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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화가 잔인해? 조금 당황스럽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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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내 영화가 잔인해? 조금 당황스럽겠지"

오동진의 영화갤러리<39> '친절한 금자씨' 박찬욱 감독 인터뷰

박찬욱은 한때 당대의 논객 소리를 들었다. 박찬욱만큼 영화에 대해 박식한 언변을 구사하는 사람도 없었다. 박찬욱만큼 영화 비평을 능수능란하게 쓰는 사람도 없었다.(실제로 1990년대 초반 그가 펴낸 「비디오 드롬」이란 책을 보라.)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이상하게도 그가 작가적으로 아직 완숙되지 않았을 때였다. 생각해 보면 영화감독이 말을 잘하고 글을 잘 쓴다는 건 다른 한편으로 보면 작품에 쏟아야 할 에너지가 다른 데로 새고 있음을 보여주는 건지도 모르는 일이다.

요즘의 박찬욱을 만나 얘기를 나누다 보면 속이 답답해 터질 지경이 된다. 이 사람이 과거의 그 화려한 '말발'의 인간이었나 싶을 정도다. 이번 작품 '친절한 금자씨'든 곧바로 작업에 들어갈 HD프로젝트 영화든, 영화에 대한 구상을 들을 때쯤에는 이 친구 살짝 머리가 어떻게 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예컨대 그가 전해준 다음 작품의 줄거리를 들여다 보면 이런 식이다.

"정신병원에 어떤 소녀가 입원을 한단 말이지. 얘는 자기가 로봇이라고 생각하는 애야. 그것도 전투용 로봇이야. 과대망상증에 걸린 앤데, 얘는 주변의 기계들을 보면, 모두 자기 편이라고 생각해. 예컨대 휴대폰도 자기편인데 액정에서 늘 어떤 사인이 나온다고 생각하는 거지. 어디 가서 누구를 죽여라, 뭐 그런 식의 사인 말야. 그런 애가 정신병원에 가서 각종의 미친 사람들을 만나는 거지. 그 중에서 어떤 남자를 만나서 사랑에도 빠지게 되는데, 그 남자 애는 도벽이 있는 친구야. 물건을 훔치다 훔치다 결국엔 자기가 남의 영혼까지도 훔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됐다고 생각하게 된 친구지. 이 친구는 조잡한 기계 장치를 이용해서 밤마다 자고 있는 사람에게 전극 같은 걸 연결해서 영혼을 훔치려고 해. 이 영화는 음… 그런 두 소년소녀의 러브스토리야."

그게 러브스토리라고?! 콰과광. 머릿속에서 뇌성이 울린다. 그런데 사실 '친절한 금자씨'도 시작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정말 이런 식이었다. 그래서 '친절한 금자씨'가 박찬욱 영화미학의 최정점이 될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오히려 이 친구가 점점 이상해지는 거 아닌가 싶었다. 당신이라면 그렇지 않겠는가?

영화작가가 별종이어야 한다면, 그리고 그렇게 별종감독의 머릿속에서 나온 작품일수록 뛰어난 작품이라면 박찬욱은 지금 별종 중의 별종이 돼가고 있는 중이다. 요즘 그와 마주 앉아 얘기를 나누면 마치 미국 데이빗 린치 감독('로스트 하이웨이' '멀홀래드 드라이브') 같은 사람과 불교식 선문답을 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박찬욱의 작품이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박찬욱과의 대화는 점점 더 어려워진다. 이건 또 웬 부조리인가. 마치 그가 요즘 만들어 내는 인생의 부조리한 드라마들처럼.

***"복수를 통해 구원을 얻고자 했던 사람의 어리석음에 대한 얘기"**

- 당신 영화는, 당신 영화를 아는 사람한테는 한 줄로 설명할 수 있지만 당신 영화를 제대로 안 본 사람한테는 도무지 설명할 말이 없다는 특징을 가졌다. 그래서 당신은 기자들에게 있어서는 최악의 감독이다. 이번 영화를 한줄로 설명한다면….

박찬욱 : 이 영화는 이런 영화일 것이다라고 생각해서 극장에 왔는데 얘기가 아주 복잡하게 꼬이게 된다. 근데 그게 바로 주인공 금자가 처한 상황이다. 일이 아주 이상하게 꼬여서 인생이 복잡해지는 여자, 그런 여자에 대한 얘기가 '친절한 금자씨'다.(자기도 자기 영화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 듯이 얼굴에 찝찝해 하는 표정이 역력해진다.)

- 이번 영화를 두고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에 이은, 복수 3부작의 완결편이라고들 한다. 이번 영화는 정말 '복수'에 대한 얘기인가, 아니면 '구원'에 대한 얘기인가?

박 : 복수를 통해서 구원을 얻고자 했던 사람의 어리석음에 대한 얘기다. 금자는 이 영화에서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하려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도 그 용서를 구하는 데는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그 노력이 처절할 정도다. 그래서 사람들이 영화를 다 보고나면 이렇게 얘기할 것 같다. '수고했다'라고. '용서한다'는 말 대신에.

- 사람이 악한 것은 상황 때문인가, 아니면 원래 악해서인가?

박: 일반론적인 건 잘 모르겠고…. 보통 사람들은 자기가 원래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어떤 실수를 저질렀을 때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돌리거나 상황 탓으로 돌린다. 하지만 여기서의 금자씨는 좀 다르다. 나쁜 짓을 저지른 사람이지만 의도는 선했던 사람이다. 아니, 사람인 것 같다. 원래 사람의 마음 속에는 사악함이 들어 있다고 본다. 금자씨처럼 그걸 민감하게 의식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대답이 됐나?

