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가 어느덧 쇠락의 길로 들어선 것은 두 가지 일에 기인한다.
그 하나는 내륙의 도시국가들을 통치하면서 그 국가들의 지도자들 중 상당수가 베네치아의 지도계층으로 영입되었던 탓에 통치 계층이 지나치게 비대해졌던 것이다. 사공 많은 배가 된 것이다.
그리고 새로 영입된 내륙 출신들은 바다보다는 더욱 더 내륙 쪽으로 진출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서 베네치아의 힘은 분산되었다. 자신의 세계관만을 고집하면 언제나 이런 법, 그 사이에 베네치아의 막강 해군력은 서서히 녹이 슬고 있었다.
또 한 가지 요인은 새롭게 등장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동로마를 멸하고 지중해로 진출한 사건이었다. 원래 바다에 능했던 아라비아인들은 그리스와 알바니아의 해안선을 따라 진출하면서 베네치아의 세력권과 마주치게 된 것이었다.
내륙 확장에 신경을 쓰는 사이, 해상에는 어느새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한 것이다. 베네치아는 내륙에서도 싸우고 해상에서도 오스만 투르크와 소모전을 벌여야 했다. 이처럼 전선(戰線)이 두 개가 되면 어려워지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
베네치아의 내륙 진출에 자극된 내륙의 강자들, 즉 독일과 신흥 강호 에스파냐, 그리고 로마 교황은 캉브레(Cambrai)에서 반(反) 베네치아 동맹을 맺게 되었으니 베네치아로서는 바다와 육지로부터 동시에 적을 맞이한 형국이 되었다. 결국 반 베네치아 동맹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베네치아는 1508년 무진(戊辰)년에 가서 굴욕적인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베네치아는 겨우 일부 영토를 지킬 수 있었지만 핵심인 지중해에 대한 제해권을 상실하고 말았다. 사실상 여기가 해상 글로벌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의 종말점이었다. 한 번 내륙으로 눈을 돌린 것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되었다.
그 이후 베네치아는 외교와 군사를 통해 재기의 힘겨운 노력을 펼쳤으나 역사는 다시금 기회를 주지 않았다.
신흥의 포르투갈과 에스파냐가 새로운 해상의 길을 찾아 나서면서 이른바 '대항해시대'가 막을 열었다.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을 돌아가는 코스가 발견되고 콜럼버스에 의한 아메리카 신대륙의 발견으로 역사의 중심 추는 어느 덧 지중해로부터 벗어나 대양으로 향하기 시작했고 이로서 베네치아는 역사의 주류에서 밀려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베네치아가 공식적으로 간판을 내린 것은 그로부터 다시 수 백 년이 지나 1797년 정사(丁巳)년에 가서 나폴레옹이 이 도시국가를 점령하면서였다. 한때 거대한 해양 세력이던 베네치아의 종말 치고는 너무도 씁쓸한 에피소드였다고 하겠다.
그러면 베네치아의 영고성쇠를 음양오행의 수로 정리해보자.
697, 정유(丁酉)년, 통령 선출로 자치도시국으로 등장
1202, 임술(壬戌)년, 제4차 십자군 전쟁을 충동질, 해상의 강자로 등장
1380, 경신(庚申)년, 라이벌 제노바를 격파한 후 해상 제국 완성
1470, 경인(庚寅)년, 내륙과 해상을 아우르는 대제국 건설, 최전성기
1508, 무진(戊辰)년, 캉브레 동맹 결성으로 제해권 상실
1650-1651 경인(庚寅),신묘(辛卯)년, 베네치아의 투르크 해군 격파
1797, 정사(丁巳)년, 나폴레옹에게 멸망
이 연도들이 제멋대로 나열된 것 같지만, 음양오행을 가만히 살펴보면 일련의 질서가 발견됨을 알 수 있다.
경신(庚申)이라는 코드, 그리고 그와 상충(相衝)이 되는 경인(庚寅)이라는 코드가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697년의 7년 전이 경인(庚寅)년이고, 1202년 제 4차 십자군 전쟁의 2년 전이 경신(庚申)년이다. 그런가 하면 1380년은 그대로 경신(庚申)년이며, 1470년은 경인(庚寅)년이다. 또 1508년 캉브레 동맹이 있기 8년 전에 경신(庚申)년이 있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도시공화국이 경인(庚寅)이라는 코드를 만나면 위기국면이 조성되고, 경신(庚申)이라는 코드를 볼 때 가장 강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베네치아의 전성기는 1200년 경신(庚申)년부터 1500년 경신(庚申)년까지의 3백년 동안이었다고 말해준다. 그리고 그 300년 동안의 기간 중 그 6할인 180년이 지난 1380년의 경신(庚申)년에는 라이벌 제노바를 격퇴했는데 이 무렵이 사실상 힘의 응축이 최고조에 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1470년, 경인(庚寅)년을 역사가들은 베네치아의 퇴조가 시작된 시점으로 보고 있는데 그 또한 정확한 해석임을 알려준다.
결국 베네치아가 내륙으로 눈을 돌리면서 역풍을 맞이한 것이 캉브레 동맹이니 이것이 이 나라의 명줄을 죄고 말았던 것이다.
