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한국에서는 개발사업의 열기로 전국이 들썩거리는 중이다. 행정복합도시, 혁신도시, 산업 클러스터, 기업도시. 정부에서 쏟아낸 굵직한 사업만 해도 한 무더기고, 뉴타운, 도시개발사업, 산업단지, 관광 리조트, 골프장 등 지자체 스스로 추진하는 사업까지 더하면 그야말로 ‘전국이 공사장’이라는 표현이 우스갯소리만은 아닐 듯하다.
각 지역의 개발사업 열기는 올해 더 뜨거워질 것 같다. 내년 6월에는 각 지자체의 수장과 지방의회 의원을 뽑는 지방 선거가 있기 때문이다. 언제나 그렇듯, 선거철이 다가오면 각종 개발사업의 유치 및 추진을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지자체장의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뉴타운! 레저 타운! 행정타운! 첨단산업단지! 이름만 들어도 멋지지 않은가. 홍보 포스터에 들어간 굵직한 개발사업 목록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시장님이 지역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셨다는 느낌이 들 수도 있겠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의 수많은 잡음에도 불구하고, 뉴타운, 균형발전촉진지구, 청계천 복원 등 굵직한 사업들을 뚝심으로 밀어붙인 서울시 이명박 시장이 ‘일 많이 한 시장’으로 칭송받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기업도시를 둘러싼 지방자치단체의 뜨거운 유치전은 그런 지자체장의 심경을 내비치고 있는 것 같아 흥미롭다. 올해 4개 시범지구를 정하기로 한 기업도시에는 2005년 5월 현재, 모두 8개 지자체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재미있는 것은, 유치를 희망한 일부 지자체에서는 실물 생산기업이 아닌 건설회사나 신설된 개발회사가 주요 참가 기업으로 올라 있다는 것이다. 기업 도시의 목표가 오랫동안 지역에 이바지할 생산 기업을 유치하는 것임을 떠올린다면, 일부 지자체에서 추진하고 있는 기업도시는 그야 말로 앙꼬 없는 찐빵, 기업 없는 기업도시인 셈이다.
물론 그런 지자체의 노력이 너무 극성스럽다거나, 필요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자체 재원과 인력이 모자란 지방자치단체에게 기업도시나 정부 공공기관 같은 외부 자원의 유치는 무척 매력적일지도 모른다. 특히, 택지개발사업 하나만 결정돼도 지역 토지가격이 확 뛰는 현실에서 기업도시나 뉴타운 같은 대형 개발사업의 유치가 지역민에게 미치는 정치적 효과는 무척 크기 때문에, 지자체장들은 대부분 개발사업을 시행하고 싶어 한다. 지방선거를 1년 앞둔 지금은 더더욱 그렇다. 기업 없는 기업도시나마 여러 도시가 유치전에 뛰어 들고, 서울시에서처럼 뉴타운 사업 같은 대형 개발에 동참하려 구청장들이 발 벗고 나서는 이유다.
필자의 고향인 모 시에서도, 그런 대형 개발사업들이 제안되어 진행되고 있다. 작년에는 3만평 남짓한 아파트 단지가 문을 열었고, 30만평에 이르는 대규모 택지개발사업이 몇 년 후면 완공될 예정이다. 아파트 단지 건설에 맞춰 서울시와의 연결 도로도 크게 확장되었고, 얼마 후면 경전철도 들어선다. 한강 근처에 생태공원을 조성하고, 벤처단지를 짓는 것도 현직 시장님의 주요 역점 사업이다. 아마도, 위에 열거한 사업들은 내년 지방선거에서 현 시장의 주요 업적으로 제시되어 다시 한 번 시장직을 맡아야 하는 이유로 쓰일 것이다.
