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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바다의 동해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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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바다의 동해문명

김봉준의 '유라시아 문화기행' <4> 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는 두만강을 넘으면 펼쳐지는 대륙입니다.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 러시아 땅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도시가 있는 곳입니다. 한반도와 붙어있어서 동해안 해변 길로 달려가면 바로 들어가는 연해주를 동해 먼 바다로 에둘러 갔습니다. 동해는 맑고 깊었습니다. 숨가쁘게 달려야 했던 육지와는 다르게 넉넉한 바다에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배에 우리 일행들은 목숨을 맡긴 셈입니다. 몸도 마음도 차도 모두 다 배에 맡긴 채 침상에 누웠습니다. 배도 누워 사람들과 화물을 가득 담고 동해를 천천히 미끄러졌습니다. 유라시아대장정 단원 40명과 12대의 지프차, 보따리 무역상들, 관광객, 친지방문자들을 다 떠안고 동해를 헤엄치고 있었습니다.

<사진1> 연해주 지도

동해는 역시 깊고 청정한 바다입니다. 태평양의 축소판이라고 할 정도로 난류와 한류가 원활히 흐르는 바다랍니다. 비슷한 연안해인 유럽의 지중해와 비교하면 지중해는 해류가 대서양과 막혀 갇혀있는 바다인 반면, 동해는 태평양과 남북으로 탁 트인 바다입니다. 거기다가 동해를 둘러싸고 있는 연해주, 한반도, 일본은 모두 울창한 숲이어서 육지의 많은 부유생물(플랑크톤)이 바다로 흘러들어갑니다. 그러니 고기의 먹이가 되어 풍부한 바다 어장이 됩니다. 반면에 주변 땅이 사막화 되가는 지중해는 물이 탁하고 어장도 풍부하지 않습니다. 바다 차이만큼이나 문명의 차이도 만들어집니다.

도시문명으로 발전해온 그리스ㆍ로마문명과 숲에서 살아온 동아시아의 고대문명은 참 대조적입니다. 그리스 로마문명 유적지를 보면 두드러진 특징이 있습니다. 공회당, 극장, 목욕탕, 시장 등의 돌로 쌓은 공공건축이 도시의 중심에 있습니다. 농경과 유목의 생활을 변두리로 두고 상업도시를 중심에 둔 도시문명입니다. 여인숙, 하수구, 수세식 변소, 심지어는 창녀촌까지 두고 있는 이 고대도시들은 오늘날 도시의 전범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도시문명이 누리는 편리와 효능은 거의 모두 그리스ㆍ로마문명으로부터 배운 것이지만 숲을 사막으로 바꾼 역사도 그리스 로마문명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지중해 지역이 고대에는 숲이었다고 하니 숲을 베어내고 도시를 조성하면서 지중해 연해지역은 점점 푸르름을 잃어갔습니다.

동해를 끼고 역사한 동아시아의 문명은 도시문명이 아닙니다. 흙과 나무로 만든 집들이 숲으로 둘러싸인 '숲의 문명'입니다. 문명은 숲으로 돌아가 자취 없고 숲은 언제나 문명을 흡수할 만큼 관대한 터가 동아시아 터였습니다. 지금까지 동해가 푸른 것도 태평양 해류와 연안지역의 숲 덕분입니다. 동해를 세로 지르는 백두대간과 태백산맥이 있고, 일본도 산들로 빙 둘러쳐져 태평양의 거친 해류까지 막는 방패 역할을 합니다. 연해주는 보시다시피 드넓은 숲의 대륙입니다. 그 한 복판, 싱싱하게 푸르른 동해에 누워서 보낸 하루는 참 행복했습니다. 이날, 나와 동해의 관계는 인류문명을 자연과 우주 안에서 바라보게 하는 시적 관계였습니다. 노래와 술과 환담이 아니어도 드넓은 수평에 심취한 하루였습니다.

역사적으로 동해는 고구려와 신라, 발해가 일본에 문물을 전하는 해상로이기도 하며 근대에 와서는 열강들이 영토확장을 위해 전쟁터로 삼았습니다. 오늘에 와서 동해는 점점 인간으로부터 보호받고 있지 못합니다. 주변은 빠른 서구식 근대화로 더 이상 '숲의 문명'도 아니며 영토분쟁의 소지를 지닌 바다입니다. 지구를 우주항공 사진으로 관찰해 보면 오랜 기간 점점 도시가 늘어나는 모양이 잡히는데, 이 형세가 흡사 사람 체내에서 암세포가 증식되는 모양과 같아 보입니다. 동해 주변도 그렇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는 지구 생태론 '가이아'의 관점에서 보더라도 인간의 거대한 도시화는 생태계의 균형을 깨는 일방적인 파괴입니다.

