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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과 아벨,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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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과 아벨,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뿌리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8>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카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그가 또 카인의 아우 아벨을 낳았는데 아벨은 양 치는 자이었고
카인은 농사하는 자이었더라.
세월이 지난 후에 카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 제물은 열납하셨으나
카인과 그 제물은 열납하지 아니하신지라
카인이 심히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카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은 어찜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찜이뇨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카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그 후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카인이 그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여호와께서 카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가로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창세기> 4장 1절~9절

위의 글은 바로 유명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존 스타인벡(John Ernst Steinbeck : 1902~1968)의 『에덴의 동쪽(The east of Eden)』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람 입에 오르내리고 새로 씌어지기도 했던 주제입니다. 에덴의 동쪽이란 카인이 아벨을 죽인 후 여호와를 떠나 살게 된 땅을 말합니다.

히브리말로 카인(Kayin)은 대장장이라는 뜻이라고 하고, 아벨은 히브리말로 헤벨(Hebel)로 ‘덧없음’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카인은 농기구를 만들어 농사를 짓던 농경민이고, 아벨은 유목민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 설화는 유목민인 히브리인들이 농경민에게 당한 박해를 의미한다고도 하지요.

그러나 살인(殺人)은 인간의 가장 큰 죄(罪)에 해당하는데, 그것이 바로 형제에게 행해졌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요. 그런데 일은 여기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보복이 또 되물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재미있는 것은 자연계에서도 ‘카인과 아벨의 효과’가 있다는 것이지요. 즉 물새는 한 번에 알을 두개씩 낳는데 먼저 알에서 나온 새끼는 나머지 알들을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밀어내버린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어미 새는 그렇게 쫓겨나간 새끼를 그냥 굶어죽게 내버려둔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카인과 아벨의 끝없는 싸움이 2천여년 전 부여와 고구려에서 비롯되었고 만약 그것이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면 여러분 그 기분이 어떻겠습니까?

***(1) 알타이에서 장백으로**

이번 장에서는 예맥을 종합적으로 정리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 쥬신의 모습을 알아가도록 합시다.

저는 앞서 맥(貊)이라는 명칭은 서주(西周) 시대 이후 나타났다가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시대에는 소멸되고, 그 명칭이 요동의 서부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이동하여 동쪽으로는 동해(東海)에까지 이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한(漢)나라 이전에는 마치 맥과 예가 요동을 동과 서로 나누어 차지하는 것처럼 서술이 되다가 한(漢)나라 이후에는 예맥(濊貊)이라는 말을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예맥이라는 종족명은 『관자(管子)』에 처음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때 말하는 예맥은 하북(河北)의 동북부 지역의 거주민을 의미하였습니다. 즉 현재의 베이징으로부터 요동 - 만주 일대에 이르는 지역입니다. 이후 한(漢)나라 때의 문헌 사료에 빈번히 나타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맥이라는 말이 조선이라는 말보다 앞에 나온다는 것이죠.

이 같은 내용을 종합한 이옥(李玉)의 연구에 따르면, 맥족(貊族)이 중국 사서(史書)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B. C. 7세기경인데 이 때 이들의 거주지는 섬서(陝西), 하북(河北)이라고 합니다. 이후 이들은 B. C. 5세기경에 산서(山西), B. C. 3세기경에는 송화강 유역으로 이동한 뒤 다시 남하했다고 합니다(이옥, 『고구려민족형성과 사회』1984).

맥족이 나타난 시기에 대해서는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으나 맥족이 B. C. 3세기경 송화강(흑룡강 최대지류) 유역에서 출현한 것에는 학자들 간에 이견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역이 지난 장에서 보았던 원조(原祖) ‘아리수’ 유역이군요.

그리고 우리말에서 나라[國]라는 말은 강변을 의미하는 (나루[津])라는 말과 어원이 동일하죠? 그리고 이 말은 일본의 ‘나라(奈良)’와 동일합니다. 모두 물가(해변, 강가)와 관련이 있습니다. 특히 일본의 ‘나라’는 바다를 끼고 있지만 그 바다가 마치 큰 강과도 같아서 분위기가 거의 비슷하지요. 그래서 하내(河內), 즉 ‘가와치’라고도 합니다.

[그림 ①] 나라(奈良)의 위치와 풍경(파란색은 현재 지명)

지병목은 소수[小水 : 혼강(渾江)]에 거주하던 소수맥(小水貊)이 구려별종(句麗別種)이라는 말에 주목하여 맥족의 원명은 구려(句麗)이고 이들이 후에 고구려를 건국했다고 합니다(지병목, 「고구려 성립과정고」『고구려사 연구』1995). 북한학자 리준영은 맥족은 고대 중국사서의 고리국(槀離國)의 구성원이며 이 고리국이 바로 북부여이고, 리지린 선생은 이들이 동호(東胡)라고 합니다.

