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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죠

[김운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찾아서']<2>

제 1 부
돈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죠

제 1 장. 역사의 종언(終焉)

□ 돈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죠


최근에 중국을 대표하는 유명 배우와 차기 중국 지도자감으로 지목되던 전도유망한 정치가의 스캔들이 크게 보도되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습니다. 이 여배우는 출국금지 조치까지 당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했는데, 보도에 따르면 하룻밤 잠자리 대가가 최대 1000만 위안(한화 약 18억 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10여 차례 이상 있었다고 하니 이른바 웬만한 기업보다도 많은 수익을 창출했겠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이런 정도는 아니지만 간간히 들려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사랑이 아니겠죠? 비즈니스라면 비즈니스겠지만 인간 사회의 불합리성을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보도에 따르면 이 여배우는 평소 대여섯 명 이상의 거물급 재벌인사와 스캔들이 있었다고도 합니다.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어떤 부자가 여자를 돈으로 유혹하여 애인으로 삼았는데 늘 "나는 당신을 사랑해. 진심으로 사랑해. 나만 사랑하고 기다려 주면, 아내가 되게 해줄께."고 하면서도 제대로 살만큼 돈을 주지 않고 립서비스(Lip Service)만 한다고 해봅시다. 이 여자가 과연 남자의 말만 믿고 그대로 있어야만 할까요? 가끔 심술이 나서 한 번씩 관계를 공개할라치면 또 다가와 사랑의 밀어(蜜語)를 늘어놓으면서, "조금만 참아라."고 한다면 어느 정도는 견디겠지만, 오래가기는 어렵지요. 그런데 문제는 이 부자가 부동산 투기를 잘못하고 주식투자에서 큰 손실이 나서 살림이 거덜이 났다면 어떻게 될까요?

오늘날 선진국 - 후진국의 관계가 이런 것은 아닐까요?

다행히 한국은 어떻게 잘 벗어났습니다만 대부분의 후진국들은 거덜난 살림에 돈이 나올 구석은 없는 참담한 시절이 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고교 시절만 해도 필리핀이나 태국을 '따뜻한 남쪽 나라'로 부러워했습니다. 세계 최악의 극빈(極貧)의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서울역 앞에는 미군 부대의 음식 쓰레기로 만든 '꿀꿀이 죽'으로 아침을 때우는 나라였으니 오죽이나 했겠습니까? 이런 음식들이 요즘 한국에서 유명한 '부대찌개'의 원조가 될 지 또 누가 알았겠습니까?

(1) 역사의 종언 - 그 스승에 그 제자

한 때 미국에서는 『역사의 종언(The End of History : 1992)』이라는 책으로 떠들썩했던 적이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별로 대수롭지 않은 책으로 보고 있습니다만 일단 패러다임(paradigm)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으니 간단히 검토는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저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로 패러다임을 어떤 한 시대 사람들의 견해나 사고를 지배하고 있는 이론적 틀이나 개념의 집합체라는 의미로 사용할 것입니다. 앞으로 이 부분은 상세히 설명할 것입니다)

미국의 정치학자 프란시스 후쿠야마(Francis Fukuyama)는 『역사의 종언』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로 역사는 이제 종언(終焉)을 고하였다고 주장합니다. 역사가 끝이 났다는 말이지요? 좀 이상하죠? 역사가 끝이 났다니 ? 여기서 말하는 역사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말세(末世)'나 '종말론(終末論)' 또는 '지구에 종말'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후쿠야마가 말하는 역사란 과거 그리스 시대 이후 인류가 추구한 보편적인 역사를 말합니다. 즉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이 자체적인 모순을 해결하려하고 그 내재적인 모순을 없애는 일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다 보면 근원적인 모순이 없어지고 인간이 바라던 최종 목적에 도달할 수 있으며 바로 이 상태가 '역사의 끝'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고는 유럽 사회에 오랫동안 전통적으로 내려온 생각들로 독일의 철학자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나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 ~1831)의 견해를 바탕으로 하는 것입니다.

