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린 선원, 북방 최초의 비구니 선방**
늦여름 오대산에는 전나무 숲과도 같이 밀림한 비가 쏟아져 내렸다. 남대 지장암, 월정사 큰절을 지나, 상원사로 향하는 길로 접어들자 왼편으로 표지판이 고대 나타난다. 푸른 전나무 숲을 일주문처럼 양편으로 거느린 길, 하늘에서는 굵은 빗줄기가 땅으로 내리꽂히고, 전나무 숲 그늘 아래 땅에서는 검푸른 마디초가 대바늘과도 같은 기상으로 하늘로 솟구치며 자라고 있었다. 삽시간에 불어난 오대천이 궁궁 깊은 물소리를 내며 객의 젖은 발뒤꿈치로 감겨 든다. 요사채로 쓰고 있는 육화료 처마 밑으로 뛰어들어 비를 긋는다. 도량 맞은편의 기역자 백골(白骨) 기린(麒麟) 선원, 기왓골을 타고 내려온 빗물이 폭포처럼 휘어져 쏟아졌다.
사람 기척 없는 비 오는 산사, 다섯 칸 계단 위 선방 댓돌 위에는 더러 운동화가 섞이기도 하면서 하얀 고무신들이 줄지어 늘어 놓였다. 얇은 대나무 발 뒤로 부도처럼 움직임을 끊고 정(定)에 든 선객들의 몸채가 비로소 보인다. 땅을 울리는 듯한 빗소리도 도무지 안중에 없나 보았다. 구름장이 얇아지나 싶더니, 선방 처마 밑 그늘이 조금 묽어지고, 유리창을 해단 선방 뒤편 벽에 걸린 동그란 밀짚 모자 위로도 맑은 빛이 내려와 앉는다.
산중의 하루가 삽시간이듯, 천둥과 번개까지 더불고 위세 당당하던 비 그침도 순간이었다. 지장전 법당 뒤를 병풍처럼 둘러친 산에서 내려오는 서늘한 기운은 느닷없는 여름 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라 안 산에서는 소나무가 자라지 않는 곳이 드문데, 이상도 해라, 간혹 잣나무와 소나무가 섞이기는 해도, 이곳에서 대종을 이루는 나무는 전나무이다. 비는 그쳤건만, 귀 속에 남아 있는 빗소리는 잦아들지 못하고 여전히 소란하다. 이미 산중에는 보랏빛 벌개미취가 피어나고 있었다. 끝물 원추리도, 더욱 작아진 동자꽃도 드문드문 보였다. 해제가 얼마 남지 않았다.
기둥에 기대고 서서 앉지도 않고 선 채로 공부하여 49일 만에 깨쳤다는 공부인도 있거니와, 앞으로 나아가려 하나 길이 없는 듯이, 몸을 돌려 물러서려 하나 문도 없는 듯이 애써야 할 터였다. 드디어 한선(漢禪) 입승 스님의 좌복 위에 놓여 있던 죽비가 들리고, 이어서 두 손으로 마주잡아 세 번 쳐 소리 낸다. 상이 있는 것은 모두 변함이 있으니, 어떤 상도 상 아님을 알면 여래를 보는 것이라 했으나, 선불장(禪佛場) 으뜸 할아비인 달마 한 분도 모셔 두지 않는다면 그 또한 섭섭할 일이었다. 어간문 맞은편 벽, 그곳에는 늘 달마 스님이 잠도 없이 퉁방울 눈을 부라리며 선객들을 다그치고 계신다. 문에 쳐진 발이 걷혀지니, 방을 가로지르는 횃대에 걸쳐진 가사, 그리고 벽에 바싹 붙어 놓인 좌복들이 보인다. 생사를 밝히려는 격렬한 전장, 후욱하니 더운 기운이 방밖으로 끼쳐졌다. 하루 열 시간 이상, 스무 명이면 맞춤한 이 곳에 올 하안거 동안에는 스물아홉 명의 수좌가 좌복을 폈다. 주지 스님을 비롯한 외호 대중도 여덟이나 되었다.
