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일본, 그 끝없는 싸움의 시작**
『겨울 연가(冬のソナタ)』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저는 이 드라마를 방영할 당시에는 시시콜콜한 남녀간의 사랑 얘기라고 생각하여 관심이 없어 보지 않았다가 일본에서 열광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세계적인 드라마가 된 이후, 여기저기서 찾아서 아내와 함께 며칠 밤을 새워가며 다 보았습니다.
은행나무 잎으로 가득한 남이섬의 오솔길,
노을 지는 북한강변,
춘천(春川) 호반의 정취,
눈 덮인 벌판의 연가,
여기에 아름다운 음악과 사랑의 노래들, 몽고메리 클리프트(Montgomery Clift)나 쥴리아 로버츠(Julia Roberts)보다 잘생긴 한국의 남녀 주인공들, 등장인물들 모두의 탁월한 연기 등등 『겨울 연가』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대개 성공한 드라마가 그렇듯이 『겨울 연가』는 단일한 구조가 아니라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얽히고설켜 재미도 있어 마치 추리소설을 보는 듯합니다. 끝까지 사람의 마음을 졸입니다. "도대체 준상이가 누구의 아들이야?"라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제가 보기엔 『겨울 연가』는 지나치게 순애보(殉愛譜)적이어서 한편으로 유치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런데도 『겨울 연가』를 왜 이렇게 한국과 일본의 여성분들이 좋아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심지어는 우즈베키스탄과 같은 중앙아시아·베트남·중국까지도 열풍을 일으켰으니 말입니다.
돌이켜 보면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유치함이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기도 합니다. 오히려 그 유치함을 사랑할 줄 아는 것이 사랑의 본질일지도 모르죠. 저는 항상 "당신은 사람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아"라는 말을 많이 들은 것 같습니다. 제가 로맨틱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상하리만치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항상 가슴 속에 뭔가가 저를 재촉하는 것이 있었고 사랑에 완전히 빠진다는 것은 일종의 자기 존재의 부정이라는 생각에 오랫동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세상을 살다보니 참으로 '사랑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삶의 굴곡이 많을수록 깊은 사랑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읽은 책 가운데는 과거 혁명가들은 유난히 부부간의 금슬이 좋은 경우가 많다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부부간의 깊은 사랑은 우리들의 '죽음으로의 여행'을 편하게 해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을 때 자신의 가장 아름답고 편안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가장 힘든 고통의 순간을 이기는 힘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병사들 대부분이 '어머니'를 부르면서 세상을 떠난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가끔은 아내나 연인(戀人)을 부르면서 죽는 사람도 있답니다. 그런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죠. 세상에 가장 편한 존재인 어머니보다 연인을 더욱 편안하게 생각한다는 얘기니까요. 사랑을 제대로 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무의식은 거짓말을 하지 않지요.
사랑은 우리도 모르게 다가와 마음의 솜들을 적십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사랑에 젖은 솜 때문에 마음이 무거워져서 스스로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런 것이 사랑이겠죠. 세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사랑의 본질은 크게 바뀌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생각해보세요. 지금까지 크게 히트 친 드라마들은 하나같이 한 남자 또는 한 여자가 어떤 경우에도 불구하고 오직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구조입니다. 이것은 심리적으로 나 자신을 이 같이 열렬히 아끼고 사랑해주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나 자신은 이 사람 저 사람 사랑하지만 상대는 오직 나만을 사랑하기를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아이러니지요. 특히 여성에 대한 사회적 억압과 왜곡이 심한 나라일수록 여성은 제대로 사랑받지 못합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도 항상 불안한 상태이기도 합니다. 그러니 더더욱 자기만을 사랑해주는 남자가 있어야 합니다.
『겨울 연가』는 두 번 이상이나 자신의 죽음과 연인과의 사랑을 맞바꾸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상대적으로 사랑받지 못하는 한국과 일본의 여성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지요.
『겨울 연가』는 여러 면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수천 명의 한국과 일본의 역사가나 외교관들이 하지 못할 일을 해냈거든요. 마지막 쥬신의 나라인 한국과 일본 두 나라 국민들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죠. 2002 월드컵에서 우리의 선전을 아낌없이 성원해주었으며 『겨울 연가』에 대한 깊은 사랑으로 한국을 새롭게 인식하게 된 일본 국민들을 보면서 쥬신으로서 새로운 역사의 장을 열어갈 수도 있겠다는 가능성을 저는 본 것이죠.
***(1) 이상한 기록**
1970년대 후반 『삼국지(三國志)』의 영웅 조조(曹操)의 고향인 안휘성[安徽省 : 한나라 때 패국(沛國) 초현(譙縣)]에서 발견된 고분에서 "유왜인이시맹불(有倭人以時盟不)"이라 적힌 명문 벽돌이 출토되어 말들이 많았습니다. 이 부분의 해석은 쉽지가 않는데 대체로 보면 "왜인들이 있는데 때를 보아 동맹을 하든가 아니든가(不同盟)"라고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고분이 말썽이 많은 것은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이 고분의 주인공이 과연 조조의 할아버지인가 하는 점과 다른 하나는 왜 왜(倭)라는 존재가 여기까지 와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려운 책이기도 하지만 중국 최초의 지리지『산해경』에 "개나라는 거연 남쪽이고 왜의 북쪽이며 왜는 연나라에 속한다(蓋國在鉅燕南倭北 倭屬燕 : 권 12 해내북경)."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기존의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가 안 되지요. 왜냐하면 왜국은 바다 건너 멀리 있는데 요동반도인 연나라 옆에 있다니요? 세상에 이런 말이 어디 있습니까? 그 뿐이 아니죠. 『삼국사기』의 기록은 더 이상한 기록이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보면 차대왕(次大王)이 왕제(王弟) 시절에 "(132년) 왜산(倭山)에서 사냥했다"는 기록(『三國史記』「高句麗本紀」太祖大王 80年, 94年)이 그것이죠. 당시의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를 거점으로 하여 요동으로 진출하기 위해 준비를 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귀한 왕자가 왜산에서 사냥을 했다니요? 그렇다면 왜산이라는 곳은 요동이나 요서 지역처럼 들리는데요? 알 수 없는 말이 자꾸 나옵니다. 그리고 『산해경』을 비롯한 여러 책에서도 왜인이 일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반도, 중국 등 여러 군데 존재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한서(漢書)』에는, "낙랑의 바다 가운데 왜인이 있고 그것이 나누어 백 여국이 있었다(樂浪海中有倭人, 分爲百餘國 :『漢書』卷28下 地理志 第8下)."고 합니다. 이상하지요? 낙랑이라면 요즘으로 치면 평양(平壤)에서 가까운 곳인데 그 곳에 왜인들이 있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그 주석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위략(魏略)』에서는 왜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고 산과 섬에 의지하여 나라를 만들었다. 그리고 바다를 건너 천리 길에 또 나라들이 있는데 그들은 모두 왜인들이다(魏略云 倭在帶方東南大海中 依山島爲國 度海千里 復有國 皆倭種 : 『漢書』卷28下 地理志 第8下)."
이상하죠? '왜 = 일본'이 아니라 여기저기에 왜가 있습니다. 마치 부여나 백제의 영역을 얘기하는 듯도 합니다. 위의 사실대로 본다면 초도·석도·백령도·연평도·흑산도·다도해·제주도·대마도 등 한반도 서남해안의 섬들도 다 왜(倭)가 될 가능성이 크지요.
그런데 『후한서』에는 더욱 이상한 말이 있어서 우리를 완전히 한방 먹입니다.
"서기 178년 겨울, 오랑캐(선비)가 다시 주천(酒泉)에 쳐들어와, 변방이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사람들이 나날이 불어나자 들짐승을 사냥하는 것만으로 양식을 대기가 힘들었다. 이 때문에 단석괴(檀石槐 : ?~181)는 스스로 정복지들을 널리 돌아보다가 오후(烏侯)에서 진수(秦水)를 보았는데, 진수(호수)는 광대하고 큰물이 멈춘 채 흐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물 속에는 물고기가 있었으나 잡지를 못했다. 단석괴는 왜인(倭人)이 그물질을 잘 한다는 말을 들은 바 있어 이에 동으로 가서 왜인국(倭人國)을 공격하여 왜인들의 1천여 가를 잡아온 뒤, 그들을 진수 위로 이주시키고 난 뒤 '물고기를 잡아 먹을거리를 마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光和元年冬 又寇酒泉 緣邊莫不被毒 種衆日多 田畜射獵 不足給食 檀石槐乃自徇行見烏侯秦水 廣從數百里 水停不流 其中有魚 不能得之 聞倭人善網捕 於是東擊 倭人國 得千餘家 徙置秦水上 令捕魚以助糧食(『後漢書』「鮮卑傳」)."
이렇게 이상한 장소에서 왜인국(倭人國)이라는 말이 또 나옵니다. 주천(酒泉)이라는 곳은 현재의 깐수성(甘肅省) 주취안(酒泉)인데 이 곳에서 동쪽으로 가면 큰 호수가 있고 그 호수에서 다시 동쪽으로 가면 왜인(倭人)들이 산다는 말이 되죠?