칸트는 『세계공민적(公民的) 견지에서의 구상(1789)』에서 "역사는 반드시 종점이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종점'이란 인간의 최종목표이며 인간 자유의 실현(realization of human freedom)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인식과 실재의 관계에 대해 이원론(二元論 : Dualism)적 고민을 했던 칸트와는 달리 베를린의 거인 헤겔은 "세계 밖에 절대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그 자체가 절대"라고 하여 일원론(一元論 : Monism)적 설명원리로서의 관념론(idealism)을 집대성합니다.(1)

헤겔은 "개인이 역사의 주체가 아니라 세계정신(Weltgeist)이 개인을 도구화하는 것이며 역사란 객관적 정신의 자기전개"일 뿐이라고 고집합니다. 그는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전쟁들을 바라보면서 "역사는 끝없는 갈등 속에서 체계 내에서 스스로 모순 때문에 충돌하고 산산이 부서져 모순이 보다 적은 새로운 체계가 등장하고 그 체계도 또 다른 형태의 모순을 잉태해 간다. 결국 이 과정들을 되풀이하다보면 '근원적인 모순'이 없어진 상태에 도달하고 이것이야말로 <역사의 종언>"이라고 한 것입니다.

나아가 헤겔은 역사상의 제과정은 필연적인 것이고,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이요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임을 주장하여, 열광적인 천재 숭배의 그 시대에 급기야 도덕적 관념이 왕성한 국가는 다른 열등한 국가를 병합해도 무방하다고 하여, 사회경제적으로는 제국주의(Imperialism)가 극성할 수 있는 철학적인 근거를 제공합니다. 그는 "역사란 우월한 국가가 항상 그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열등한 국가들을 합병한 자취이며, 인류의 역사에 나타나는 수많은 전쟁은 우수한 사상과 열등한 사상의 전쟁일 뿐"이라는 지나친 생각으로 나아가, 외적으로는 '힘은 강자의 정의'라는 논리로 비약합니다. 그 덕분에 수많은 제국주의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더니, 결국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에게 객관적 정신의 실체에 대한 메시아적 관념을 이식하여 역시 신의 아들로 자처하던 다윗(David)의 후손들과 내적인 혈통싸움을 전개, 세계사를 온통 피로 물들입니다.(2)

아이러니하고 무서운 말이지만 헤겔은 후일 진보의 대명사인 마르크스주의자(Marxist)나 희대의 극우주의자인 파시스트(Fascist)들의 큰 스승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근대 유럽의 제국주의(imperialism) 정신의 선구자라고나 할까요? 그를 통해서 사회주의 제국주의자와(3) 자본주의 제국주의자들이 양산된 것이죠.

헤겔의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포이에르바하(Ludwig Feuerbach, 1804∼1872)는 헤겔을 인정하는 것은 신학(神學)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사유(思惟)'가 변증법의 토대라고 하는 그의 스승과 절연하고 '실재(實在)'가 변증법의 주체이며 토대임을 주장하였고 마르크스는 헤겔 철학을 바탕으로 모든 사회 및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원리로서 변증법적 유물론(dialectical materialism)을 집대성합니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라고 하는 하나의 테제(these)는 자기모순성으로 말미암아 사회주의라는 안티테제(antithese)를 형성하게 되고, 이 사회주의체제는 자본주의가 그 모체이므로 자본주의체제가 가진 그 필요한 내용(가령 고도의 공업 생산력)은 보존(bewahren)하고 인간 소외(Alienation)의 원인인 그 형태는 파괴(beseitigen)함으로써 이전의 체제가 가진 모순들을 확연히 인식하는 대자적(für sich) 단계로 이행하고, 이러한 자기모순의 통찰로부터 사회적 모순들을 지양함으로써 새로운 테제(합)를 형성하는 단계(Synthese) 즉 공산주의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단계는 인류가 이룩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발전단계이며, 부정의 부정 단계를 거친 즉자대자적(卽且對自的 : an und für sich)인 단계로 변증법적 역사의 전개의 막이 내리는 것이지요. 바로 역사의 종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 자체에 대해 현대의 지성 샤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는 헛된 꿈이자 정열로 일축합니다.(4) 그런데 이상하게도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헤겔 철학의 잘 가공된 미국식 버전(American version)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후쿠야마가 말하는 결론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자유주의나 민주주의 앞에 굴복한 오늘날이야말로 '역사의 종언'의 때라는 것입니다. 프란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언』은 역사의 진보가 멈추는 것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칸트, 헤겔 이후의 여러 생각들이 이리저리 중첩되고 가공된 느낌이죠. 다만 그 시대 정신이 자유민주주의로 대체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칸트, 헤겔, 마르크스 할 것 없이 '역사의 종언'을 논하는 자체가 사고의 미숙성(未熟性)을 의미합니다. 무의식적으로 기독교의 종말론을 벗어나지 못한 유아적(幼兒的)인 사고방식입니다. 근대 유럽의 열강들이 기독교의 전파를 명분으로 교회를 제국주의의 도구로 이용했다는 사실을 세계인들은 잊으면 안 됩니다.