풍속은 자연풍토의 영향을 받으며 내려옵니다. 자연은 배려하지 않는 도시화는 위험합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독선과 배제의 논리도 세속화한 도시문명의 결과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유일신 이외에는 모든 생명을 피조의 대상으로 보면서 '나 이외에는 모든 것을 섬기지 마라' 했으니, 나 이외 모든 것은 세속화합니다. 생물 간에 섬기고 존중하는 태도는 사라지고 대상화한 즉물주의가 자연에 대한 태도이자 문명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진 세속도시입니다. 오늘의 세속도시는 오래전 자연과 대립적 인공도시를 건축하기 시작한 그리스ㆍ로마문명으로부터 이미 시작했습니다. 사진2- 자루비노항@김봉준

동해바다에 대한 상념에 한참 젖어 있던 밤을 지나 다음날, 2005년 7월 25일 낮12시 유라시아대장정 단원들은 자루비노항에 도착하였습니다. 두만강을 바로 넘으면 핫산, 조선인이 처음 마을을 이루고 정착한 곳이 나오고 그 옆 항구입니다. 해외에서 처음 독립운동을 시작한 곳입니다. 안중근이 동지들과 조국의 독립을 손가락을 끊어서 맹세했던 '단지동맹'이 있었던 곳이 여기서 멀지 않은 지역에 있습니다. 지금 핫산은 시베리아의 가스파이프가 묻혀서 한반도로 내려가는 대규모 에너지 공급단지가 건설될 예정지입니다. 한국은 아랍에서 공급되는 석유자원 확보가 어려워질 때를 대비하는 대책으로 두말할 것도 없이 시베리아의 천연 에너지 자원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백년 이상 공급할 수 있는 대체 에너지 자원입니다. 핫산지구는 몇 년 안가서 큰 변화가 있을 것입니다.

연해주와 러시아에 대한 종합적인 경제 협력의 전략이 수립되어야 할 시급한 시점입니다. 유라시아 대장정 일행은 자루비노항 세관을 통과하는 데 무려 9시간이 걸렸습니다. 차대번호와 배기량 등 차적을 일일이 확인하고 잘못 기록된 차량은 재신고하고 벌금을 물어야 했습니다. 여기는 연해주에서도 남쪽 끝. 두만강이 인접한 핫산 지역입니다. 구한말 이전부터 빈번히 드나들던 연해주에서 조선 동포들은 이곳 핫산에 처음 이주민촌을 만들었답니다. 지신허 마을이 기록에 남은 첫 정착촌입니다. 연해주에 가족을 따라 이주해 살던 일제시대 시인 이용악은 '풀버렛 소리'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일부를 인용합니다.

우리집도 아니고
일가집도 아닌 집
고향은 더욱 아닌 곳에서
아버지의 침상 없는 최후 최후의 밤은
풀버렛 소리로 가득차 있었다.

노령을 다니면서까지
애써 자래운 아들과 딸에게
한마디 남겨두는 말도 없었고
아무을 만의 파선도
선룽한 니코리스크의 밤도 완전히 잊으셨다
눈빛 미명은 고요히
낯을 덮었다
아버지 침상 없는 최후 최후의 밤은
풀버렛 소리 가득차 있었다.

연해주는 물론 먼 옛날 고구려, 발해 땅이었습니다. 그러다 조선이 두만강을 국경으로 하면서 중국 땅이 되었지요. 그러다가 1860년 러시아가 중국한테 베이징 조약으로 받은 땅입니다. 당시 청나라는 서방 열강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러시아를 서방제국의 견제세력으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러시아는 얼지 않는 항구를 갖고 싶어 동해 진출을 노렸습니다. 중국은 이로써 동해연안지역을 잃었습니다. 러시아는 중국인을 내쫓고 농사 잘 짓기로 소문난 한국인을 환영했답니다. 마적떼가 많아 러시아 경비대는 재산과 생명을 보호해 주고 한인은 식량을 경비대에 주는 관계였습니다. 일제시대 1930년대만 해도 한인은 연해주에 18만이 살았습니다. 당시 한반도 조선인 인구가 2000만도 안될 때이니 1% 가까이가 이곳으로 갔지요. 논농사가 애초에 안 된다는 지역을 개척하면서 우스리스크까지 논농사를 개간하고 이 일대를 한마당이라 불렀습니다. 지금도 그곳에 가면 버려진 옛 논농사 터에서는 야생 벼가 피고 지고를 반복하는 곳이 있습니다.사진3- <1937년 고려인 강제이주>. 김봉준 작