단석괴는 말하자면 영락대제(광개토대왕)와 같은 분으로 『삼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대체로 2세기 중반 남으로는 허베이 등의 지역과 북으로는 정령(丁靈), 동으로 부여 등에 이르는 곳을 점령한 대정복 군주였습니다. 그런데 『자치통감(資治通鑑)』에는 바로 이듬해에 단석괴가 유주(幽州)와 병주(幷州)에 침입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병주(幷州)는 현재의 산시성(山西省) 타이위안(太原)이나 따둥(大同) 지역이고 유주(幽州)는 바로 베이징(北京) 지역입니다.
[그림 ①] 단석괴의 출몰지역 (주천·유주·병주)
결국 왜인들이 거주한 지역은 현재의 베이징이나 요동지역·산둥반도 서부·한반도 황해의 도서지방 등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대체로 바다나 강에 연하여 사는 사람들 즉 연안(沿岸) 사람들로 볼 수도 있겠군요.
그런데 또 『후한서』 다른 부분에서는 "왜국은 낙랑에서 2천리를 가야하고 남자들은 얼굴이나 몸에 문신을 하고 이 문신의 좌우 대소로 높고 낮음을 나누었다(倭國去樂浪萬二千里, 男子黥面文身, 以其文左右大小別尊卑之差 :『後漢書』卷5 安帝紀)."라는 말이 있는데, 또 이 말은 한반도 남해나 일본 열도를 가리키는 듯도 합니다. 같은 책인데도 뒤죽박죽입니다.
왜(倭)에 대한 기록이 매우 상세하고 후대의 기록에 큰 영향을 미친 『삼국지(三國志)』에서 말하는 왜(倭)의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에 있고 산과 섬에 의지하여 나라를 정했다. 과거에는 1백 여국이 있었고 현재는 30여 개국이 중국과 왕래를 한다. 대방군에서 왜로 가는 데는 배로 해안을 따라 남으로 갔다가 다시 동으로 가서 왜의 북쪽 해안에 있는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게 된다. 그 곳까지는 7천여 리가 된다. … 기후는 몹시 따뜻하여 겨울이든 여름이든 싱싱한 나물을 먹을 수 있고 … (사람이 죽으면) 상주는 곡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춤추고 노래한다. … 무슨 일이 있어 먼 길을 가거나 특별한 일이 있을 때는 반드시 뼈를 태워 길흉을 점친다. … 각 나라마다 시장이 열리고 물건을 사고 팔 때 신분이 높은 사람이 감독한다. 여왕국(女王國)으로부터 북쪽에는 특별히 큰 기관을 두어 여러 나라를 관리하는데 모든 나라가 이 기관을 몹시 두려워한다(『三國志』倭人傳)."
이 기록을 보면 왜(倭)는 현재의 일본(日本)을 가리키는 것도 같지만, 구야한국은 김해 지역의 나라 이름이 구야국(狗邪國)이라, 가야를 가리키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가야 연맹의 냄새가 물씬 풍깁니다. 특히 "(사람이 죽으면) 상주는 곡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술을 마시고 춤추고 노래한다(喪主哭泣 他人就歌舞音酒)."는 기록은 2천년 후인 지금 우리의 모습과 너무 흡사합니다. 한국의 초상집은 사실상 동창회(同窓會)나 동호회(同好會), 또는 화투(花鬪) 하우스가 아닙니까? 이것은 쥬신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삶과 죽음을 하나로 보는 습성은 천손족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하여 중국인들은 철저히 현세적입니다.
그나저나 왜(倭)의 실체가 무엇인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지요?
하지만 그 동안의 분석들로 유추해 보면 왜의 실체를 알기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왜라는 것은 쥬신들 가운데 해상세력 또는 큰 강을 끼고 사는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라고 봐야지요.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왜가 "가야에 예속된 나라, 또는 가야국의 분국"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말이지요.
그리고 '왜'라는 말이 '옥저(오쥐)'나 '와지'와 다르지 않다는 말씀은 이미 드렸죠. 그것은 물길(勿吉)이라는 비칭과 다를 바 없죠('물길과 말갈' 부분 참고). 결국은 물길 등 쥬신 가운데 연안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왜인으로도 불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왜라는 것은 고구려나 부여처럼 일정한 국체(國體)를 가지지 않고 요동과 만주·한반도 남부지역·북규슈(北九州) 등에 광범위하게 거주하는 연안지역의 사람들의 별칭으로 볼 수 있죠.
따라서 단순히 왜를 대륙과 관련이 없는 일본 열도의 사람들로만 이해하거나 가야국의 별종이니 분국이라고 보는 것은 왜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소치지요. 제가 보기엔 왜라는 말은 앞서 보았듯이 물길(勿吉)과도 크게 다르지 않죠. 다만 기마민족과 해상세력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공유하는 부분도 많거든요(한국의 어촌 사람들은 한국인이 아닙니까?).
이들은 요동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한반도 남부까지 흘러 들어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래서 『삼국지』나 『후한서』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죠.
『삼국지』를 보면, "(변진) 가운데 독로국(瀆盧國)이 왜(倭)와 접해있다(『三國志』東夷傳 弁辰)."고 합니다. 그러면 이 독로국의 위치를 알면 한반도와 관련한 왜국의 위치도 알 수 있겠군요. 독로국은 삼한시대(三韓時代) 변한(弁韓) 12국의 하나로 크게는 두 가지의 설이 있습니다. 먼저 정약용(丁若鏞) 선생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경상남도 거제도(巨濟島)로 추정하셨고(『我邦疆域考』弁辰別考), 이병도 박사는 현재 부산광역시 동래(東萊) 지역으로 추정하였습니다.
그러니까 독로국이 어디이든 간에 한반도 경상도 남부 지역에 있었던 사람들도 왜(倭)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한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또 있습니다.
"한(韓)은 마한(馬韓)·진한(辰韓)·변진(弁辰)의 세 종류가 있다. 마한은 서쪽에 위치하고 북쪽으로는 낙랑이 있고 남쪽으로는 왜(倭)와 접해있다 … 진한은 동쪽에 있고 12개 정도의 나라가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하고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인데 대략 12개국이 있고 그 남쪽은 왜(倭)와 접하고 있다(韓有三種: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貊接. 弁辰在辰韓之南, 亦十有二國, 其南亦與倭接 :『後漢書』『後漢書』卷 85 東夷列傳 第75)."
즉 이제는 전라도 남부 지방도 왜라고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한반도 남부 해안 지역은 모두 왜(倭)라고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희근은 안정복의 『동사강목(東史綱目)』(地理考)과 『당서(唐書)』(地理志 高句麗), 『삼국사기』(地理志) 등을 토대로 분석하여 한반도에서 왜의 중심지는 전라남도 나주(羅州)라고 합니다[이희근,『한국사는 없다』(사람과 사람 : 2001) 88~92쪽]. 그러나 나주가 한반도 왜 세력의 전체 중심지라기보다는 전라도 지역의 왜 중심지가 나주라고 보는 편이 타당합니다.
한반도에 국한시켜서만 본다면, 현재 황해의 도서지방과 한반도 남부의 해안 지대에 거주한 사람들을 부르는 말이 왜(倭)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해안 지방의 우리 민족을 왜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점 제발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러니 일본사람들이나 가야사람들만 왜라고 부른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점은 알겠죠? 왜냐하면 가야 사람들뿐만 아니라 요동·산동·평양의 연안 지역 사람들 까지도 왜인(倭人)이라고 했기 때문이죠.
정리해봅시다.
그 동안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은 왜(倭)가 일본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말은 '키가 작다'는 의미의 '왜(矮)'라는 말과 결합하여 일본인들을 비하하는 용어로 사용되어왔습니다.
그러나 왜인(倭人)이라는 말은 현재 산동(山東)·베이징(北京)이나 요동(遼東) 지역, 황해 도서지역, 한반도 남부 해안 및 도서지역, 그리고 일본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게 흩어져 살아온 사람들로 결국은 말갈이나 물길의 다른 표현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림 ②] 왜(倭)라는 말이 나타난 지역 관련 지도
결국 왜(倭)라는 말은 쥬신, 또는 조선인(朝鮮人)·일본인(日本人)이라는 말과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히 왜의 영역은 한반도로 이주하는 벼농사 문화를 주도한 남방계의 이동로, 즉 남중국 해안 - 산둥반도 - 요동반도 - 한반도에 이르는 통로와도 일치하여 남방계와 섞인 상태로 추정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체적인 쥬신의 이동로[알타이 - 허베이 - 산둥 - 요동 - 아리수(흑룡강 : 부여) - 압록강(아리수) 유역·아리ㄱ오손 - 한강(아리수) 유역 - 한반도 남부 등]와도 상당 부분 겹치고 있습니다.
놀랐죠? 더욱 놀라운 사실 하나를 알려드리죠.
『삼국사기』신라본기(新羅本紀)에 왜(倭)라는 말이 박혁거세 이후 줄기차게 나타나 신라를 침범하다가 소지왕(479~500) 이후에는 왜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죠. 즉 500년 이후 왜의 침범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9세기경에 다시 나타나는데 이 때(통일신라 애장왕 4년 : 804)는 일본국(日本國)이라고 나옵니다.