"백인들이 처음으로 아프리카에 들어왔을 때 우리는 땅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은 성경을 들고 있었다. 백인들이 우리에게 눈을 감고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가 눈을 뜨고 보니 백인들은 땅을 차지했고 우리는 성경을 들고 있었다.(When the Missionaries arrived, the Africans had the land and the Missionaries had the Bible. They taught how to pray with our eyes closed. When we opened them, they had the land and we had the Bible.)"

라고 조모 케냐타(Jomo Kenyatta, 1894~1978)는 개탄했습니다.

이상하리만치 유럽인들의 사고에는 종말론과 선악의 이분법(二分法, dichotomy)이 강합니다. 기독교의 틀을 온전히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세상에 선악의 절대적 기준이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하다보니 세상이 이 지경이 된 것입니다. 차라리 '너와 내가 결국은 하나'라는 불이적(不二的)이고 원융적(圓融的)인 철학에 기반하는 불교적(佛敎的)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세계를 지배했더라면 세상은 훨씬 더 평화로웠을 것입니다. 제가 볼 때는 이 불이적이고 원융적인 패러다임만이 미래의 파국을 막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패러다임을 과연 현대 사회가 수용해낼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인간은 그저 무한의 우주와 대지 위에 서있는 존재입니다. 이들이 앞으로 어떻게 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앞으로 있을 단기적인 변화만을 예측할 수 있을 뿐이죠.

(2) 미국, 아름다운 나라

후쿠야마가 말하는 역사의 종언에는 다음과 같은 의미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첫째, 미국의 자유민주주의가 절대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후쿠야마는 1990년대 초 사회주의의 몰락과 제 3세계의 민주화 등을 통해 세계는 드디어 자유민주주의의 시대에 진입했다고 보고 있지요.

둘째, 자본주의는 그 어떤 시스템보다도 견고하게 미래의 패러다임으로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1990년대 초반 소비에트러시아와 동유럽의 사회주의 국가들이 모두 붕괴될 시기와 거의 동시에 이 책이 나왔다는 점에서 후쿠야마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에 대하여 최종적인 승리자로 생각한 듯합니다. 간단히 얘기하면 후쿠야마는 자본주의가 사회주의에 승리함으로써 역사가 일단락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는 시간낭비만 한 셈이 됩니다. 결국 간단히 자유주의 또는 자본주의로 돌아오면 되는 길을 사회주의라는 긴 시간의 낭비를 거쳤으니까요.

셋째, 후쿠야마가 말하는 것은 전 세계가 필연적으로 자유민주주의로 이행하게 되어있다는 것입니다. 후쿠야마는 단순히 사회주의의 붕괴 현상을 보고서 이렇게 주장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그 근거로 근대화가 자유민주주의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 등을 들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의 갑작스런 몰락은 역사의 변화에 큰 분기점이 된 것은 물론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인류는 당분간 다른 대안(alternative)을 찾기가 어려워졌기 때문이죠. 즉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세계는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를,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선택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죠.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더 있습니다. 첫째는 미국과 서유럽의 세력이 크게 강화된 것도 원인이죠. 즉 미국과 서유럽이 세계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유일한 세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IT 혁명으로 인류가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정신적 여유가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 같은 세계적인 경향에 따라가기도 바쁜 상태입니다.