저렇게 많은 일을 하셨으니 당연히 내년 선거에 현 시장님께 한 표를 던져야 하겠지만, 무엇인가 찜찜하다. 시장님이 추진하신 여러 사업들이 시청 홈페이지를 멋지게 채우고 있지만, 시장님이 우리 지역을 위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마음 깊이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대규모 아파트 단지도 들어서고, 예전에는 없었던 높은 건물도 하나둘 늘어가고, 시의 발전을 상징하는 대형 공사 현장도 여기저기 볼 수 있지만, 사실 내 삶은 그다지 변한 것이 없다. 여자 친구와 맘 편히 거닐며 이야기할 곳 찾기는 여전히 어렵고, 자전거 탈 때는 차도에서 좌우 두리번거리며 자동차와 경쟁해야 한다. 영화 한 편 보려면 버스로 30분 떨어진 서울까지 나가야 하고, 홈페이지를 열심히 뒤지지 않으면 시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아내기도 어렵다. 마을 문화행사라도 있으면 동네 주민들과 안면이라도 트련만 그런 기회도 거의 없다. 현 시장님의 취임 전과 별다르지 않은 풍경이다. 물론, 현 시장님은 억울할 수도 있다. 대규모 개발사업을 유치해 재임기간 인구도 늘었고, 세수도 늘었고, 번듯한 고층 건물도 많아졌으니 나름 열심히 일했다고 항변하실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4년간 시의 살림을 다시 맡기기에 충분할까?
멋진 시장님이 되기 위해, 꼭 각종 국책사업이나 개발사업을 여럿 유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적 효과는 크지만, 대규모 개발사업이 지역 주민의 삶에 미치는 실제 효과는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아파트 건설사업에서 보듯, 개발 사업의 실패는 세금이라는 형태로 비용이 고스란히 시민들에게 돌아오지만, 성공의 과실은 몇몇 기업이나 유지들에게 집중되기 쉽다. 개발사업으로 인해 지역 원 거주민들이 밀려난 자리가 외지인들로 채워지는 경우도 많다. 오히려, 나 같은 소시민들은 ’아파트 사업 착수! 산업단지 유치‘같은 딱딱하고 메마른 사업 구호가 아니라, 지역을 위해 헌신하는 시장님의 땀과 열정이 인간적인 매력으로 다가올 때 ’시장님 멋져‘를 외치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그러한 열정의 전달 매체가 꼭 대규모 사업이 될 필요는 없음을 우리 시장님들은 모르고 계신다는 데 있다.
얼마 전 경기도 부천시의 행정 아이디어를 모은 책자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주민의 불편과 요구사항을 파악하고, 생활 속의 작은 아이디어로 이를 개선함으로써 보다 좋은 도시를 만들려는 시도를 담은 책이었다. 정수장 저수탱크에 기조성된 잔디밭을 축구장으로 활용하고, 시간이 없어 영화를 못 보는 주민들을 위해 차량에 대규모 스크린을 설치해 이동하며 영화를 상영하고, 지역 문화공간을 조성하기 위해 주말이면 차 없는 거리에서 문화행사를 개최하고, 시청 앞 주차장과 로비를 청소년을 위한 농구장과 인라인 스케이트장, 각종 전시회장으로 활용했다는 아이디어들! 이러한 아이디어에 꼭 많은 돈과 인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지역의 현안을 파악하는 눈과 귀, 그리고 아이디어를 모색하는 정열과 약간의 융통성만 있다면 충분히 시민에게 감동을 주는 멋진 도시 행정을 펴나갈 수 있다.
나아가, 임기 내 진행하는 시장님의 아이디어와 업적들은 연속적인 하나의 선을 그려야 할 필요가 있다. 도시 행정의 ‘철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선’은 지역 주민들이 시장의 도시 경영 비전을 더 잘 이해하도록 돕고, 시에서 추진하는 각 사업들이 필요한지 그렇지 않은지, 또는 사업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평가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각 지역에서 열심히 활동하시는 시장님들 또한 나름의 비전을 갖고 계시지만, CEO 도시경영, 지역발전, 환경·생태, 문화·예술 등 유행하는 개념들이 종합선물세트처럼 들어 있는 그 비전에는 명확한 방향성도 없거니와 진한 사람 냄새가 나지도 않는다. 