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평양냉면의 으뜸 장인' 타계하다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평양냉면의 으뜸 장인' 타계하다

'을밀대' 주인 고(故) 김인주 씨…'장인정신'으로 남아

"냉면 육수가 3일치밖에 안 남았는데…."

냉면에 관한 한 '서울시내 4대 천왕'의 한 사람으로 꼽히던, 평양냉면집 '을밀대'(乙密臺)의 주인 고 김인주 씨는 임종 5분 전까지도 이렇게 말했다.

김씨가 직접 만드는 평양냉면 맛을 사랑해 온 주위 사람들은 10일 이 '냉면의 장인'이 타계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안타까운 마음을 금하지 못했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차려진 그의 빈소에는 가족 친지들뿐 아니라 음식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다는 인사들이 줄을 이었다.

김씨는 그의 손맛에 대한 기억만을 남긴 채 12일 경북 영천의 선산에 영원한 안식처를 얻었다. 향년 69세였다. 가업을 전수한 장남 영길 씨(42)로부터 평양냉면과 함께 한 고인의 삶을 들어봤다.

***'외골수'로 불린 원칙에 대한 신념**

평남 중화군 출신으로 실향민 1세대였던 김 씨는 어렸을 적 아버지가 사 준 냉면을 먹어본 뒤 그 맛에 매료돼 '냉면 만들기'에 남다른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결국 18세 때 냉면을 마음껏 먹을 수 있다는 점에 이끌려 피난지 대구에서 이른바 냉면집 '시다바리'로 취업한다. 궂은 일을 도맡아 하면서 어깨 너머로 냉면 사리 뽑고 육수 만드는 등의 일을 익힌 것이다.

마침내 1971년 대구에 자신의 냉면집을 처음으로 열었고, 70년대 중반 지금의 서울 마포구 염리동으로 가게를 옮겨 30여 년 동안 꾸준히 평양냉면의 진수를 선보여 왔다.

잘되는 집은 다 이유가 있는 법. 김 씨는 냉면에 관한 한 '외골수'라 불릴 정도로 원칙을 철저히 고수해 왔다. 개업 초기 손님이 없어 손해를 볼 때에도 맛이라면 자신 있었기 때문에 '자신만의 맛'을 포기하지 않았고, 결국 그 손맛이 입소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평양냉면은 단연 을밀대"라고 얘기될 정도로 번창하게 됐다.

사업의 성공으로 체인점을 열 수 없냐는 문의가 귀찮을 정도로 들어왔지만 그는 "다른 가게에서는 맛을 유지할 자신이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하곤 했다. 자신의 자존심이 '맛의 포기'를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에게 냉면을 많이 파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김 씨가 만들어 온 '을밀대' 냉면의 성공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장남 영길 씨는 의외로 요리비법보다 정직함을 꼽았다.

"육수는 영업이 끝나는 밤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번갈아 자면서 만듭니다. 다 만들고 얼린 뒤에 시간이 되면 깨어 녹이고 냉장통에 받아서 쓰는데, 언젠가는 오전에 오신 손님은 싱겁다고 하고, 오후에 오신 손님은 짜다고 하더군요. 육수통이 큰데다가 얼음은 뜨고 육수는 가라앉아서 밑으로 갈수록 진해져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김 씨는 이런 사정을 일일이 손님한테 다 설명해 주곤 했다. 손님이 음식과 음식을 만드는 사람을 믿고 오기 때문에 사소한 것이라도 당연히 알려주어야 한다는 게 그의 원칙이었다. 손님을 속이거나 대충 넘어가는 일은 그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을밀대' 냉면의 또다른 성공비결은 신뢰였다. '을밀대'에는 지금도 카운터와 캐시어가 따로 없다. 계산은 직원들이 직접 알아서 한다. 손님들이 식사 후 식당을 나서면서 현관의 아주 작은 탁자 앞에서 멈칫 거리면 마침 근처에 있던 종업원이 알아서 계산을 해준다. 카운터를 만들기 여의치 않을 정도로 식당이 좁다는 이유도 있었겠지만 계산을 직원들을 그만큼 믿는다는 얘기다.