어쨌든 후쿠야마의 견해는 일단은 다른 대안 없이 당분간은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전세계적인 패러다임의 구실을 할 것이라는 것을 좀 과장스럽게 표현한 것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습니다.

후쿠야마의 견해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보면 나무랄 것이 없는 논리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미국 정부의 입장을 크게 지지한 것이기도 하고 미국의 아름다움을 만천하에 과시할 수 있게 합니다.

(3) 돈 없는 사랑,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나 후쿠야마가 간과하고 있는 것은 현재 미국과 서유럽이 향유하고 있는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은 그 동안 자행된 제국주의(Imperialism)의 침략과 구조화된 국제분업(international division of Labor)으로 말미암아 가난에서 좀처럼 헤어 나올 수 없는 저개발 국가들의 존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편입된다고 해서 저개발 국가가 빈곤의 늪을 탈출할 수 있습니까? 제가 보기엔 저개발 국가들은 오히려 상품과 자원시장의 기능 이상을 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지난 경제개발의 역사를 면밀히 검토해보면 빈곤(poverty)의 탈출은 '개발독재(developmental dictatorship)'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타이완(Taiwan), 싱가폴(Singapore), 한국(Korea), 현대 중국(China)입니다. 이들을 제외하고는 저개발 상황을 탈피한 예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은 경제개발에 필요한 자본이 축적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빈약한 자원을 가장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세계 시장에 대한 경험도 없기 때문에 국가 주도로 엘리트 중심으로 세계시장에 진출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물론 제가 드리는 말씀은 개발의 명분으로 독재를 옹호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실제 상황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후진국들이 후쿠야마가 말하는 식으로 자유민주주의 - 자본주의로 완전무장을 하게 되면, 오히려 선진국들의 밥이 될 수 있는 상황입니다. 왜냐하면 야생의 자유라는 것은 사자나 호랑이에게는 유쾌한 일이지만 산양이나 얼룩말, 토끼 등에게는 치명적인 공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치타(cheetah)나 하이에나(Hyena)는 그래도 나은 편이겠죠. 한국은 아마 치타(cheetah) 정도는 될 겁니다.

바그와티(Jagdish Natwarlal Bhagwati)는 이 점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5) 가령 스리랑카(Sri Lanka)의 경우를 봅시다. 스리랑카는 제국주의 시대의 잘못된 자본주의 국제 분업 구조로 말미암아 강제적으로 차(tea) 생산에 사실상 특화(特化 : specialization)됩니다. 따라서 차 생산을 많이 하는 것이 경제성장(economic growth)입니다. 그래서 전 국민이 열심히 일해서 차(tea) 생산량을 2배로 늘렸다고 가정 합시다. 그런데 이 차를 주로 소비하는 영국인들이 평소의 2배로 차를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배탈이 나려고 그렇게 많이 마십니까? 이런 종류의 상품들은 대개는 기호품들입니다. 그래서 만약 영국의 차 소비가 지난해와 똑같다고 하면 어찌 됩니까? 가격만 반값으로 폭락합니다. 그러면 두 배의 일을 해서 두 배의 생산을 하고도 찻값은 반값으로 폭락하여 소득 변화는 없지만 두 배의 노동으로 인한 엄청난 사회적 비용(social cost)이 발생하여 결국은 소득은 이전보다도 감소하게 됩니다. 더 열심히 일하니 오히려 더 가난해지는 이상한 현상이지요. 이것이 바로 바그와티의 궁핍화성장(窮乏化成長 : immiserizing growth) 이론입니다. 커피, 바나나, 카카오 등 후진국 대부분의 작물들이 같은 꼴입니다. 결국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운명도 이와 다르지 않지요.

