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 아메리카대륙 정상들이 모이는 제4차 미주정상회담을 앞두고 중남미 국가들이 결속을 다지며 미국의 영향력을 배제하자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화제다.
중남미 국가들의 이와 같은 움직임은 지난달 말 아르헨티나의 유명한 휴양도시 바릴로체에서 열린 19개국의 중남미 외무장관 회담에서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문제의 발단은 미국 정부가 중미에 이어 남미까지 군사력 증강과 영향력 강화를 노리고 메르코수르 회원국인 파라과이에서 독단적으로 군사훈련을 실시하고, 마약조직 소탕이라는 명분을 앞세워 미 해병대 병력의 파라과이 주둔을 합법화하는가 하면 미 연방수사국(FBI) 지부까지 설치한 사실 등이 알려지면서부터 시작됐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외무장관 주도로 중남미 국가들의 외무장관들은 "남미 문제는 남미 국가들끼리 풀어야 한다"는 공동선언문을 채택해 중남미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강화 움직임에 쐐기를 박고 나선 것이다.
이와 함께 중남미의 빈 라덴으로 불리는 전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 루이스 뽀사다 까릴레스라는 테러리스트의 신병을 베네수엘라로 인도하라는 소송을 현재 미 텍사스주 엘파소 법정에서 벌이면서 미국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이 문제는 목하 중남미와 미국 간에 최대의 정치적 현안이기도 하다(5월30일자 <카스트로 '미국은 테러리스트 보호 말라'> 참조).
호세 미겔 인술사 미주기구(OAS) 사무총장은 "미국 정부는 쿠바의 반(反)카스트로 행동주의자이자 테러리스트인 까릴레스의 신병 인도를 요구한 베네수엘라 정부의 요구를 들어주어야 할 것"이라며 "세계는 지금 테러리스트와 전쟁 중에 있으며 까릴레스는 마땅히 법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인술사 총장은 또 "미국에 불법입국한 까릴레스에 대해 미 이민법을 적용해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추방해야 한다"고 베네수엘라 정부의 요구를 지지하고 나섰다.
까릴레스는 지난 76년 베네수엘라 수도 카라카스를 떠나 쿠바로 향하던 민항기를 공중폭파시켜 쿠바인 탑승객 73명 전원의 생명을 앗아간 폭파 혐의와 아바나 호텔 폭탄테러 등 쿠바에서 일어난 각종 폭탄테러의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다. 또 지난 2000년에는 파나마에서 개최된 이베로 아메리카 정상회담 장소에 폭약을 설치해 카스트로의 암살을 기도한 혐의도 받고 있다. 그는 현재 미 엘파소 법정에서 불법입국자 신분으로 재판 받고 있으며 미국에 정치적 망명을 요구해 놓은 상태다.
엘파소 법원의 윌리암 아보트 판사는 "까릴레스가 미 이민법을 어긴 게 확실히 드러나고 정치적인 망명이 받아 들여지지 않는다면 당연히 추방될 것"이라고 밝혔다고 베네수엘라 현지언론들이 보도했다. 테러리스트인 까릴레스의 장래는 결국 부시 행정부의 정치적인 판단에 의해 추방되거나 합법적인 미국체류가 받아들여지는 쪽으로 결정될 것이라는 얘기다.
***미국판 X-파일 열릴까**
한편 까릴레스의 변호인 측은 까릴레스가 미 정보국 요원으로서 미국에 공헌한 그의 업적들을 예로 들어 그의 정치적인 망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하면서 "만일 미국 정부가 까릴레스를 베네수엘라로 인도한다면 그는 베네수엘라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게 될 것"이라고 미 법원의 인도주의적인 판단을 요구했다.
그러나 남미 언론들은 미국 정부가 정작 우려하는 것은 까릴레스의 인권이 아니라 그가 가지고 있는 미국의 대중남미 정책들에 대한 각종 정보들일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만일 그가 추방되고 베네수엘라 법정에 다시 서게 돼 미 중앙정보국 요원 시절 취득한 중남미정책과 관련한 미공개 사실들을 폭로하면 그야말로 미국판 X파일이 열리는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미국은 까릴레스를 추방해 베네수엘라 정부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국익에 도움이 안 될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차베스의 신병인도 요구를 무시하고 까릴레스의 주장을 받아들여 망명을 허용할 경우, 쿠바와 베네수엘라를 비롯한 남미 국가들의 반발을 잠재울 마땅한 카드가 없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는 게 현지언론들의 평가다.
이 와중에 터진 팻 로버트슨 목사의 '차베스 암살' 주장은 부시 행정부를 더욱 곤경에 빠뜨린 것으로 알려진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지금이야말로 미국을 확실하게 압박할 호기라고 판단해 까릴레스와 로버트슨 목사의 소환을 연계하여 반미의 목청을 높이고 있는 상황이다.
미국이 차베스와 카스트로의 요구를 무시하고 까릴레스의 정치적인 망명을 허용해 중남미 전체국가들의 반발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그의 신병을 베네수엘라로 인도해 미국의 대 중남미 전략의 과거 X파일이 열리는 계기를 만들 것인가.
한편 오는 11월 제4차 미주정상회담에서 최근 남미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는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을 견제하고 중남미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강화해야 하는 부시 행정부로서는 중남미 정상들을 달랠 마땅한 선물보따리가 없다는 것도 부시가 안은 딜레마라고 현지언론들은 전망하고 있다.
"초대강국 미국이 자신들의 안방과도 같은 중남미 대륙에서 우고 차베스라는 강적을 만나 고전중인 것은 틀림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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