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들에게 한국은 과연 어떻게 보일까요? 제가 보기엔 좀 나이가 든 한국 지식인들은 중국에 대하여 지나치게 눈치를 보는 듯합니다. 최근 중국 전문가로 잘 알려진 외교부 고위 인사가 중국 관련 책을 냈는데, 원래 중국어로 썼던 것을 한글 번역판으로 다시 낸 것이랍니다. 이 책의 중국어판은 중국에서 꽤나 팔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한국인의 본류가 중국에서 건너왔으며 중국인과 뿌리가 같은 것은 한국인뿐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습니다. 이 책은 한국인들의 뿌리를 찾아보면 중국인이 조상인 경우가 많고, 한국인들이 중국을 동경(憧憬)하는 이유 중에는 많은 한국인의 조상이 옛날에 중국에서 건너왔다는 혈통적 요인이 있는 것도 사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 근거는 한국인과 중국인의 성(姓)이 대부분 일치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그렇지가 않아도 동북공정으로 세상이 시끄러운데 한국의 중국전문가에 고위 외교관이 이 같은 논리를 펴고 있으니 중국으로서는 이 보다 다행한 일이 없겠지요. 아무리 역사학을 전공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공부를 좀하고 썼더라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한국인들과 중국인들의 성이 같은 것은 한국인들에게는 문자가 없어서 중국어를 빌려서 사용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한국에도 중국에서 건너온 성씨들이 있긴 하지만 이들이 주류는 아니죠.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고구려 고(高)씨, 백제의 부여(扶餘)씨 등 8성 집단, 신라 김·박씨 등 6성 집단이 삼국시대 왕족 중심으로 이뤄진 한반도 초기 성씨들이고, 고려 초반 이후에 한반도 거주했던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성을 대거 차용(借用)하였는데 앞의 8성과 6성을 제외한 대부분 성씨들은 중국식 성을 차용함에 따라 정착되었다고 보고 있죠.
그런데 만약 어떤 사람이 일본에 대해서 이런 책을 썼더라면 아마 귀국도 못하였을 것입니다. 어디서 총이나 칼을 맞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한국인들은 정말 ‘중국의 머슴살이’를 무의식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렇지 않으면 왜 이토록 알아서 기는지 알 수가 없군요. 한국의 사학자들은 중국이 우리를 보고 욕설로 뱉은 말도 금이야 옥이야 하더니 말입니다.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이든지 일본의 역사를 중국과 연계시키려고 온갖 짓을 다합니다.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나타나는 이 같은 ‘새끼 중국인’ 근성을 보면서 저는 한없이 처량해집니다. 제게는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없습니다. 일본(열도 쥬신)은 실질적으로는 한반도로부터 대부분의 문물을 받아들였으면서도 이것을 인정하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합니다. 여기에는 분명 한국(반도 쥬신)의 책임도 있습니다. 한국은 한국대로 중국을 빼면, 저만 잘났고 나머진 모두 오랑캐라는 식입니다. 이 같은 한국과 일본의 작태를 보면서 중국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할까요? 공식적으로 말이야 하겠습니까만 “쥬신은 참으로 한심한 백성들이다. 그러니 점차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지만 중국도 요즘 때로 한국에 대하여 짜증을 내기도합니다. 생각보다는 잘하는 것도 꽤 많거든요. 과거에는 그저 개ㆍ돼지 같은 오랑캐나 잘 되어봐야 머슴 정도였는데 이제는 가끔 주인(중국)과 맞먹으려고 하니 배가 아프기도 할 겁니다.
2002년 월드컵은 이 같은 중국의 태도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계기가 되었습니다. 당시 한국이 우수한 성적을 거두자 중국 언론 대부분이 “이탈리아 선수들의 옷을 잡아당기면서 일궈낸 한국 축구의 8강 진출은 아시아의 치욕”, “우리는 하룻밤에 졸부가 된 한국 사람들을 칭찬할 수 없다.”라고 떠들어대었던 것 기억나십니까? 그 뿐만 아니죠. 얼마나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에서 봉변을 당했습니까? 저는 이 일들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많은 한국인들이 봉변을 당하자 우리 정부는 이를 숨기기에 급급했습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다 보면 도대체 한국에 외교부가 왜 있는지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이들에게 ‘대국민 봉사’니 ‘서비스 정신’을 기대하는 그 자체가 사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들은 그저 권력기관일 뿐인데 말입니다.
중국 대부분 공중파 방송과 언론이 이 지경인데도 당시 일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래, 중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도 아니잖아?”
허어, 그렇습니까? 그러면 이름 없는 일본 시골의 일개 현의 조례에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말에는 왜 거품을 물고 혈서를 씁니까?
***(1) 축소지향(縮小指向)의 한국인**
우리가 ‘민족(nation)’에 대한 보편타당한 개념을 규정하기는 불가능할 것입니다. 민족은 공통된 체질적 특성·언어·문화전통·영토를 공유(共有)하는 사람들의 집합체(集合體)라고 일단 해둡시다. 인류학적 측면에서 보자면 민족은 ‘ethnic group’, 또는 ‘ethnicity’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가급적이면 한(漢)나라 때를 기점으로 하여 중화주의가 강화되는 시점을 기준으로 쥬신이라는 민족을 분석한 것이죠.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 이야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그 동안 저는 우리의 뿌리를 찾는 작업들을 알타이어족에서 떨어져 나온 예맥(濊貊)의 실체를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러면 인간은 모두 아담과 이브의 자손이지.”라고 비아냥하시는 분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렇지요. 그러면 제가 그런 분들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한족(漢族)은 13억이라고 하는데 왜 그런 말은 문제 삼지 않는가 말입니다. 제가 보기엔 한족은 5억 정도도 안 될 것 같은데 말이죠.
대개의 경우 한족(漢族)은 작은 차이는 내버려두고 크게 비슷한 것을 하나씩 통합해가는 ‘구대동존소이(求大同存少異)’식으로 중국의 역사를 정리해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한국의 사학계는 예맥조차도 그 차이를 분석하는 등 미세한 차이까지 다 찾아내어 같은 민족조차도 신경질적으로 나누고 떼어내려는 시도를 하여왔습니다. 이들이 왜 이런 짓을 하는지 그 저의(底意)가 몹시 궁금합니다.