한국은 정말 운이 좋았습니다. 1960~1970년대 한국의 기적도 그저 한국인들이 부지런하고 똑똑해서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한국의 성공은 ① 토지개혁(다소 미흡한 측면이 있었지만 효과가 있었음), ② 미국의 대규모 지원(미국의 대륙규모의 한국 지원), ③ 수출드라이브 정책(당시 상당수의 국가들은 수입대체 공업화), ④ 정부주도의 체계적인 자원관리 및 경제개발 정책 시행(후기엔 개발독재가 심화됨), ⑤ 국제적인 저금리, ⑥ 계급전쟁으로 인한 봉건세력의 사실상 소멸, ⑦ 사회주의 산업 국가들이 세계 시장에서 배제됨으로써 경쟁 라이벌이 적은 환경, ⑧ 정부의 강제적인 자본축적(인플레이션 정책으로 대기업 육성 - 정경유착의 심화) 등 매우 복합적이고 다양합니다.

그러니까 한 나라의 경제가 제대로 굴러 가려면 이렇게 험난한 과정을 다 겪어야 합니다. 경제는 정치와는 달리 혁명이 없거든요. 값이 싸고 풍부한 노동력은 물론 경제를 잘 이끌고 갈만한 정부, 자본과 기술, 나아가 잘 훈련된 노동력과 국제적인 시장 경험의 축적과 금융 시장의 정비 등이 제대로 되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은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까지 대거 세계 시장으로 진입해버려 한국과 같은 행운아가 다시 나타나기란 불가능합니다.

결국 자유민주주의가 막연히 확산된다는 것은 미국과 서유럽(일본, 호주, 캐나다 등도 포함) 등의 활동 무대만 세계로 확장되고 또 다른 형태의 식민주의(植民地主義 : Colonialism)가 강화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도대체 후쿠야마가 보는 세계는 무슨 세계인지가 궁급합니다.

미국과 유럽은 틈만 나면 이슬람권이나 제 3세계의 비민주적인 나라들을 민주화시키려고 노력한다고 떠듭니다. 그런데도 미국과 유럽의 인종차별(racial discrimination)은 어느 나라들 보다 심합니다. 사실 이들 나라는 당장의 민주화보다는 자국의 자원의 효율적 사용과 경제적 개발 및 광범위한 교육 투자가 더 필요한 시점입니다. 가난한 민주화는 민주화(democratization)가 아니죠. 한때 한국의 지식인들이 동경하던 인디아(India)를 보세요. 지금 도무지 해답이 없는 나라가 되어버렸지 않습니까? 그래서 갈브레이스(John Kenneth Galbraith, 1908~2006)는 "경제발전을 위한 핵심적 요소로서 아프리카에서는 교육이, 아시아에선 자본 축적이,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혁명이 필요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과거 공산주의도 예외는 아닙니다. 공산주의가 애당초 '이념 그 자체를 위한 이념'이 아니라는 것, 다시 말해, "공산주의는 높은 의식과 완전히 평등한 사람들이 빈 접시를 놓고 앉아 있는 식탁이 아니다. 이것을 공산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사람을 초대해서 송곳으로 밀크를 마시라는 것과도 같다."는(6) 후루시초프의 개탄을 확실히 이해해야합니다.

생각해봅시다. 돈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죠. 돈 많은 백인(white)이 가난하고 순진한 인디오(Indio) 여인을 꼬드겨 돈 한 푼 안 주고서 입으로만 "나는 당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우린 함께 가야해."라고 하면서 현지처(現地妻 : mistress)로 삼고 하녀처럼 부리면 안 되죠. 만약 그런 남자가 있으면 그것은 여자의 몸만 유린하려는 것밖에 안됩니다.

