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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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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203>

베네치아, 최초의 글로벌 제국 (1)

오늘은 다소 엉뚱하지만 이탈리아의 유명한 관광지이자 항구 도시, 베네치아에 대한 얘기를 하고자 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중세의 어둠을 박차고 나온 르네상스 시대의 한 일원으로서 한때 지중해 무역을 바탕으로 글로벌 제국을 경영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고성쇠를 음양오행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그 흥망 속에는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진한 교훈도 담겨있다.

먼저 그림 이야기로부터 들어가기로 한다. 화가들은 여인의 누드(nude)를 곧잘 그린다. 그림에 몰두했던 미술학도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누드를 진지하게 그렸던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누드는 서양화를 하는 이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장르의 하나이다.

그런데 세상 모든 것이 시작이 있듯이, 여성의 몸을 표현하는 누드화 역시 그 기원(起源)이 있으며 누드화의 변천 속에는 근대 이후의 모든 정조(情調)와 이념이 다 들어있다.

이런 누드화의 발상지가 바로 베네치아이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도시를 하나만 꼽으라면 당연히 피렌체가 되겠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근대화, 즉 성(聖)으로부터 속(俗)으로 인간을 해방시킨 이념의 진원지는 베네치아였다고 하겠으며, 그림의 근대화 역시 베네치아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베네치아는 바다위에 떠있는 도시이기에 그들의 미적 감각 속에는 광선과 색채, 공기와 공간이 깊게 새겨졌던 것이니, 이는 훗날 프랑스 인상파와 같은 유사한 맥락이다. 베네치아 미술은 그 창시자'지오반니 벨리니'의 뒤를 이은'죠르지오네(Giorgione)'에 와서 빛을 발했는데, 그가 남긴 유명한 작품이 바로 "잠자는 비너스"이다.

일반적으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술가라면 피렌체에서 주로 활동했던 '레오나르도 다 빈치'나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등을 들지만, 그들의 그림은 여전히 신(神)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죠르지오네'의 '잠자는 비너스'를 보면 성스러움은 전혀 없고, 오로지 풍만한 살의 향연이 펼쳐지고 있을 뿐이다.

풍만한 여성의 누드화는 바로 이로부터 시작하였다.

(박 대표님, 이 자리에 그림을 넣어달라고 기술팀에게 부탁해주십시오.)

베네치아 화파의 그림들은 관능적이며 서정적인 화려한 색조(色調)를 통해 삶의 쾌락과 즐거움을 최대한 노래하고 있기에 다소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피렌체의 화풍보다는 근대성이라는 면에서 한 걸음 크게 나아가고 있다 할 것이다. 특히 '잠자는 비너스'야말로 누드화의 원조이며, 근대회화의 출발점, 나아가서 근대성(modernity)의 시작을 예고하는 그림이라고 필자는 여긴다.

이 같은 그림을 낳게 한 베네치아는 어떤 곳이었던가?

베네치아는 이탈리아 반도의 북부에서 동쪽 바다인 아드리아 해에 연한 항구도시이다. 이 도시가 생겨난 것은 로마제국 말기인 5-6 세기 경, 로마인들이 만족의 침략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모래톱과 개펄위에 일종의 해상도시를 건설하면서부터였다.

바다라는 천연의 방벽이 있어 야만족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던 이 마을은 로마의 부호들에게 절호의 피난처가 되었고 중세를 통한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안전을 유지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 인들은 서로마제국이 멸망한 후, 자치를 유지하면서 동로마제국에 붙어서 아드리아 해의 해상 세력으로 이어가다가 697년 정유(丁酉)년에 도제(doge)라 부르는 통령을 선출하면서 서서히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런 베네치아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828년, 두 명의 모험적인 베네치아 상인들이 예수의 제자 마가의 유해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부터 훔쳐와서 도시의 수호신으로 삼으면서부터였다. 베네치아에 가면 산 마르코 광장이 가장 멋있는 곳인데, 바로 수호신 성 마가를 모신 곳이다.