이미 앞서 보셨다시피 리지린 선생은 B. C. 3세기경에 연나라가 동호를 침입함으로써 맥족이 멸망했으며 당시의 잔존세력들이 집단적으로 동부지방 즉 송화강(흑룡강의 최대 지류) 유역으로 이동했다고 합니다. 또 그들이 세운 나라가 고구려이며 그 시기는 대략 B. C. 232년경이라고 합니다. 물론 이 시기에 대해서는 앞으로의 더 많은 연구가 기대되지만 B. C. 3세기경에 원조 ‘아리수’ 지역(아무르강 : 흑룡강)이 새로운 근거지가 된 것은 분명합니다.

이상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맥족은 우리가 지리적으로 알고 있는 동호 지역과 부여지역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에 분포하고 있었고, 이들은 만리장성 북쪽에 주로 거주하다가 한족(漢族)이 강성해지자 지속적으로 동부로 이주하고 있습니다. 이상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 해보면 [그림 ②]와 같이 됩니다.
[그림 ②] 중국 사서에 나타난 맥족의 시기와 장소(숫자는 이동 순서 : 1은 추정)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맥족은 알타이 지역에 거주하던 흉노의 일파로 알타이에서부터 이동한 것으로 생각되어집니다. 물론 이렇게 한 방향이 아니라 일부는 송화강 쪽으로 동시에 내려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제가 [그림 ②]과 같이 표현한 것은 중국의 사서들의 기록에 나타난 이동 경로를 표시한 것입니다(참고로 말씀드리면 알타이에서 동쪽으로 송화강변으로 남하한 사람들은 중국과의 접촉이 없어 기록에 남을 리가 없지요).

그런데 [그림 ②]에서 B. C. 3세기는 대단히 중요한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에 남쪽으로 내려왔던 쥬신([그림②]에서 1,2)이 다시 북쪽으로 옮겨 가서 송화강(흑룡강 최대지류)유역으로 들어가([그림②]에서 3)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알타이에서 남동쪽으로 내려왔던 쥬신들([그림 ③] 참고)과 B. C. 3세기경에 합류합니다. 그래서 비로소 ‘쥬신’이라는 하나의 역사공동체를 형성하게 됩니다. B. C. 3세기가 중요하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한족(漢族)의 압박이 이들의 합류를 촉진한 것이죠. 또 이런 합류의 과정이 ‘단군신화’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도 보입니다. 이것을 그려보면 [그림 ③]과 같이 됩니다.

[그림 ③] 쥬신의 합류

[그림 ③]을 보면 B. C. 3세기에 새로운 역사공동체 즉 ‘쥬신’이 구성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쥬신이 이동하는 과정에서 한족(漢族)의 영향력도 지속적으로 이동해 와서 이 시기에 이르면 요동지역까지 한족(漢族) 사가들이 요동ㆍ만주 지역의 민족들을 일일이 자신의 입맛에 맞게 나누기 시작했다는 것이죠. 사람들은 같은 사람들인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들 한족사가(漢族史家)에 의해 민족이 나눠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부분을 고고학적으로도 간단히 살펴보고 넘어갑시다. 그러면 당시의 사정을 좀 더 소상히 알 수 있으며 [그림 ③]과 같이 기존의 샨시(陝西ㆍ山西) - 허뻬이(河 北) - 베이징(北京) - 요동 방향뿐만 아니라 알타이 동부를 돌아서 흑룡강․송화강으로도 쥬신이 이동했음을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죠.

신석기 때 요서지역에 주로 나타나는 홍산(紅山)문화(4000~3000 B. C.)는 중국 문명인 황하(黃河) 유역의 앙소(仰韶)문화 및 용산(龍山)문화와는 성격이 확실히 다릅니다(흔히 중국인들을 앙소문화의 후예라고 합니다). 홍산 문화에서 나타난 토기는 한반도의 것과 유사한 반면, 중국본토의 신석기 토기 형태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홍산문화는 청동을 사용하는 형태로 발전하여 하가점[夏家店 : 내몽골 적봉(赤峰) 하가점촌] 하층(下層)문화(2000~1500 B. C.)로 이어집니다.

그런데 같은 지역에서 나타나는 하가점 상층(上層) 문화(1000~300 B. C.)는 이전과는 다르게 유목문화의 특징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죠. 즉 이전과는 달리 스키타이 동물문양들이 나타나는 등 유라시아 초원지대와의 교류를 보여주는 많은 유물들이 나타난다는 겁니다. 우리가 앞서 이미 본 비파형 동검은 바로 이 하가점 상층문화에서 나타나죠.

여기서 잠시 봅시다. 일반적으로 하가점 상층문화의 시기와 지역은 동호의 존속기간과 지역이 거의 일치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국인들은 인심을 써서(?) 요동지역은 고조선(古朝鮮)의 문화로 요서지역은 동호(東胡)의 문화로 생각해오기는 합니다만, 제가 보기엔 요서와 요동의 문화적 차이가 무엇이 있는지 알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애초에 동호 = 예맥이라고 한 것이죠. 구체적으로 봅시다.