선방에서 죽비를 잡고 놓는 입승 스님은 객을 방에 들이지 않았다. 이(咦)!! 말의 자취를 끊어라!! 도를 닦는 일에 있어 들려 줄 말도, 들을 말도 없다 하신다. 그이가 뒷배 삼고 있는 분은 부처이기도 할 터이나, 이 유서 깊은 도량에서 정진을 아끼지 않았던 선학(先學)들의 자취도 더불어 육중한 것이다. 닫힌 문 앞에서 하릴없이 돌아서기는 하였으나 객은 조금도 서운하지 않다.
<화엄경>에서 이르는 "동북방 청량산에 문수보살이 계시면서 일만의 보살을 거느리고 늘 설법하는" 오대산의 자취는 <삼국유사>에서 비롯된다. 중국의 오대산(청량산)에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온 자장은 일만 명 문수 보살이 머물고 있다는 이곳에 부처의 정골 사리를 모시고 적멸보궁을 창건함으로써 개산(開山)을 했다. 신라의 보천, 효명, 두 왕자는 진여원(상원사 전신)을 지으니, 한강물의 시원(始原)이 된다는 서대의 우통수로 차를 달여 공양을 올리고, 푸른 연꽃이 피어난 곳에 띠집을 짓고 도를 닦았다.
동서남북 네 대(臺)와 중대 가운데서 일만의 지장 보살이 상주하신다는 기린산 남대 지장암, 이곳은 비구니 선방으로서 북방에서는 그 비롯됨이 가장 오랜 선방이다. 육이오 전쟁 때에 사적기는 모두 불타 버리고 말았지만, 한암을 흠모하여 오대산으로 내려온 비구니 스님들이 지장암을 근거지로 삼고 정진을 하기 시작한 것이 일제 시대 중반즈음이라고 전해지는데, 지장암 정안(淨岸) 주지 스님은 이 곳은 이미 그 이전부터 수행 도량으로서 여러 십 명의 납자들이 정진을 했던 곳으로 짐작한다. 이후 지장암은 이곳을 출가 도량으로 삼은 인홍, 진관과 같은 걸출한 비구니 스님들을 배출하게 되거니와, 수많은 납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수승한 공부처가 되어 왔다.
육화료 마루 벽 위에는 옛기억처럼 희미한 사진 한 장이 걸려 있다. 너와집을 배경 삼아 앉은 스님 세 분, 두 분 노스님은 늙어서 이미 비구인지 비구니인지 구별하기조차 힘들었다. 현재 남아 있는 사적기가 없으니, 마흔 살 나이에 이 곳으로 출가한, 정안 스님의 노스님이 되는 성진(性眞, 또는 成眞) 스님과, 그의 상좌이자 정안 스님에게는 은사 스님이 되는 혜종(慧宗) 스님의 자취, 또는 그 분들이 들려 주신 옛이야기로나마 더듬어 볼 수밖에 없었다. 절의 원터는 산의 정상 부근에 있었다는데, 이후로 호환(虎患)을 피하여 절은 중부리쯤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지금의 오대천 옆으로까지 내려왔다.
그이들이 겪어낸 곤고한 세월, 그래서 바짝 마른 너와집처럼 건조해진 두 노스님은 성진(1896-1983년)과 혜종(1930-1995년)이다. 모친의 사십구재 때에 한암의 법문을 듣고 발심, 이곳으로 출가한 성진 스님은 상좌 혜종 스님과 함께 곤고하고 적막한 세월을 고스란히 지켜 낸 산중의 어머니 같은 분들이었다. 산에서 거둔 땔나무의 껍질을 벗겨 죽을 쑤어 병든 서넛 노스님들을 봉양했으니, 전쟁이 났어도 절을 떠날 수가 없어서 노스님들을 부축하여 '아홉살리'라 부르던 산아래 마을로 내려가 난리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곳, 네댓 평 초막 너와집뿐이었던 이곳으로 나이 스물넷에 출가한 혜종 스님은 전쟁이 끝나면서 은사로부터 절 운영을 넘겨받는다. 그리고 십 년 세월 끝에 대광명 보살의 시주를 받아 인법당(因法堂) 형편으로나마 45평으로 법당을 증축하고 이어서 삼성각과 요사채를 지었다. 이 곳에서 선방이 다시 문을 연 것은 1974년, 마흔다섯 명의 선객들이 방부를 들였다. 법당 밖 마루에도, 법당에도, 그리고 방에도 좌복을 펴야 했다. 혹독한 추위에 무시로 허리춤에까지 눈이 내리는 이 곳에서 동안거는 엄두를 내지 못하고 그저 하안거 한 철만 운영하니, 방부를 들이려는 선객들의 발걸음은 더 재발라야 했다.