후쿠야마의 논리는 이 "말로만 사랑하는" 돈 많은 백인 남자와 흡사합니다. 후쿠야마의 책은 미국과 유럽이 패권주의로 세계를 좌지우지 하려는데 전위대 역할을 하는 것에 불과합니다.(7)

사실 인간이 지구에 살아가는 한, 인간의 역사에 종말이 어디 있겠습니까? 끝없는 시작이 있을 뿐이지요. 제가 보기엔 이제 제대로 된 패러다임(paradigm)의 논의를 시작해야 된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세계는 미국과 서유럽, 일본을 제외하고는 정치ㆍ경제 구조의 왜곡과 저개발이 심각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원래부터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는 좋지 않은 상황인데 여기에 동유럽과 러시아가 다시 합류하게 된 것입니다. 제가 보기엔 새로운 형태의 유토피어니즘(Utopianism)을 지향하는 패러다임이 나와야할 시점으로 보입니다.

그 이유는 라틴아메리카나 인도양의 국가들과 아프리카는 말할 것도 없고 과거 공산권의 국가들이 한국, 타이완 등과 같이 제대로 세계시장을 주도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의 국민들은 산업이 절망적인 상태에서 실업률은 급등하고 있고 조직범죄가 극성한 상태입니다. 대부분의 산업시설과 자원은 미국과 유럽 혹은 조직 범죄꾼들에게 넘어갔거나 문을 닫은 상태입니다. 이것은 결국 경기 침체로 이어지고 대량실업과 불안정 고용의 증가함에 따라 사회불안이 증대하게 되죠. 그래서 이민과 돈 세탁을 통해서 국민경제에서 자본이 이탈하는 악순환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특히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던 러시아가 심각합니다. 이렇게 짧은 시간에 사회주의 종주국이었던 초강대국 러시아가 철저하게 분해되고 있습니다.(8)

시간이 흐를수록 이들 국가들의 사회적 불안은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들 국가는 과거로의 회귀를 선택할지도 모릅니다. 이들이 회귀하는 과거는 마르크스-레닌주의(Marx-Leninism)는 아니겠지요. 아마도 새로운 패러다임이겠지요.

그래서 제가 보기엔 21세기는 역사의 종언이기보다는 새로운 의미의 유토피어니즘 지향의 패러다임이 태동하는 시기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필자 주석

1. Sterling Power Lamprecht,『서양철학사』(을유문화사, 1963), 제13장. F. Grundriss Uberweg , der Geschite der Philosophie, 3 Bde.

2. 헤겔의『역사철학』의 '대강'을 요약하여 평가한 것이다. 히틀러와 관련하여 '헤르만 라우슈닝그'는『히틀러의 대화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즉"도스토예프스키라면 저 병적인 정신 착란과 히스테릭한 창조력으로 히틀러와 같은 악령의 인물을 창조했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히틀러의 사상에서 나타나는 헤겔의 전통들을 몇 가지 소개해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이다. 히틀러는 "영원한 자연은 자연의 법칙을 침범하는 자에게 복수한다 … 요컨대 어떤 새로운 관념이 훌륭히 성공하지 않는 이상, 대중이 그 이전에 어떻게 그 관념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대중의 인기를 얻지 못하는 정치가가 무슨 일을 해낼 것인가? … 국가란 상공업 단체나 실업자들의 모임이 아니다. 그것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평등한 인간이 그 종족의 발전을 위해서 결합된 하나의 공동체이다. 경제는 단순한 부가물에 지나지 않는다 … 국가란 결코 평화적인 경제의 힘으로 건설되는 것이 아니라 항상 민족의 보존과 유지의 본능으로 말미암아, 또는 영웅적 행위 내지는 책략에 의해서만 건설되는 것이다"등의 주장들을 늘어놓았다.(Adolf Hitler『나의 투쟁』,홍경호역, 한그루, 51쪽, 56쪽, 81쪽).

