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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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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16>

1400년 전의 '양김(兩金)체제' - 김춘추와 김유신

『삼국유사』가 『삼국사기』와 그 성격을 달리하면서도 어떤 부분에서는 상호보완적인 역할을 할 때가 있어 그 둘을 같이 읽음으로써 사건이나 인물의 성격을 보다 상세히 파악할 수 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컨대 『삼국사기』에 자세히 보이는 김춘추와 김유신과의 동맹관계를 파악할 수 있는 단초는 『삼국유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삼국유사』'태종 춘추공'조는 이렇게 시작된다.

"제29대 태종대왕의 이름은 춘추, 성은 김씨이다. 용수(龍樹 혹은 龍春) 각간으로 추봉된 문흥대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진평대왕의 딸 천명부인이며 비(妃)는 문명황후 문희이니 곧 유신공의 막내누이다."

이 기사에 이어 김유신의 누이동생들인 문희와 보희가 꿈을 사고 파는 이야기가 나온다. 언니 보희가 꿈에 서악(西岳)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더니 온 서울이 오줌에 잠겼다. 아침에 동생 문희에게 꿈 이야기를 했더니 문희가 그 꿈을 사겠다고 하여 비단 치마 하나를 주고 꿈을 샀다. 열흘 후에 김유신이 김춘추와 함께 유신의 집 앞에서 공을 차다가 일부러 춘추의 옷자락을 밟아 옷끈이 떨어지게 하고는 누이동생 보희에게 꿰매주라 했다. 이에 보희가 사양하고 문희가 김춘추의 옷을 꿰매주게 되는데, 두 사람이 관계를 가져 문희가 임신을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 뒤 유신이 두 사람을 정식으로 혼인시키기 위해 공작을 꾸민다. 선덕여왕이 남산에 놀러가는 틈을 보아서, 애비 없는 아이를 밴 문희를 태워 죽인다고 소문을 내고 장작불을 피워 연기를 올린다. 선덕여왕이 연기를 보고 그 까닭을 물어 김춘추의 소행임을 알고 김춘추로 하여금 문희를 구하게 해 둘이 혼례를 치르게 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에는 잘못된 대목이 있다. 두 사람이 혼례를 치르는 시기가 선덕여왕 대가 아니라 진평왕대다. 두 사람 사이에서 장자인 문무왕이 태어난 시기를, 문무왕의 몰년(沒年)을 기준으로 역산(逆算)하면 626년, 즉 진평왕 48년이 되어 선덕여왕이 공주로 있던 시절이라는 것이다. 아무튼 이 혼인은 김유신과 김춘추의 돈독한 관계 맺기의 시발점이었다. 패망국 가야 출신으로 신라의 귀족 체제에 편입된 김유신은 전도가 유망한 파트너를 붙잡는 데에 성공한 것이다. 경북대 문경현 교수가 '무열왕 체제의 성립'이라는 글에서 김유신 집안과 김춘추 집안의 '결혼동맹'이라고 표현한 바 있는 두 사람 간의 관계는 진평왕 말년에 이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가 혈맹으로까지 진전되는 모습은, 선덕여왕 11년(642년) 8월 백제 장군 윤충이 신라의 서쪽 요충 대야성을 함락시키고 도독 품석 부부를 죽인 사건에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이 대목에서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풍부한 편인데 신라본기 중 '선덕왕 진덕왕 태종왕' 조와 열전 중 '김유신 상(上)'에 자세하다. 선덕여왕 11년 7월 신라가 백제 의자왕에게 40여 성을 빼앗긴 데 이어 8월에 백제 장군 윤충이 대야성을 공격해 함락시켜 도독 이찬(伊湌) 품석 부부와 사지(舍知) 죽죽ㆍ용석 등이 전사했을 때 김춘추의 충격이 어느 정도였는지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5 '선덕왕 진덕왕 태종왕'조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대야성이 패했을 때 도독 품석의 아내가 여기서 죽었다. 그녀는 춘추의 딸이었다. 춘추는 이 소식을 듣고, 온종일 기둥에 기대서서 눈도 깜빡이지 않은 채, 사람이나 물건이 앞을 지나가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한참 후에 '아아! 대장부가 되어 어찌 백제를 멸할 수 없으랴!'하고는 곧 왕에게 나아가 "제가 고구려에 가서 군사의 파견을 요청해 백제에 대한 원한을 갚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김춘추가 고구려로 출발하기에 앞서 김유신과 나눈 대화 내용이 또 『삼국사기』열전'김유신 상(上)'에 실려 있다.

