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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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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13>

사복(蛇福)이라는 고승

요즈음이 ‘인플레이션의 시대’가 아닌가 생각될 때가 많다. 이 때 인플레이션이란 말은 경제용어로만 한정되지 않는다. 예컨대 사람들의 호칭을 두고 볼 때, 문화예술 분야에서 또는 학계에서 대가(大家)라든가, 석학(碩學)이라는 말이 너무 쉽게 발음되고, 그런 호칭이 매스컴을 통해서 대량으로 전파되는 현상에서 그런 생각이 든다는 얘기다. 불교계에 ‘큰스님’이란 호칭이 흔한 것도 어쩌면 그 비슷한 현상일 것이다. 이런 인플레이션의 시대를 그럭저럭 살아가는 평범한 나날 속에서, 예사롭지 않은 내공을 지닌, 무명의 인물과 마주친다면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 될 수 있다. 『삼국유사』를 읽다 보면 이런 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데, 내가 사복이라는 고승을 마주친 것도 하나의 사건이 되기에 충분할 것이다. 『삼국유사』 의해편 ‘사복불언’조의 이야기이다.

서울 만선북리(萬善北里)에 어떤 과부가 남편도 없이 잉태하여 아이를 낳았는데, 나이 12세가 되도록 말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했다. 이 때문에 이름을 사복(蛇福)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그 어머니가 죽었는데 그때 원효(元曉)가 고선사에 있었다. 원효가 그를 보고 맞이하면서 예(禮)를 했으나 사복은 답례도 하지 않고 말했다.

"그대와 내가 옛날에 경(經)을 싣고 다니던 암소가 죽었으니 함께 장사 지내는 것이 어떻겠는가."

원효는 좋다고 승락하고 함께 사복의 집으로 갔다. 사복이 원효에게 포살(布薩)시켜 계(戒)를 주게 하니, 원효가 그 시신 앞에서 빌었다.

"태어나지 말지어다, 죽는 것이 괴롭도다. 죽지 말지어다, 태어남이 괴롭도다."

사복이 말이 너무 번잡하다면서 고쳐서 말했다.

"죽고 태어남이 괴롭도다."

두 분이 상여를 메고 활리산(活里山) 동쪽 기슭으로 가서 원효가 말했다.

“지혜 범을 지혜 숲에 묻는 것이 좋지 않겠소?”

이에 사복이 게(偈)를 지어 말했다.

“그 옛날 석가모니 부처는 사라수 사이에서 열반에 드셨다. 지금 또 그 같은 이 있어 연화장 세계에 들어가고자 한다.“

사복이 말을 마치고 띠풀의 줄기를 뽑으니, 그 밑에 명랑하고 청허(淸虛)한 세계가 나타났는데, 칠보(七寶)로 장식한 난간에 누각이 장엄하여 인간의 세계가 아닌 것만 같았다. 사복이 시신을 업고 그 속으로 들어가니 그 땅이 바로 합쳐져 버렸다. 원효는 그냥 돌아왔다.

원효라면 당시 신라에서 의상과 함께 명성을 떨치던 고승인데, 사복은 그런 원효를 아랫사람 부리듯 대하고 있다. 원효 같은 고승을 이처럼 무람없이 대하고 있는 사복이라는 인물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사복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삼국유사』가 ‘사복불언’조 이외에, 흥법편 ‘동경 흥륜사 금당10성(十聖)’조에서 간략히 언급한 귀절이 있다. ‘동경 흥륜사 금당 10성’조는 단 한 문장으로 되어 있는데 “동쪽 벽에 서향으로 앉은 소상(塑像)이 아도, 염촉, 혜숙, 안함, 의상이요, 서쪽 벽에 동향으로 앉은 소상이 표훈, 사파(蛇巴), 원효, 혜공, 자장이다”라는 것이 그 전부이다. ‘사복불언’조 기사 중에 사복을 “사복(蛇卜)이라도고 한다. 또 ‘복’을 파(巴) 또는 복(伏) 등으로 쓰기도 하는데 이것들은 모두 어린애(童)를 일컫는 말이다.”라는 주석이 있음으로 미루어, 사파(蛇巴)는 사복을 가리키는 말임이 틀림없다. 사복이 신라 10대 성인(聖人)에 꼽히면서 원효에 앞서 거명되고 있는 점이 눈에 뜨인다.