3. 이른바 신제국주의(New-imperialism)를 말한다. 최근에도 이 개념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 개념은 1980년대 등장한 개념이다. 주로 소련과 중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패권주의와 사실상 동의어로서 신제국주의라는 용어가 등장하였는데 엄밀한 의미에서 신제국주의란 자국의 경제적 이해 또는 헤게모니 장악을 위해 다른 나라를 침공하는 행위로 보면 된다. 대표적인 경우가 소련의 동유럽 침공과 중국에 대한 간섭, 중국의 베트남 침공,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 등이다. 중소분쟁은 신제국주의 경쟁의 단면을 보여준다. 소비에트러시아(소련)는 중소분쟁 이후 상당히 오랜 기간을 대중국 포위에 몰두하였다. 1980년대를 기준으로 당시 소련 지상군 180개 사단 가운데 50개 사단을 중소국경지역에 배치하였다. 여기에는 장거리 폭격기, ICBM, MRBM, IBRM, SAM 등 최신예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미국방성 비밀자료, 『소련의 군사력』, 1981,『신동아』). 1981년판『일본의 방위』는 소련의 극동지상군 병력을 51개 사단 가운데 대부분이 중소국경지역에 배치되어 있다고 본다. (『요미우리 신문』, 1981. 10. 23). 당시 소련은 잠수함의 30%, 지상총병력의 25%, 해군항공대의 30%, 진술항공기의 30%, 장거리 항공병력의 30%를 대중국 국경지역에 배치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소련이 이들 전력을 대자본주의 지역으로 돌린다면 그 결과는 충격적일 것이다"라는 당시의 보고가 있었다.(<The China Card in Play.> The Far Eastern Economic Review, October. 2. 1981). 즉 자본주의 국가를 겨냥해야할 사회주의국의 군대가 형제 사회주의국가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당시 중국은 소련에 대하여 패권주의라고 비난했지만, 중월전쟁 당시 중국이 보인 행태는 소련과 다를 바 없었다. 마찬가지로 베트남(월남)의 캄보디아침공도 캄보디아의 입장에서 보면 역시 패권주의라고 할 수 있다.

4. 헤겔은 정신의 자기전개 3단계 발전을 ① 존재가 하등의 규정이 가해지기 전에는 무라고 하는, 아무런 매개도 거치지 않는 즉자적인 존재, ② 공간과 시간의 구속을 받는 자연의 형식으로 외화되는 대자적 존재, ③ 정신이 자기 외화의 상태를 벗어나 다시 자기 자신으로 복귀하는 즉자대자적인 존재로 나아간다고 보았다(Hans Joachim Störig『서양철학사』, 228쪽). 이에 대하여 싸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자(卽自)는 인간의 의식을 넘어서 그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식은 즉자같이 그 자체에 있어서만은 '있는 것'이 되지 못한다. 따라서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즉 그 무엇에 관한 의식으로서만 의식은 있다. 의식의 이러한 성격이 대자(對自)이다. 의식이란 원래 자기 자신을 벗어나 자기를 넘어서 자기가 아닌 것으로 향하는 것이므로 그 본성은 탈자적(脫自的) 자기 초월적이다. 의식에는 그 핵심에 분열이라는 부정적인 것(無)이 있다. 이것은 존재의 구멍이고 이것의 출현에 의해서 대자라는 구조가 생기는 것이다. 의식은 단순히 무엇에 대하여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하여서도 항상 무(無)를 개입시켜 언제나 거리를 두는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의식은 존재 속에 출현하면서 존재에 관해 의식함으로써 존재의 중심에 무를 분비한다. 대자는 무를 간직하지만 즉자는 존재에 충실하다. 대자는 존재가 결여됨에 따라서 공허를 메울 것을 요구하게 되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즉자와 대자는 상반된 개념이다. 따라서 즉자-대자는 신과 같은 이상일 뿐 이를 희구하는 것은 헛된 정열이다." 한진숙,『현대의 철학1』, (서울대 출판부, 1980) 31쪽∼40쪽.