그런데 500년 이후라면, 일본은 더욱 강력해지고 있는 시기인데 신라를 공격을 했다면 더욱 강력하게 공격을 했겠죠. 그러나 이 500년 이후에는 신라를 공격한 기록이 없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흔히 왜의 본거지는 일본이라는 식으로 알고 있지만 적어도 『삼국사기』의 기록들에 나타난 왜인이나 왜병이 일본열도에 본거지를 두고 있었다는 증거는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木下禮仁 "「五世紀以前の倭關係記事 -『三國史記』を中心として」"『倭人傳を讀む』, 森浩一 編, (中公新書 : 1982).
이상하죠? 더욱 이상한 것은 백제본기(百濟本紀)에는 아신왕(392~405) 이전에 왜는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신왕 이후에는 주로 통교와 사절의 왕래가 대부분이죠. 이 말은 백제와 왜가 잘 구별이 되지 않거나, 백제와 왜가 매우 긴밀하여 하나의 운명공동체로 들립니다.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좀 알기 쉽게 말할 수는 없을까요?
간단히 말하면, 500년 이전의 신라를 줄기차게 공격한 왜(倭)는 일본(日本)이 아니라 경남해안 지방의 비주류 가야인 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통상 말하는 이 시대의 왜구(倭寇)는 일본이 아니라 한반도 남해안 지방에 광범위하게 거주하던 [포상팔국(浦上八國)과 같은] 비주류 가야 세력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유난하게 친백제(친부여)계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고구려에는 적대적이지요.
나아가 그 동안 한국과 일본 양국 사학자들이 수십 년을 싸워 온 영락대제비(광개토대왕비)에 나타난 왜(倭)도 결국은 바로 이 한반도 남부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참고로 영락대제비는 "(太王)渡海破百殘倭救新羅 以爲臣民 : [(광개토대왕께서) 바다 건너 백잔(부여의 잔당 : 백제)과 왜를 쳐부수어 신라를 구하고 이들을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하고 있지요(이 부분은 그 동안 너무 많이 다루어온 주제이므로 다음 기회로 미루지요).
그 동안 이 왜의 존재를 일본에서는 야마도(大和) 정권, 또는 한반도 남부 왜인(井上秀雄,『任那日本府と倭』(東出版 : 1973) 119쪽]으로 보았고, 한국에서는 북규슈의 백제계 왜국[金錫亨,『초기조일관계연구』(사회과학원출판사 : 1966) 297쪽], 친백제 북규슈 세력[千寬宇, "廣開土王凌碑文再論"『全海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일조각 : 1979)], 중국에서는 북규슈의 해적 세력[王建群(박동석譯)『廣開土王碑硏究』(역민사 : 1985) 236쪽] 등으로 보고 있는데 제가 보기엔 조금씩 잘못된 견해들입니다.
그리고 500년 이후 왜가 나타나지 않는데 그 이유는 (제가 보기에) 이 시기에 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었기 때문입니다. 한창 신라의 침공으로 정신이 없는데 웬 침략을 하겠습니까? 532년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고, 554년 백제·가야 연합군이 관산성에서 신라에 대패한 이후 (백제 성왕도 전사하죠) 대부분 가야의 소국들은 신라에 투항합니다. 6세기 중반 대가야도 신라에 멸망당합니다(562).
놀랐죠? 왜(倭)라는 말은 요동 - 한반도 남부 - 북규슈(北九州) 등에 광범위하게 거주한 친부여계 연안 거주민들(해양세력)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항상 '왜놈'이니 하면서 놀리고 욕하던 그 말이 결국 우리 스스로를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일본인들이 '조센징'하면서 비하하던 그 말과도 다르지 않죠. 앞에서 보았지만 일본은 조선의 다른 표현이 아닙니까? 마치 미국인들이 "양키 고우 홈(Yankee, Go home)"이라고 서로 욕하는 것과 다르지 않죠. 물론 양키(Yankee)란 원래 미국 동북부 일부 해안지역(뉴 잉글랜드) 사람들을 말하는데 '겁쟁이'라는 의미로 약삭빠르고 '사나이' 답지 못하다는 말이지요. 그렇다고 양키가 미국인이 아닙니까? 유명한 소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를 보세요. 온통 양키에 대한 욕들이 나옵니다. 그런데도 대외적으로는 오히려 양키가 미국인을 대표하는 말로 자리 잡았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1천 수백 년을 '누워서 침 뱉기 누가누가 잘하나' 시합을 한 셈입니다. 아니면 형제간에 서로 얼굴을 맞대고 침 뱉기 시합을 한 것입니다. 이런 부끄러운 일이 세상에 또 있겠습니까? 한족(漢族)들은 조금이라도 비슷하면 그대로 하나로 합쳐 생각하는데[구대동존소이(求大同存小異)] 우리는 거의 같은데도 차이를 찾아서 서로 나누고 있습니다. 기가 찰 일입니다.
생각해보세요. 오늘날에도 조선이 망하고 난 뒤 만주로 러시아로 중앙아시아로 떠돌고 있는 우리 동포를 고려족(高麗族), 또는 조선족(朝鮮族)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현재 조선이라는 나라가 있습니까? 고려라는 나라가 있습니까? 그렇다고 그들이 한국인, 즉 쥬신이 아닙니까? 지금 우리는 심지어 북한(北韓) 주민조차도 한민족으로 생각하지 않고 열등 국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있습니다. 하기야 같은 서울(Seoul) 내에서도 강남(江南)이니 강북(江北)이니 하여 서로 차별하는 마당이니 오죽 하겠습니까?
제가 앞에서 물길(勿吉 : 발음이 [웨지])이나 말갈은 만주어로 밀림, 또는 삼림(森林)의 뜻인 '웨지'[窩集 (Weji)], 또는 '와지'에서 나왔다고 말씀드렸죠. '와지'라는 말은 삼림의 뜻 말고도 동쪽, 즉 '해뜨는 곳(日本)'을 의미합니다. 평생을 알타이 연구에 몸을 바치신 박시인 선생(前서울대교수 : 1921~1990)은 이 말을 옥저(沃沮)나 왜(倭)의 어원(語源)이라고 분석합니다. 저도 박시인 선생님의 견해를 지지합니다.
결국 왜(倭)라는 말은 숲의 사람·동쪽 사람·해 뜨는 곳의 사람들이라는 의미입니다. 조선인(朝鮮人)이나 쥬신(Jüsin)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죠.
이것을 뒷받침할만한 기록이 있습니다.
『한서(漢書)』에서는 "왜라는 것은 나라이름이다. 몸에 문신을 사용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이를 일러 委[위(웨?)]라고 이른다(倭是國名, 不謂用墨, 故謂之委也 :『漢書』卷28下 地理志 第8下의 주석)"라고 하고 있습니다. 즉 왜라는 것의 발음이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와·위·웨 등의 발음 가운데 하나라는 말입니다.
참고로 『삼국지』에 따르면, 이들이 문신을 하는 것은 민족적 습속이 아니라 물일을 할 때 큰 고기나 물새들이 물일하는 사람[水人]들을 상해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산업적 또는 직업적 행태라고 합니다(『三國志』「魏書」倭人傳). 요즈음 식인 상어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몸에 긴 천을 두른다든지 하는 것과 같은 행태지요.
『후한서』에서는 "왜국은 한의 동남의 큰 바다 가운데 있다. 산섬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웠고 대개 1백 여국이 된다. … 그 가운데 세력이 큰 왜왕은 야마다이국(邪馬臺國)에 거주하였다(其大倭王居邪馬臺國)."고 하는데 그 주석에 보면 "이제는 야마로 이름을 짓고 그것을 '와(訛)'로 읽는다(今名邪摩(惟)[堆], 音之訛也. :『後漢書』卷 85 東夷列傳 第75)."라고 합니다[이 말에서 야마도(大和), 즉 화(和)라는 말이 나왔겠죠?].
이를 본다면 왜라는 것의 발음은 물길(勿吉)과도 별로 다르지 않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죠.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은 왜를 일본 열도로 보려는 경향이 강해집니다. 『후한서(後漢書)』를 보면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옵니다.
"한나라 환제와 영제 연간(132~189)에 왜국에 대란이 일어나 다시 서로 싸워서 주인도 없게 되었다. 히미코(卑彌呼)라는 한 사람의 여자가 있었는데 나이가 들어도 결혼을 하지 않았고 귀신도(鬼神道)를 숭상하고 요술로 능히 대중을 현혹할 수 있었다. 그래서 히미코는 왕이 되었는데 시비는 1천 명이요, 음식을 시중드는 남자 1인이 있었고 … 법속은 엄격하였다. 이 히미코 여왕의 나라로부터 동쪽으로 천여 리를 가면 구로국(拘奴國)에 이르는데 이들은 모두 왜인들이다. 그런데 이들은 히미코 여왕에 속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남으로 4천여 리를 가면 주유국(朱儒國)이 있고 사람들의 키가 3~4척밖에 되지 않는다. 여기서 다시 동남으로 배를 타고 1년을 가면 나국(裸國)·흑치국(黑齒國)에 이른다(桓靈閒, 倭國大亂, 更相攻伐, 歷年無主. 有一女子名曰卑彌呼, 年長不嫁, 事鬼神道, 能以妖惑眾, 於是共立為王. 侍婢千人, 少有見者, 唯有男子一人給飲食, 傳辭語. 居處宮室樓觀城柵, 皆持兵守衛. 法俗嚴峻 自女王國東度海千餘里至拘奴國, 雖皆倭種, 而不屬女王. 自女王國南四千餘里至朱儒國, 人長三四尺. 自朱儒東南行船一年, 至裸國、黑齒國, 使驛所傳, 極於此矣 :『後漢書』卷85 東夷列傳 第75)."
