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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년 맞은 스레브레니차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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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년 맞은 스레브레니차 학살

[김재명의 월드 포커스] <2>

7월15일은 보스니아의 작은 도시 스레브레니차에서 집단학살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지 꼭 10년을 맞는 날이다. 나흘 앞서(7월11일) 1500명의 세르비아계 무장세력이 스레브레니차를 점령한 뒤부터 그곳은 공포와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리고 그 나흘 뒤, 남자로서 16세 이상의 보스니아 무슬림(공식명칭은 '보스니악')들을 뺀, 3만명이 넘는 여자들과 노인들이 피난길에 올랐다. 그들이 떠난 뒤 세르비아인들의 본격적인 학살이 시작됐다. 스레브레니차 지역의 희생자 규모는 7000-8000명쯤.

스레브레니차 지역에서는 지금도 발굴과 신원확인 작업이 진행 중이다. 한 발굴팀의 보고에 따르면, 세르비아계는 그들의 전쟁범죄를 감추기 위해 시신을 몰래 외딴 곳에 파묻었고, 학살 현장에 엉성하게 묻혀 있던 희생자들을 다른 곳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시신들을 마구 훼손했다. 이미 외신에 보도된 대로, 7월 11일 스레브레니차에서는 약 4만명의 추모객이 모인 가운데, 그동안 신원이 확인된 610구의 유골을 묻었다. 이미 묻힌 1300구를 합치면, 이름이 드러난 희생자는 2000명 남짓. 따라서 DNA 검사로도 누구인지 확인이 되지 못했거나 어딘가에 묻혀 있을 시신이 스레브레니차 지역에만 5000-6000구에 이를 것으로 추산된다.

***인류사의 새로운 전쟁**

유고연방 해체과정에서 보스니아 지역에 살던 세르비아계-크로아티아계-보스니악(무슬림)이 4년 가까이 서로 뒤엉켜 피를 흘렸던 보스니아 내전(1992-95년)은 인류 전쟁사에서 지우려 해도 지울 수 없다. 그 까닭은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라 일컬어지는 전쟁범죄 탓이다. 남한땅의 절반 크기로 인구는 400만명 남짓인 이곳 보스니아의 내전은 20세기 인류사의 잔인하고 수치스런 전쟁으로 기록된다. 인구의 40%가 피난을 떠나야 했고, 또한 40%의 집들이 불타거나 파괴됐다. 25만~30만명쯤의 시민들이 내전으로 죽었다지만 정확한 통계는 아무도 모른다.

보스니아 내전은 종교-언어-문화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대로 살던 땅에서 쫓겨난 대량난민, 조직적 성폭력 따위로 전세계 언론의 눈길을 끌었다. 내전은 예전의 전쟁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인종청소란 이름 아래 대량학살이 벌어졌고, 나토군이 유엔보스니아평화유지군(UNPROFOR) 깃발 아래 진주했고, 많은 비정부기구들(NGOs)이 구호활동을 폈다. 그래서 국제정치학자들은 보스니아 내전을 '새로운 전쟁'이라 불렀다. 유럽 땅이 아닌, 아프리카에서 그런 전쟁이 터졌다면 '나 몰라라' 하고 팔짱을 꼈을 것이란 비판도 나왔다. 영국-프랑스-독일 등은 발칸반도에서의 정치위기로 그곳 난민들이 서유럽으로 넘쳐나는 걸 바라지 않았다. 그러나 평화유지군이란 이름으로 파견된 유럽의 군대들은 중무장이 아닌 경보병이었다.