비전을 따라가면, 지역 주민이 도시의 주인으로서 대접받고 공동체의 일원으로 서로 훈훈한 인정을 나누는 따뜻한 사회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인지 확신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브라질에는 뽀르뚜 알레그리(Porto Alegre)라는 도시가 있다. 1988년 시장 선거에서 좌파 성향의 노동자당이 집권하면서, 뽀르뚜 알레그리에는 시정 방향에 큰 획을 긋는 방향전환이 일어났다. ‘참여 예산제’라 불리는 정책이 도입되면서, 시의 예산 수립권한이 주민들에게 이양된 것이다. 참여 예산제 하에서, 뽀르뚜 알레그리의 각 마을 주민들은 마을 회의를 개최하여 마을에 무엇이 필요한지 논의하고, 결정된 사항들은 보다 큰 단위인 지구(서울시 각 구 정도의 위계)별 주민 회의에서 주민 대표자들이 다시 다루게 된다. 이는 다시 1년을 임기로 하는 주민 평의회(서울시 차원의 주민의회로 생각하면 된다)로 상정되고, 주민 평의회에서는 각 지역 대표자들의 투표와 지역별 인구 및 시설 현황 등을 고려해 다음해 각 지역에 지출할 시의 예산안을 짜게 된다. 주민들이 스스로 자기 지역과 다른 지역의 현안들을 고려하여 시 전체의 살림살이를 어떻게 꾸려갈지 결정하는 것이다. 주민에 의한 예산수립과 적극적인 시정참여, 주민의 도시의 주인이라는 이 원칙은 1988년 이래 뽀르뚜 알레그레 시정부의 도시 경영 ‘철학’으로 자리 잡았고, 이후 노동자당이 내리 세 번 도시를 경영하도록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쿠바 아바나시에서 도시 경영의 근본 철학은 ‘공동체’다. 아바나시의 유명한 도시 유기농업은 우리나라 동사무소에 해당하는 콘세호 퍼프랄을 중심으로 도시 내에 확산되었다. 국유지의 대여, 유기농법 교육, 각종 농업 재료 판매소 개설, 농산물 직판장 설립 지원 등이 모두 콘세호 퍼프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지역 공동체 중심으로 도시 농업을 장려한 결과, 아바나시 각지에서 생산되는 유기농 제품들은 대부분 싼 가격에 지역주민들에게 팔리거니와 농산물의 일부는 학교, 양로원 등에 무상으로 기부된다. 장거리 수송이 필요없는 효율적인 직거래 체제가 갖추어지고, 약자를 돕고 사는 훈훈한 인정이 그대로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농업 외에도 의료 및 교육 사회복지를 공동체, 즉 커뮤니티 중심으로 이끌어나가는 것이나, 주민 간담회, 연구 토론회, 주민 행동 계획의 작성 등 주민들을 중심으로 커뮤니티를 재생함으로써 지역경제를 활성화한다는 전략은 공동체를 근간에 두는 아바나시의 도시 운영 철학을 잘 보여준다.
이제 1년 후에는 지방 선거가 실시된다. 아마도 마음속에 담고 있는 멋진 시장의 조건은 각자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게는 개발사업 시행 외에는 별달리 능력과 의지를 보여주시지 않은 현재 시장님들의 모습은 아무래도 아쉽게 느껴진다. 정치적 효과를 노리는 손쉬운 사업만을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뚜렷한 경영 철학과 끊임없이 노력하는 열정을 가진 진짜 ‘멋진 시장’의 모습을 보고 싶기 때문이다. 대규모 개발사업이 아니라 지역 주민의 소소한 삶의 모습에 신경 쓰고, 지역유지·건설회사가 아닌 지역 공동체 살리기에 뜻을 두는 그런 시장의 모습을 다음에는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궁금하다. 4년간 시의 살림꾼이 되어 지역을 위해 그리고 주민을 위해 열심히 일하겠노라고 나선 이에게, 시의 수십만, 수백만 인구를 이끌어 나가야 할 이에게, 이는 과한 요구일까?
***공간연구집단 소개**
공간연구집단은 우리가 살 맛 나는 공간을 만들겠다는 소박하지만 강한 희망을 공유하고 있는 모임입니다. 기존의 공간 담론들이 사회의 특정 집단들의 배타적 이익을 숨기기 위해 이용되는 것에 반대하고,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학문을 탐구하기 위해 결성되었습니다. 현재 도시계획·도시설계·건축·지리학 등의 전공자가 모여 있지만, 각 학문이 쌓고 있는 장벽과 지식인들이 늘어놓은 어려운 말들을 넘어서서 즐겁게 살기 위한 말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사진> 첫번째는 한국의 아파트공사장 @프레시안
두번째 브라질 뽀르뚜 알레그리시의 주민예산회의 모습
세번째 쿠바 아바나의 도시농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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