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물시장의 약속은 어디로...**
1988년 올림픽을 즈음해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현대적인 인상을 심어주고자 노점상에 대한 무차별적인 철거를 자행했던 정부는 이듬해 단순 철거위주의 대책에서 벗어나 풍물시장이라는 새로운 대책을 시도한다. 1989년 서울시는 종로·명동·영등포·한강 둔치 등에 무질서하게 자리잡은 노점상을 철거한 뒤 서초구 사당역 네거리 복개도로와 구로구 신도림전철역 후문 앞 공터 등에 풍물시장을 조성하였다.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만들겠다”는 사탕발림은 그때가 시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두 풍물시장은 개장 1년도 안 되어서 주변의 대형 매장들에 밀려 손님이 끊기고 망해버렸다.
2003년 말, 정부는 15년 전 처참하게 실패한 풍물시장이란 환상을 다시 불러일으킨다. 서울시는 "청계천 복원공사 과정에서 노점상은 단속하지 않겠다"라는 애초의 약속을 어기고 황학동 벼룩시장 등 청계천 주변의 노점상에 대해 대대적인 철거를 강행하다, 노점상인들의 집단적인 저항과 시민여론에 못 이겨 2004년 1월에 “풍물시장을 유명 관광명소로 만들어주겠다”며 동대문 운동장에 풍물시장을 조성해 9백여 노점상을 입주시켰다. 개장 초기에 평일 3만명, 주말 1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몰려와 동대문 운동장은 관광명소로의 풍물시장이 되는 듯한 인상을 주어, 상인들은 ‘제2의 황학동’에 대한 환상에 젖게 되었다.
하지만 3개월이 지난 2004년 4월, 청계천 복원공사가 끝나면 어떻게 개발될지 모르는 동대문 운동장에 개장한 풍물시장은 노점상인들에 대한 서울시의 사탕발림이었음이 드러난다. 공동수도 10개와 간이 화장실 9개가 전부인 편의시설은 몰려드는 사람들을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지만, 서울시는 그나마 부족한 화장실마저 철거해버렸다. 그리고 몇몇 힘 있는 상인들이 좌판을 수십개씩 차지하여 상인들 내부에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상황이었지만, 서울시는 상인 명부조차 확보하지 못한 채 문제를 그냥 방치하고 있다. 3개월 동안의 반짝 특수를 끝으로 손님은 주변의 대형 쇼핑몰로 빠져나가고 좌판 상인들마저도 하나 둘씩 빠져나가는 상황이 되었지만, “풍물놀이 이벤트를 열 수 있는 무대를 만들겠다”는 상인들의 자구책마저 서울시는 묵살해 버렸다. 게다가, 전기·지붕공사는 상인들이 점포당 70만원씩 거둬서 직접 설치한 것이라고 한다.
현재 30여층의 고층 아파트와 상업시설로의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는 황학동 벼룩시장 일대를 떠나온 상인들은 더욱 근본적인 두려움에 떨고 있다. 풍물시장의 불경기도 고민거리이지만 풍물시장이 존폐의 기로에 서 있기 때문이다. 지난 2월 서울시는 동대문운동장을 동대문 관광특구를 지원하는 복합상업 문화시설로 개발할 계획임을 밝혔다. 청계천 복원사업이 완료되는 오는 10월 전후로 동대문운동장 내 축구장을 민간에 매각하거나 임대해 상업시설로, 야구장은 자체 공원시설로 조성하는 안을 검토 중이라는데 풍물시장의 상인들에 대해선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을까 궁금하다. 2003년 말, 노점상들의 격렬했던 시위가 재연되지는 않을까 우려되기도 한다.
여태까지 풍물시장을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만들기 위해서 서울시가 들인 노력은 길에 있는 노점상을 철거하여 특정 장소에 몰아넣은 것뿐, 다른 어떠한 프로그램이나 전향적인 재정적 지원은 없었다. 보행의 난류를 떠나면 존재가치를 잃는 노점상은 풍물시장의 상인이 되었지만, 그들에겐 보행의 난류를 불러일으킬 힘이 없었다. 서울시는 이러한 약자들에게 어떠한 힘을 실어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풍물시장이 활성화되어 복합 문화시설 건립 계획에 차질을 빚을까 두려워했다.
***비공식 부문의 가치, 노점상의 가치**
노점상은 도시 비공식 부문의 대표적인 형태로서 저소득층의 생계유지를 위한 수단이며 경기불황에 대한 안전망으로서 사회경제적 유연성을 증가시키는 역할을 한다. 물론 GRDP와 세수의 증가를 목표로 최우선의 과제로 삼는 이들에겐 별로 중요치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GRDP 혹은 GNP는 특정 부문을 누락시킴으로써 총 생산 부가가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미 많이 알려진 논의이다. 도시지역에서의 수많은 봉사활동, 바자회, 이웃돕기 등과 농촌지역에서의 품앗이, 자급자족적 경제활동, 농산물 물물교환 등의 경제적 가치를 무시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GNP에서 당연히 제외된다. 특히, 가정주부의 가사활동과 더불어 전국에 1백만개 정도로 어림짐작되고 있는 노점상은 그 부가가치는 그 규모 면에서 무시하기엔 너무나 아까운 부문이다. 가사활동이야 상품거래 행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노점상은 엄연한 상거래의 일종이지 않은가?