***호남 최초의 비구니 선원을 짓다**
한 톨 쌀이라고 업신여기지 마라. 백천(百千) 알이 모두 이 한 알에서 나왔노라! 석상은 출가하여 후원에서 궂은 일을 스스로 맡아 하되 십 년을 한결같았으나, 위산은 쌀 한 톨을 떨어뜨린 그를 두고 그렇게 야단쳤다. 산문의 가르침이 그렇다 하더라도, 스무 살 나이에 이곳으로 출가한 정안 스님에게 은사 혜종 스님은 참으로 근검 절약하시던 분이었다. 이후에 내가 절 살림을 하게 되면 저리 행하지는 않으리라, 그렇게 다짐을 두었을 정도였다.
강원도 강릉이 속향인 정안 스님이 이 곳 지장암을 찾은 것은 1971년이었다. 고등학교 재학 시절, 병으로 두어 달을 사경에서 헤매던 중에 '마음의 때가 벗어진 듯' 문득 깨달은 것이 있었다. 내가 여기서 왜 이러고 있나. '한 번 마음 먹은 것은 이루어 내고야 마는' 그의 성품은 가족 중 어느 누구도 그가 내딛는 발걸음을 막지 못했다. 중학 시절에 수학 여행을 왔던 오대산에서 마침내 삭발을 하게 된 곳, 그러나 절에 대중이라고는 노스님과 은사 스님 두 분뿐이던 적막한 곳이었다.
중도 작파한 학업에 대한 미련이 없지 않아, 행자 노릇 삼 년 하고, 운문사 강원을 거쳐 중앙승가대 복지학과를 다녔고, 졸업한 뒤에 다시 절로 돌아와 소임을 살기에 이르기까지, 그 때로서는 마음 고생으로만 여겨지는 생활이 이어졌다. 머리를 깎아 주고, 법명을 지어 주신 은사 스님은 문득 어느 날부터 그를 부르지도 찾지도 않았다. 수행의 뜻이 무엇인지도 모르던 그 시절, 몸이 힘든 것은 견딜 만하였으나, 불편한 마음을 견디기는 힘들었다. 머물기 힘들었던 어느 해 음력 9월 9일, 제가 덮던 이부자리를 빨아 놓고, 절을 떠나려고 가만히 걸망을 싸놓은 늦은 저녁, 신도 한 분이 절을 찾아왔다. "정안아아, 손님 오셨다. 공양상 좀 차려라!" 방의 창호가 밝기만을 기다리던 그를 부르던 은사 스님의 음성에, 힘든 마음이 눈 녹듯이 녹아 걸망을 다시 푼 적도 있었다. 그렇듯 은사 스님은 알게도 모르게도 그를 지장암에 묶어 두었고, 그의 제자 사랑은 지극한 것이었음을 이제사 깨닫는다.
사하로 다시 내려가고 싶을 만큼 다가온 경계들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굳건한 초발심으로 다시 자신을 추스릴 수 있었던 것은 순경계가 아니라 역경계였던 듯하다. 강원을 다니던 시절, 아름답지 못한 현실들을 만날 때마다 몸과 마음은 퇴굴심을 내는 게 아니라, 내가 실천함으로써 채워 가리라, 그렇게 생각되었다. '이론만 앞선 채 대중의 참 공의를 끌어낼 수 없는 집단 행동이 횡행하던' 시절, 다니던 승가대학도 그 마음이 없었으면 도중에 끝냈을 뻔했다.