그 동안의 발굴된 과정에서 나타나는 주요 현상은 돌무덤에서 출토되는 것은 청동검(靑銅劍)과 청동거울 등이 마치 하나의 조를 이루고 있고, 그 합금비율(合金比率)이 한반도·요서·요동 지역 등이 일치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비파형 동검은 동일한 세력의 기술정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들은 결국 하나라는 것이죠.

그리고 한반도 중남부지역에 비파형 동검의 발달된 형태인 세형동검이 나타날 즈음 일본 열도에서는 야요이 문화가 시작됩니다. 이 시기는 연(燕)나라가 세력을 키우면서 고조선을 압박한 때이기도 해서 쥬신의 청동문화가 한반도 - 일본 쪽으로 내려가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조진선, 『세형동검문화의 전개과정 연구』전남대학교 박사학위논문 : 2004) 참고].

나아가 홍산문화 - 하가점 상하층 문화의 특성들(빗살무늬 토기·민무늬 토기·고인돌·비파형동검)은 요서 - 요동 - 만주 - 한반도 - 일본 열도에도 광범위하게 나타나고 있으므로 제가 항상 주장하는 범쥬신(몽골쥬신 - 만주쥬신 - 반도쥬신 - 열도 쥬신)의 영역과도 일치합니다.

B. C. 3세기 이후 형성되는 ‘쥬신’이라는 공동체의 역사적 특성은 ① 매우 복합적이고 다양하지만 유목문화(遊牧文化)의 특성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② 서역의 발달된 문화를 수용하고 한족(漢族)의 문화를 일부 엿보면서도 자신의 고유한 전통 문화(傳統文化)를 견고히 유지했으며, ③ 농경과 유목·수렵·어로 등의 다양한 경제적 기반을 가진 사회나 국가들이 등장했고, ④ 신화(神話)의 경우도 요동과 만주 및 한반도 등을 중심으로 남북방계가 혼합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 등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쥬신의 일부 세력들은 중국 문화에 대한 강한 동경(憧憬)을 요동과 만주ㆍ한반도 땅에 심기도 했다는 점입니다. 이후 쥬신의 역사에서는 일부 세력이 철저히 한화정책(漢化政策), 또는 친한족 정책(親漢族政策)을 수행함으로써 쥬신의 내부에서 갈등을 겪게 됩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는 쥬신족 내부의 갈등이기도 하지만 한족(漢族)들의 이이제이(以夷制夷) 정책의 성공적인 정착과정이기도 합니다. 부여와 반도부여(백제 : 말기는 제외), 요(遼)나라와 북위(北魏), 신라(통일기), 한반도의 조선(朝鮮) 등이 대표적인 경우지요.

고조선 역사를 오랫동안 연구한 유 엠 부찐은 알타이족인 예맥의 구(舊) 발상지는 몽골 알타이와 랑산(狼山) 산맥 사이이며(알타이산맥 부근), 신(新) 발상지는 장백고원(백두산 부근)으로 보고 있고, 그 증거로는 깐수성(甘肅省)의 고분에서 출토된 두개골과 랴오닝성(遼寧省) 적봉(赤峰)의 고분에서 출토된 두개골이 유사하다는 점을 들고 있습니다[유 엠 부찐 『고조선』(소나무 : 1990) 107쪽].

앞서 본 대로 쥬신과 한족(漢族)의 전설적인 대규모 전쟁인 탁록대전(琢鹿大戰 : 연대 미상)으로 쥬신은 요동으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며 요동을 중심으로 번성한 것이 고조선이겠죠? 이후 다시 한나라의 압박으로 동만주로 송화강으로 이동해 간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기록들의 연대를 신뢰하기 어렵지만 치우천황은 청동기에서 철기 시대로 넘어가는 시대의 인물로 보이기 때문에 중국에서 철기가 발달된 시기가 B. C. 5~7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것을 고려한다면 이 시기의 요동의 변화를 충분히 알 수 있죠. 물론 전설상으로는 탁록대전이 B. C. 2000~3000년대의 사건이라고 하는데, 이 시기를 믿기는 어렵겠죠. 물론 과거의 시간 개념은 오늘날과는 많이 다릅니다. 아담(Adam)은 930세에 죽었다고 하지요?

몽골학을 전공한 박원길 교수는 이 맥족의 원래 이름은 ‘코리’라고 합니다. 즉 ‘위략(魏略)’이나[위략에는 고리(槀離 : 중국식 발음으로 읽으면 [까오리])] ‘몽골비사’의 기록처럼, 맥족의 원래 명칭은 모두 코리(Khori)를 음역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몽골은 ‘몽골비사’에서 몽골의 기원이 이 코리족의 일부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사실 몽골 문화 가운데 한국인들과 유사한 것이 많고 외모나 체격 등도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닮았습니다.