즉 왜국을 현재의 일본과 동남아시아와 연관을 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기록을 보면 오키나와 - 류큐 - 필리핀(黑齒國?) 등으로 가는 항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의 글은 2세기 일본의 사정인데 당시에는 남부여(백제)계가 일본 열도를 정벌하기 전의 상황입니다.
『삼국지(三國志)』에서는 "왜인은 대방의 동남쪽 큰 바다에 있고 산과 섬에 의지하여 나라를 정했다. … 대방군에서 왜로 가는 데는 배로 해안을 따라 남으로 갔다가 다시 동으로 가서 그 북쪽 해안에 있는 구야한국(狗邪韓國)에 이르게 된다.(『三國志』倭人傳)." 라고 하여 왜가 가야 남부, 또는 현재의 일본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후 『진서(晉書)』에서는 239년 경 "동왜(東倭)"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正始元年春正月, 東倭重譯納貢 : 『晉書』卷1 宣帝). 같은 책에 "위나라 때까지는 30여 개 나라들이 서로 통교하며 지냈는데 호수는 대개 7만 정도(至魏時, 有三十國通好. 戶有七萬 : 『晉書』卷97 列傳 第67)"라고 합니다. 『진서』에서는 동왜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왜가 광범위하게 존재했음을 시사하고 있습니다. 마치 북부여·동부여 하듯이 말입니다.
그런데 『진서(晉書)』를 보면, 히미코의 존재는 시기가 조금 뒤로 미루어집니다. 즉 『진서』에는 "한나라 말기 왜인들이 난을 일으켜 서로 치고 박고 싸우는 통에 안정되지 못했다. 그래서 여자를 왕으로 세웠는데 히미코라고 했다. 선제(사마의)가 공손씨를 토벌하였을 때(238) 그 여왕이 사절을 대방 땅까지 보내기도 했다. 그 후 조공이 끊이지 않았다(漢末倭人亂, 攻伐不定, 乃立女子為王, 名曰卑彌呼. 宣帝之平公孫氏也, 其女王遣使至帶方朝見, 其後貢聘不絕 :『晉書』卷97 列傳第67 四夷)"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나라가 성립되던 3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왜 영역은 부여 세력이 제대로 진출하지 못했고 여러 개의 국가가 난립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미코 여왕이 정시 연간(239~248)에 세상을 떠나자 남자 왕을 세웠는데 또 다시 이에 복종하지 않고 많은 정변이 일어나자 히미코 여왕의 종녀(宗女)를 왕으로 세웁니다. 그 후에 다시 남자로 왕을 세우고 중국과의 외교를 강화하여 진나라를 거쳐 송-제-양나라에 이르기까지 조공이 끊이질 않았습니다(正始中, 卑彌呼死, 更立男王. 國中不服, 更相誅殺, 復立卑彌呼宗女臺與為王. 其後復立男王, 並受中國爵命. 江左歷晉宋齊梁 朝聘不絕 : 『北史』卷94 列傳 第82).
시간이 지나 『북사(北史)』가 등장하는 시기엔 왜는 거의 일본 열도로 굳어지고 있습니다. 『북사』에는 "왜국은 백제와 신라의 동남쪽 수륙 삼천리에 있다. 큰 바다 가운데 산섬에 사람들이 살고 있다(倭國在百濟、新羅東南, 水陸三千裏, 於大海中依山島而居 :『北史』卷94 列傳 第82)"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북사』는 북위(386∼534)에서 수나라(581~618)에 이르는 네 개의 왕조 242년간의 역사서이죠.『북사』에서는 일본의 왕도(王都)에 이르는 길이 상세히 묘사되어있습니다.
남조의 역사서들도 마찬가지입니다.『송서(宋書)』에 따르면 "왜국은 고려(고구려)의 동남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倭國在高驪東南大海中 : 『宋書』卷97 列傳 第57)"라고 합니다. 이 책은 송나라(420~479)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남제(南齊) 무제(武帝)의 명령으로 488년경에 편찬된 책입니다. 그러니까 5세기경에 이르면 이제 '왜 = 일본열도'라는 등식이 거의 성립하게 되지요.
이와 같이 일반적인 쥬신의 다른 이름이었던 왜(倭)라는 말이 일본 열도로 정착되어가고 있음을 시기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마치 쥬신이라는 말이 만주와 한반도에 정착해 갔듯이 말입니다.
그래서 다 따지고 보면 오늘날 일본은 남부여(백제)로 인해서 다시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일본이란, 대륙에서 패배한 강력한 기마민족인 부여계가 남하하여 기존의 왜라는 범쥬신의 해양세력들을 다시 제압하고 강력한 고대 국가를 건설한 것입니다. 즉 일본의 고대국가의 주체는 바로 부여계(남부여 또는 백제)라는 것이죠. 이것이 일본(日本)의 기원인 야마도(大和) 왕국의 실체지요. 이 점은 앞 장에서 충분히 보셨을 것이라고 봅니다.
이제 왜(倭)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그러면 이제는 일본을 더 알아봅시다.
***(2) 일본, 또 하나의 한국**
부여는 재미있는 나라입니다. 친중국적인 정책을 오랫동안 견지했지만 완전히 한화(漢化) 정책을 시행하지는 않았습니다. 마치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이지만 그 중심에는 부여가 있다는 '여체중용(餘体中用)'이라고나 할까요?
오늘날 일본도 그렇지요. 탈(脫)아시아니 하여 친서구(親西歐) 정책을 지향하면서도 그 근본은 매우 국수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의 것이 최고라는 의식 말입니다. '화체양용(和体洋用 : 일본의 것을 근간으로 지키고 필요한 서양문물을 받아들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일본이 재미있는 나라라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일본에는 기독교가 성공적으로 정착하지 못하고 일본 인구에 비해 기독교도가 거의 없다는 점입니다. 한국과는 상당히 대조적입니다. 일본의 거리를 가다보면 불구(佛具), 즉 불교용품점이 많습니다. 그리고 이 불교(佛敎)라는 것도 주로 생활 불교적인 측면이 강합니다. 즉 불교의 원리를 따르되 토착화된 일본 불교라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대승불교, 또는 불교 진리 그 자체를 숭상하는 한국 불교와도 또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불교라는 진리 그 자체에 대한 탐구는 한국이 우수하지만 실질적으로 신도들에게 도움을 주는 정도는 일본이 우수합니다. 즉 한국 불교는 불교라는 그 교리 자체를 아는데 좋지만 그저 일반인들이 불교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하는 데는 일본 불교가 좋다는 말입니다. 사실 어차피 스님이 안 되는 바에는 생활에 필요한 불교를 믿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거든요.
대부분의 일본 사람들은 신도(神道)를 믿는데, 이 '신도'는 일종의 조상신을 믿는 종교라고나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 조상신이라는 것은 올라가다보면 범쥬신의 전통을 벗어날 수가 없지요. 일본 전문가 김운용 교수의 말을 들어볼까요?
"일본 신사(神社)에는 언제나 큰 방울이 걸려 있는데 그것도 역시 무당이 갖는 것이 아닌가! 신사 앞에 있는 '도리이(とり)'는 무당집 앞마당에 있는 신이 내린다는 샛대가 아니고 무엇인가! 나는 어설프게나마 일본 신도에 쓰이는 것들의 원형은 한국 농촌의 무당집에 있는 것들임을 알게 되었다[김운룡,『한일민족의 원형』(평민사) 63쪽]."
[그림 ③] 일본의 상징, 도리이(새 날개를 형상화)와 신사(神社)
이 지적은 범쥬신의 전통을 가장 간결하고 적확하게 나타낸 말로 볼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잃어버리고 있는 것들이 일본에서는 더욱 견고하게 보호되고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인류학자인 김택규 교수는 "일본의 신사 가운데서 이세신궁(伊勢神宮 ; 皇太神宮), 숙전신궁(熟田神宮), 강원신궁(彊源神宮), 출운신궁(出雲神宮 ; 大社) 등 신궁(神宮)으로 불리는 신사(神社)와 그 신들은 신라 신궁의 영향이라는 견해가 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 신궁에는 모두 한계(韓系) 문물(文物)이 그 신체(神體)로서 제신(祭神)의 기능을 하고 있다. 거울·검(劍)·곡옥(曲玉)으로 된 이른바 삼종(三種)의 신기(神器)를 비롯하여 칠지도, 한서검(韓鋤劍) 등이 그것이다[김택규,『한일문화비교론』(문덕사 : 1993) 129쪽]" 라고 하고 있습니다.
저는 앞에서 일본 신들의 고향이 경상남도 지역이며 일본 야마도 조정이 남부여(백제)를 바탕으로 성립했다는 이야기를 해왔습니다. 결국 한국인과 일본인은 동족(同族)이라는 애깁니다. 이것은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 한일 관계사를 연구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적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일본은 세계 여러 나라들과 비교해서 어쩌면 가장 독특한 문화를 가진 민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만큼 과거의 쥬신의 전통을 많이 가지고 있죠. 홋가이도(北海島)의 아이누를 제외하면 문화적인 측면에서나 생물학적으로 측면에서 상당히 단일적인 특성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과 일본이 동족(同族)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전에도 여러 차례의 지적이 있었습니다.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니 한국과 일본의 조상이 같다하여 무조건 식민사관(植民史觀)을 떠올리면 안 됩니다.