"길을 떠나기 전에 춘추가 유신에게 말했다.'공(公)과 나는 일심동체로서 나라의 기둥이오. 이번에 내가 고구려에 들어가 만약 불행한 일을 당한다면 공이 무심할 수 있겠소?' 유신이 대답했다. '공이 만일 돌아오지 못한다면 저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ㆍ백제 두 왕의 궁정을 짓밟을 것이오.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무슨 면목으로 백성들을 대하겠소?' 춘추가 감격하고 기뻐하여 공과 함께 서로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마시며 맹세했다.'내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오. 만일 이 기한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을 것이오.' 그들은 드디어 작별했다."

김춘추는 그러나 고구려로 들어가서 청병은커녕, 고구려가 수(隨)나라와 싸울 때 신라가 고구려 후방을 쳐서 차지한 죽령 서쪽의 땅을 내놓으라는 연개소문의 독촉에 시달린 끝에 연금당하고 만다.

"춘추가 고구려에 간 지 60일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자 유신은 국내의 용사 3000명['본기'에는 1만명]을 선발해 놓고 말했다. '위기를 당하면 목숨을 내놓고, 어려움을 당하면 한 몸을 돌보지 않는 것이 열사의 뜻이라고 나는 들었다. 한 명이 목숨을 바쳐 100명을 대적하고, 100명이 목숨을 바쳐서 1000명을 대적하고, 1000명이 목숨을 바쳐서 1만 명을 대적한다면 천하를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지금 이 나라의 어진 재상이 타국에 구금되어 있는데 어찌 두렵다 하여 일을 도모하지 않겠느냐?' 이에 모든 사람들이'비록 1만 번 죽고 한 번 사는 일에 나아갈지라도, 어찌 감히 장군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답했다. 유신은 마침내 왕에게 떠날 날짜를 정해주기를 요청했다."

김유신이 결사대를 거느리고 행군해 한강을 건너 고구려 남쪽 경계에 들어서자 고구려왕이 그 소식을 듣고 김춘추를 놓아 돌려보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김춘추는 신라의 외교권을 장악하게 되고, 죽음을 맹세한 1만명의 군대를 거느리는 김유신은 신라의 군사권을 장악하게 됐다.

그 뒤 이들 두 사람에게 또 다른 기회가 찾아온다. 선덕여왕이 즉위한 이래 여자가 왕이 되었다 하여 백제, 고구려가 신라를 얕보고 침공을 일삼을 때 신라가 당에 원병을 청하자 당 태종이 신라 사신에게 "너희 나라는 임금이 여자여서 이웃나라의 업신여김을 받는다"고 했다고 한다. 이 발언을 빌미로 비담 등 신라 귀족 일부가 선덕여왕 16년 정월에 '여왕은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없다[女主不能善理]'는 명분을 내걸고 반란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는 진평왕 53년(631년) 5월의 칠숙과 품석의 난에 이은, 두번째 귀족세력의 반란으로 왕권 강화에 대한 저항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었다. 이때 김유신이 일선에 나서서 이들을 진압해 처형된 귀족이 30명에 이르렀으며 반란의 와중에서 선덕여왕이 죽고 진덕여왕이 즉위했다.

