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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60주년에 되돌아보는 '이승만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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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60주년에 되돌아보는 '이승만의 길'

<새 책> 정병준 교수의 '우남 이승만 연구'

흔히들 한 나라의 지도자는 그 나라 국민의 '얼굴'이라고 말한다. 어떤 인물이 국가지도자의 자리에 올랐을 때, 그것은 그 사람 개인의 능력이나 운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과 국민들, 그리고 주변상황 간의 상호관계 속에 국민들이 '선택한' 결과로 봐야 한다는 뜻일 게다. 박정희ㆍ전두환을 독재자로 비판할 수는 있겠지만 이들이 대통령의 자리에 오르게 된 데에는 국민들도 일정부분의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의미다.

5000년 역사상 최초의 신생공화국을 수립한 이승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보수세력은 그를 '국부(國父)'로 추앙하고, 진보세력은 '분단의 원흉' '외세의 앞잡이'로 매도한다. 하지만 이승만에 대한 포폄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이승만이 해방 직후에 정치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던 과정과 원인을 역사적으로 해명하는 것"이다. 이승만은 이미 우리 역사의 부정할 수 없는, 중요한 일부가 되었으며 그 역사가 오늘의 우리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해방 60주년을 맞으면서 어찌하여 "해방은 한 외세의 지배에서 풀려나 두 외세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된 계기"가 됐으며 "단일했던 식민지가 적대적인 분단국가로 전환되는 계기"가 됐는지를 제대로 해명하기 위해서도 이승만의 권력장악 과정에 대한 객관적이며 역사적인 탐구는 불가결하다.

<사진> <우남 이승만 연구-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우파의 길> 정병준 지음, 역사비평사 펴냄. 792쪽, 35,000원 @프레시안

정병준 교수(목포대 역사문화학부)의 <우남 이승만 연구-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우파의 길>은 바로 이러한 문제의식의 소산이다. 1990년대 초반부터 10여년에 걸친 자료수집과 연구 끝에 펴낸 이 책은 이승만의 출생(1875년)에서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에 이르기까지 그의 행적을 추적하면서 왜 우리 민족 최초의 공화국이 통일국가가 아닌 분단국가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묻는다.

백범 김구나 다른 인물이 아닌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됐는지에 대해서는 적지 않은 기존 연구가 있다. 그가 왕족의 후손(양녕대군의 16대손)이라는 점, ' 나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적 고집, 현실적 정치감각과 정보능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과의 관계 등이 그 원인으로 꼽힌다.

이 책도 대체로 이러한 시각을 취하되 그 양상을 보다 심도 있게 파헤치고 있으며 몇가지 새로운 사실을 제시한다.

첫째, 오랜 망명생할을 했던 이승만은 국내 기반이 없었다는 종래의 통설과는 달리 기독교계ㆍ친미파 인사들로 구성된 강력한 국내기반(흥업구락부)이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해방 직후 좌익이 주축이 된 인민공화국이 그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게 된 데는-그리하여 20여년간 한국민들 사이에서 잊혀졌던 이승만이 일약 전국민적 지도자로 떠오르게 된 데는-1942년부터 미국에서 한국인을 향해 방송된 단파라디오 방송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이승만은 임정 요원 자격으로 몇차례 방송을 했는데 국내에 있던 미 콜럼비아대 유학생 출신 동아일보 기자인 홍익범이 그가 임정의 대통령이며 미국의 승인과 원조를 받고 있다고(모두 사실이 아니었다) 퍼뜨리고 이 소문이 확대재생산됨으로써 그의 위상이 과대평가되게 됐다는 것이다. 1945년말 미국언론의 오보(고의 여부는 알 수 없으나)로 시작된 반탁 소동과 마찬가지로 '소문의 정치'가 우리의 근대사를 규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이승만과 미국과의 관계다. 저자 자신이 밝혔듯이 "이승만에 대한 연구는 한국과 미국 사이의 역사적 관계를 해명하는 구체적 매개체이자, 그 자체로 한국 내 친미파의 역사가 된다."

1904년 한국의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해 루즈벨트 대통령과 헤이 국무장관을 만났고, 미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조지워싱턴대ㆍ하버드대ㆍ프린스턴대 등 미국의 명문대학에서 학사ㆍ석사ㆍ박사 학위를 받았고(1905-10년), 1910-12년 사이의 2년간을 빼놓고는 해방 때까지 약 40년을 미국에서 산 그는 차라리 미국인이라 해야 옳을 것이다. 게다가 이승만이 미국에서 사귄 일단의 기업인ㆍ언론인ㆍ군인 등은 미군 점령하의 남한 해방정국에서 소중한 정치적 자산이 됐다.

그가 해방 직후 중경의 임정 요인보다 한달 이상 빨리 귀국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미국 인맥 덕이었다. 당시 극동의 황제 맥아더는 이승만에게만 귀국 허가를 내주었으며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를 동경으로 불러내 이승만과의 회합을 주선했다. 맥아더가 자신의 전용비행기인 바탄호를 국외로 보내 외국인을 태운 것은 딱 2차례였는데 탑승자는 모두 이승만이었다. 1945-50년 맥아더는 2차례 동경을 비웠는데 그중 한 번은 대한민국 정부출범식이었으며(다른 한 번은 필리핀 정부수립) 이승만과는 5차례 이상 회동했다.

맥아더가 이토록 이승만을 극진히 대접한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미국적 시각을 갖고 미국의 이익을 대변한 때문이 아니었을까. 저자의 지적대로 "이승만의 외교 노선과 활동은 미국을 사고의 중심에 놓고, 미국을 대상으로, 미국식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었으므로.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이승만이 "권좌에 올랐을 때, 그의 정치 행위는 (…) 한국 현대정치사의 출발점이자 판단기준이었고, 비교의 지표가 되었"으며 "모든 평가를 떠나, 한국 현대사에 오랜 울림을 갖는 역사로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반미자주의 목소리가 어느 때보다 드높은 요즘이지만, 미국으로 향하는 조기유학의 행렬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고 박사 학위를 받은 경제관료의 90%가 미국 박사라는 통계치에 접하면 진정한 자주의 길은 아직도 험난하다는 예감을 떨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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