삼국유사』를 통틀어 가장 논란이 많은 대목 중의 하나일 것이다. 논란의 핵심은 허황옥의 출자(出自) 문제, 다시 말해서 "허황옥이 정말 아유타국에서 왔느냐" 하는 것이다. 아유타국은 탑상편 '금관성 파사석탑'조에 '서역(西域) 아유타국'으로 보다 분명히 표기되고 있는데, 지금부터 2000년 전에 어떻게, 멀리 인도에 있는 '아유타'라는 나라에서 김해까지 배를 타고 올 수 있었을까 하는 데에서 논란이 시작된 것이다.

크게 나누어 보면 '가락국기'의 기사를 그대로 믿는 입장이 있고, 이에 반하여'아유타국'에서 왔다는 허황옥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 있다. 이 두번째 입장은 다시 여러 갈래로 나뉘는데, 허황옥이 떠나온 곳을 발해 연안으로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당시 한(漢) 군현이던 낙랑 지역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이와는 정반대 방향인 일본 큐슈 동북방 지역으로 보는 견해 등 다양한 설이 있다.

이 대목에서 '가락국기'가 쓰여진 경위를 한번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연은 '가락국기' 서두에서 이 기사가, 고려 문종 때 금관지주사(金官知州事)를 지낸 문인(文人)이 지은 것을 자신이 축약해서 싣는다고 밝히고 있다. 최근의 연구에서 이 문인의 이름이 김양일(金良鎰)임이 밝혀졌으며, 그가 왕명에 의하여 이 글을 찬술했다는 설도 있다. 그렇다면, 고려 문종 때인 11세기에, 김해 지역을 관장하던 고위 관리가 왕명을 받들어 찬술했다는 점에서 '가락국기'는 어느 정도 신빙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가락국기'에 대한 논란이 야기된 것은,'가락국기'가 쓰여진 이후에 허황옥이 아유타국 출신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행해졌던 일종의 상징조작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다름 아니라, 조선조 초기인 예종 원년(1469년)의 문헌에 허왕후릉 이야기가 나오면서 허황옥에게 '보주태후(普州太后)'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조 후기 정조 17년에 납릉(수로왕릉) 전각들이 증축될 때에 능의 정문에 인도 아유타국의 문장(紋章)이라는'쌍어문(雙魚紋)'이 그려졌다는 기록이 있는 것이다.

조선 후기 이래로 김해 일원에 확산된 쌍어문과 보주태후라는 시호는 모두 '가락국기'보다 나중에 만들어진 것임에도 몇몇 학자들은 쌍어문과 보주태후라는 시호가 허황옥과 아유타국에서 유래된다고 내세우면서 '가락국기' 기록을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맞서서, 다른 연구자들이 후대 기록에 의한 소급 적용의 모순을 지적하게 되면서 논란은 더욱 가열되고 있는 형편이다. 어찌 보면, 쌍어문과 보주태후라는 키워드가 '가락국기'의 신빙성을 오히려 무력화시키는, 소모적인 논쟁을 자초한 측면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와 관련하여 국사학계에서는 '가락국기' 중의 수로왕 탄강 신화를, "철기문화를 보유한 북방계 유이민 집단이 김해로 진출하여, 이미 그곳에 터잡고 있던 9간으로 대표되는 토착세력을 흡수하여 정치적으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해석하면서, 허황옥 도래 설화도 "낙랑, 대방 등 한반도 서북 지역에서 한(漢) 군현과의 교역을 담당했던 중국계 상인집단 출신이 김해 지방으로 진출하여 가락국 초기에 왕비족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김해 일대에서 행해진 고고학적 발굴 결과들을 바탕으로 내려진 이런 견해를 고지식하게 받아들인다면 '가락국기'는 허황한, 그야말로 허구(虛構)가 아닐 수 없게 된다. 그러나 허황옥 관련 기사는 허구로 보기에는 너무나 사실적(寫實的)이다. '가락국기'에서 수로왕이 허황옥을 배필로 맞이하는 장면이,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흡사 중계방송 하듯이 소상하게 그려지고 있는 점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건무 24년 무신(기원 48년) 7월 27일 조회할 때 아홉 간들이 수로왕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강림하신 후로 좋은 배필을 구하지 못하셨으니 저희들의 딸들 중에서 가장 얌전한 자를 골라 대궐로 들여 배필로 삼도록 하시기를 청합니다.'