베네치아는 그 이후 지중해의 독점권을 잃었지만 그간에 쌓은 엄청난 부로 인해 외관상 여전히 강국이었고 호사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으며 문화 예술 면에서도 정력적인 힘을 외부 세계로 투사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이미 젊은 탄력을 잃어버린 황혼의 시간들이었던 것이다. 원래 해질 녘의 황혼이 더 아름답듯이, 대개 이런 시기에 문화는 더욱 세련되고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법이다.
돌이켜보면, 그들은 대단히 영리했었다. 지중해와 크레테 섬의 곳곳을 거점으로 삼았으나, 영토획득에는 별 관심을 두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그들은 다른 제국들과 성격을 달리했고, 필자가 최초의 글로벌 제국이라 표현하는 것도 그런 까닭이다.
수많은 제국들이 영토 확장에 매달리다가 힘을 소모하고 사라져 갔지만, 베네치아 상인들은 현지인들의 반감을 사는 그런 행동을 삼가면서 오로지 교역의 편의만을 도모했던 것이다. 요점을 장악하고 있으면 현지인들은 제 발로 베네치아의 세력권으로 들어왔으니, 베네치아가 주는 이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그들은 내륙에 강력한 통일세력이 생겨나는 것을 지속적으로 견제했었다. 매수하거나 분할하거나 원수끼리 싸우게 만드는 등 갖은 외교적 책략을 성공적으로 펼쳤는데, 그 교묘한 술책은 오늘날까지도 외교의 교과서로서 취급받을 정도이며, 외교관이라는 직업 자체가 베네치아 사람들의 창안이었다.
이처럼 내륙으로 들어가지 않고 해상을 장악함으로써 부를 누린 또 하나의 글로벌 제국은 훗날의 대영제국이었고, 에스파냐는 내륙으로 눈을 돌리다가 몰락하고 말았다. 베네치아나 영국은 모두 땅에 관심을 두지 않고 교역에만 관심을 두었기에 오래도록 번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베네치아가 피렌체를 흉내 내면서 내륙의 땅에 눈을 주기 시작하자 곧 바로 역풍을 맞이하고 힘을 잃고 말았던 것이다. 오스만 투르크가 지중해로 진출하자 이런 경향은 더욱 짙어만 갔고 마침내 쇠락을 재촉했으니 이 또한 역사의 흐름이라 할 것이다.
줄여 말하면, 동로마 제국의 요람에서 자란 그들은 종가(宗家)의 쇠락을 틈타 바다에서 힘을 키웠고, 라이벌 제노바를 물리치고 세계해(world ocean), 지중해를 장악한 그들은 동방의 산물을 유럽으로 유통시키는 교역으로 치부를 했다.
그러다가 내륙으로 눈을 돌린 것이 카운터 펀치 한 방으로 기세가 꺾였고, 때마침 등장한 새로운 강호 오스만 투르크와 에스파냐라는 두 고래 사이에 끼어 신음하다가 서서히 몰락하고 말았다. 이것이 300년에 걸친 베네치아의 영고성쇠였던 것이다.
그들은 모험적인 사업가(entrepreneur)이자 벤처였다. 현실적인 세계관으로 무장한 그들은 치밀하고 강인했으며, 부자가 된 이후로는 호탕하게 돈을 흩뿌리면서 행세를 했다. 여전히 신의 가호와 또 진노가 두렵던 그 시절에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현세의 쾌락을 경박할 정도로 추구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이 글은 베네치아, 그 경박함과 화려함에 대한 헌사(獻詞)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진지함이 때로는 너무 치열하게 느껴지거나 무겁게만 여겨질 때 베네치아는 그 대안(代案)으로 존재한다.
하늘에서 보면 'S'자가 거꾸로 된 모양으로 수로(水路)가 형성되어 바다로 나갈 때까지 아름다운 다리들과 건축물, 곤돌라들이 수를 놓고 있는 화려의 극치인 베네치아.
그 끝에 위치한 산 마르코 광장에 가면 비둘기가 모이를 쫒아 날아드는 가운데 성당의 그림들과 금은으로 된 장식들, 두칼레 궁전의 장엄한 위용, 수많은 이방인들, 멀리 보이는 라피스 라줄리의 남색 바다. 실로 피렌체와 함께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낭만의 도시 베네치아는 과거의 영광을 덧없는 세월 속에 묻은 채, 오늘도 한없는 가벼움, 하이 톤(high tone)으로 빛나고 있으니 마땅히 경박함의 찬가(讚歌)라 할 것이다.
그러니 희대의 플레이보이 카사노바가 놀던 주 무대가 베네치아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필자도 오늘도 꿈을 꾼다. 언젠가 여건이 허락하면 베네치아에 한 두어 달 머물면서 수채화를 한껏 그려보고 싶은 것이 평생 소망 중에 하나이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물길 위로 빛과 음영이 교차하고 그 위를 경쾌한 음악과 함께 부드럽게 움직여가는 곤돌라들로 가득한 베네치아 풍경을 질릴 때까지 담아보고 싶은 것이다.
프랜시스 투상의 멋있는 베니스 사진도 올렸으니 즐기시기 바란다.
(알리는 말씀: 이사를 했습니다. 책방이 없는 곳에 있다 보니 너무 불편해서, 전에 있던 강남 교보문고 근처로 돌아왔습니다. 새 약도는 "상담을 원하시면"을 클릭하시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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