"정안 스님, 스님 자리는 여깁니다!" 어느 날에 여러 도반들과 함께 발우를 펴는 꿈을 꾸었다. (여러 스님들이 함께 앉아 발우를 펴는 꿈은 절집에서는 더할 수 없는 길몽으로 친다.) '꼴값을 떨고 잘난 척하며' 절을 떠나 사숙의 절에서 백일 기도로 마음을 눅이고 있을 때였다. 그 꿈 꾼 지 사흘 만에 그는 백양사 천진암으로부터 주지 소임을 맡아 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이후로 십 년이 지난 뒤에, 그가 호남 최초의 비구니 선방을 개원시키게 되는 천진암 시절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고려 충렬왕 때에 각진 국사가 창건한 뒤로, 휴정, 영규, 연담, 만암과 같은 대덕들이 공부를 짓던 곳, 그러나 1986년, 절에 도착하여 법당에 계신 부처님께 절을 올리고 치어다보니 맨몸의 서까래가 말끄러미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백양사 요사채를 뜯어낸 목재로 지었다는 초라한 법당이었다. 미처 끝내지 못한 백일 기도도 마저 회향하고, 그리고 이어서 천일 기도를 올리면서 앞날의 가닥을 잡았다. "비구니 선방 하나 없는 이 곳에 공부인을 위한 선방 하나 지어 부처님께 바치리라." 은행 따위 임산물로 얻는 수입이 년 70만원 정도, 쌀이 떨어지면 백양사 큰절에서 얻어먹어야 할 지경이었던 절살림보다도, 오랜 세월 동안 방치해둔 세월 끝에 바닥에 떨어진 절의 위의부터 되살려 내야 했다.
기도 중에는 일주문 밖을 나갈 수 없다. 그는 기도를 하면서 먹을 갈아 제 마음에 박아 쓰듯 글씨를 썼다. 그가 그 세월 동안 버린 것이 무엇이고 거둔 것은 무엇이었을까. "네 덕, 내 탓", 오늘 공양간 벽에 붙여 놓은 것, 글자꼴의 구체적 이미지는 이미 날아가 버리고, 그 자체로도 메시지가 될 만한 추상화 한 점이었다. 형상은 고졸하였으나 그 뜻은 얕지도, 단촐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비자나무 숲과 대숲으로 둘러싸인 곳, 천진암은 큰절과는 500여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나, 도량은 적정(寂靜)하여 수승한 공부처라 할 만한 곳이었다. 불사는 91년부터 시작되었다. 법당을 중건하고 삼성각과 요사채, 그리고 선원 신축, 가풀막진 지세에다 앉은 자리도 옹색하여 계곡을 가로질러 다리를 놓고 그 위에 당우를 얹었다. 섬세한 그의 안목은 도량에 바투 자라고 있는 탱자나무도 고스란히 살려내야 했다. 자금도 부족하고 건강은 나빠지고, 간신히 나무를 구해 놓았는데 눈이 내려 또 손이 묶이고 마는 세월이었다. 그러나 마음 먹은 일은 해내고 만다! '작정하고 준비한' 끝에 그가 찾아간 관공서의 관리들은 그가 내뻗는 도움의 손길을 끝내 뿌리치지 못하는 일이 허다했다.
호남의 불심은 경상도의 그것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척박하다. 불심이 깊다 하더라도, 그 불심을 경제적으로 힘을 보태 드러내 보이기에는 역부족인 것이 현실이었다. 이 곳 지장암으로 자리를 옮겨 앉은 지금까지 소식을 주고받고 있거니와, 믿기 힘든 일, 그의 계행과 성심을 눈여겨보고 선원 불사를 앞장서서 이끌어 준 사람들은 그곳의 개신교 신자들이었다! 호남에 없는 비구니 스님 선방 함께 짓기, 선방 불사를 그렇게 이루어졌다. 군비와 도비 등의 국비를 타내는 일에조차 그들은 힘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남은 힘을 쏟아부어 선원 불사를 마무리할 즈음인 95년에 그는 지장암에 계신 은사 스님의 입적 소식을 들었다. (백암 선원, 그렇게 편액을 단 호남 최초의 비구니 선방은 이듬해 10월에 개원을 했다.)