그러자 왕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내려온 것은 천명(天命)이매, 나에게 짝을 지어 왕후를 삼게 하는 것도 역시 천명일 것이니 경들은 염려 말라.'

왕이 마침내 유천간(留天干)을 시켜 가벼운 배와 좋은 말을 가지고 망산도(望山島)에 가서 기다리게 하고, 또 신귀간(神鬼干)은 승점(乘岾)으로 가게 했더니 바다 서쪽에서 붉은 빛 돛을 단 배가 붉은 기를 휘날리면서 북쪽을 바라보고 오고 있었다. 유천간 등이 먼저 망산도에서 횃불을 올리니 사람들이 다투어 육지로 내려 달려오므로 신귀간은 이것을 바라보다가 대궐로 달려와서 왕께 아뢰었다. 왕이 듣고 기뻐하며 아홉 간들을 보내어 찬란하게 꾸민 배로 그들을 맞이하여 곧 모시고 대궐로 들어가려 하자 왕후가 말했다.

'내가 본래 너희들을 모르는 터인데 어찌 경솔하게 따라갈 수 있겠느냐.'

유천간 등이 돌아가서 말을 전하니 왕은 옳게 여겨 유사(有司)를 데리고 거동하여, 대궐 서남쪽 60보쯤 되는 산기슭에 장막을 치고 왕후를 기다렸다. 왕후는 산 바깥쪽 별포(別浦) 나루터에 배를 대고 육지에 올라 높은 언덕에서 쉬고, 입었던 비단바지를 벗어 산신령(山神靈)에게 폐백으로 바쳤다. …… 왕후가 왕이 있는 곳에 가까이 오자, 왕이 나아가 맞아서 함께 장막 궁전으로 들어왔다. 후행 이하 여러 사람들은 뜰 아래서 현신하고 곧 물러갔다."

바로 이 다음 대목에서 허황옥은 자신을 아유타국 공주라고 밝히고, 자신의 부모들이 상제의 명을 받아 자신을 수로왕에게 보냈음을 고하는 것이다. 이에 수로왕은, 자신 또한 허황옥이 멀리서 올 것을 짐작하고 왕비를 들이라는 신하들의 청을 거절했다고 얘기하여 허황옥을 왕비로 맞이한다. 그리하여 수로왕과 허황옥은 두 밤, 하루 낮을 지내고 궁으로 돌아온다.

'가락국기'에는 수로왕과 허황옥의 국혼(國婚) 과정이 매우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은 아마도 우리나라 고대의 혼례기록 중 가장 상세한 기록이 아닐까 한다. 동원된 인원과 교통수단들이 자세할 뿐 아니라, 혼인과 관련된 거처도, 임시처소로 설치한 만전(幔殿)과 수로왕이 허황옥을 맞아들인 유궁(帷宮), 허황옥 후행으로 온 일행이 묵은 빈관(賓官) 등이 언급되고 있다.

허황옥이 배에 싣고 온 물품들 또한 다양하여 허황옥 일행이 가지고 온, 말하자면 혼수(婚需)로는 중국 상점의 잡화라는 뜻의 한사잡물(漢肆雜物)로 금수능라(錦繡綾羅), 의상필단(衣裳疋緞), 금은주옥(金銀珠玉)과 구슬로 만든 패물들이 있다. 그밖에 '가락국기'에는 나오지 않지만, '금관성 파사석탑'조에서 항해의 안전을 위한 액막이 탑으로 아유타국에서부터 싣고 왔다는 파사석탑이 아직도 김해 수로왕비릉 앞 전각에 모셔져 있다.