당시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국가들은 경쟁적으로 각자의 수호성자를 모시는 일이 대유행이었는데, 베네치아는 성 마가의 위력을 빌고자 했던 것이다.

우리의 경우 통일신라 말, 지방 세력들은 저마다 불교 도량을 지어 그 위신력을 빌고자 했으니 구산선문(九山禪門)이 그것으로서 당시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과 비교되는 면이 있다. 종교는 이처럼 중앙이 약해질 때 더욱 이채(異彩)를 띄는 법이다.

처음부터 베네치아는 해상무역을 지향했다. 동로마제국의 보호 아래 커가던 이 도시는 동로마가 약해지자 1202년 임술(壬戌)년에 가서는 서유럽의 나라들을 꼬드겨서 십자군으로 하여금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약탈하도록 했으니 바로 제4차 십자군 전쟁이었다.

이처럼 종가(宗家)를 배신한 베네치아는 이 일로 해서 지중해의 신흥 강호로 등장할 수 있었다. 또 동로마로부터 훔쳐온 수많은 노획물들로 교회나 성당을 장식했는데, 그 중에 유명한 것이 청동으로 된 네 마리의 말로서 산 마르코 성당에 장식되어 있다.

그런데 당시 지중해를 통한 교역 이익이란 그 내용이 무엇이었는가를 잠시 알아보기로 하자.

유럽은 1100년경부터 가축을 식량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원래부터 수렵목축을 하던 유럽인이었지만, 가축은 귀한 것이라 함부로 먹지 못하다가 이 당시부터 곡식의 증산이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가축도 늘면서 먹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귀한 것이라 주로 건초를 구하기 어려운 겨울에 들 무렵, 번식용의 가축만 남기고 나머지는 잡아먹었다. 그러나 한 번에 다 먹을 수는 없으니 훈제하여 소시지를 만들거나 소금에 절였는데, 그 냄새가 지독했다.

그런데 여기에 후추를 뿌려두면 악취가 나지 않았다. 그 바람에 유럽인들에게 후추는 없어선 안 될 향신료가 되었고 나중에는 인이 박혀서 후추가 들어가지 않은 육류 요리는 도저히 먹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 결과 유럽인들은 후추를 비롯하여 정향이나 육두구, 생강과 같은 강렬한 향신료를 즐겨 찾게 되었다. 이 향신료들은 모두 그 성분이 오행 상 불의 기운을 지니고 있다. 한습한 지역인 유럽인들에게 이 불의 기운을 지닌 향신료들은 정말이지 체질에 딱 맞아들었을 것이다.

참고로 중국 음식인 오향장육에 들어가는 향신료 중의 하나가 정향(丁香)인데, 이런 성분들은 비위가 약한 사람에게 한방에서 약으로 쓰는 재료들이라는 점을 밝혀둔다.

이런 향신료들은 불의 나라, 정확하게는 병오(丙午)의 나라인 인도의 서해안이나 말레이 반도에서 생산되며, 아라비아 무역상들에 의해 홍해를 거쳐 낙타를 타고 다니는 캐러밴들에 의해 사막을 거쳐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도착하게 된다.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향신료들은 그곳 항구에 대기하던 베네치아나 제노바의 무역상들 손에 넘어가고 그를 통해 유럽으로 운반되는 루트를 통했던 것이다. 수많은 사람의 손을 거치고, 도중에 마적과 산적의 공격도 받았을 것이니 그 가격이 얼마나 비쌌겠는가!

그러자 베네치아와 제노바는 그 교역 이익을 독점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 결과 두 나라는 충돌했고 이에 네 차례에 걸친 치열한 전쟁을 치르게 된다.