그러다가 1937년 소련 스탈린 정권은 한인을 모조리 중앙아시아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키르키즈스탄 등의 오지 벌판으로 강제이주 시킵니다. 영문도 모른 채 가을 농사 수확기에 살림을 챙길 여유도 안주고 강제로 끌려갔고 저항하는 사람은 총살을 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우스리스크 가는 중간에 라주돌노예역이 있습니다. 여기에 총집합 시켜 30~40일 동안 시베리아 기차를 태워 중앙아시아로 끌고 갔습니다. 가면서 20~30%로 추정되는 동포가 추위와 굶주림에 죽었습니다. 폐렴, 홍역, 디프테리아, 성홍열 등 질병이 돌아 특히 갓난아이의 90%는 죽었다고 합니다. 화물 기차에서 짐짝처럼 실려 가다가 추위와 굶주림에 못 견뎌 간이역에 쉬는 틈에 먹을 것을 구한다고, 용변을 본다고 내렸다가 기차가 떠나는 바람에 시베리아에서 길을 잃고 헤매며 죽어갔습니다. 시베리아는 한인의 귀곡성이 아직 묻혀 있는 곳입니다. 제대로 진혼굿 한번 못했습니다. 저는 삼년전 연해주를 처음 갔다가 이 슬픈 동포사를 알고 나서 참을 수 없는 비애를 달랠 길 없어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1937 고려인 강제이주> 그림입니다.

사진4- 빵과 소금을 전하는 러시아 여인들

다음날 아침 블라디보스토크 중앙광장에서 공식 환영행사를 치뤘습니다. 한국에서 김원기 국회의장, 박계동, 이화영, 유기홍, 고진화, 이은영 등 국회의원이 참석했고 블라디보스토크 시장이 환영사를 하며 시작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민속 예술단과 한국의 풍물은 분위기를 한껏 돋우었습니다. 러시아는 반가운 손님에게 빵과 소금을 전달하는 의례가 있습니다. 한국은 떡과 빛을 그릇에 담아 전하는 것으로 응했습니다. 이것이 한ㆍ러 평화맞이 의례입니다. 한국에서는 김원기 국회의장이 축사를 하여 정치외교적 의미를 높였습니다. 부슬비가 솔솔 내리는 광장에서 한국에서 달려온 유라시아대장정 단원들을 우호협력의 상징으로 받아들이는 주정부 관계자와 시민을 볼 수 있었습니다. 특히 고려인 동포와 유학 온 대학생들은 한껏 자부심에 부풀어 풍물판에서 주인이 되어 춤을 추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풍물은 동적인 악대입니다. 관중 뒤에서 들어와 관중을 을자진으로 감고 방울진으로 싸잡아 도는 연출이 가능한 풍물굿은 주와 객을 하나로 만듭니다. 싸잡고 돌며 객을 주가 되게 하고 주가 변두리가 되는 모심의 문화의례입니다. 우리가 원하던 국제적인 유라시아 평화맞이 의례 연출이 첫 결실을 맺었습니다.

사진5. 상쇠 김원호씨가 이끈 평화맞이의례사진6- 블라디보스톡 광장에서 환영행사

블라디보스토크 공식 환영행사가 있던 7월 26일 화요일 비가 주룩주룩 내렸습니다. 우산을 받치고 모였습니다. 한·러 관계자들, 고려인들, 시민들, 유학생들 등 100여명이 참석 했습니다. 특히 고려인 4세, 5세로 보이는 동포들에게 무한한 자부심을 주는 행사임이 틀림없었습니다. 잊혀가던 할아버지 조국에서 멋진 자동차를 가지고 러시아인이면 누구나 달려가 보고 싶어 할 시베리아 땅을 횡단하니 고려인으로서는 남다른 감회가 있을 겁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끌려가던 치욕의 길을 유라시아 대장정은 한인과 고려인이 함께 자랑스러운 길로 만들고 있는 것일 겁니다.