예를 들면, 14세기 일본 남조의 유력한 정치 지도자였던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 : 1293-1354)는 자신의 저서인 『신황정통기(新皇正統記)』에서 "옛날 일본은 삼한(三韓)과 같은 종족이라고 전해왔다. 그런데 그와 관련된 책들이 칸무 천황(桓武天皇 : 재위 781~806) 때 모두 불태워졌다."라고 합니다.
어 그런데 이상하죠. 마치 진시황(秦始皇)의 분서갱유(焚書坑儒)와 같은 사건이 일본에도 있었다니 말입니다. 이 점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한번 봅시다.
반도부여의 멸망(660) 이후 부여 세력은 일본열도를 중심으로 발전합니다. 한편으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으므로 더욱더 외부의 침입에 대해서는 두려움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한반도와의 역사적 단절을 추구한 듯합니다. 반도부여(남부여)가 부여의 계승자임을 강조한 것과는 달리 일본은 오히려 숨기기에 급급합니다. 일본은 더 이상 부여라는 형식적 의미에 집착하지 않고 열도 자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전력을 기울입니다(이것이 오늘날 일본의 역사를 비밀 속으로 몰아넣은 원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백제가 위기로 치닫는 7세기 중반부터 열도부여는 일본(日本)이라는 국호를 서서히 사용하기 시작합니다.『일본서기』에 의하면, 교토꾸(孝德) 천황 원년(645)이라고 합니다.
백제가 멸망하자 곧 텐지(天智) 천황은 왜라는 이름을 버리고 전면적으로 일본(日本)이라는 나라이름을 사용합니다(668). 따라서 이 텐지 천황이 오늘날 일본의 실질적인 시조라고도 할 수도 있지요.
그리고 일본 조정은 『일본서기』의 편찬 작업을 시작합니다. 쉽게 말하면 '과거사 정리'이죠.『일본서기』는 덴무(天武) 천황의 명으로 도네리친왕(舍人親王)이 중심이 되어 680년경 착수, 720년에 완성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즉 반도부여(백제)가 멸망한 이후 20년 만에 바로 『일본서기』를 편찬하여 남부여의 역사를 일본을 중심으로 모두 개편합니다.
그리고 키타바타케 치카후사(北畠親房 : 1293-1354)의 지적과 같이 칸무(桓武) 천황(재위 : 781~806)은 한국과 일본이 동족이라는 문건들을 모두 불태웁니다. 이 부분은 일본사(日本史)의 대표적인 미스터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 불태웠을까요?
제가 보기엔 정치적으로 통일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정치적 시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일본이 한반도에서 유입된 세력의 각축장이 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기 때문에 한반도와의 정치적 관계의 단절을 시도했을 것이라는 얘깁니다. 또는 일본 지역의 효과적인 통치를 위하여 불필요하게 이미 멸망한 백제(부여)를 거론할 필요가 없었을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칸무 천황이 한국과 일본이 같은 계통이라는 문서들을 불태운 이유에 대해서 납득할 만한 설명은 없습니다. 마치 아께찌 미스히데(明智光秀)가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를 왜 죽였는지를 모르는 것처럼 말이죠.
[그림 ④] 칸무 천황
어쨌든 칸무 천황 이후 일본은 더 이상 한반도와의 역사의 무대를 공유하지 않습니다.
반도부여의 멸망(660)은 여러 면에서 일본의 성장과 과거사의 단절을 요구한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반도부여의 멸망과 함께 부여의 천년의 숙적이자 원수인 고구려도 역사상에 사라져간 것입니다. 그러자 이제 다시 새로운 천년의 적이 나타납니다. 그것이 바로 신라(新羅)입니다.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 참으로 끝이 없군요. 부여는 고구려라는 신진세력을 제압하기 위해서 한족(漢族)과의 협력이라는 가장 나쁜 길을 택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수많은 무리수를 두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주변의 나라들에게 '백제는 신뢰하기 어렵다'는 이미지를 주고 만 것입니다. 사서에 기록된 이 말들은 '험난한 부여의 여정'을 다르게 표현한 말입니다. 항상 생존의 기로(岐路)에 서 있었던 부여인들이 부여의 자존심을 굳게 지키려다보니 생긴 문제라고 할 수 있죠.
지금 어디를 봐도 부여는 없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엔 일본에 부여가 굳건히 살아있습니다. 특히 앞에서 지적한 인종적 생물학적 특성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 가지 민속이나 정신문화를 보면 그렇지요. 이 부분의 이야기는 다음의 기회로 미룹시다.
부여와 고구려에서 시작된 반목이 고구려가 사라진 후 부여와 신라가 다시 원수가 되어 싸우고 그것이 한국과 일본간의 반목으로 2천년 이상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이런 것을 보면 아무리 형제라도 그들이 당면한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얽히면 오히려 남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질이 급한 쥬신처럼 한국과 일본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습니다.
역사문제만 해도 4세기 이후 8세기까지 양국의 교류를 보여주는 수많은 증거를 일본은 일본이 한국을 정벌하여 많은 장인들과 생산요소들을 데려온 결과라고 주장하고 한국은 한국대로 한국이 일본을 정복했으며 일본 황가의 창시자는 한국인이라고 주장합니다. 이들이 끝도 없는 소모전을 하는 동안 중국은 모택동 이후 줄기차게 한반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동북공정이 1990년대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하시죠? 그것이 순진한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1960년대 초에도 지금보다도 훨씬 심각한 중국의 역사 도발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흐지부지 유야무야하고 넘어갔습니다. 기억도 못합니다. 말 없고 엉큼하지만 신중하고 철저한 한족(漢族)과는 달리 쥬신의 '냄비근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당시 중국정부는 "한국은 중국의 잃어버린 영토(失地領土)"라고 하였습니다. 즉 『중국근대간사(中國近代簡史 : 1954)』에 실린 지도에 따르면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17개 지역이 원래는 중국영토였는데(여기에는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대부분의 나라가 들어갑니다), 미국과 일본·영국·프랑스 등 제국주의자들이 중국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하여 실지(失地)가 되었으므로 이제 회복해야한다는 것입니다[Owen N. Denny(柳永博 譯註) 『청한론(淸韓論)』(동방도서 : 1989) 64쪽]. 울릉도에서 멀리 떨어진 무인도 하나가 문제가 아니지요. 한반도 전체가 중국에 넘어갈 판입니다.
아마 지금 70대이신 분들은 당시의 내용을 잘 아시리라 봅니다. 제가 기회가 있으면 이 부분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해드리겠습니다.
"한반도가 중국이 제국주의자들의 책동으로 빼앗긴 영토"라는 식의 주장이 제국주의자들을 고립시키고 그들로부터 세계인민을 해방시킨다[以農村包圍都市]는 중국공산당이 주장한 것이라 더욱 충격적이었죠. 중국은 제국주의자들을 대신하여 중국이 새로운 지배자가 되어야함을 공식적으로 선언한 셈입니다.
이것을 보면 중국공산당(中國共産黨)은 공산당(共産黨)이 아니라 그저 한족(漢族)의 공산당(共産黨)이지요. 마르크스의 제자들치고는 가장 저질에 속합니다. 오히려 제국주의자들보다 한술 더 뜬 격이죠. 지금도 중국은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한국전쟁(1950) 당시 북한을 도와준 것은 따지고 보면, 중국 영토를 보호하기 위한 속셈이죠.
제가 보기에 중국은 '아시아의 암(癌)'과 같이 위험한 국가입니다. 왜냐하면 이 같이 노골적으로 아시아의 대부분 영토가 자기들의 것이라고 주장한 예는 세계 역사상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중국은 이것을 계속하여 '되지도 않은 이론'으로 무장하고 다른 나라에 강요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국과 일본의 수많은 새끼 중국인들이 들러리를 서고 있고요.
결국은 쥬신의 마지막 보루인 한국과 일본은 한족(漢族)들의 이이제이(以夷制夷)에 잘도 놀아나고 있는 셈이지요. 이것이 더욱 쥬신의 미래를 암담하게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the saddest thing in the world)'이죠.
***(3) 악연(惡緣)의 고리 : 정한론(征韓論)**
제가 대학원을 다닐 때의 이야기입니다. 일본 외교사를 전공하신 교수님이 "근대 일본 지식인 치고 세이깐론자(征韓論者 : 정한론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는 말을 하십니다.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이상한 일도 많습니다. 일본은 국내에 무슨 일이 생기면 제일 먼저 하는 생각이 한반도를 정벌한다는 것입니다. 소위 '세이깐론[(せいかんろん : 정한론(征韓論) - 한국을 정벌해야한다는 이론)]'이지요.
일본이 개국하는 것도 '정한론'과도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일본의 개국과 정한론이라니 ? 겉으로 보면 일본의 개국이나 근대화가 한반도의 정벌, 소위 '세이깐(征韓)'과는 무관한 듯 보이지만 실제는 다르다는 것이죠. 이것을 입증하는 대표적인 이론가가 바로 '요시다 쇼우인(吉田松陰)'이었죠.