서울시가 실업대책으로 시행한 공공근로사업의 효과와 노점이란 상행위를 단순비교해 보자. 1999년 노점환경개선협의회의 추정에 따르면 서울시 전역의 노점상이 15만여 개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구당 평균 인구가 3인이라고 보더라도, 서울시에 노점상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적어도 45만 명에 이른다는 말이 된다. 서울시가 1999년 실업자 대책으로 시행한 공공근로사업에서 3개월 단위로 1만2천여 명의 실업자에게 170억원 가량의 자금을 투입한 것과 비교한다면, 노점상이란 형태의 일자리 창출이 가지는 사회복지 차원의 실질적인 효과를 무시할 수만은 없다. 공공근로사업과 같은 실업대책보다 노점상이라는 저소득층의 자발적인 일자리 창출이 사회적으로 더 건강한 것은 아닐까. 게다가 전국에 분포한 노점상의 수가 1백만이라면 정부는 1백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서 얼마나 큰 자금과 인력을 소요해야 할까? 소상공인 지원센터에서 현재 소상공인창업경영자금으로 개인들에게 지원하는 액수는 최고 5천만원인데, 평균 1,250만원이라고 한다. 1백만 노점상이 사라진다면, 이들에게 지원되어야 할 자금은 (물론 단순 어림짐작이지만) 총 12조5천만원이 된다. 물론 더욱 엄밀한 계산이 필요하겠으나 비공식 부문의 경제적 가치는 이렇듯 무시할 것이 못된다.
***더구나 그들은 보호받아야 할 약자들**
황학동 도깨비시장과 현재 동대문 풍물시장의 상인 중에는 장애인과 노약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노점상이 비교적 자유롭게 펼쳐질 수 있는 이러한 시장은 그들에게 중요한 생계수단을 제공하는 공간으로, 별다른 대책 없이 이러한 공간은 없앨 경우 이들의 생계는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 뻔하다. 그들에게 자그맣게나마 생계를 위한 수단을 제공해주었던 도깨비시장은 그야말로 약자를 배려하는 공간이었다. 황학동 벼룩시장은 겉으로 보기엔 어수선하고 무질서하기만 한 시장으로 보이겠지만, 나름대로 공간을 구획하고 서로를 배려하는 자생적인 질서가 내재한 곳이었다. 좌판의 크기를 제한하기도 하고 어느 선 이상으로 좌판을 펼치지 못하게 하여, 다른 상인들과 보행자를 배려하기도 하였다. 또한 거기서 장애인이나 노약자들에게도 자그마한 공간을 제공하여 조금이나마 돈벌이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하는 곳이었다.
이러한 공간이 토지이용의 효율성이란 가치에 따라 너무나 손쉽게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이 공간에 의해 그나마 안전하게 살아가던 이들에게는 엄청난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그들을 위한 별다른 대책도 강구하지 않은 채로... 대책이 강구될 리가 있겠는가? 애초에 대책이란 명분으로 내놓은 것이 “세계적인 관광명소 동대문 풍물시장”이었는데, 동대문 운동장은 이미 공원으로 개발할 계획이었다. 그리고 재개발 지역처럼 몇 푼의 보상금을 쥐어준다고 해도 그들이 다른 어디를 가서 과거와 같은 배려를 받을 수 있을까? 돈 몇 푼으로 치열하고 냉혹한 경쟁시장으로 내몰릴 경우 그들이 살아남을 확률은 과연 얼마나 될까? 물론 정부는 그나마 돈 몇 푼이라도 쥐어줄 생각이 없지만.
***세계적인 관광명소, 풍물공원!!**
‘세계적인 관광명소’라는 약속이 처음부터 거짓이었다고는 해도 전혀 불가능한 기획은 아니다. 프랑스, 독일 일본 등지에서 자그마한 벼룩시장이 유명한 관광명소로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일본 나고야의 ‘고메효’ 벼룩시장, 독일 프랑크푸르트 마인강변의 벼룩시장, 프랑스 파리의 ‘클리냥크루’와 ‘방브’ 벼룩시장, 스웨덴 스톡홀름의 ‘회토리에트 광장’ 등. 시정부는 수백억원의 자금을 들여 동대문 운동장 일대를 아름다운 공원으로 개발해 동대문 관광특구를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꾸밀 기획은 하고 있는데, 현재 노점상인들을 이용하여 북적북적거리는 세계적인 풍물공원을 만들 기획을 하는 것은 무리일까?
현재 동대문 풍물시장에 입지한 노점상들과 그들의 커뮤니티는 그 자체로 아주 훌륭한 자원이며, 시정부가 최소한의 관리를 하면서 그들의 자생적인 질서와 다양한 흐름들을 살려나간다면 녹음이 푸르른 공원보다 더 정겹고 활기찬 풍물공원이 조성될 수 있지 않을까? 서울시 홈페이지에서 명동의 노점상들을 자랑거리로 삼았듯이, 공원 개발에 투입될 자금의 일부만으로도 서울시의 또 하나의 자랑거리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풍물시장의 노점상들은 그들을 쫓아내지만 않으면 시정부의 어떠한 기획에도 적극적으로 협력할 자세는 되어 있는 듯한데, 시정부는 그러한 동력을 제대로 살려낼 능력이나 의지가 없나 보다.
현재 서울시의 이런저런 개발사업을 보면 약자를 배려할 줄 아는 유연한 공간, 자생적인 공간을 만들기보다는 약자를 배제함으로써 발생하는 막대한 개발이익으로 서울을 더욱더 고급스럽게 치장하려는 인상을 준다. 굳게 박힌 콘크리트 건물은 우리네 삶의 공간을 더욱더 경직되게 할 뿐이다.
필자 이메일: redquito@dreamw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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