김 씨는 여기에 '서로 존중'이라는 의미도 더했다. 을밀대에서는 지금도 직원들을 '직책'이 아니라 '담당'으로 호칭한다. 각자 맡은 일에 자부심을 갖도록 한다는 것이다.

***'을밀대' 성공비법은 정직·신뢰·존중**

"언젠가부터 손님이 너무 많이 오셔서 재료가 모자라 저녁 때가 되기 전에 문을 닫는 일이 많아졌어요. 멀리 강남에서까지 오시는 분들께 미안해서 육수 끓이는 솥을 새로 크게 만들었는데 분명히 재료와 양념의 비율을 2배면 2배, 3배면 3배 똑같이 넣었음에도 그 맛이 안나오는 겁니다. 육수 맛이 변한 건 손님들이 더 잘 알죠. 경기가 나빠서 매출이 줄어드는 것보다 단골손님들 한 분, 두 분이 '오늘은 맛이 이상하다'며 고개를 저으실 때가 정말 힘듭니다. 믿고 와서 드시는데 실망시켜드릴 때가 있어서 힘들기도 하지만, 또 손님들이 만족하시는 모습 때문에 이 일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정신'까지 김 씨를 꼭 빼닮은 장남 영길 씨의 말이다.

장남 영길 씨는 10여년 동안 대기업의 회사원으로 일하다가 8년 전부터 아버지의 가업을 차근차근 이어받았다. 사실 영길 씨가 '을밀대'를 이어받게 된 데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다.

"98년 봄 아버지가 갑자기 가출을 하셨어요. 가업을 이어받으라는 말씀을 제가 한쪽 귀로 흘려들어서 그러셨던 거죠. 두 달, 세 달 돌아오시지 않으셔서 초조하기도 했던 데에다, 제가 을밀대에서 할 줄 아는 일이라고는 음식 나르는 일밖에 없어서 답답했어요. 결국 처음부터 배우자는 마음으로 다시 일을 배우기 시작했죠. 돌이켜 보면 아버지의 선견지명이 아니었나 싶어요. 처음부터 냉면 만드는 방법을 직접 배우는 것보다 밑바닥부터 경험하는 게 훨씬 나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을밀대 냉면의 비법은 말로 설명하면 1분 정도밖에 안 걸리지만 육수의 재료와 양념 비율을 맞추는 일을 체득하는 데는 3년도 모자랐어요."

이제 '을밀대'의 주인 김 씨는 고인이 됐지만 그 맛만은 아들을 통해 그대로 이어져 나갈 것이다. 앞으로 '을밀대'를 어떻게 운영해 나갈 것인가를 묻자 영길 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제품마다 특색이 있고 가문마다 가풍이 있듯이, 저희 집안은 냉면 맛에 있어 '을밀대만의 장인 정신'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맛을 계속 유지하며 이어나가야죠. 원칙은 변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다만 아버지를 포함한 실향민 1세대들이 이제 거의 다 떠나신 상태에서 이제는 젊은 고객들의 입맛에도 맞출 수 있도록 시도하고 있어요. 얼마 전에는 일본인 몇 분이 배낭여행으로 한국에 와서 물어물어 찾아오셨다고 하는데, 이런 분이 점차 많아지면 트렌드를 넘어서 훌륭한 문화 상품도 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평양 금수산 을밀대의 이름을 빌어 가게 이름을 지었다는 서울 마포 '을밀대'. 김 씨는 명을 달리 했지만 평양냉면에 대한 고인의 애착과 장인 정신만은 아직 살아 있다.

'을밀대'는 15일부터 영업을 다시 시작한다. 02-717-1922.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