5. J.Bhagwati, "Immiserizing Growth", Review of Economic Studies, Vol. 25.

6. Hammer, U.S.S.R : The Politics of Oligarchy (Hinsdale : The Dryden Press, 1974), p.307.

7. 프랜시스 후쿠야마도 역시 책에 실린 <개인인가 공동체인가-세계화와 개인주의 사이에서>라는 글에서 낙관적 확신을 수정하고, 세계화가 가져온 사회변화의 불안정성을 인정하고 있다. 즉 자유주의적 개인주의가 확산됨으로써 나타나는 공동체성의 파괴는 자유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8. 1991년에서 2004년 동안 옛 사회주의 국가들의 1인당 평균 실질소득 증가는 그 이전의 15년(공산주의 치하) 보다 훨씬 낮았다. 이와 함께 소득격차는 엄청나게 심각해져서 최상위 소득계층 1%가 사적 자산의 80%와 소득의 50%를 지배하게 되었다. 빈곤층은 50%를 상회하고 있다. 옛 소련, 특히 아르메니아, 조지아, 우즈베키스탄 등의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는 생활 표준이 80%나 떨어졌다. 인구의 25%가 이민을 가거나 극빈 상태에 놓였으며, 산업과 공공자금, 에너지는 강탈당했다. 과학, 보건, 교육 시스템은 거의 붕괴되었다. 아르메니아는 결국 대다수 인민들이 중앙난방장치와 전기 없이 사는 국가로, 국가의 경제적 자원들을 마피아들에게 강탈당한 국가로 전락했다.(『내셔널 지오그래픽』 2004년 3월호) 러시아의 문제도 심각하다. 사회주의 붕괴 초기 즉 1990년대 중반에는 인구 50% 이상이 빈곤층이며 노숙자는 증가 추세이고 국가적 차원의 보건·교육 시스템은 붕괴했다. 비(非)전시 상황에서 한 나라의 경제가 이토록 빠르고 철저하게 무너진 경우는 현대사에서 '러시아 자본주의'밖에 없다. 러시아 경제는 자본주의화 과정에서 민영화되면서 마피아들에게 접수되었다. 러시아 마피아를 이끄는 것은 8개의 억만장자 과두체제이다. 이들은 뉴욕, 텔아비브, 런던, 스위스 등의 은행으로 2천억 달러 이상을 반출한 바 있다. 이로 인해 러시아의 전 경제 부문에서 살인과 테러는 '경쟁력'이 되었고, 과학은 말살되었다. 공산주의 체제하에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수준이었던 러시아 과학자들이 현재는 저소득과 설비부족 때문에 굶주리고 있다. 2004년을 기준으로 보면, '러시아 자본주의화'의 수혜자는 옛 소련의 관료, 마피아 보스, 미국과 이스라엘의 은행, 유럽의 땅 투기꾼, 미국의 제국주의자, 군부, 초국적 기업들이다. 이렇게 약탈과 대량실업, 빈곤, 절망이 만연하면서 자살과 알콜, 약물 중독이 폭증하고 있다. 소련 체제하에서는 좀처럼 보이지 않았던 질병도 나타나고 있다. 옛 소련이 붕괴되던 당시 남성의 예상 수명은 65세였으나 2003년엔 58세로 줄어들었다. 이는 방글라데시 보다 낮은 수준이다.(『월스트리트 저널』 2004.2.4) 최근 러시아 일간지인 『니자비시마야 가제타』(2012.4.18)의 보도에 따르면, 경제 전문가들은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2008년 집권 초기부터 내세웠던 혁신과 현대화는 실현되지 못한 꿈으로 남았으며 만성적인 부패는 치유될 수 없는 질병으로 확인됐다고 꼬집었다. 전문가들은 개혁이 없으면 러시아에 1991년과 같은 경제 혼란기가 찾아올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전문가들은 러시아가 2008~2011년 사이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5.5%를 기록했는데, 같은 기간 중국( 44.2%), 인도(34.1%), 브라질(15.6%), 남아프리카 공화국(8%)의 등의 신흥공업국들의 GDP 성장률을 과 비교하면 최하위 수준이다. 옛 소비에트러시아권 국가 모임인 독립국가연합(CIS) 11개 회원국 가운데서도 러시아의 경제성장률은 겨우 9위에 머물렀다.(『연합뉴스 2012.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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