윤내현 교수(단국대)도 이와 유사한 견해를 피력했습니다. 현재의 몽골인들의 주류 종족은 보르치긴족이라고 합니다. 칭기스칸을 배출한 종족이죠. 윤내현 교수는 이 보르치긴족이 몽골로 이주해 가기 전 북만주 어르구나하 유역에 거주했던 종족이었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고대 북만주 지역은 고조선의 영토였다는 점에 주목하면 이들은 결국 고조선을 구성한 종족이라는 말이 된다는 것이죠. 이 후 고조선이 붕괴된 후 이 지역은 동부여 영토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보르치긴족은 한민족의 한 갈래이거나 아주 가까운 지역에 거주했던 사람들로 한민족에서 갈라져 나갔을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몽골과 코리족들은 형제, 또는 자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지요(몽골에 관해서는 ‘몽골편’에서 다시 상세히 분석합니다).

***(2) 쥬신의 새벽**

『사기』(흉노전)나 『산해경』에 연나라가 맥국을 쳐서 내몰았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시기는 B. C. 3세기경입니다. 부여와 고구려는 고리국(槀離國)에서 나왔고, 맥국(貊國)은 결국 고리국의 별칭이겠지요(이 고리국이라는 말을 반드시 기억해두셔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쥬신은 ‘고리국 → 부여 → 고구려’라는 건국의 방향이 나타나게 됩니다(물론 이 고리국은 예맥 전체를 포함한 나라는 아니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갑시다. 진수의 『삼국지』(「동이전」) 에 따르면 “예(濊)는 현재 동부에 연한 함경도 지방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합니다(마치 숙신 내지는 읍루로 들리지요?). 즉 예는 남쪽으로는 진한(辰韓)과 북쪽으로는 고구려 옥저 등에 인접해 있다고 하거든요(『삼국지』「위서」東夷傳). 그런데 역시 같은 책 『삼국지』에는 부여의 경우 “나라 안의 오래된 성을 예성(濊城)이라고 불렀다(「위서 東夷傳」夫餘).” 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연구자들은 부여(夫餘)의 국호가 사용되기 전에 부여인들은 스스로를 ‘예’라고 불렀을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과 관련하여 체계적인 기록으로는 가장 처음 나타나는 책이 바로 『삼국지』「위서(魏書)」입니다. 그런데 예(濊)에 대한 기록을 보면 몇 가지의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한번 요약해 봅시다.

첫째, 현재의 지린(吉林)ㆍ하얼삔 일대의 부여도 예(濊)라고 불렀고, 현재의 함경도 지방의 사람들도 예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濊)의 범위가 한반도 북부에서 흑룡강(아무르강)에 이르는 정도로 광대한 영역의 거주민을 나타내는 총칭으로 사용되었다는 말이 됩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 명칭은 말갈이나 물길을 지칭하는 지역의 범위만큼이나 넓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런데 부여(夫餘)는 맥(貊)족이 건설한 나라인데, 또 그들이 과거의 성을 예성(濊城)이라고 했다는 것은 맥족이 예족을 통합했거나, 아니면 하나로 융합되었거나, 아니면 원래부터 같은 민족일 수가 있다는 것이죠. 따라서 부여는 예족과 맥족이 결합하여 형성된 국가라고 볼 수 있겠지요. 현재 남북한의 학자들은 나중에 나타난 맥족이 선주민이었던 예족을 동화ㆍ통합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셋째, 한(漢)나라 때 이후의 기록들은 대체로 예맥족(濊貊族)을 하나의 범주로 두고 있기 때문에 결국 이 예맥족의 활동범위는 함경도에서 흑룡강에 이르는 지역이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바로 예맥으로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림 ④] 송화강의 풍경들

B. C. 3세기경에 흑룡강(黑龍江) 중류(송화강) 지역에서 ‘고리’ 족이 등장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가들이 인정하는 부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몽골은 고리 족에서 분리되어간 종족의 일부로 추정되는데 이 점은 일본의 역사학자 시라토리 쿠라키치(白鳥庫吉)의 연구와 일치합니다[시라토리 쿠라키치는 몽골-고구려-탁발선비(타브가치)의 원주지가 흑룡강(黑龍江) 중상류 일대인데다가 그들의 언어가 매우 유사하다는 점을 고증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 일대에서 많은 관련 유적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점은 몽골 부분에서 다시 다루겠습니다].

그리고 『몽골비사』의 기록을 보면 고리족의 이동과 고리족의 일파인 몽골의 이동로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몽골은 이후 4세기 후반 북위를 건설하고 11~12 세기 경 흑룡강(黑龍江) 상류(오논강 : Onan)까지 진출했으며 13세기에 크게 발흥합니다(박원길,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역사와 민속』 55쪽).

따라서 흑룡강을 포함한 만주 전체 지역과 요동 및 한반도 북단의 지역민들을 중국인들은 예맥(濊貊)이라는 불렀다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알타이에서 남진한 흉노의 일파 가운데 하나인 맥족은 한족(漢族)과의 끊임없이 투쟁하면서 요동과 만주로 밀려가 동북지방에 산재하고 있던 부족들과 융합하여 예맥이라는 민족으로 거듭나고 일부는 국가체제를 갖추어 갔을 것이라는 말이죠(그리고 앞에서 우리는 동호·선비 등과 예맥이 구분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림 ⑤] 함경도에서 하얼삔까지

예맥은 경우에 따라서 예로, 또는 맥으로 되어있기도 하는데 이것은 아마도 이 예맥이 워낙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동북아시아의 정치적 상황(초기 쥬신의 역사)은 아래와 같이 진행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지요.