정한론(征韓論)은 크게 ① 요시다 쇼우인(吉田松陰)의 정한론 ② 키도 다까요시(木戶孝允)의 정한론 ③ 사이고 다까모리(西鄕隆盛)의 정한론 등으로 나누어집니다. 한학자이자 존황양이(尊皇攘夷) 개국론자인 요시다(吉田)는 쇼우까숀주꾸(松下村熟)를 설립하여(1856) 야마구찌껭(山口縣)의 인재들을 교육시킵니다. 그의 정한론의 특징은 "서양과의 교역으로 인한 손실을 조선과 만주를 점령하여 그 토지와 물산(物産)·금은(金銀)의 리(利)로서 보상해야한다"는 것입니다. 요시다는 30세에 요절하였는데 '명치유신(明治維新 : 메이지이싱)'의 주역들은 대부분 그의 제자들이었지요.
요시다의 제자들이 정권을 장악하면서 '명치유신(明治維新 : 1868)'이 시작되었고, 당시 수상이던 이와꾸라(岩倉具俔)에게 키도 다까요시(木戶)에 의해 다시 정한론이 헌책되었는데 그것은 이전의 것보다는 더욱 발전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즉 명치유신 이후 독립하여 말을 잘 듣지 않을 가능성이 있는 제번(諸蕃)의 무사들의 병력을 정한(征韓)에 동원함으로써 무사들의 눈을 해외로 돌리게 한다거나 군사기술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정한론이 필요하다는 말이죠. 이것은 결국 대일본 황국의 흥기(興起)와 만세를 보장한다는 겁니다.
이 정도는 그래도 봐줄만 한데요. 사이고(西鄕隆盛)는 한술 더 떠 자기가 정한론의 명분을 만들겠다는 겁니다. 즉 사이고는 스스로 특사로 한국에 가서 조선왕을 의도적으로 모욕하면 자신이 처형될 것이니 이것을 구실로 한국을 침략하라는 겁니다. 기가 찰 이야깁니다.
마치 연나라의'씽꺼(荊軻 : 형가)'가 진시황(秦始皇)을 죽이기 위해 역수(易水)를 지나면서 부르던 "風蕭蕭方易水寒 壯士一去不復還(바람불어 소소하니 역수의 물이 차다. 장사 한번 가면 다시 오지 못하리)" 노래와 같은 비장함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림 ⑤] 사이고 다까모리의 동상과 그림
사이고의 강력한 주청에 대하여 이와구라(岩倉)는 정한(征韓)의 시기가 아니고 소위 '센나이찌·고세이깐(先內治後征韓 : 먼저 내정을 다스리고 다음으로 한국을 침)'을 강조하여 사이고를 퇴진시킵니다. 사이고가 너무 나간다는 것이죠.
이런 상황은 일본사(日本史)에 자주 나타납니다. 애국도 좋지만 카미카제(神風) 특공대 같은 식이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지요.
참으로 희한한 일입니다. 개국(開國)은 자기들끼리 하면 될 일인데 왜 거기에 한국이 들어가는가 말입니다. 이 같이 일본의 선각자들이 개국(開國)과 '세이깐론(せいかんろん : 征韓論)'을 하나의 범주로 보고 있다는 점은 정말이지 다시금 생각해보아야 하겠지요.
한국 - 미국 - 일본의 군사동맹체제가 이렇게 견고한데 요즘 일본인들이 과연 정한론을 포기하였는지도 의심스럽네요. 바로 이 같은 점 때문에 쥬신의 앞날이 더욱 걱정되기도 합니다.
제가 쥬신의 입장에서 본다면 일본은 정신을 좀 차려야 합니다. 형제국가에 대한 오랜 반목을 종식하고 서로 도움이 되는 협력 체제를 구축해가야 합니다. 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형제국에게 "쪽발이, 왜놈"이 웬 말입니까? 특히 왜놈은 바로 남부 한국인을 부르는 소리이기도 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도대체 왜 일본은 이렇게 맹목적으로 한국을 정벌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그들의 무의식 속에 어떤 심리가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가 말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모르는 과거의 일과 관계는 없을까요? 어떤 고대의 숙명들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남아서 이 두 민족을 괴롭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만약 있다면 두 나라는 '한풀이 굿'이라도 해야 할 일이 아닐까요?
언젠가 읽은 책에서, 일본은 고려가 몽골과 연합하여 일본 정벌에 나선 것을 두고두고 한국침략의 이유로 들곤 한다는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공격이 가미가제(神風 : 여름태풍) 때문에 그대로 실패한 듯이 알고 계시지만 당시 일본의 피해는 이만저만이 아니었고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일본 고대 조정에서는 신라와의 관계가 악화되기만 하면 '정한론'이 들끓었다고 합니다. 이제 그것이 고대사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지 한번 찾아나 보고 넘어갑시다.
일본인들이'정한론'의 근거로 일반적으로 하고 있는 이야기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신라정벌 설화입니다. 이 설화는 이른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즉 일본의 진구황후가 신라를 정벌하여 그 일부를 일본 땅으로 했으니 그것을 돌려받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그 내용은 대체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고 있습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사이메이(齊明) 천황이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직접 북규슈까지 가서 원정군을 지휘했는데 출병을 보지 못하고 안타깝게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이메이 천황의 백제 구원에 대한 열망을 진구황후 설화로 형상화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반도부여(백제)가 멸망한 이후 20여 년이 흐른 후 텐무(天武) 천황이 "제기(帝紀) 및 상고사제(上古諸事)를 정하라."는 명을 내려서 편찬되었다고 합니다. 이 책은 일본의 역사를 아는 데 매우 중요한 책입니다. 이 책이 백제 멸망 이후 씌어졌다는 점이 대단히 중요하죠. 이제 반도부여는 사라졌으니 모든 일을 일본을 중심으로 편찬할 수 있는 정치적 여건이 성숙되었죠. 이 책의 근거가 되었던 것은 당대의 문장가인 백제인 태안만려(太安萬侶)가 편찬한 『고사기』(712) 3권입니다.
쥬신의 역사에서 이 책이 중요한 이유는 일본으로 밀려간 부여세력들이 한반도나 대륙의 역사를 보는 관점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한반도에 대한 구원(舊怨)을 설욕하기 위한 표현들이 다수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들은 아직도 한국과 일본 양 국민들의 갈등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고구려·백제·신라 등의 세력들이 각축이 심하던 일본의 역사를 백제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의 계통으로 묶으면서도 일본이라는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열도부여로서는 일본이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는" 마지막 보루인 셈이므로 어떻게 해서든지 일본이라는 섬에서는 무리 없이 통치해야만 했겠습니다. 에도시대(江戶時代 : 1603∼1867)의 일본 국학자들도 일본의 신(神)과 천황이 과거 한국을 지배했고 다스렸다는 식으로 방향을 잡았고 에도시대 말기에는 이것이 정한론(征韓論)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상한 점은 『일본서기』가 다른 책과는 달리 일반인들에게 공개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책이란 무릇 많이 보고 읽혀야 하는 것인데 『일본서기』는 메이지 유신 시대에 가서야 "다소 손질이 된 상태"에서 일반에게 공개가 됩니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문제가 많이 개입되어 있습니다. 즉 정치적으로 일본은 동아시아를 침략할 명분을 세워야했고 내부적으로 일관성 있는 황통(皇統)을 강조해야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죠.
대화(大和) 일본의 기원과 백제와의 관련성을 수십 년간 연구해 온 홍원탁 선생(서울대 교수)에 따르면 한일관계에 대한 일본 사람들의 전형적인 견해는 다음과 같다고 합니다.
"일본이 한국을 통치할 권한은 일본이 미마나(任那)라는 보호령을 창설할 때부터 생긴 것이다. 7세기 이전까지 일본과 한반도 남부 왕국들 사이에 일종의 종주국- 조공국의 관계가 유지되었다는 것은 널리 공인된 역사적 사실이다.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합병했을 때, 일본의 『역사와 지리』라는 잡지는 특집을 발행했고, 주필은 권두언에서, '이 합병이라는 위업은 일본이 7세기에 잃었던 한반도 지배권의 회복으로 간주해야 한다.'고 말했다(Kuno, Yoshi S.,『Japanese expansion of the Asiatic Continent』Vol. 1, Berkerly : Univ. of California Press, 1937)."
이런 생각들은 전형적인 일본 정치 마녀 사낭꾼들의 생각으로 쥬신의 공동번영을 도모하기보다는 일본을 중심으로 하는 제국주의적 피라미드 구조를 만들려는 책동입니다. 그리고 한·중·일 고대사 문제가 단순히 고대사로 끝나지 않는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지금까지 본대로 일본의 고대사는 쥬신사의 일부로서 파악하고 부여의 다이나믹한 역사의 일부로 봐야합니다. 그런데 지금 일본인들이 생각하는 방식대로라면 일본인들은 모두 수만 광년 떨어진 별에서 온 에일리언(외계인)들입니다.
즉 에일리언들이 UFO를 타고 일본 땅에 내려와 야마도 나라를 만들고 이들의 지배자가 2천년 이상을 일본의 통치자로 군림해왔으며 이들은 한반도를 정벌하여 지구(the earth)의 생활에 필요한 물품은 모두 한반도의 장인들을 잡아다가 조달했다고 해야지 앞뒤가 맞습니다. 이상한 일은 UFO를 가지고 다닐 정도의 문명인들이 왜 이 작은 한반도를 정벌하려고 이 난리를 칩니까?