***지장암, 벗어날 수 없었던 인연터**
법당 왼쪽, 94년에 지장암 기린 선원을 완공하는 불사를 끝으로 불시에 열반하신 은사는 '오지 않을 제자'를 그렇게 부르셨던가 보았다. 은사 스님 가시는 길을 살펴드렸던 그 무렵, 정안의 나이 어린 제자, 공양간에서 일을 보아 주던 보살 등, 다섯 사람의 죽음을 잇따라 지켜보아야 했다. 출가한 지 25년, 이제 불교가 무엇인지 입으로 조금 말할 만큼은 되었고, 의식은 익어 스스럼없이 행할 수 있게는 되었는데, 희로애락에 움직이는 마음은 출가 이전과 조금도 달라진 것 없이 그대로로구나. 슬프고도 두려웠다.
강원을 다니면서도 선방에 갈 생각은 없었다. 좌복 위에 앉아 짓는 것만이 마음 찾는 공부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던, 몸 또한 좌복 위에서 30분을 견디기 힘들었던 그이였다. 온 힘을 다했던 천진암의 불사도 백암 선원 개원과 낙성식을 끝으로, 지장암에서 은사 스님의 열반 이후 1년 동안 뒷수습을 마친 뒤로 마음 공부를 위해 이리저리 떠돌았다. 너희 은사 스님께서 어찌 지켜 오신 절이더냐. 그렇게 큰절의 걱정도 들었으려니와, 꼭 그 말씀 때문은 아니었더라도, 그렇게 삼 년을 보내고 그는 지장암 주지 소임을 맡아 다시 절로 돌아왔다.
법당과 요사채는 비가 새고, 어느 해에는 불사 중에 일일 강수량의 극값을 갱신했던 태풍 루사가 산중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이가 그토록 애썼던 천진암 불사는 '실습'이었고, 이후로 지장암에서 겪어야 했던 바는 '실전'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비스듬히 흘러내리던 도량은 축대를 쌓아 반듯이 돋워 올리고, 인법당 규모이던 법당을 널찍하게 늘이어 고쳐 짓되, 기둥과, 그 옛날 불을 지펴 공양을 짓던 부엌 아궁이도, 위에 마루를 덮기는 했으나 그대로 살려 두었다. 선방을 마주보고 서 있는 요사채도 뜯어 내고 연건평 250평 규모로 다시 지어 올렸다.
제 노력으로 된 것인 줄 알았던 불사, 그러나 그것은 십 년 세월 두 번 보내고 보니, 그저 자신은 뜻만 세웠을 뿐,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분은 따로 계심을 알게 되었다. 도리대로 살고 순리에 어긋나지 않게 살면, 그래서 마음이 바뀌고 행이 바뀌면 살 집도 주고 사람도 곁에 두게 하시는 줄 이제사 알게 되었다. 모든 것을 지켜보고 보호해 주시는 분의 임재를 비로소 믿게 된 것은 그런 세월 보낸 끝에 얻은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일지도, 즉심시불(卽心是佛)이라는 마음일지도 몰랐다. 전쟁으로 잿더미가 되고 난 뒤에 겪어야 했던 그 어렵던 시절에 이 절을 중창하고 지켜 내신 노스님과 은사 스님의 노고가 어떤 것이었을지도 마음에 사무치게 다가왔다.
"법의 깃발을 세우고 종지를 드러내려면, 외호 인연, 단월 인연, 납자 인연, 토지 인연, 도연(道緣)의 다섯 가지 인연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위산은 말했다. 바깥에서도 절을 돕고, 신도들이 모여들고, 그 산에 사는 데 장애가 없고, 공부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그래서 공부하고 수행할 수 있는 도량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주지가 가람을 운영해 나가는 일에 있어서도 그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외호와 단월(시주)과 토지의 구족함은 오로지 '공부 도량'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일신의 안위를 위한 세간의 속된 구복(求福)과 다를 바가 없다.