***"평화유지군 아닌 자기보호군" 조롱 받아**

1995년 7월 스레브레니차에는 경무장한 150명의 네덜란드 군이 주둔 중이었다. 보스니아 내전으로 곳곳에서 살육과 파괴가 한창이던 1993년 유엔은 스레브레니차를 유엔 역사상 최초로 국제사회가 보증하는'안전지대'(safe area)로 선포했다. 그 뒤로 스레브레니차엔 세르비아계의 학살을 피해 4만명에 이르는 난민들이 몰려들어와 있었다. 그들은 주로 보스니아 지역에서 대대로 살아 온 이슬람교도들이었다. 그러나 탱크를 앞세운 세르비아계의 공세에 밀려 네덜란드 군은 맥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네덜란드 사령부는 자국 병사들이 위기에 빠지자 나토군의 공습을 요청했지만 이뤄지지 못했다. 설마 하며 상황을 지켜보던 난민들을 기다리는 것은 세르비아계의 학대와 학살이었다.

스레브레니차 학살은 아프리카 르완다 학살(1994년)과 더불어 국제 평화유지 활동의 문제점을 말할 때 본보기다. 보스니아와 르완다에 파견된 평화유지군은 소수의 경보병 부대였다. 교전수칙도 자위(self-defense)로 제한돼 무력순찰을 비롯한 보다 적극적인 평화유지 활동은커녕, 스스로를 지키기조차 어렵다는 한계를 드러냈다. 이는 유엔헌장 제6장에 따른 평화유지군의 근무지침(중립을 지키고, 공격받지 않는 한 사격하지 않는다)에 충실한 탓이었다.

세르비아계 군사령관 락토 믈라디치 장군은 허약하고 자기방어에 급급한 UNPROFOR군을 가리켜 '유엔 자기(self)보호군'이라고 조롱할 정도였다. 나토 사령부는 5만에서 10만의 중무장 나토 지상군 투입을 검토했지만, 어디까지나 '검토'에 그쳤다. 내전 말기 UNPROFOR군은 2만4000에 이르렀지만 그 역시 경무장 보병이었다. 유엔군은 세르비아계 무장세력과 전투다운 전투를 벌이지 않고, 식량차량 경비 등 최소한의 방어에 그쳤다. 유엔헌장 제7장에 규정된 보다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역할을 맡기 시작한 것은 전쟁 말기인 1995년 8월 나토 공습 뒤부터였다.

***"카라지치는 우리 시대의 영웅"**

세르비아계 정치지도자 라도반 카라지치, 세르비아계 군사령관 락토 믈라디치는 전쟁범죄 혐의로 헤이그 유고전범재판소에 기소된 채 10년째 도피 중이다. 이들은 현재 헤이그 유고전범 법정에 선 슬로보단 밀로세비치(전 세르비아 대통령)로부터 군수물자와 병력 등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사람들의 정서는 이들 두 사람을 민족적 영웅으로 여긴다.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모여 사는 스르프스카공화국(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공화국)의 주요도시 팔예는 카라지치가 한때 숨어 지내던 곳이다. 그곳 한 카페에서 만났던 젊은이들은 세르비아계 특유의 세 손가락 사인을 해보이며 "카라지치는 우리의 영웅"이라고 말했다.

도피중인 카라지치는 보스니아 내전 당시의 전쟁범죄들이 전쟁의 회오리 속에서 불가피하게 빚어졌던, 일종의 '통치행위'라고 여길 것이다. 그가 전쟁에서 이겼다면, "전장이 법을 결정한다"(Battlefields determine the law)는 말에 비춰 전쟁범죄자로 기소되지도 않았을 것이라 심정적으로 억울해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세르비아계 인종청소의 피해자들이 카라지치를 보는 눈길은 전혀 다르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북쪽으로 50km 떨어진 곳에 자리잡은 스브레냐 난민수용소에서 만났던 한 난민은 "카라지치와 믈라디치가 전범재판소에서 단죄를 받기 전까지는 스레브레니차의 원혼들이 편히 잠들지 못할 것"이라며 울먹였다.

(사진 설명 1) 스레브레니차 지역의 집단학살 발굴현장(AP 자료사진)
(사진 살명 2) 세르비아계 도시 팔예의 젊은이들은 세르비아계 특유의 세 손가락 사인을 해보이며 "카라지치는 우리의 영웅"이라 말했다(@김재명)

필자 이메일: kimsphoto@yaho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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