예를 들면, 예와 맥은 서로 다른 종족으로 예족과 맥족은 화북지방(華北地方)에 따로 거주하다가 점차 동쪽으로 이동하였고, 예의 일부가 맥족에 흡수되어 새로운 종족인 ‘예맥(濊貊)’이 성립되었고, 이것이 바로 고구려족이라는 식입니다[이옥,『高句麗民族形成과 社會』(교보문고 : 1984)]. 천관우의 경우에는 한국 상고사의 전개 자체를 ‘한(韓)계[조선계(朝鮮ㆍ眞番ㆍ三韓 등)’와 ‘예맥계[부여계(高句麗ㆍ夫餘 등)’의 양계가 지역과 시기를 따라 때로는 분리되고 때로는 서로 결합하는 과정의 역사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북한 지역의 연구는 남한과는 다소 차이를 보이지요. 북한의 탁월한 사가였던 리지린 선생은 1960년대 초반에 이미 예와 맥은 한 개 족속의 두 갈래이며 한(漢)나라 이전에 동호(東胡)를 맥(貊)’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맥은 처음부터 예의 지역 북방에 거주, 늦어도 B. C. 5세기경에는 ‘맥국(貊國)’을 건설했다고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가 ‘고조선족’이라고 파악했습니다. 부여는 B. C. 3세기 맥족의 일부가 예인의 나라인 ‘불여지국(不與之國)’을 정복하고 세운 나라라고 합니다[리지린,『고조선연구』(평양, 과학원출판사 : 1963)].
손영종은 고조선ㆍ부여ㆍ고구려 사람들이 다 같은 ‘고대 조선족’의 여러 갈래였던 만큼, 굳이 고조선 주민을 예족, 고구려 주민을 맥족, 그리고 선주민인 예족을 정복하고 세운 맥족의 나라 부여 등으로 그들을 분별하여 인식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이것은 북한학계의 입장을 반영하는 말이기도 합니다[손영종,『고구려사』(평양,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 1990)]. 제가 지금껏 주장해온 바와 동일합니다.
그러나 남북한 모두에서 고구려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라고 하면서 고구려 그 이전이나 이후의 역사에서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지배층이라고 하거나 대부분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 속에 넣지 않고 무시해버립니다. 쉽게 말해서 ‘고구려만 우리 역사’라는 식입니다. 남북한 양쪽 모두에‘새끼 중국인’ 근성이라는 고질병이 얼마나 암(癌)처럼 깊이 퍼져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분은 한국의 역사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하면 고구려가 UFO를 타고 온 외계인일 것이라고도 하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구려 전후사가 어떻게 해석이 됩니까? 어떤 분의 말씀처럼 “고구려인들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도 아니요, 망한 다음 모두 땅속으로 꺼진 것도 아닐진데” 말입니다.
참고로 1970년대 김철준교수(서울대)는 한국의 상고사를 독자적 단위세력집단으로서 존재한 부여족(扶餘族)의 분열(分裂)과 이동(移動)이라는 측면에서 파악한 예가 있습니다. 탁월한 식견으로 볼 수 있습니다. 즉 북부여(北扶餘)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의 부여(扶餘)로, 동부여(東扶餘)는 동예(東濊)로, 남부여(南扶餘)는 백제(百濟)로 파악한 것이지요. 저는 이 견해가 전적으로 옳지는 않지만 상당한 부분에서 역사를 보는 영감을 준 견해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쥬신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보면 고구려보다 부여의 역할이 강조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부여는 어떤 의미에서 한족(漢族)과의 연계를 통하여 동족인 쥬신을 압박하였기 때문에 다소 부정적인 요소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당나라와의 야합을 통해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도 그 역사적 비난을 면하기 힘듭니다.
이상의 논의를 보면,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역사인식과 사학계의 논리의 가장 큰 문제점은 ‘축소지향(縮小指向)’이라는 것입니다. 가급적이면 중국에게 아부하고 우리 역사를 숨기며 영역도 한반도 내로 축소하여 안주(安住)하려고 합니다. 조선시대 최고의 석학으로 추앙을 받으시는 정약용(丁若鏞 : 1762-1836) 선생조차도 가급적이면 우리의 강역을 한반도에 국한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하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쥬신은 한족(漢族)들에게 대부분의 영토와 문화 및 민족 그 자체의 정체성도 상실하고 이제는 한반도와 일본에 겨우 매달려 있는 형국입니다. 앞으로 얼마나 버틸지가 걱정스럽습니다.
이상하게도 쥬신이 항상 앞서 가고 그 넓은 중국도 대부분 경영하였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한족(漢族)은 점점 많아져서 이젠 13억이나 되고 있는데 쥬신은 지속적으로 줄어들어 몽골ㆍ한국ㆍ일본에만 2억 남짓 남아있습니다. 몽골인구(2003년 현재 : 인구 249만 3천 명, 인구밀도 1.6명/㎢)는 한국의 대구(大邱)나 인천(仁川) 정도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쥬신이 남아있는 곳이라고는 사실상 한반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일본(열도 쥬신)은 어떻게든 중국에 줄을 대려고 하는 그 동안의 행태로 봐서 쥬신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수천 년 이상 정체성을 유지하던 막강한 쥬신족에게 지금 최대의 시련과 위기가 엄습하고 있습니다. 더욱 무서운 일은 이 위기 상황을 위기로 인식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민족 사학을 하는 사람들조차도 쥬신 전체를 보지 못하고 막연히 고대의 영광에만 안주하거나 ‘고구려의 영광’만 강조하기도 하는데 그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위기라고 말하는 사람을 뭔가 모자라거나 정치ㆍ외교와 세상을 잘 모르는 사람들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차라리 한족(漢族)이 되어버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우리가 언제부터 한반도에만 스스로를 묶으려 했는지는 분명하지는 않지만 제가 보기엔 ‘새끼 중국인(소중화주의)’ 근성이 극심하게 자리 잡은 조선(朝鮮) 시대 이후가 아닌가 합니다.