① 맥족은 고리국을 건설 - 맥국의 별칭이 고리국(?~?).
② 고리국의 일부 세력이 분파되어 부여(?~494)를 건설 - 예맥의 융합.
③ 부여국의 일부 세력이 남쪽과 서쪽으로 이동 .
④ 남쪽으로 이동해 간 예맥족은 일찌감치 고리국(고구려 : ?~668)을 건설.
⑤ 서쪽으로 이동해 간 예맥족은 북위(北魏 : 386~535)를 건설.
⑥ 북위를 건설한 예맥의 일부가 후일 몽골제국(1271~1368)을 건설.

다시 한 번 상기해봅시다. 한(漢)나라 때 고조선(요동지역)을 맥족과 동일하게 보고 있고 후한(後漢) 대에서는 이르러서는 고구려(백두산 부근)를 맥과 동일시(『後漢書』4 「和帝紀」)하고 있죠? 그런데 “부여(夫餘)는 본래 예(濊)의 땅(『後漢書』85 東夷傳)”이라는 부분들을 생각해보면 제가 드리는 말씀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죠.

그런 기록들을 제외하더라도 건국 신화에서 보듯이 고구려와 부여는 하나의 갈래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죠. 다만 고구려와 부여는 같은 예맥족이라도 신·구세력간의 갈등이나 거주 지역의 차이로 인하여 국가의 성격이 다른 형태를 띠게 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면 이제부터는 오늘의 주제 ‘카인과 아벨’ 그 끝없는 보복의 세월들, 즉 고구려와 부여의 천년의 악연(惡緣)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3) 카인과 아벨 -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뿌리**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우선 부여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봅시다. 부여는 고조선·고구려 등과 상당기간 공존하면서 예맥문화권을 유지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합니다. 한(漢)나라 때 예맥을 고구려와 부여를 지칭하는 말로서 사용했습니다. 고구려와 부여는 그 점에 있어서 단순히 요동의 국가라고만 보면 안 되지요. 왜냐하면 부여와 고구려는 쥬신족들에게 있어서는 ‘역사의 호수(湖水)’ 같은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한(漢)나라가 중국사의 호수이고 로마가 유럽사의 호수였듯이, 쥬신의 역사에 있어서도 고구려와 부여는 예맥이 모두 거쳐 가는 하나의 호수였습니다. 로마의 역사와 다른 점은 고구려와 부여는 끝없이 계승되어왔다는 것이죠. 여기서는 일단 부여만 간략히 보고 넘어갑시다.

『삼국지』의 부여전(夫餘傳)에 따르면 부여의 위치는 다음과 같습니다.

“부여는 장성(長城)의 북쪽에 있고 현도(玄免)에서 천리가 떨어져 있다. 남으로는 고구려와 접해있고 동으로는 읍루(挹婁), 서로는 선비(鮮卑)와 접하여있다. 북으로는 약수(弱水)가 있고 지방은 2천리가 되며 호수(戶數)는 8만이다.”

부여의 터전은 대체로 현재의 눙안(農安)에서 하얼삔(哈爾濱)에 이르는 지역으로 보이고 약수는 송화강으로 추정이 됩니다. 특히 현재의 하얼삔 바로 남쪽에 위치한 쏘앙청(雙城) 아래에 금나라의 발상지인 아르추꺼(阿勒楚喀)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대체로 그와 같이 추정할 수 있는 것이지요. 『삼국지』에 나타난 부여에 대한 평가는 비교적 긍정적입니다.

[그림 ⑥] 만주대평원

부여와 비교해보면 고구려에 대한 중국 사서들의 평가는 형편없습니다. 물론 고구려가 중국의 북방에서 강대한 세력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특히 쥬신족에게 밀려서 양쯔강 남쪽으로 밀려간 한족(漢族)의 남조(南朝 : 동진ㆍ송ㆍ제ㆍ양ㆍ진 : 317~589) 국가들의 입장에서 고구려는 매우 두렵고 성가신 나라였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삼국지』위서(동이전)에도 보면 고구려는 좋은 밭이 없어 농사를 지어도 식량이 부족하고 “성질이 사납고 약탈과 침략을 좋아한다.”고 합니다. 『남사(南史)』「열전(동이 고구려)」에도 “사람들이 흉폭하고 성질이 급하며, 노략질을 좋아하고(人性凶急喜寇) 풍속은 음란(其俗好淫)하며,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한다(兄死妻嫂)”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석은 농경민들의 시각을 반영한 것으로 보입니다. 즉 형사취수(兄死妻嫂)는 농경민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겠지만, 유목민들에게는 불가피한 경제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에 대한 서술은 부여와 비교해볼 때 매우 신랄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부여에서도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데, 이것은 흉노의 풍습”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의 경우에는 여러모로 사납고 음란(淫亂)하게 묘사되어있습니다. 아마도 고구려가 이주해간 지역이 평야지대가 없는 산악지대라서 식량을 자급하기 힘들자 주변지역을 정복하기 시작한데서 이 같은 평가가 나왔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고구려가 부여를 기반으로 형성되었다고 해도 고구려와 부여가 서로 다른 입장에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농업과 목축을 동시에 할 수 있었던 부여와는 달리 대부분 산악지대였던 고구려는 일찍부터 전쟁을 통한 식량의 확보라는 국가정책 방향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그러나 오히려 이 같은 특성으로 말미암아 고구려가 동북아의 패권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같은 계열의 종족이라도 고구려의 성장은 부여로서는 위협적일 수밖에 없어 부여는 고구려나 주변 민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중국의 정부들과 긴밀히 협조하였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고구려와 부여의 싸움은 이후 수백 년, 아니 천년 이상이나 계속되는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뿌리라는 것입니다. 부여는 고구려와의 대립에서 패배하지만, 다시 반도부여[백제(百濟)]로 통합되어 고구려와 처절한 동족상잔의 전쟁을 계속합니다.