진덕여왕 즉위 직후, 김춘추는 원병을 청하고자 당나라로 들어갔으며, 유신은 압량주 군주로 있으면서 대야성 패배의 설욕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군사들의 사기가 올랐을 때 김유신은 왕에게 청하여 출병했다. 유신은 대량성[합천] 밖에 이르러 백제군과 싸우다가 거짓 패한 체하고 옥문곡까지 후퇴했다. 백제군이 신라군을 업신여겨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 영토 깊숙히 들어오자 옥문곡에서 신라 복병이 앞뒤로 쳐서 크게 깨뜨리고 백제 장군 8명을 사로잡고 군사 1000명을 참획했다. 유신은 대야성에서 죽은 품석 부부의 유골과 비장 8명을 바꿀 것을 제안해 유골을 받고 8명을 돌려보낸 뒤 승세를 몰아 백제 경내로 쳐들어가 12성을 함락하고 2만여 명의 목을 베고 9000명을 사로잡았다. 왕은 유신에게 이찬의 작위를 주고 상주 행군 대총관으로 삼았다. 유신은 다시 적의 경내에 들어가서 진례 등 아홉 성을 공격하여 9000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600명을 사로잡았다.

"김춘추가 당나라로부터 군사 20만을 지원받기로 약속받고 돌아와 유신에게'사생(死生)은 명(命)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돌아와서 다시 공과 만나게 됐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라고 했다. 유신은 '제가 나라의 힘에 의지하고 영령의 위세를 빌어, 다시 백제와 크게 싸워 20개의 성을 빼앗고 3만여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또한 품석공과 부인의 유골을 향리로 돌아올 수 있게 했습니다. 이는 모두 천행으로 이뤄진 것이지 내가 무슨 힘이 있었겠습니까?'라고 말했다."

진덕왕 8년 3월에 왕이 죽자 마침내 김춘추가 왕으로 즉위하는데 『삼국사기』는 그 과정을 이렇게 적고 있다.

"진덕왕이 숨지자 여러 신하들이 이찬 알천(閼川)에게 섭정할 것을 요청했다. 알천은 굳이 사양하며 '나는 늙었고 이렇다 할 만한 덕행도 없다. 지금 덕망이 두텁기로는 춘추공만한 이가 없다. 그는 실로 세상을 다스릴 영걸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마침내 그를 받들어 왕으로 삼으려 하니 춘추가 세 번이나 사양하다가 마지 못하여 왕위에 올랐다."

왕위계승 서열 제1위의 상대등 알천이 김춘추에게 왕의 자리를 양보하게 되는 분위기는 『삼국유사』'진덕왕'조에서도 간접적으로 언급되고 있다.

"왕의 대에 알천공(閼川公), 임종공(林宗公), 술종공(述宗公), 호림공(虎林公), 염장공(廉長公), 유신공(庾信公)이 있었다. 이들은 남산 우지암에 모여 나랏일을 의논했다. 이때 큰 범 한 마리가 좌중에 뛰어들었다. 여러 사람들은 놀라 일어났지만 알천공만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태연히 담소하면서 범의 꼬리를 잡아 땅에 메쳐 죽였다. 알천공의 근력이 이처럼 세었으므로 웃자리를 차지했지만 여러 어른들은 유신공의 위엄에 복종했다."

이들 기록에 의하면, 알천공이 왕위를 양보한 것은 자발적인 의사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알천공의 이러한 태도는 김춘추와 김유신의 쌍두체제를 현실로 인정한 결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김춘추와 김유신의 쌍두체제는 그리하여 절정에 이르게 되는데 이 양김 체제는 무열왕 즉위 직후에 또 한번의 의식으로 매듭지어진다. 그것은 또 다시 두 집안 사이의 혼인이라는 형식을 취하는데 이번에는, 임금이 된 김춘추가 자신과 문희와의 사이에서 난 딸을 김유신에게 시집보내는 것이었다. 김유신은 말하자면 자신의 나이 어린 조카와 결혼하게 되는데 이로써 그 전에 처남매부지간으로 김유신이 손위이던 두 사람의 관계가 옹서지간(翁壻之間)으로 바뀌면서 김춘추가 윗자리를 차지하기에 이른 것이다.

사진설명 @ 김대식

무열왕릉1: 무열왕릉 전경
무열왕릉3: 무열왕릉 비각 안의 귀부와 이수
무열왕릉4: 무열왕릉비 이수 '태종무열대왕지비太宗武烈大王之碑'가 읽힌다.

김유신묘1: 김유신 장군묘 전경
김유신묘2: 김유신 장군묘 앞 비석 '新羅太大角干'이라는 글자가 보인다.
김유신묘3: 김유신 장군묘 12지신상 未像(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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