사실 고려 말기에서 조선시대에 이르는 기간은 한반도가 중국화 되기 위해 엄청 몸부림을 친 시기였습니다. 한편으로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국제 정치질서의 형편으로는 불가피한 선택일 수도 있다고 봅니다.
다만 지나치니까 문제지요. 만주와 몽골, 그리고 열도의 동족들을 완전히 오랑캐로 몰아붙이면서 극심한 한화(漢化) 정책을 강행한 것은 지나치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국체(國體)를 유지했을 텐데 말입니다. 나중에는 한족(漢族)의 명(明)나라를 아예 ‘부모의 나라’라고 합니다. 기가 찰 일입니다. 자기를 낳아주거나 길러준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그러나 조선 초기에는 그나마도 쥬신적인 사고방식이 있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조선시대 초기 예종(睿宗) 때의 일입니다. 성리학이 극성을 부리기 전의 일이지요. 한 고위 신하가 임금에 올린 상소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주(周)나라가 신하로 예속시키지 못했고, 수나라의 대군이 대패하였고, 당나라가 빈국(賓國)으로 대우하였습니다. 송나라가 섬겼고, 금나라가 부모의 고향으로 불렀으며, 원나라가 조카[甥]와 장인[舅]의 나라로 삼았습니다(『朝鮮王朝實錄』「睿宗實錄」).”
조선 후기 같으면 나올 수가 없는 말이겠지만 그래도 이때까지는 조선의 지배층들이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에 사로잡히지는 않은 듯합니다. 사실 조선 후기처럼 소중화주의에 극렬하게 사로잡혔으면 인류의 문화유산인 ‘한글’이 나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소름이 끼칠 일이지요.
위의 상소문은 당시의 고위 인사가 왕에게 올린 글이기 때문에 당시 지도층들의 인식의 일면을 볼 수 있는 글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우리나라는 고구려를 명백히 포괄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금나라에 대해서도 과장이나 미화 없이 “있는 사실 그대로”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고 원나라와 한반도의 관계에 대해서도 얼마나 돈독했는지를 말하고 금나라나 원나라를 오랑캐로 보고 있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나마도 조선 초기에는 자주의식이 어느 정도는 있어서 단군숭배가 자주적인 입장을 강화하는 논리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만 대부분은 기자조선(箕子朝鮮)에 대한 찬양일색이었습니다. 즉 같은 고조선이라도 기자조선에 대한 숭배는 한화정책(漢化政策)의 강화를 의미하고 단군조선의 숭배는 자주의식을 강화하는 논리지요. 이 같은 한화(漢化)의 강화는 이미 고려 숙종 초에 기자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면서 “우리나라의 교화(敎化)와 예의(禮義)는 기자(箕子)로부터 비롯되었다.(『고려사(高麗史)』63 禮志)”는 기록으로서도 충분히 확인이 됩니다. 이 같은 점을 본다면 한반도의 쥬신족들이 쥬신의 대표성을 가지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이젠 더 이상 이 세상에는 남아있는 쥬신도 없으므로 좋으나 싫으나 반도 쥬신(한국)과 열도 쥬신(일본)이 이 역할을 떠맡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지요. 쥬신이라는 민족 전체가 계속 이 지구상에 살아있든가 아니면 소멸하든가 하는 기로(岐路)에 서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단군을 민족사의 시작으로 보는 관념은 일반적으로 고려시대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고구려의 경우에도 단군신화를 포용하려고 합니다(『三國遺事』王曆篇, 고구려벽화 각저총). 그러나 신라의 경우에는 별 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신라가 대동강 이남 지역을 점령한 후 북방에 대한 관심이 소멸하여 단군의 이야기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이유가 없었던 것이죠. 신라는 축소지향(縮小指向)의 본보기를 보여준 셈입니다.
***(2) 황하문명이라?**
중국을 흠모해온 사람들은 모든 문명의 근원이 중국인 듯이 이야기합니다. 한족(漢族)들은 세상의 모든 문명이 한족으로부터 나왔다고 떠들어댑니다. 여기에 한술 더 떠서 소중화주의자들은 볍씨 한 톨, 유리 한 조각에서 문명의 전부까지 중국에서 온 것처럼 말합니다. 동양학(東洋學)하면 으레『사서삼경(四書三經)』과 한족(漢族)의 역사이고 이것을 모르면 마치 사람의 도리를 모르는 듯이 떠들어댑니다. 아마도 나라의 대표적인 공중파 방송으로 『논어(論語)』를 강의하는 나라는 한국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저도 고교시절에 대학입시를 준비하느라 『사서삼경』의 중요 부분은 물론 중국의 아름답고 장쾌한 시(詩)와 유명한 부(賦)를 외운다고 두 세 해의 여름, 겨울 한 철을 다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어렵게 외운 수십 편의 한시(漢詩)를 한 번도 제대로 써먹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다만 『삼국지 바로읽기』를 쓰면서 『적벽부(赤壁賦)』한 번 인용한 정도였습니다.
디지털 시대에 이르러서도 한국의 지배층들은 시대에 뒤떨어진 유교적ㆍ가부장적 사회질서와 기존의 제도를 철저히 옹호하는 논리를 아는 것이 교양이 되는 나라를 만들지 못해서 안달입니다. 마치 이것을 몰라서 충효(忠孝)를 못하는 듯이 말입니다.
충효(忠孝)라는 것은 이런 방식으로 강요해서 될 문제가 아니지요. 나라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이 모범을 보이면 저절로 나라에 충성하려는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계백장군이나 화랑관창 같은 분들이 나라 일을 한다면야 누가 애국자가 안 되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실상은 어떻습니까? 장관이라고 뽑으려고 보니 경력이 성한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과거사를 청산한답시고 떠들어대던 사람들의 경력이 더욱 의심스러워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더니 결국 흐지부지되고 말았습니다. 한국에서 꽤나 사는 사람이나 권력을 가진 사람치고 미국에 집 없는 사람도 없고 미국인 자녀를 한 둘 씩 안 둔 사람도 별로 없지요(국제결혼 한 것도 아닌데 말이죠).