이런 사고가 위험한 것은 쥬신사를 복원하고 쥬신인들 간의 단합과 새로운 공영(共榮)의 기틀을 세우는 데 가장 큰 저해요소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행위는 반도쥬신이 열도 쥬신을 "쪽발이"라고 비하하는 것이나 오랑캐 취급하는 것보다 더 나쁘지요. 형제간에 하는 짓들이 이 모양이니 항상 한족(漢族)의 손아귀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쥬신은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러나 저러나 일단 이것만 가지고는 '정한론'의 실체를 알기가 어렵군요. 다시 좀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할 듯한데요.
***(4) 한국과 일본, 그 끝없는 싸움의 시작**
일본과 신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왜구(倭寇)라고 하면 으레 노략질이요 사람을 죽이고 하여 온갖 피해를 입힌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일본인들도 마찬가지로 신라인들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했던 것 같습니다. 『일본서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습니다.
"서쪽에 살고 있는 비열하고 천박한 신라 인간들, 하늘을 거역하고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우리 관가를 부수고 우리 백성을 독살하고 우리 군현의 사람들을 씨를 말려 죽이고 … 살아있는 사람들을 소름이 끼치게 간을 꺼내고 웃으면서 다리를 잘라내고 시체를 태운다.(『日本書紀』「欽明天皇」)"
위의 글은 킨메이(欽明) 천황(509~571)이 내린 조서의 일부에 있는 내용입니다. 한국인들도 일본인들에 대한 원한이 깊은 듯한데, 일본인들도 한국인들에 대한 원한의 연원(淵源)이 만만치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서기』에서는 403년에서 405년에 걸친 일로 신라로 인하여 가야 쪽에 집결되어있던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가지 못하여 일본에서는 이들을 일본으로 안전하게 데려가기 위하여 가쓰라끼(葛城襲津彦)와 정예 병사들이 파견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반도부여(백제)가 신라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그 후 신라에 대한 적대감은 훨씬 더 커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당시 일본의 조정은 상당한 부분이 반도 부여인들로 채워져 있었고 이들이 『일본서기』의 편찬에 관여하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이들에게 신라는 철천지원수의 나라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보기엔 이 적대감이 아직도 살아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신라에 의해 반도부여가 멸망한 것만으로 열도 쥬신의 반도 쥬신에 대한 적대감을 설명하기는 좀 어려울 듯한데요. 뭔가 다른 이유는 없을까요?
지난 2001년 12월 아키히토 천황이 "나 자신 칸무(桓武 : 781~806년 재위) 천황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기 때문에 한국과의 인연을 느낀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 부분이 무슨 암호처럼 들리죠? 맞습니다. 실제로 매우 심각하고 비밀스러운 암호입니다. 이 말 안에 모든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 비밀 속으로 한번 들어가 봅시다.
백제 무령왕(501~523년 재위)은 동성왕의 둘째 아들입니다. 동성왕(곤지왕자의 아드님)은 일본에 머물다가 돌아온 분입니다. 무령왕의 동생(동성왕의 셋째 아들)은 일본의 게이타이(繼體) 천황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무령왕과 일본 게이타이 천황은 친형제이죠. 한국(백제)과 일본 양국의 통치자가 한 가족이라는 말이죠.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 키타야마 시게오(北山茂夫)는 『왕조정치사론(王朝政治史論)』(岩波書店 : 1967)에서 "칸무 천황은 백제왕계 귀화인의 핏줄을 타고났다."고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이상하게도 들립니다. 도대체 어디서 어디로 귀화를 했는지 말입니다.
고대 기록(『袋草子』: 1157)에 따르면 칸무 천황의 아버지인 코우닌(光仁 : 770~781) 천황은 백제 성왕[聖王 : 일본의 히라노신(平野神)]의 증손자(曾孫子)입니다. 그리고 관련 전문가들은 이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면 칸무 천황의 아버지는 성왕의 직계 후손이고 그 어머니는 무령왕의 자손이라는 것이죠? 이 칸무 천황은 한반도, 또는 북방인들로 부터 정치적 고리를 과감히 단절하고 일본(日本)이라는 국가적 정체성을 확립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가 바로 백제 성왕(聖王)의 직계 후손이라는 얘깁니다.
여기서 바로 이 성왕(聖王)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성왕과 일본인들이 가지고 있는 반한의식(反韓意識)과 무관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죠.
성왕은 무령왕(武寧王)의 아들입니다. 성왕은 무령왕과 함께 백제의 대표적인 성군(聖君)입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성왕을 "하늘의 도리와 지리에 대해 신묘하게 통달한 왕"으로 성명왕(聖明王)이라고 부르며 최고의 존경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마치 부여의 시조 동명성왕(東明聖王)과도 비슷한 느낌을 주고 있군요.
성왕은 부여의 영광을 재현하기 위해 온몸을 바칩니다. 아마 부여의 재건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노력한 왕은 없을 것입니다. 성왕은 고구려의 침입(529)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후 고구려에 대해서는 신라와 동맹을 맺어 공동으로 대처합니다. 성왕은 동맹국인 신라와 함께 한강(漢江) 유역을 공격하여 76년간이나 고구려에 빼앗겼던 군(郡)을 되찾습니다(551). 이 지역은 원래 남부여(백제)의 영토라 부여의 중흥을 꿈꾸어 오던 성왕으로서는 감격에 찼을 겁니다.
그런데 그 감격을 누릴 사이도 없이 한강 유역 대부분을 신라에 오히려 빼앗기고 맙니다(553). 뿐만 아니라 동맹국인 백제의 영토까지 침범하자 성왕은 일본에 구원병을 청하는 한편, 친히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 공격에 나섭니다. 그러나 성왕은 신라에 대패하고 관산성(管山城 : 충북 옥천)에서 잡혀 처참하게 처형되고 맙니다. 이 때 수만 명의 병사가 거의 전멸했다고 합니다. 이로써 남부여 중흥의 간절한 꿈이 사라져 버렸고 남부여(백제)는 이제 황혼이 깊어집니다.
성왕의 죽음과 관산성 전투의 패배(554), 이것으로 남부여(백제)는 신라에 대한 원한이 사무치게 됩니다.
『일본서기』에서는 이례적으로 성왕의 슬픈 죽음에 대해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성왕은 가장 치욕적으로 죽음을 맞이하였고, 신라인들은 성왕의 시신 가운데 몸은 백제에 돌려주었지만 머리를 북청(北廳)이라는 관청의 계단 밑에 묻어두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밟게 했다고 합니다(『日本書紀』 欽明 15年 夏5月). 부여의 이름 높은 성군의 죽음을 지나치게 치욕스럽게 만든 것, 이것이 열도 부여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말았습니다. 비극의 시작인 셈이죠.
그런데 바로 이 성왕의 후예들이 일본 황실을 구성하게 되지요. 그러니 그 다음의 이야기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입니다. 애초에 부여는 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요동으로 나아가 한족들과 연합하면서 고구려를 견제하는데 주력했지만 고구려가 강성해지면서 요동의 거점들이 위태로워지기 시작했고 결국은 부여의 멸망과 더불어 한반도 남부에서 거점을 확보하고 고구려에 대항합니다.
그 후 다시 고구려가 압박해오자 신라와 연합하여 이를 물리치지만 신라에게 오히려 뒤통수를 맞은 것이지요. 물론 객관적으로 보자면 현실의 국제관계에서 영원한 동지와 적이 어디에 있겠습니까만, 백제는 부여 이래로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스스로는 신라와 비교할 수 가 없으며 신라는 과거 백제의 속국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의 배신에 대해 성왕은 참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당시 성왕의 심경을 읽을 수 있는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
"예로부터 신라는 무도하였고 식언을 하고 신의를 위반하여 탁순(卓淳)을 멸망시켰다. 옛날에는 우리에게 둘도 없는 충직한 나라[股肱之國]였으나 이제는 사이좋게 지내려 해도 오히려 후회하게 될 뿐이다(『日本書紀』欽明 5年命 冬10月)"라고 성왕은 말합니다.
이렇게 하여 나선 대(對)신라 복수전에서 성왕은 그 자신 치욕적으로 처참하게 죽고 맙니다. 이러니 그 후손들이 신라에 대한 원한(怨恨)이 얼마나 심각했을 지는 정말이지 짐작이 갑니다.
성왕의 서거에 대한 당시 일본 조정의 분위기를 실세(實勢) 권력자인 소가신(蘇我臣)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어찌 이렇게 뜻 밖에 서거하셔서 흘러간 물과 같이 돌아오시지 않으시고 현실(玄室)에서 편안하게 쉬시리라고 생각했겠습니까? 어찌하여 이렇게 마음이 아프고 그 슬픔이 혹독합니까?[何痛之酷] 그 누가 슬퍼하지 않고 애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何悲之哀] 그 누구라도 깊은 정을 가지고 있으며[凡在含情], 누군들 슬픔으로 마음이 찢어지지 않겠습니까?[誰不傷悼](『日本書紀』欽明天皇 16年)."
제가 보기엔 바로 이것이 한국과 일본 이 두 민족을 괴롭히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 듯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넘어가려고 하니 여러분 가운데는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씀하실 분이 계실 것입니다.