그런가 하면 허황옥 일행이 배에서 내려서 궁에 이르는 연도(沿道)의 지명들도 매우 구체적으로 열거되고 있다. 망산도, 승점 외에, 허황옥이 처음 도착하여 닻을 내린 주포촌(主浦村), 산신령에게 비단바지를 바쳤던 능현(綾峴), 붉은 기를 달고 들어왔다는 기출변(旗出邊) 등이 그것이다. 이들 지명은 그 위치 비정에 다소 이론(異論)이 있기는 하지만, 그 이동 경로가 지금도 재현할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하다고 한다.

그뿐 아니다. '가락국기'는 또 김해 지방에, 유희와 오락으로 옛일을 추억하는 행사, 즉 희락사모지사(戱樂思慕之事)가 대대로 이어지면서 연희되고 있었음을 덧붙이고 있다.

"매년 7월 29일이면 지방 사람들과 서리(胥吏)·군졸(軍卒)들이 승점 고개에 올라가서 장막을 치고 술과 음식을 먹으면서 즐겁게 논다. 이들이 동서로 두목을 내보내고 장정들을 좌우편으로 갈라서 한편은 육지에서 말을 몰아 달리고, 다른 한편은 뱃머리를 나란히 몰아 북으로 고포(古浦)를 향하여 먼저 닿기 내기를 한다. 이것은 대개 옛날에 유천간과 신귀간 등이 왕후가 오는 것을 바라보고 임금에게 달려와서 서둘러 보고하던 자취이다."

이 희락사모지사의 연희는, '가락국기'의 원전 또는 그 이전의 기록들이 이미 실전(失傳)된 마당에 또 다른 역사적 자료로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이 행사는 '당시 상황의 재현'이라는 뜻에서 역사기록과 맞먹는 중요성을 지닐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이 합리적인 행위들로만 이루어지지 않듯이, 역사 또한 객관적인 기록만으로 채워지지는 않는 법이다. 고려 문종 때 금관지주사가 지었다는'가락국기'의 원본이 없는 이상, 수로왕과 허황옥의 국혼 장면을 연희 형식으로 전해내려 온 희락사모지사는, 그것이 바로 가락국의 역사가 될 수도 있다. 이런 관점에 서면, 옛부터 연희 형식으로 전해내려 왔다는 행사뿐만 아니라 근래 김해시에서 개최되고 있는 '가락문화제'나 '가야세계문화축전' 같은 행사들도 현대판 희락사모지사로서, 가락국의 옛일을 기리는 면면한 전통을 잇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진 file명 "01가락문화제_계욕제_허황옥의 등장"
2005년 4월 제29회 가락문화제 중의 연극 "계욕제, 수로왕 탄강과 건국/결혼"(출연 부산예술대학) 중 허황옥이 등장하는 대목.

사진 file명 "02수로왕비릉 비석과 파사석탑"
'가락국 수로왕비/보주태후 허씨릉'이라는 글씨가 뚜렷한 수로왕비릉 비석과 왕비릉 앞 비각에 있는 파사석탑.

사진 file명 "03납릉정문 쌍어문"
수로왕릉 납릉 정문의 쌍어문 및 그 확대 사진.

사진 file명 "04김해시 일원의 쌍어문 장식들"
왼쪽부터 진해시 용원동 유주각 출입문의 쌍어문 그림, 김해 시내 다리 난간의 쌍어문 조각, 수로왕릉 앞 보도 난간의 쌍어문 장식.

사진 file명 "05망산도와 추정 유주암"
경남 진해시 용원동의 망산도와 그 앞 바다의, 유주암으로 추정되는 바위. 망산도는 허황옥이 처음 배에서 내린 곳이고 허황옥이 타고 온 돌배가 바다 속에 뒤집혀서 유주암이 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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