이렇게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ésse oblíge : 사회 지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높은 수준의 도덕적 의무. 흔히 노블리스 오블리제라고 영어식으로 발음함)가 없는 나라에서 충효만 강조하는 것은 일종의‘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저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자기 말만 잘 들어라 이런 말이지요.
그렇거나 말거나‘새끼 중국인’들이 중국을 아는 것이 세상의 진리를 아는 것인 듯 떠들어대니 일단 중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봅시다.
황하문명(黃河文明)은 잘 아시는 바와 같이 황하(黃河)의 중·하류와 그 지류에서 발생한 문명입니다. 중국은 황하문명이 마치 모든 문명의 근원인 듯이 세상에 알리려고 안달합니다. 여기에 부화뇌동하는 소중화주의자들도 가세하여 중국 문화야말로 가장 위대한 듯이 떠들어댑니다. 그것은 결국 황하문명의 주역인 한족(漢族)의 사상과 전통을 숭상하는 방향으로 길을 잡게 됩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많이 다릅니다. 새끼 중국인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황하문명(黃河文明)을 연 민족은 바로 쥬신이라는 것입니다. 즉 세계 4대 문명의 하나인 위대한 황하문명도 쥬신의 주도로 한족(漢族)이 함께 만든 작품이라는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김 선생, 당신 보자보자 하니 이젠 상식에 가까운 이야기들에 대해서도 억지를 부리는군. 그것이 애국이니 애족으로 착각하지마. 쇼비니즘일 뿐이야. 그래서 말인데 당신 혹시 바보 아니야?”라고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그렇군요. 저도 명색이 공부하는 사람인데 영 근거도 없이 떠들기야 하겠습니까? 그러면 이 점을 차근차근 알아봅시다.
먼저 아래의 [그림 ①]을 봅시다. 이 그림은 유목지대와 농경지대를 표시한 그림으로 어떤 역사부도나 지리부도를 보시더라도 쉽게 확인하실 수가 있습니다. [그림 ①] 유목문화권과 농경문화권과 문명의 발생
[그림 ①]에서 보면 특이한 점이 나타납니다. 즉 문명의 발상지는 유목민과 농경민들의 충돌지점에서 발생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림 ①]을 보면 또 이상한 점이 눈에 띱니다. 즉 중국에는 매우 풍부하고 다양한 신석기 문화가 나타난 화중지방(華中地方 : 산둥·안후이·장쑤·허난·후베이)이나 양쯔강(洋子江)에서는 왜 고도의 문명이 발생하지 않았을까 라는 점 말입니다.
사실 황하(黃河)는 양쯔강에 비하면 조건이 형편없이 열악합니다. 황하는 진흙과 모래가 많은 하천인데다 자주 범람합니다. 황하는 1950년대 이전까지 역사의 기록만 보아도 하류의 제방이 터지고 범람한 횟수가 5백여 차례나 된다고 합니다. 하도(河道), 즉 강의 물길이 바뀐 것만도 20여 차례나 된다고 합니다[류제헌, 『중국역사지리』(문학과 지성사 : 2004) 68쪽].
상상이 되십니까? 하룻밤 자고 나면 강이 십 리나 도망을 가서 없어지는 상황을 말입니다. 오죽하면 황하를 ‘다스릴 수 없는 강’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겠습니까?
이와 같이 황하는 양쯔강에 비하여 토지도 비옥하지 못하며 기후도 좋지 못하기 때문에 문명이 발생하기에는 적당하지 못한 곳이기도 합니다. 사람 살기에도 썩 좋은 장소는 더구나 아니지요.
구체적으로 보면 황하는 대홍수가 나서 자주 범람하고 기후조건도 나빠 여름에는 무덥고 겨울에는 혹독한 추위가 닥칩니다. 하지만 장강(長江), 즉 양쯔강은 자주 범람하지도 않으며 토질도 좋고 기후도 곡식이 자라기에는 적합합니다. 그래서 한족과 중화사상이 극성하게 된 송나라 이후로는 양쯔강은 중국 최대의 곡창으로 한족을 먹여 살린 것이죠,
그러면 마땅히 양쯔강 유역이나 산둥반도 등 화중지방에서 고도의 문명이 발생해야 하겠지요[제가 화중지방을 지적하는 이유는 이 지역이 중국의 원류(原流)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보다 발달된 문명이 발생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양쯔강이 신석기 시대에는 현재보다 기온이 높고 강수량이 많아 저습지에 크고 작은 호소(湖沼)가 여기저기에 있는데다 삼림이 무성한 상태여서 개발이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에 비하여 황하 유역은 대륙성 기후로 건조한데다가 비옥한 황토가 퇴적하여 황토 지대를 형성하였고 이것을 문명 발생의 원인으로 보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입니다.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제가 보기엔 좀 앞뒤가 맞지 않군요.
중국의 양쯔강 문화[長江文化]는 북부의 황하문화(黃河文化)와 함께 중국 고대문화를 형성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최근 중국 정부는 양쯔강 문화가 1만 2천년까지도 올라가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화라고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어쨌든 황하문명보다는 훨씬 오래된 것은 사실이겠군요. 그렇다면 중국 문명의 원류는 양쯔강 문화이겠네요. 그런데도 신석기 문화로 정체되었다니 이해가 안 되는군요.
그나저나 이 사실 하나만 보더라도 양쯔강이 살기가 나빠서 고도의 문화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그 동안의 분석은 앞뒤가 맞지를 않지요.