고구려의 천년의 적인 부여는 346년 전연의 침입으로 사실상 와해되었고, 410년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자 영락대제(광개토대왕)는 부여를 대대적으로 정벌합니다. 결국 이름만 남아있던 부여는 494년 고구려에 의해 패망합니다. 6세기 이후 더 이상 공식적으로 부여는 존재하지 않지요.

쥬신의 역사에서 가장 치열한 형제간의 싸움은 부여와 고구려의 싸움입니다. 그것을 단적으로 증명해주는 것이 반도부여(백제) 왕들의 전사(戰死)입니다. 고려나 조선시대를 보면 국왕(國王)이 전사한 경우는 없지요. 그런데 백제는 사정이 다르죠.

반도부여(백제)의 책계왕(責稽王 : 재위 286~298)은 고구려가 대방군을 공격했을 때 군사를 보내 대방을 돕자, 고구려가 이에 대해 분개하였고 298년 낙랑군과 맥인(貊人)이 쳐들어와 피살됩니다. 책계왕의 아버지는 고이왕(古爾王)이고, 왕비는 대방왕의 딸이었습니다. 이 점은 앞으로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부분인데 ‘백제편’에서 상세히 살펴보지요(古尒薨, 卽位. 王徵發丁夫, 葺慰禮城. 高句麗伐帶方, 帶方請救於我. 先是, 王娶帶方王女寶菓, 爲夫人. 故曰 帶方我舅甥之國, 不可不副其請. 遂出師救之, 高句麗怨. 王慮其侵寇, 修阿旦城․蛇城, 備之 十三年, 秋九月, 漢與貊人來侵, 王出禦, 爲敵兵所害, 薨. : 『삼국사기』「백제본기」).

그리고 책계왕을 이은 분서왕(汾西王 : 재위 298~304)도 낙랑태수의 자객에 의해 살해됩니다(七年 春二月, 潛師襲取樂浪西縣. 冬十月, 王爲樂浪大守所遣刺客賊害, 薨). 이에 맞서서 반도부여(백제)의 복수전도 치열하게 전개되어 결국은 반도부여(백제)의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입니다. 그렇지만 또다시 개로왕(蓋鹵王 : 재위 455」475)은 장수왕에게 도성이 함락당하고 피살됩니다. 개로왕은 고구려의 압박에 대하여 외교적인 노력으로 이를 극복하려고 시도합니다. 개로왕은 위나라에 조공을 하며 고구려를 토벌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위나라가 들어주지 않자 조공을 끊기도 합니다.

보세요. 국왕이 죽는 일 자체가 일어나기 힘든 일인데 그 대부분이 고구려와의 전쟁, 또는 복수전에서 비롯되고 있지요?

다시 생각해봅시다. 왜 형제간의 투쟁이 이토록 치열할까요? 사실 따지고 보면 이들은 형제들인데 말이죠. 왜 이 기나긴 카인과 아벨의 싸움이 계속될까요? 물론 그 경제적 기반의 차이라든가, 같은 지역에서 서로 경쟁관계(競爭關係)에 있기 때문이겠지요.

그러면 이제 고구려와 부여의 실제적인 상황을 그 내부에서 좀 더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부여나 고구려의 건국 신화에 따르면, 부여는 북방의 고리(槀離)라는 나라에서 나왔죠? 고리국의 왕의 하녀가 하늘의 아들을 낳았는데, 그 이름이 동명(東明)이었죠. 그런데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습니다. 고구려의 시조는 주몽인데, 그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따님이었죠. 그러다가 주몽은 부여의 핍박을 받아서 부여를 탈출하여 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위서』에 따르면, “부여 사람들은 주몽이 역심을 품을 수도 있으니 주몽을 죽이자고 청하였으나 … 부여의 신하들이 주몽을 죽이려하자 주몽의 어머니는 ‘이 나라 사람들이 너를 죽이려하므로 너는 지혜와 재주가 있으니 멀리 다른 곳으로 가서 업을 도모하도록 해라’라고 했다(『위서』「고구려전」).” 라고 합니다.