지장암 주지로서 감당해야 할 바, 그가 가장 으뜸으로 놓는 것도 물론 선원을 외호(外護)하는 것이다. 이곳에 온 뒤로, 결제에 들어가는 대중들이 첫 사흘 동안 <자비 도량 참법>을 독송하는 것을 전통으로 삼게 하기는 했으되, 그가 주지로서 선원을 외호하는 원칙은 '무원칙의 원칙'이다. 열흘에 한 번씩, 대중들과 함께 큰스님들의 녹음 법문을 함께 듣지만, 대중들과 함께 산중의 일을 의논하는 대중 공사에서 따로이 내거는 조건도, 주문도 없다. 포행길에서 마주치면 공양은 자시었습니까, 공부는 여여하십니까, 그저 그런 말로 안부를 여쭙기만 할 뿐이다. 이번 철은 방부 대중이 앉기도 빠듯하여 함께 앉지는 못했지만, 형편 닿는 대로 큰방에 앉으려 애쓴다.
양족존(兩足尊), 이는 부처가 중생 교화의 바탕으로 삼고 계신 바 '지혜(智)'와 '자비심(悲)'의 두 가지를 뜻하기도 하지만, 초창의 교단을 유지해 나가는 토대인 '현실적 이해'와 '복'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항산(恒産)이라야 항심(恒心)'이라 했다. 주지의 첫 번째 임무는 물질로 공부인을 뒷받침해 주는 일이다. 그러나 이곳에 온 뒤로 첫 삼 년 동안은 전기 요금도 내지 못할 만큼 절 형편이 어려웠다. 하안거만 이루어지던 이 곳에 동안거를 시작한 것은 1999년부터였다. 이 곳 산중의 유난스런 추위를 감당할 난방비 마련조차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형편이 조금 나아져 10만원씩이던 해제비를 지난해에 처음으로 30만원을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정진하는 스님들에 대한 주위 스님들의 배려와, 신도들의 신심으로 이루어진 그 일이 그는 마냥 기껍다.
선방을 외호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지장암이 신도들의 귀의처이자 고단한 마음을 부려 놓는 휴식 공간으로 운용되게 하는 것도 그에게는 선원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일이다. 초하루와 지장재일말고도, 한 달에 한 번, 두 번째 일요일에 가족 법회를 갖는다. 심오하고 심각한 법문이라기보다는, 그저 어미는 어미 노릇, 아비는 아비 노릇, 자식은 자식 노릇하는 제자리됨 지키기, 그것 한 가지만 성심껏 이른다고 했다. 가족 법회에는 그런 '심심한' 내용으로 이루어지는 그의 법문을 들으려고 전국에서 찾아오는 불자들로 법당이 채워진다. 아마도 번잡한 삶을 살아 내야 할 우리에게 절실하고도 긴요한 것은, 고담과 준론이 아니라, 그렇게 간단하고도 소박한 일상에서부터 시작되고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믿음인 듯하다.
"스님이 시주를 받으면 셋 가운데 하나는 불우한 이웃을 위하는 일에 써야 한다" 했다. 그런 경전의 말씀 치켜들 것 뭐 있는가. 겪고 있는 어려움이 불자, 비불자가 달라서 가르고 구별지을 것인가, 그는 그리 생각한다. 천진암에 머물 때부터 해오고 있는 일, 적으면 적은 대로 실팍하면 또 실팍한 대로, 재를 지내는 날에 불전함에 모인 정성은 한 푼도 달리 쓰는 데 없이 통장에 거두어 놓았다가, 그 전액을 수소문된 관내 불우 이웃이나 인연 있는 복지 시설 따위로 보낸다. 이 일에는 온라인으로 동참하고 있는 신도들도 적지 않다 했다.