***"모든 이에게는 '사적인 복수'에 대한 욕망이 있다"**

- 영화를 보다 보면 사악한 짓을 저지른 사람한테는 어떤 식으로든 응징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박 : (따분한 질문이라는 듯) 내가 뭐 슬로건을 내걸고 어떤 주장을 하려고 영화를 만드는 사람은 아니니까. 사람들한테는 사법제도를 통하지 않고 개인적인 처벌, 앙갚음을 하려는 욕망이 있다. 그건 부인하기 어려운 얘기다. 근데 그게 참 어리석다고 얘기하는 건 말하기 쉽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방식을 옹호하려는 이야기도 아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일 뿐이다.

- (도대체 뭔 소린가?) 결과적으로 이 영화는 세상이든 사람이든 구원받기 어렵다는 것을 얘기하려는 건가? 세상에 희망이 없다는 당신 특유의 염세주의가 들어 있는 영화인가?

박 : (지금의 세상이 구원받기 어렵다 해도 혹은 어렵기 때문에) 영화 끝에 가서 "그래서 난 금자씨를 좋아했다"는 대사를 썼다. 어떠한 해결도, 구원도 얻지 못하고 일을 끝내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까지의 일은 다 헛수고였어, 무의미해'라고 얘기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보기엔 딱하지만 용기와 노력은 가상했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 잘못된 세상에 대해 당신 나름대로 잔혹하게 복수하고 응징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자신의 잘못에 민감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을 뿐"**

박 : (따분하다는 표정으로) 내가 뭐 인간시장 같은 영화를 찍는 건 아니니까.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렇고, 세상의 비리와 뭐 그런 것에 대해 공격하는 영화를 만들 생각은 없다. 다시 한번 영화 대사를 인용할까?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해. 그러나 속죄를 해야 해." 자신의 실수와 잘못에 대해 민감할 줄 알아야 한다고 얘기하고 싶었을 뿐이다.

- 어디서 이런 얘기의 영감을 얻나?

박 : 그걸 어떻게 설명해. 때론 신문의 사회면에서, 우연히 만난 택시기사의 한마디에서, 때로는 옛날에 읽은 책에서 모티프를 얻는다. 분명한 건, 옛날의 어떤 특정한 감독이나 사람한테서 영향을 받지는 않았다는 거다. 그건 아무에게서도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얘기가 아니라 너무나 많은 사람들한테서 영향을 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 영화를 정교하게 만들면 만들수록 인터뷰하는 태도는 안성기씨를 점점 닮아간다.

박 : (곤란하면서도 허를 찔린 듯한 웃음) 요즘엔… 다른 일은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 영화 한편 끝나고 나면 바로 다음 영화 생각하고, 또 만들고 싶을 뿐이다. 그런데 항상 문제는 영화 한편 만나면 이렇게 해야 하는 인터뷰다. 영화감독으로 살면서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영화를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 지난 해 칸에서 상을 타고 와서 당신은 '앞으로 나에겐 내리막길만 있을 것이다. 그게 두렵다'고 얘기했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나?

박 : 내리막길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영화가 흥행에 성공해야 한다. 그게 늘 고민이다.

- 당신 같은 감독도 흥행을 걱정하나?

박 : 그건 충무로의 현실을 몰라도 너무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영애씨의 고정된 이미지를 확 바꿔보고 싶었다"**

- 그 흥행 걱정 때문에 이영애씨를 캐스팅한 것인가?

박 : 스타 시스템의 문제를 질문하는 거라면… 음… 뭐 그런 셈이다. 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니다. 나도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이영애씨에게서 보고 싶은 게 있었다. 이영애씨가 만약 이러이러한 역할을 해낼 수 있다면 얼마나 멋있고 또 얼마나 재미있을까, 하는 점도 이번 캐스팅의 이유였다. 송강호 최민식 유지태 신하균 등등은 뭘 잘해도 새삼스럽게 놀랄 만한 사람은 아니지만 이영애씨는 좀 다르지 않겠는가. 이영애 하면 뭔가 떠오르는 고정적인 이미지가 있는데 때론 그걸 그대로 가져오고 때론 그걸 확 바꿀 수 있으면 복잡하고 흥미로운 연기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건 관객 입장에서 보면 다른 영화에서 누릴 수 없는 재미가 될 것이다.

- 이번 영화엔 특히 아이러니한 상황속에서의 블랙유머가 넘친다. 유머에 대한 강박증이 있는가?

박 : 웃지 않아야 할 상황에서 웃을 수밖에 없는 유머가 참 중요하다. 그거야말로 인생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의 웃음일 수 있다.

- 당신 영화는 어렵다, 잔인하다고 해서 싫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한다면?

박 : 어렵거나 잔인한 게 아니고 조금 당황스럽게 만드는 장면들이 있을 거다. 바로 그 지점을 잘 통과해 내느냐의 여부가 이 영화 혹은 내 영화를 좋아하느냐 싫어하느냐를 가르는 지점이 될 것이다. 근데 이번 영화도 정말 잔인해? 난 이 영화가 15세 관람가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아무튼 이번 영화는 '올드보이'보다는 훨씬 따뜻하고 희망적인 영화다.

동의대 영화과 교수 ohdjin@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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