사정이 이러니 고구려와 부여의 사이가 좋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하죠.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지만 부여를 가장 싫어할 수밖에 없겠지요. 여기서 고구려가 부여에서 나왔지만 부여와 등을 돌리고 스스로 고리(고구려)라고 한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봅시다.

신화상으로 보면 고리국(槀離國 : Kohri)에서 부여가 나온 것이고 그 부여에서 다시 고구려가 나왔지요. 즉 A(고리) → A'(부여) → A"(고구려 = 고리국) 라는 형태가 됩니다.

부여는 물론 고리국과 사이가 좋지 않을 것입니다. 갈등이 심하니 그 곳에서 뛰쳐나왔겠지요.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부여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요? 제가 말씀드렸다시피 고구려가 부여로부터 떨어져 나간 것은 신·구세력의 갈등과 같은 것이라면 엄밀한 의미에서 부여와 고구려는 치열한 경쟁 관계에 있죠?

그렇다면 고구려는 원래 부족으로 돌아가서 자기들이 고리국의 정통성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것이 오히려 부여를 제압하는 더 큰 논리가 되는 것이죠. 왜냐구요? 사실 따지고 보면 모두가 다 고리국의 일파이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고리국으로 회귀하는 것이 오히려 더욱 강력한 정통성을 가질 수 있게 하는 힘이 될 수 있겠지요.

고리국을 축으로 하여 고구려와 부여의 싸움이라는 것도 결국 이 싸움이지요. 그래서 신화도 공유(共有)하는 것이고, 그 정통성을 차지하기 위한 극렬한 투쟁이 진행됩니다. 마치 호랑이가 개보다는 고양이를 더욱 미워해서 잡아 죽이듯이 말입니다. 『삼국지』에서 원소(袁紹)의 부인(유씨 부인)과 그 아들 원희(袁熙)가 원소의 여러 명의 첩들과 그 첩들의 자식들을 죽여서 얼굴을 짓이기는 등 필설로 하기 힘든 잔인한 짓을 한 기록들이 남아있습니다(김운회,『삼국지 바로읽기』삼인 참고). 이런 극심한 갈등과 악행(惡行)의 원인은 이들이 서로 경쟁관계에 있기 때문이죠.

사자(lion)는 사회적 동물로 그 무리가 4마리에서 40여 마리 정도라고 하는데 암컷을 중심으로 사회를 유지합니다. 그런데 우두머리 수컷사자가 바뀌게 되는 과정에서 암사자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지요. 새로 외부에서 들어온 수컷사자는 이전의 다른 수컷들의 자식들을 모두 죽여 버리기 때문이죠. 이것은 장기적으로 자신의 안정된 지위를 확보하고 자신의 유전자(새끼)를 좀 더 안정된 환경에서 자라게 하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지요. 이것은 가까운 사이에서의 경쟁관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종교도 그렇지 않습니까? 종파(宗派) 내에서 서로 이단시(異端視)해서 싸우는 싸움이 그 종교와 다른 종교와의 관계보다도 더 극렬한 것을 말입니다. 주변을 돌아보세요.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러나 이 같이 치열한 경쟁관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동질적인 집단은 그 무의식 내부에 하나로 통합(統合)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하나[統一]’가 되고자 하는 열망이 강할수록 싸움이 치열해지는 것이죠. 만약 이질적인 집단이라면 통합해도 그 이질성(異質性)으로 말미암아 오랫동안 존속하기가 어렵지요. 그러나 동질적인 집단은 합쳐짐으로써 ‘시너지 효과(synergy effect)’가 나타나 안정성(安定性)과 생존율(生存率 : 외부환경에 효과적으로 대처)이 높아져 훨씬 더 오래 존속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합쳐지려는 본능(本能), 좀 더 고상하게 표현하면 보다 높은 하나로 통합하려는 의지(意志)가 동질적인 집단 내부에는 있다는 말이지요.

생각해봅시다. 역사상 한국전쟁(1950년)만큼 형제 자매간에 벌어진 잔인한 살육은 없었다고 제가 말씀드렸죠? 그 말은 결국 한국인들의 하나로 통합하려는 의지가 역사적으로 가장 강했다는 말이 됩니다. 즉 카인과 아벨이니 더 치열하게 싸운다는 것이죠.

결국 부여는 고리국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이를 벗어나 중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보다 발전된 문화를 습득하는 한족화(漢族化) 정책을 시행한 반면, 고구려는 고리국의 전통을 중시하여 반한족적(反漢族的)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그래서 부여가 철저히 친한족적(親漢族的)인 정책을 추진했었다면, 고구려는 철저히 쥬신적인 전통을 고수한 나라였습니다. 이때부터 벌써 소중화주의(小中華主義)가 시작된 셈이라고 볼 수도 있겠군요. 그래서 이 두 나라는 결코 화해할 수 없는 길로 가고 있습니다. 쥬신의 비극(悲劇)도 태동하고 있는 것이죠.