B. C. 3000년 경, 양쯔강에는 이미 벼농사를 바탕으로 신석기 문화를 꽃피웠는데, 대계문화(大溪文化 : B. C. 4000년), 굴가산문화(屈家山文化 : B. C. 3000년), 청룡천문화(靑龍泉文化 : B. C. 2000년)가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 문화는 벼농사 중심의 농경문화로 2~3모작이 가능했으며 후에 춘추전국시대의 오(吳)나라ㆍ월(越)나라ㆍ초(楚)나라의 문화적 기초가 된 문화입니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무엇보다도 밀에 비해 쌀은 같은 양으로 인구를 부양하는 능력이 크다고 합니다. 즉 벼농사 지대는 밭농사 지대보다 인구를 많이 부양할 수 있기 때문에 문명을 만드는 조건으로는 오히려 유리하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 양쯔강 문화는 전성기가 B. C. 3000년경으로 가장 오래된 문명일수도 있는데 B. C. 2000년경에 까닭도 없이 쇠퇴해버렸고 이 시기에 황하문명이 발흥하더라는 것이죠. 그래서 기후 변화(한랭화)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러면 양쯔강 문화의 쇠퇴는 더욱 이해하기가 어렵군요. 한랭화되면 양쯔강 지역은 황하보다 더욱 유리한 게 아닌가요? 황하는 더욱 살기도 어려워지겠고요. 그런데 양쯔강 문화는 쇠퇴하고 황하문명이 더 크게 발전한다? 무슨 말인지 알기가 어렵군요.
양쯔강 유역과 이를 기반으로 한 화중지방(華中地方)에서 왜 고도의 청동기 문명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은 저만 가진 것이 아니라 그 동안 관련 학자들 대부분이 가진 의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최근 일본학자들과 중국학자들이 연합하여 양쯔강 중류 지역을 대대적으로 발굴하였습니다(『월간중앙』2002.5). 구체적으로 이 지역은 동정호(洞庭湖) 주변 후난성(湖南省) 청터우산(城頭山)이었는데 여기에는 양국 학자들의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었겠지요.
일본인들의 목적은 야요이(彌生) 문화가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에서 왔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했겠고, 중국인들은 ① 세계 벼 문화의 출발점이 중국이라는 것과 ②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문명이 중국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 것으로 보입니다(중국인들은 말은 안 해도 청동기 유적을 발굴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니 이들은 서로 눈이 맞아 발굴을 시작한 것이죠.
그래서 발굴을 해보니 양쯔강 유역에는 이미 B. C. 5000년에 고도의 벼농사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월간중앙』2002.5(日本『文藝春秋』4月號 長江文明發掘記座談)]. 그런데 재미있게도 일본은 이 결과에 크게 고무된 것 같은데 중국 측의 반응은 별로였습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양쯔강 유역은 황하문명 훨씬 전에 신석기문화가 고도로 발달해 있었지만 그것이 더 높은 단계의 청동기 문화로 발전하지는 못했다는 것이죠. 그래서 결과는 엉뚱하게도 중국이 자신의 원류 지역인 양쯔강과 화중지방에서는 독자적으로 청동기 문화를 발전시킬 수 없었다는 것만 입증하고 만 셈이 되었지요.
중국인들이야 으레 그렇다하더라도 같은 쥬신으로서 열도 쥬신(일본) 학자들의 이 같은 행태는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도대체 왜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사학이나 고고학을 한다는 이들이 이토록 쥬신을 거부하고 ‘새끼 중국인’ 근성을 가지고 있는지 슬픈 일이기도 합니다. 또 이것이 오늘날 쥬신 지식인 사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자기의 이익을 얻으려고 머리를 굴려서 한다는 일이 항상 그저 중국인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고 있는 것이지요.
제가 보기엔 한·일 양국의 학자들이 마치 중국에 잘 보여서 눈도장이라도 찍으려는 것 같습니다. 장강(양쯔강)의 벼농사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이 열도 쥬신(일본)의 자존심을 높여줍니까? 또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벼농사 문화를 가지고 갔다고 해서 그것으로 쓸데없이 우쭐거리면서 동족(同族)을 오랑캐로 부르는 반도 쥬신의 태도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고서 무슨 한·일 두 나라의 화합(和合)이 이루어지겠으며 동족의식(同族意識)이 생기겠습니까?
그리고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학문을 왜곡시켜야 되겠습니까? 열도 쥬신이나 반도 쥬신의‘새끼 중국인’들도 이젠 사실을 제대로 보고 연구하는 풍토를 가져야 합니다. 왜 자기의 전공도 아닌 많은 사람들이 역사학에 대하여 간섭합니까? 다른 분야에 이런 경우가 있습니까? 뭔가 알면 알아갈수록 학교나 교과서에서 배운 것과 너무 다르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이 점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매너리즘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3) 황하문명의 주역, 쥬신**
중국의 양쯔강 유역에 고도의 신석기 문화가 있었다는 것은 이제 알겠습니다. 그런데 고도의 신석기 문명만 형성된 상태에서 왜 그 이상의 문화로 발전하지 못하고 정체되었는가 하는 의문은 전혀 해결이 안 되고 있습니다. 다시 [그림 ②]를 봅시다.
[그림 ②] 신석기ㆍ청동기 유적지 분포도(후난성 청터우산 추가)
[그림 ②]은 어느 책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지도로 『고교 역사부도』(금성출판사, 천재교육)에 나타난 자료를 한 곳에 모아본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가 흔히 보는 자료 속에 비밀이 숨어있는 경우가 많죠. 다만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히지 말고 생각을 바꾼다면 말이지요. 사람들은 제가 애초부터 쥬신의 역사에 빠진 것처럼 알기도 하는데 사실은 다릅니다. 지난 세월을 제 일을 하면서 아무 생각 없이 이 책 저 책 읽고 방송도 보고 관심도 가지고 하다 보니 저절로 내릴 수밖에 없는 결론이 바로 ‘쥬신’이었습니다.
[그림 ②]를 보면 대체로 보면 과거의 중원 땅은 주로 석기(신석기) 문화의 유적지가 많고 북부에 갈수록 청동기 유적들이 많음을 한눈에 알 수 있죠. 그런데 한눈에 봐도 보다 발달된 청동기 문화는 지금까지 보아온 대로 쥬신의 영역에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중국이 자랑하는 황하문명이라는 것도 무엇인가 ‘쥬신의 냄새’를 풍기고 쥬신의 코드(ethnic code)가 느껴집니다.
이제 다시 양쯔강 유역에서 왜 고도의 문명이 발생하지 않았는가 하는 물음으로 돌아갑시다.