"김 선생, 당신 심하구만. 도대체 신라가 언제 백제의 속국이었다는 거야? 당신 너무 막가는 거 아냐?"
그렇군요. 제가 신라의 입장이나 사정을 잘 알겠습니까마는 당시의 기록이 그러니 어쩝니까? 『삼국사기』와는 달리 고구려·백제·신라가 대립했던 당시의 사서(史書)들에서 그런 기록이 나오고 있습니다. 한번 보고 넘어 갑시다.
『북사(北史)』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新羅)는 백제의 속국[附庸國家]이었다"고 합니다.『남사(南史)』(남조의 역사서)에 따르면, 신라는 위나라 때는 '사로'라고 하고, 송나라 때에는 '신라'라 하거나, 혹은 '사라(斯羅)'라 하는데 "신라는 작아서 능히 스스로 사신을 보내어 통할 수가 없었다. 양나라 보통(연호) 2년 신라왕의 이름은 모태(募泰)인데 백제의 사신을 따라 양나라에 방물을 받친 것이 처음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魏時曰新盧 宋時曰新羅 或曰斯羅. 其國小, 不能自通使聘. 梁普通二年, 王姓募名泰, 始使使隨百濟奉獻方物 : 『南史』「列傳」).
그리고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에 따르면 "신라는 처음에는 백제의 속국이었는데 후에 가락·임나 등이 여러 나라를 겸병하여 백제와 대등한 나라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같은 책에 "백제의 강역은 서북쪽으로는 광녕· 금주·의주에 이르고 남으로는 해성·개주·동남쪽으로는 조선의 황해·충청·전라 등을 포괄하고 있었다. 따라서 백제의 강역은 동서가 좁고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위나라 때는 물길과 도모하여 고구려의 땅을 빼앗아 동북으로는 물길과 이웃하였으며 당나라 초기에는 신라의 60~70성을 취하여 그 강역이 더욱 확장되었다." 고 하여 이 같은 사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칸무 천황 이후 일본 내에서 반도의 다른 세력들의 영향력은 감소했겠지만 백제의 영향력이 감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엄밀하게 보면 반도부여인과 열도부여인들은 구별되는 집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백제의 왕실과 일본 천황가의 계보를 참고로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이 그림은 20년 이상 백제와 일본의 왕가 계보를 연구한 홍윤기 선생(한국외대 교수)의 견해입니다.
[그림 ⑥] 백제왕실과 일본 천황가의 관계도
(홍윤기 『일본천황은 한국인이다』61쪽 재구성)
[그림 ⑥] 의 계보 표를 보면 개로왕의 아드님이신 곤지왕자(昆支王子)는 두 손자를 한 쪽은 백제, 한 쪽은 일본에서 모두 최고 권력자로 등극시킵니다. 그런데 곤지왕자 당시는 장수왕의 침입으로 부왕(개로왕)이 세상을 떠나는 등 백제가 "회복 불능" 한 상태에 빠지는 시기입니다. 아이러니한 이야기지만 근초고왕 당시도 유사한 환경인데 양국이 근초고왕과 왕비족인 진씨를 중심으로 백제와 일본을 경영하듯이 개로왕의 죽음 이후도 곤지왕자의 가계를 중심으로 하나의 왕조를 형성하게 되지요.
사실 일본과 백제의 왕실의 계보를 따지는 자체가 의미 없는 시도일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백제와 일본의 왕가는 너무 얽히고설켜 누가 누군지도 잘 모를 정도로 친족관계가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하나의 왕실로 보는 것이 좋을 듯도 합니다.
그래서 일본의 저명한 고대 사가 가운데는 백제의 성왕이 바로 킨메이(欽明) 천황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小林惠子『二つの顔の大王』(文藝春秋 : 1991)]. 아닌 게 아니라 『일본서기』의 킨메이 천황조를 보면 대부분 성왕에 대한 기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이상하죠? 일본의 역사책에 백제 성왕의 연설문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이 말입니다.
홍윤기 선생에 따르면, 660년 백제가 멸망할 당시 백제 의자왕(641~660)과 왜의 죠메이천황(舒明天皇 : 629~641)은 그 선대가 혈족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일본서기(日本書紀)』에서는 "(641년) 10월 9일 천황이 백제궁에서 붕어하시다. 18일에 왕궁 북쪽에 안치하고 빈궁을 만들었다. 이것을 '백제의 대빈(大殯)'이라고 한다(『日本書紀』舒明天皇)"라고 하고 있습니다. 백제라는 말이 여기저기서 나옵니다. 여기서 말하는 '백제의 대빈(大殯)'이란 백제식의 국장(國葬)이죠.
그 후 사이메이 천황은 죽고 텐치(天智) 천황이 등극하는데 의자왕과는 종형제간이죠. 백제가 멸망한 지 8년인 668년 텐치 천황은 등극한 지 5년 만에 왜라는 이름을 버리고 일본(日本)이라는 나라 이름을 사용합니다.
다시 성왕을 죽음으로 몰고 간 관산성 전투(554)로 돌아갑시다.
관산성 전투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가지는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원래부터 백제는 고구려와 천년의 적대 관계였는데 관산성 전투 이후에는 오히려 신라가 다시 천년의 원수가 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성군(聖君)은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천년을 꿈꾸어 온 부여(夫餘) 부활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으며 이제 지축이 흔들리는 땅 일본에서 그 터전을 가꾸어가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 후 고구려는 역사에 사라지고 신라만 남아 이 신라에 대한 적대감은 일본 조정에 지속적으로 남게 된 것이죠. 이 신라는 고려 - 조선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결국 한국(韓國)으로 연결되지요.
백제가 멸망한 이후 일본 열도에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갑니다.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일본의 정치무대에서 활약하기도 합니다. 이 부분은 앞에서 충분히 보셨을 것입니다. 결국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고사기』(712)나 『일본서기』(681~620)의 편찬에 깊이 개입했을 것이고 한국에 대한 인식은 이때 고착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이도학,『새로 쓰는 백제사』(푸른역사 : 1997) 260~264쪽].
일본은 바로 부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여를 지키기 위해 요동과 한반도의 한강 유역으로 진출하여 분국(分國)을 건설했으며 부여 - 요동부여 - 남부여(백제) 가 차례로 멸망해가자 부여의 중심세력은 다시 열도(일본)로 이동한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일본의 실체지요. 부여는 일본에서 비로소 안식을 찾게 됩니다. 그러나 더 이상 입 밖으로 부여를 부르지는 않습니다. 정치는 현실이니까요. 백제나 남부여는 사라지고 이젠 일본만 남아있을 뿐이지요.
하지만 열도 부여인들은 멀리 두고 온 산하(山河)를 항상 열망합니다. 바로 이것이 일본인들의 무의식에 내재한 정한론의 본질일 겁니다.
이제 한국과 일본 이 두 나라는 쥬신의 마지막 보루인데 아직도 목숨을 걸고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이 상황이 제대로 극복되지 않는다면 쥬신의 미래는 정말이지 기약할 수가 없습니다.
일본은 과거처럼 문제를 극우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일본은 고대사에서 면연히 이어지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부정할 필요도 없고, 또 한국은 그 사실로 인하여 '본국(本國)'이니 하여 부적절하게 우월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본국은 무슨 본국입니까? 본국은 저 멀리 원(原) 아리수의 부여인데 말이죠. 두 나라 모두는 그저 사실을 차분히 살펴보면서 미래를 새롭게 설계하면 될 일입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대로 한국과 일본의 역사는 백제나 야마도 왕조 등 한 두개의 편협한 정권으로만 파악해서는 안 되고 전체 쥬신의 역사 속에서 봐야지만 의미가 있고 그 실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국과 일본이 쥬신의 역사 전체를 대변하는 것은 더구나 아니지요.
한국과 일본, 쥬신의 마지막 보루는 다행스럽게도 정보통신 분야에서 세계 최강국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기마민족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일본은 작은 문제에 집착하지 말고 보다 원대한 쥬신의 미래를 위해 한국과 함께 정보통신산업(IT)을 비롯한 미래 산업들을 더욱 개발하여 세계를 이끌어 가야합니다.
일본은 야스쿠니(靖國) 신사 참배나 독도 문제와 같은 작은 일로 '아시아 흔들기'를 하기보다는 인류의 미래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꾸 팽창해가는 한족(漢族)의 패권주의를 극복할 수 있도록 쥬신 간의 협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디지털 시대에서는 그것만이 쥬신의 미래를 기약하는 길이지요.
끝으로 한 가지 권고하자면, 몽골을 더욱 일으켜 세워 경제협력을 강화한다거나 하여 한국과 일본이 유럽이나 중앙아시아로 진출하는 거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약화 일로를 걷고 있는 몽골 쥬신를 바로 세우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몽골을 통하여 범쥬신의 고향 '알타이'를 보호해야 합니다. 나아가 너무 어려워서 사실상 소멸되고 있는 몽골문자를 알기 쉬운 한국의 '한글'로 바꾸어 현재 몽골에서 사용하고 있는 러시아식 표기를 대체해야할 것입니다. 만주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저의 오랜 꿈입니다. 이 글을 쓰는 이유 가운데 하나입니다. 물론 현실적인 정치역학 등의 여러 어려운 문제들이 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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