이 처절한 동족상잔이 시작될 즈음 중국은 어떻게 이들을 요리했을까요? 이제 그 점들을 살펴봅시다. 먼저 『전한서』의 기록(「왕망전」)을 한번 보시죠.

“왕망이 고구려를 징발하여 오랑캐들을 정벌하려고 하였는데 고구려인들이 이에 따르지 않았다. 이에 따라 고구려인들을 강박하자 그들은 오히려 요새 밖으로 달아났다. … 요서(遼西)의 대윤(大尹) 전담(田譚)이 이를 추격하다가 오히려 피살되었다. 주군(州郡)에서는 이 모든 책임이 고구려후(高句麗侯)인 추(騶)에 있다고 하였다. 엄우(嚴尤)가 아뢰어 말하기를 ‘맥인(貊人)이 난동을 피우는 것은 역심이 있어서이니 이를 평정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부여의 무리들은 유순하지만 흉노는 아직도 정벌하지도 못하였고 부여ㆍ예맥이 다시 활동하면 큰 우환거리가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왕망은 이를 따르지 않았고 예맥이 큰 반란을 일으키자 엄우에게 명하여 이들을 정벌하게 하였다. 엄우는 고(구)려후 추를 유인하여 오게 한 후, 추의 머리를 베어 장안에 전하였다.”[『전한서』권 99 「왕망전」, 始國四年]

위의 기록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 왕망이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고구려군을 동원하려고 했다는 사실입니다. 중국의 전통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 전술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둘째, 예맥을 고구려를 지칭하는 말로서 사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은 바로 “부여ㆍ예맥”이라는 부분입니다. 이 말은 쥬신 역사의 여명을 밝히고 고구려를 예맥으로 불렀던 증거의 하나가 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비밀(秘密)이 숨겨져 있습니다.

즉 우리가 보아온 대로 부여는 예맥이 이룩한 국가인데 부여를 예맥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있지요?

중국인들은 예맥을 동북쪽 오랑캐의 범칭으로 사용하다가도 일단 분명히 구별되는 국체(國體)가 형성되면 그것을 그들의 민족으로 분리시켜 하나의 민족으로 새롭게 분류하는 것이죠. 이것은 예맥족의 문제가 아니라 중국인들의 예맥족에 대한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여기에 대부분의 비중국계(非中國系) 사가(史家)들, 특히 어설픈 한국(韓國)의 사가들이 지적(知的)으로 농락당하고 말지요. 이것은 고도의 정치적 술수와도 연결이 됩니다. 이 점들을 한번 살펴봅시다.

일찌감치 국가체제가 발달한 중국의 경우에는 교섭당사자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느 부족이든지 국가 체제를 갖춘 민족을 분명히 하여 교역이나 조공관계를 확립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이지요. 국가체제를 갖추지 못한 사람들은 이들과 분리시킴으로써 ‘분할 통치(divide & rule)’의 효과를 노릴 수도 있습니다.

즉, 이미 만들어진 국가와 같은 민족(같은 민족이나 국가를 만들지 못한 상태로 유목생활을 하는 사람들)들과의 관계를 불편하게 만듦으로써 동족(同族)간의 갈등을 유발하여 한족(漢族)의 안전(安全)을 보장한다는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고구려 - 부여라는 것이지요.

『삼국지』시대에는 위나라가 요동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기 때문에 요동 땅은 사실상 공손씨의 독립왕국이었습니다. 공손씨는 나라의 안정을 위해 지속적인 대비를 하는 한편으로는 고구려를 공격하여야 했는데 이 때 부여를 협력 파트너로 삼았습니다. 부여는 이후에도 조조(曹操)의 위(魏)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도 적극 협력합니다. 이것은 같은 민족이라도 정치적인 변화나 역학관계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중국을 축(軸)으로 하여 말이지요. 현재 한국과 일본의 관계도 마찬가지지요.

결국 고구려 - 부여의 영역을 합하여 고찰해보면 대체로 압록강-두만강을 중심으로 하여 북으로는 흑룡강(송화강) 이남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소싱안링 산맥과 압록강 - 두만강에 이르는 지역은 대부분 산지이므로 경제활동에 매우 어려운 지역인 반면 현재의 하얼삔 - 쏘앙청 - 아르추꺼 등지에서 북으로는 치치하얼(齊齊哈爾), 남으로는 푸순(撫順)에 이르는 곳은 광대한 만주대평원(동북평원)이 있어 민족통합을 달성한 종족들이 강대해지는 것은 시간문제라는 점이지요. 그리고 이것은 중국 역사의 가장 큰 변수로 변환됩니다.

이제 예맥이 어떤 사람들인지 이해가 되십니까? 결국은 몽골ㆍ만주ㆍ한국ㆍ일본 등의 뿌리가 되는 민족입니다. 바로 범쥬신, 또는 원쥬신이죠. 이제는 다시 예맥만큼이나 안개 속에 갇혀 있는 숙신(肅愼)을 찾아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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