제가 보기엔 중국 문명을 분석하는 연구자들이 쥬신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실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같네요. 쥬신을 염두에 두면 쉽게 보이는 것을 이들은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도 보지 못합니다. 아니면 쥬신을 보고 싶지 않았겠지요. 중국은 원래 그렇다 치고 일본 학자들의 행위는 여간 실망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여기서 잠시 신석기 문화를 보더라도 쥬신과 한족들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점을 먼저 알아 둡시다. 이 분야의 전문가인 정수일 교수에 따르면, 쥬신의 대표적인 신석기 토기인 즐문토기(櫛文土器 : 빗살무늬토기 - comb marked pottery)는 시베리아에서 몽골을 거쳐 한편으로는 흑룡강과 송화강 유역을 지나 두만강 쪽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요하(遼河)를 지나 한반도 서북부로 유입되었습니다[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사계절 : 2001) 95쪽]. 아래의 [그림 ③] 은 신석기 시대의 문화권을 나타낸 그림입니다.
[그림 ③] 즐문토기 문화권(정수일. 앞의 책, 70쪽에서 발췌)
어떤가요? [그림 ③]을 보시면 석기 문화조차도 쥬신과 한족(漢族)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죠? 한족(漢族)의 경우 허난성(河南省)의 양샤오[앙소(仰韶)]에서 최초로 채도(彩陶 : design pottery)가 발굴되었는데 채도는 주로 그리스·이라크· 이란·인디아의 하라빠 등지에서 나타나고 있어서 이들의 문화가 남방에서 인디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래된 것으로 보고 있으나 중국은 펄쩍 뛰면서 이를 반박하고 핏대를 올리며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했다고 주장합니다. 이 부분은 아직도 논쟁 중입니다.
채도가 이라크·이란·인디아에서 중국으로 왔든 아니든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지요.
분명한 것은 한반도의 신석기 문화와 한족(漢族)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왜 쥬신과 한족이 궁극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는지를 알 수가 있지요.
이제 생각을 좀 바꾸어봅시다.
중국 고유의 벼농사 문화의 중심지에서 보다 발달된 문명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역으로 문명이 발생한 지역을 보면서 양쯔강이나 화중지방에서 고급문명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추론하는 것이 더욱 수월하겠죠.
제가 보기엔 문명이 발생한 곳은 유목문화와 농경문화의 충돌지점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청동기를 비롯한 금속 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봅시다. 금속의 제련과 가공은 당시로서는 최첨단 국가산업입니다. 요즘으로 보면 정보 통신 산업(IT)에 해당되는 것이죠. 이 부분은 그 동안 제가 충분히 검토했으리라고 봅니다. 일단 중국의 “사실상 최초의 왕조”인 은(殷)나라를 봐야 되겠군요.
은나라는 중국 최초의 청동기 국가로 일반적으로 상(商)나라라고 불리는 중국 고대 왕조라고 하는데 대체로 B. C. 1600년에서 B. C. 1000년까지 존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 수도의 이름을 따라 통상 은나라로 부르고 있습니다. 하(夏) · 상(商) · 주(周) 등 3대의 왕조가 잇달아 중국 본토를 지배하였다고는 하지만 하왕조는 고전(古典)에만 기록되어 있을 뿐 전설적인 왕조입니다.
그렇다면 은나라 수도인 은허(殷墟)에서 나타나는 청동기 유물들은 그 초기의 원형에서부터 시기별로 그 발전 과정을 볼 수 있는 유물들이 출토되겠지요? 청동기 문화도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했다고 중국이 우기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은허에서 발굴된 청동기가 이미 발달된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즉 이 분야의 전문가인 정수일 교수에 따르면 중국의 안양(安陽) 은허(殷墟) 등지에서 나타나는 청동기는 그 성형법이나 소재·문양 등을 보건데 이미 상당히 발달된 청동기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유라시아 청동기나 서아시아 청동기와 유사하다는 것입니다[정수일. 앞의 책, 123~130쪽].
이것은 무얼 말할까요? 은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다른 지역으로부터 은나라 쪽으로 전파되었다는 말이지요. 만약 은나라에서 청동기 문화가 발생했다면 초기 청동기 흔적은 물론이요, 그 중간 과정의 형태나 가공품들이 다수 출토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은허의 유물들을 보면 중국인들이 주장해왔듯이 청동기 가공 기술이 중국에서 독자적으로 나왔다는 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었다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중국은 ‘모든 것은 중국에서 발생했다’는 식으로 이리저리 늘어놓은 거짓말이 많다보니 나중에는 앞뒤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청동기 야금술은 코카스서·아르메니아·이란 고원 등지의 유목민에 의해 개발되었다고 합니다[정수일. 앞의 책 130쪽]. 결국 은나라가 없었더라면 중국은 『삼국지(三國志)』 시대까지도 마제 석기(磨製石器 : 간석기)로 농사를 짓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변한이나 요동ㆍ만주에서 수입을 했어야 할 테니까요. 그래서 관우(關羽 : ? ~219)는 비단수염을 휘날리면서 청룡도(靑龍刀) 대신에 돌도끼[石斧]로 안량(顔良 : ?~200)의 목을 베었겠지요.
그러면 정수일 교수가 제시한 그림을 다시 한 번 봅시다. [그림 ④]는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를 그린 그림입니다(원래 그림에서 정수일 교수가 제시한 연대는 최근에 여러 유적이 발굴되고 있어서 제외했습니다).
[그림 ④]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정수일. 『고대문명교류사』122쪽)
[그림 ④]에서 보면 청동기 문화는 중국의 원류(화중지방)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단지 은허(殷墟)를 중심으로만 분포되어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은나라가 설령 중국이라고 해도 청동기가 중국의 중남부 지방에서 하늘에서 뚝 떨어졌을 리는 없고 안드로노프·오르도스·카라스크·요동, 또는 한반도 등지에서 이동해왔음을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아니면 외계인들이 UFO를 타고 중국으로 내려왔겠지요(저는 우주 과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니 이 경우는 분석을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참고로 오르도스 청동기 문화의 전기(前期)는 은나라ㆍ주나라와 같은 시대로 추정되며 시베리아의 카라스크 문화와 동류에 속하고 은나라 문화와도 관련이 있습니다(정수일. 앞의 책 145쪽).