지장암 대중이 경작하고 있는 밭은 일천여 평, 한 달에 세 번, 아흐레로 끝나는 삭발일 전 날, 대중은 손을 모아 밭을 일군다. 낯빛이 파리해진 선방 스님들도 모처럼 볕을 쏘이는 날이다. 고추, 들깨, 도라지, 콩, 호박, 가지, 아욱 따위 골 따라 심긴 그 곳, 서너 시간 또는 일에 따라 그 이상 그들은 밭에 엎드려 땅김을 쐰다. 땅에 씨를 묻는 것은 스님들뿐만이 아니었다.
절간에 전해지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그 옛날 어느 절 뒷산에 살던 다람쥐가, 배가 고파 미망에 빠진 그 절의 스님에게 겨울 양식을 빼앗기자, 식솔을 거느리고 나와 스님의 처소 앞에 놓인 고무신을 물고 죽음으로써 그 모진 손을 나무랐다. 아침에 그 참상을 본 스님은 뒤늦게나마 깊이 참회하고, 그 마음을 또 다람쥐는 어질게 받아들이지 않았을까. 그 뒷소식을 알 수 없었더니, 이 도량을 드나드는 다람쥐는 지장암 도량 끝 무른 흙 속에 호박씨를 갖다 묻고 있다 했다. 그러고는 잊어 버리니, 그 씨앗에서 움이 터 호박이 여럿 열린다. 오늘 또 도량 어느 후미진 곳에 설익은 도토리 한 톨 묻어 놓고 돌아가는 길일까. 태인 몸은 달라도 딴 몸일 수 없는 한몸이라고, 그러니 그리 마시라고 이르는 듯, 삼성각 석대 위에 다람쥐 한 마리 오똑 멈춰 선 채, 객과 눈을 맞춰 놓고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닫힌 사립에
꽃잎이 떨리노니
구름에 싸인 집이
물소리도 스미노라
--조지훈 '山房' 중
그 옛날 월정사 강원에서 외전을 강의하던 지훈이 "슬프지 않은 시" 몇 편을 얻은 곳, 그도 이 시각쯤에 이 산자락을 거닐며 짙어지는 산색과 한 몸이 되어갔을 터였다.
저녁 공양 시간도 끝나고, 비 갠 저녁 하늘로 검은 구름장이 바쁘게 지나갔다. 혼자 또는 두셋씩 무리 지은 스님들이 스며 드는 전나무 사이 숲길, 상좌 스님 뒤딸리고, 홀가분한 동방아 차림으로, 정안 스님도 저녁 포행을 나선다. 삼성각 뒤로 질경이가 푸른 비단처럼 깔리어 자라는 길, 계곡물에 적셔진 낮은 땅에는 흰 물봉선이 피어 있고, 그 꽃들 속으로 뒈앵 뒈앵 소리 내며 벌들이 드나들고 있었다. 물옥잠, 우산나물, 붓꽃 등 갖가지 꽃들로 가꾸어진 도량의 가지런한 태도 어여쁘지만, 보아 주는 이 없이도 함초롬히 자라나 낮은 데를 가득 채우고 있는 까치수영, 노루오줌 따위 들꽃의 어울어짐만 못할 터였다.
길 위 나무 숲이 잠시 끊기고, 환하게 열린 하늘로 빛이 쏟아져 내리는 곳에 정안 스님은 잠시 멈추어 섰다. 끄덕끄덕, 무엇을 얻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시는가. 스님만 아실 바였다. 그 시각에 다시 울린 선방의 입선 죽비 소리, 선방을 마주보며 육화료 마루 끝에 나와 앉은 노스님도 함께 입선에 든다. 서서 걷기커녕 기기조차 수월치 않은 육신으로 하루 세 번, 선방의 죽비 소리에 맞춰 방 문턱을 넘어가고 넘어오신다. 모기향 앞에 피워 놓고 염주를 조물락거리다 말고 무엇을 얻으셨는가. 끄덕끄덕, 머리 한없이 끄덕이시는, 불기 2549년 을유년 하안거 결제 중이신 올해 아흔한 살 법화 노스님, 이 산중 저녁 풍경이 그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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