그러가 하면, ‘사복불언’이라는 제목은 ‘노자(老子)’ 56장에 나오는 “지자불언(知者不言) 언자부지(言者不知)”라는 귀절을 연상시킨다. ‘노자’의 이 귀절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말을 하지 않고, 말을 하는 사람은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뜻으로 새긴다면 원효는 알지 못하면서 말하는 사람이 되고, 사복은 알면서 말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 역시 사복이 원효보다 한 수 위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러나 사복과 원효의 관계에 대해 『삼국유사』와는 다른 입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전승(傳承)이 있다. 『동국이상국집』 23권에 수록된 이규보의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중에는, 그가 부녕현 고을 원과 손님 6,7인과 더불어 변산반도의 원효방을 찾아갔던 일을 기록한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원효방 옆에 한 암자가 있는데 속설에 이르기를 사포(蛇包) 성인이 예전에 머물던 곳이라고 한다. 원효가 와서 머물렀기 때문에 사포 또한 와서 원효를 모셨는데 사포가 원효공에게 차를 올려드리려 했으나 샘물이 없었다. 이 때 물이 갑자기 바위 틈에서 솟아나왔는데 맛이 달기가 젖과 같아 늘 이 물로 차를 달였다고 한다.”

또, 『동국이상국집』 9권에 나오는 이규보의 ‘차판상자현거사운(次板上資玄居士韻)’이라는 시(詩)에서는 원효, 진표, 사포 세 성인의 영정이 내소사에 봉안되고 있었음이 언급되고 있다. 이들 기록에서 사포, 즉 사복은 성인(聖人)으로 불리우고 있지만, 원효의 제자로 되어 있기도 하다.

동국대 김상현 교수는 ‘사복설화의 불교적 의미’라는 글에서 사복이 원효의 제자였을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삼국유사』의 ‘사복불언’조는 “주인공 사복이 더 훌륭하다고 강조하기 위해 조역으로 등장한 원효가 낮추어진 경우로 볼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일연이 사복 설화를 채록해서 ‘사복불언’조를 기술한 의도와도 상통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복은 아무런 자취도 남기지 않고 이 세상을 버렸다. 전국 곳곳에 자취를 남기고 있는 원효와 비교해 볼 때, 그 남긴 자취로 보자면 사복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굳이 사복의 자취를 찾으려면 우리는 다시 『삼국유사』에 기댈 수밖에 없다. 일연은 ‘사복불언’조 끄트머리에 이런 귀절을 붙여놓고 있다.

“후세 사람들이 사복을 위해서 금강산 동남쪽에 절을 세우고 절 이름을 도량사(道場寺)라 하여, 해마다 3월 14일에 점찰회(占察會)를 여는 것을 상례(常例)로 삼았다.”

금강산은 경주 북쪽, 백률사가 자리하고 있는 자그마한 산이다. 이 산의 동남쪽에는 현재 아무 절도 없다. 다만 산의 동남쪽 맥이 잦아지는 곳에 마모된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가 하나 있어 몇몇 향토사학자들이 이곳을 도량사 터라고 말하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추정일 따름이다. ‘사복불언’조에 등장하는 만선 북리, 활리산 같은 지명들 또한 그 위치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확실한 것은, 사복이 원효를 찾아갔다는 고선사가 경주 동북쪽 변두리 암곡동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고선사마저, 댐이 생기면서 그 터가 물 속에 잠기게 되고, 거기에 서 있던 삼층탑이 경주 박물관 뜰로 옮겨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밖에, 이규보의 글에서 언급되고 있는 변산반도의 원효굴은 아직 남아 있으나, 내소사에 모셔져 있었다는 원효, 진표, 사복의 영정은 이제 없다. 이래저래 사복과 관련된 유적을 찾기란 점점 힘들게 된 셈이다.

사복이 이 세상을 등지던 장면을 돌이켜 본다면 지상에서 사복의 자취를 찾으려 드는 것 자체가 덧없는 일인지도 모른다. 눈에 보이는 흔적들을 찾으려 하기보다는 차라리, 사복이 어머니 시신을 업고 들어갔다는 지하의, 그 ‘명랑하고 청허(淸虛)한 세계’를 마음속으로 그려보는 것이 훨씬 더 사복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사복의 자취를 찾지 못한 내 허전한 마음은 이따금 경주박물관으로 나를 이끌어, 거기 한쪽 구석에 옮겨져 있는 고선사 탑 앞에 나를 세우곤 한다. 그렇게 고선사 탑 앞에 서게 된 끝에, 탑에게 이런 물음을 던졌던 적이 있다.

“그대 암곡동 시절에, 원효 큰스님을 찾아왔던, 사복이라는 더 큰 스님을 뵌 적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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