마침내 베네치아는 1380년 경신(庚申)년, 제노바를 '치오지아' 전투에서 물리친 후 우세한 가운데 평화조약을 체결하니 이로서 베네치아는 명실 공히 지중해 무역의 독점적 패자로 등극하게 된다. 이른바 '후추 전쟁'이었던 것이다.

교역품은 향신료가 주였지만, 이외에도 당시 인도에서만 나던 다이아몬드라든가 루비, 중국의 비취,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에서만 소량으로 채취되던 라피스 라줄리, 이른바 청금석(靑金石)같은 값비싼 보석들도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여기서 잠깐 여러분의 교양을 넓히기 위해 청금석(靑金石)에 대해 언급하기로 한다.

푸른 남빛에 간간히 금색이 내비치는 청금석은 오늘날에는 제법 다량 채취되지만, 옛날에는 실로 귀한 보석이라 가격이 다이아몬드의 수 십 배에 달했다.

또 그 바다색, 남색의 색상이 너무도 화사해서 그 가루를 그림의 안료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엄청나게 비싼 물감이라 감히 일반 화가들은 손에 댈 기회가 없었다.

그렇기에 당시 번영하던 피렌체나 베네치아, 제노바와 같은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은 성당벽화를 그려 넣을 때 이 무지무지 비싼 라피스 라줄리의 안료를 썼던 것이다. 주로 채색된 부위는 예수나 마리아의 의상으로서 푸른색으로 칠해졌다. 다이아몬드보다 비쌌던 보석의 가루이니 엄청난 돈질이었던 셈이고, 그림을 본 유럽 여러 나라의 촌놈들은 기가 팍 죽었을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그 일례로, 피렌체의 동부 토스카나에 있는 몬테르키 공동묘지 예배당에 있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품 '임신한 성모 마리아'를 들 수 있다. 성모 마리아는 긴 푸른 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데 바로 이 청람색이 라피스 라줄리 안료로 그린 것이다. 그러니 르네상스 미술을 감상할 경우라면, 라피스 라줄리의 남색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오늘날 이 청람색은 화공 기술로 대량 생산되고 있다. 화방에 가면'울트라마린 블루'라는 이름으로 튜브에 넣어져 개당 2천원 정도면 살 수 있다. 수채화를 즐겨 그리는 필자 역시 이 색깔을 대단히 좋아한다.

피렌체는 베네치아와는 다른 발전 경로를 밟아갔으니 아라비아에서 생산되던 모직물의 제조방법을 알아내어 전 유럽에 수출함으로써 치부했던 것이다. 반면 베네치아는 해상 무역을 통한 이익이 원동력이 되었다.

모직물의 원료는 유럽 중북부로부터 얻었기에 피렌체는 이탈리아 반도 북부 알프스 저 너머의 대륙으로 진출했고, 향신료를 비롯한 해외 물산에 이권을 지녔던 베네치아는 바다를 향했던 것이다.

모직물 공업으로 엄청난 부를 쌓는 피렌체를 보면서 베네치아는 그마저도 욕심을 느낀 것이 끝내 화근이 된다. 기존에 바다에만 신경을 쓰던 전략에서 탈피하여 내륙 쪽으로도 영향력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 바람에 엄청난 전비를 들여 주변의 파도바나 비첸자, 베로나, 브레시카 그리고 베르가모 등지의 도시국가들을 손에 넣으면서 1470년, 경인(庚寅)년에는 내륙의 깊이와 해상의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지중해의 유일한 글로벌 제국으로 등장하였다. 하지만 이것이 베네치아의 전략적 실수가 될 줄이야 그 누가 예견했으랴!

아울러 베네치아가 절정의 위세를 자랑하던 이 무렵, 슬그머니 퇴락의 그림자가 지중해 저편에서 밀려오기 시작하고 있었다. 역사의 조류가 변하기 시작했던 것이니 언제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세월이 흘러 훗날에 가서야 역사가의 눈에 인지되는 법이다.

이야기가 길다보니 다음 글에 이어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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