이 분야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유라시아의 초원지대에서는 B. C. 8세기경부터 철의 야금술이 도입되어 초원지대의 민족들이 유목기마민족화(遊牧騎馬民族化)되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남부 러시아 지역의 유목민족인 스키타이족(Scythian)의 철기문화는 강철 제조 기술에 기반을 두고 발달하여 소아시아·앗시리아·중국 북부에 이르는 광범위한 기마민족 문화를 형성시켰다고도 합니다. 중국의 경우에는 전국시대인 B. C. 4세기 초에 무기가 철로 제작되기 시작했습니다[전송림, 『중국 산업지리』(백산출판사 : 2001)]. 중국에서 철기문화가 발전할 때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린 것이죠. 참고로 스키타이족은 B. C. 6세기~B. C. 3세기경 남부 러시아의 초원지대에서 활약한 최초의 기마유목 민족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여러 가지 기록을 보더라도 은나라 때부터 중국 땅에서는 청동기ㆍ철기 등의 금속이 사용되었습니다. 이남규 교수(한신대)에 따르면 은나라 때부터 철로 만든 도끼[鐵刃銅鉞]나 철과 구리를 섞은 창[鐵援銅戈]이 제작되기 시작하지만, 이 같은 극소수의 무기형(武器形) 의기(儀器)에 이용된 철은 자연철(自然鐵)인 운철(隕鐵)이라고 합니다. 쉽게 말해서 자연 상태에 있는 철을 대충 사용했다는 말이지요. 이로부터 본격적으로 인공적(人工的)인 철기가 생산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합니다.
철제 무기가 등장하는 것은 전국시대 중 후기부터이지만 그것도 중국이 자랑하는 낙양을 비롯한 중원 지역이 아니라 쥬신의 영역인 요동에 있던 연(燕)나라에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당시에는 중국의 영역이 되지 못하는 초(楚)나라 방면에서 철로 만든 긴 칼[鐵製長劍]이 소수 출토되었다는 것입니다[李南珪, 『한국 고대사학회 제12회 학술토론회 발표요지』,「韓半島 古代國家 形成期 鐵製武器의 形成과 普及 (中國과의 比較的 視角에서)]. 그나마도 그 시기도 춘추 말기나 전국시대 초기이니까 황하문명이 발생하고 난 한참 뒤에 일이지요.
결국 이리저리 아무리 살펴보아도 청동기 문화는 쥬신 문화권에서 가장 풍부하고 다양하며 아름답게 꽃 피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 가운데는 “글쎄, 왜 유목민들이 청동기를 발달시켰지?”라고 하실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이에 대해 전문가인 정수일 교수는 “숙명적으로 방목하면서 부단히 이동하고 농경민족과 전쟁을 해야 하는 그들로서는 청동기가 필수불가결한 생존수단”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국이 주장하는 것처럼 이들이 문자가 없다고 선사시대의 범주라 생각하면 곤란하죠. 이들은 이미 발달된 청동기를 소유했으며 철기나 금붙이도 일찌감치 사용했다는 것이죠(정수일. 앞의 책, 133쪽). 그래서 청동기와 철기의 구분도 이들에게는 모호하다는 것이죠. 즉 청동기와 철기 문화는 따로 발전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청동기와 철기를 묶어서 금속문화가 발전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래도 여러분들은 또 의문을 가지실 것입니다. 그래서 “김 선생, 왜 당신은 농경민 사회에서는 제대로 된 금속문화가 발달할 수 없다는 거야?”라고 항의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생각해봅시다. 호미를 만드는 기술과 관우나 장비가 사용하는 전투용 대검을 만드는 기술이 같겠습니까? 유목민들이 귀금속 가공 및 제련 기술이 탁월했던 것은 모두 다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금을 가공하거나 전쟁무기로 개발되는 야금술과 저급한 철로 만드는 농기구의 가공 수준과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이죠.
예를 들어 금속 전문가들에 따르면, 섭씨 1200도 정도에서 농기구(선철 : 탄소함량은 2% 이상)를 만든다면 칼(강철)은 최소 섭씨 1500도 이상의 고열에서 탄소(탄소함량 0.01~2%)를 제거하는 공정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결국 유목민들에 의해 철기가 보급되자 농업생산력은 급성장하게 되었고 그로 인하여 농경 사회는 광대한 국가적 역량을 갖추게 됩니다. 농경민들은 그 힘을 바탕으로 유목민들과 대등하게 경쟁하기 시작한 것이죠. 마치 염제(炎帝)의 신하로 있다가 도전하는 황제(黃帝)처럼 말입니다. 치우천황(蚩尤天皇)은 염제의 계승자죠.
이후 중국의 춘추전국(春秋戰國)시대는 야철(冶鐵) 기술이 발전하였고 철기가 광범위하게 보급됩니다. 이로써 농기구가 크게 발전하였고 여기에 우경(牛耕)이 시작됨으로써 농업생산이 비약적으로 증대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농경지도 크게 늘어나고 사전(私田)이 대대적으로 나타나 전통적인 토지제도인 정전제(井田制)를 붕괴시켰다는 것이죠, 참고로『국어(國語)』에는 관중(管中)이 제(齊) 환공(桓公)에게 “청동은 칼이나 창으로 만들어 개나 말을 자르는 데 사용하고 철은 호미로 만들어 땅을 파는 데 사용한다(美金以鑄劍戟試諸狗馬 惡金以鑄鋤夷斤.試諸壤土 :『國語』「齊語」)”는 말이 있습니다. 이로 보면 이미 춘추시대 이전에 농기구의 보급이 상당히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죠.
지금도 청동기 등 금속문화의 흔적을 추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또 “에이, 아무려면 그게 언젠데 아직도 흔적이 남아 있으려고?”라고 하시겠지만 [그림 ⑤]를 한번 보세요.
[그림 ⑤] 철과 금․구리 주요 생산지
[그림 ⑤]는 현대를 기점으로 하여 주요 철과 금ㆍ구리 산지를 나타낸 그림입니다. 그런데 이상하죠?