사진7- 신한촌의 마지막 남은 옛집, 서울2번지

우리는 다음날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을 찾았습니다. 이곳에는 한국인들이 세운 기념비가 하나 있습니다. 동북아평화연대 김현동 사무처장은 이번 유라시아대장정 연해주 길 안내를 맡으면서 신한촌에 대하여 설명해 주었습니다. 여기에는 아직도 서울이란 거리 지명이 살아있답니다. 서울가 2번지 집이 아직 행정명으로 남아 있습니다. 주변은 아파트로 변했으나 그 집이 옛모습을 간직한 마지막 남은 신한촌입니다.

한국 동포이민사를 정리할 때 이민사 중에서 4대 비극사를 꼽습니다. 신한촌 학살 사건, 연해주 동포 강제이주 사건, 관동대지진 조선인 학살 사건, 그리고 LA 폭동사건입니다. 그중 두개가 연해주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신한촌 사건은 블라디보스토크 시내에 한인들이 밀집한 동네가 있습니다. 1920년 4월4일 일본군은 신한촌을 야밤에 급습하여 학살 파괴 방화 체포의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곳이 독립운동의 근거지라는 이유로 민간인을 상대로 저지른 만행입니다. 동포 수백명이 죽고 우국지사들이 행방불명되었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극동대학에는 한국어과가 있습니다. 10여년 전 고려합섬의 장치혁 회장이 후원하여 대학 건물을 마련하였답니다. 극동대는 1900년부터 한국어과가 있었다고 하니 세계 최초로 외국에서 설립한 한국어과라고 자랑합니다. 105년 전통입니다. 한국의 국제교류재단에서 1년에 10만불 씩 지원이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옥스포드 등 서방의 한국어 연구소에는 100만불을 지원한다는데 거기에 비하면 너무 차이가 많습니다. 그나마 올해로 지원을 그친다고 합니다. 한ㆍ러 문화교류에 좋지 않은 일입니다. 도서관을 가보았습니다. 오래된 한국 잡지와 신문, 북한 로동신문도 있었습니다. 로동신문 1960년 4월 하순의 신문을 펴보니 4.19 당시 상황이 바로 신문에 올라 있는 것이 눈길을 끕니다. 신문 전체를 4.19 기사로 도배하고 있었습니다. 한국학과장은 30대 청년입니다. 여기서는 나이와 상관없이 능력에 따라 높은 지위를 얻을 수도 있답니다.

우리 일행에는 러시아인 4명이 합류하였고 부산에서 함께 동행해온 고려인 두 명까지 합쳐서 42명의 큰 대오를 이루며 블라디보스토크 시가를 행진 했습니다. 오늘밤은 블라디보스토크 근교 해변가에서 민박을 하기로 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이곳으로 재이주해 온 고려인의 집입니다. 저녁파티에서 우리는 보드카와 맥주를 마시며 러시아 우스리스크 신문기자 이라의 건배로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한러의 우정과 친선을 바라며!"사진8- 환영하는 러시아 청소년들

연해주에는 중국 조선족 동포들도 노무자로 와 있었습니다. 거리를 지나다 보면 북한에서 온 벌목공 노동자들과 유학생들, 섬유공장 직공으로 와 있는 여공들도 만납니다. 중앙아시아와 사할린에서 온 고려인들과 한국에서 온 상업인들, 관광객들이 모여서 범한인계가 이루어지는 곳이 연해주입니다.

러시아인이 한국에 대하여 우호적인 것도 고려인들과 벗을 했던 역사적 경험 때문입니다. 한·러 민간교류는 오래전 고려인의 러시아 진출에 힘입어 이제 새로운 변화가 싹트고 있습니다. 범한류의 흐름은 연해주를 상륙해서 러시아인들과 접촉하며 역동적인 경제, 문화의 변화를 가져올 것입니다. 고려인의 문화적 친교, 남한의 자본과 기술, 북한의 양질의 노동력, 조선족의 상술이 연해주로 합류하고 있습니다. 숲과 바다로 이루어진 '동해연안지역은 유구한 역사가 말해주듯이 새로운 '동해문명'의 시대를 맞이할 것입니다. 그 한복판에 범한인계가 주역으로 자리할 것입니다.

유라시아 대장정은 다음 목적지 우스리스크로 달려갑니다. 그곳은 범한인계가 합류하는 교통의 요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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