[그림 ⑤]를 보면 과거 청동기 문화의 유적지와 쥬신이 다녔던 길목에 철이나 금, 또는 구리의 대규모 생산지가 지금도 있다는 점이지요. 물론 현재의 철산지와 과거의 철산지가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체로 과거 쥬신의 흔적이나 청동기 유적지와 철이나 구리 등의 대규모 산지가 서로 관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타의 비철 금속(아연·주석·텡스텐 등) 산지까지 포함하면 이 점은 더욱 확연해집니다.
따라서 문명의 여명기에 왜 은(殷)나라가 중국의 청동기 문화를 이끌어 갔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은나라는 누구나 알듯이 바로 쥬신 계열의 국가죠.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은나라는 오랑캐(夷)의 나라이고 주나라는 화하족(華夏族)의 나라(殷曰夷周曰華)”라고 합니다. 여기서 사용된 이 오랑캐라는 용어로 사용한 ‘이(夷)’가 바로 쥬신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은나라 당시 서경(西境)의 산시성에 있던 주(周)나라 민족은 제후(諸侯)로서 은 왕조에 복속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 주나라는 중국 민족의 기원인 화하족(華夏族)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쥬신 계열의 유목민들이 우수한 금속 문화를 바탕으로 농경민들을 지배하는 구조가 바로 사실상 최초의 중국 왕조라는 것이지요.
은나라는 동물의 뼈를 태워서 점을 치는 문화가 발달했는데 이는 북방 유목민적인 특징이죠. 한족(漢族)으로 대변되는 남방의 농경민적 세계에서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은나라의 왕은 점복(占卜)으로 하늘의 뜻(神意)을 받아서 백성을 통치하는 종교적인 우두머리였습니다. 마치 단군(檀君)처럼 말이죠.
더구나 이 은(殷)나라가 부여(夫餘)와 습속이 거의 같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은나라는 동이족의 나라(殷曰夷)라는 『사기(史記)』의 말과 같이 은나라는 쥬신의 나라였다는 얘기죠. 예를 들면 은나라는 부여와 같이 흰색을 숭상했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내거나 군대를 일으킬 때 점을 쳤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부여는 은나라 역법을 사용했다는군요[이형구,『한국고대문화의 비밀』(김영사 : 2005)].
그렇다면 중국의 황하문명은 그 동안 알려진 바와는 다르게 금속 문화를 전문적으로 다루던 쥬신의 주도하에서 탄생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중국 놈들이 번다.”는 속담이 생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쉽게 말해서 유목민(쥬신)들이 농경민(한족)들을 정복하면서 금속 문화를 전파한 과정이 바로 황화문명의 발생과정이었다는 말이지요. 이후 중국의 대규모 농경문화는 쥬신의 금속문화의 도움 없이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지금까지의 논의를 보면 쥬신의 이동과 청동기의 유적 분포 및 현재의 철을 포함한 금속 산지가 대체로 일치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나아가 유목문화와 농경문화가 만나는 지점에서 황하문명이 발생했음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우리가 흔히 보고 있던 지도였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가 항상 보던 지도라도 발상을 전환하여 다른 각도에서 살펴본다면 새로운 사실들을 많이 볼 수가 있지요.
이런 과정 속에서 금속문화를 수용한 농경문화가 광범하게 형성되면서 화하족(華夏族 : 중국의 한족)이 쥬신과 대등하게 겨루기 시작했다는 것이지요. 즉 농경민들이 유목민들과 그 끝없는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 동안 농경민들은 유목민들의 오랜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쳤을 것입니다.
치우천황(蚩尤天皇)과 황제(黃帝 : 중국인의 조상)의 싸움은 그것을 말하는 것이겠죠. 여기에는 화하족[한족(漢族)의 원류]의 민족적 각성도 한몫을 했습니다. 그 주역이 바로 공자(孔子)요, 맹자(孟子)요, 동중서(董仲舒 : B. C. 179~104 )요, 가의(賈誼 : B. C. 200~168 )요, 유방(劉邦)과 그의 후손들이었던 것이지요. 결국 여러분이 존경해 마지않던 중국의 그 성인(聖人)이라는 분들도 그 실상은 ‘한족들의 성인(漢族的聖人)’이었을 뿐이죠.
그 과정에서 황하문명을 연 쥬신은 허베이(河北) → 북경(北京) → 요동(遼東) → 만주(滿洲)ㆍ몽골 → 한반도ㆍ일본 등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그리고 은(殷)나라는 쥬신 세력을, 주(周)나라는 중국 민족을 대표하는 것인데, 주나라 무왕(武王)이 은나라 주왕(紂王)을 폭군으로 몰아서 천하를 빼앗은 것은 황하 유역에서의 원시적인 형태나마 중화주의(中華主義)가 태동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중간 중간 쥬신은 강력한 군대를 몰아 중국 정벌을 단행하여 중원 천하는 쥬신과 한족의 공격과 반격의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죠. 사실 은나라의 마지막 왕인 주왕(紂王)에 대해서도 중국인들은 엄청난 인신공격을 하고 있지만 사실은 다르겠죠?
제가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쥬신은 금속을 떠나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침 해[태양]나 쇠[鐵], 또는 금속은 대표적인 쥬신의 토템이죠.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이 금속 토템은 쥬신의 ‘상징과 표식(標式)이자 신(神)’입니다. 토템은 구성원들을 단단히 결속시키고 부족의 역량이 흩어지지 않도록 합니다. 박시인 선생은 다음과 같이 쥬신의 토템을 말합니다.
“거란(契丹)이란 이름이 의미하는 쇠[빈철(賓鐵)]도, 금나라의 쇠[金]도 다같이 ‘새 아침’의 새[新]라는 말에서 온 것이며 몽골(蒙兀)란 이름이 의미하는 은(銀)도 쇠의 일종이다(박시인,『알타이 신화』232쪽).”
오늘날 반도 쥬신(한국)이나 열도 쥬신(일본)이 세계 최고의 철강회사를 가진 것이나 최첨단 산업인 정보통신기술(IT)의 선두주자라든가 하는 것도 이것과 분명히 관련이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황하 문명의 주역이 바로 쥬신(Jüsin), 즉 코리안(Korean : 고리족· 코리족·까오리족)들이라는 제 말이 별로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는 아시겠죠?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