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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미국과 대결보다는 협력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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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분간 미국과 대결보다는 협력할 듯

미래전략연구원의 '지구촌, 분석과 전망' <10> 푸틴 하의 러시아 3

세계정치 및 국제사에 대한 일국의 영향력은 먼저, 영토, 인구, 부존자원, 경제력, 군사력, 국내 정치ㆍ사회적 안정성 등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국력, 다음으로 이러한 객관적 요인들을 토대로 자국의 국익을 증진하기 위한 국제전략의 운용능력에 달려 있다고 하겠다. 러시아는 영토나 부존자원 등에서는 강대국의 위상에 버금가는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경제력과 군사력, 국가 및 사회의 통합능력 등에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다.

러시아는 과거 소련 시절 공산진영의 맹주로서 미국과 글로벌 헤게모니를 다툰 것으로 흔히 이야기 하지만, 그것은 미국과 소련 양국이 주도한 진영정치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 소련은 핵전력을 제외하면 군사력에서 미국의 상대가 되지 못했고, 경제력에서나 세계사에 대한 총체적인 영향력 면에서는 더더구나 미국에 비할 바가 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소련연방의 해체와 함께 그 국제적 지위를 계승한 러시아는 그 지정학적 위상과 인구학적 조건이 현저히 악화되었다. 페레스트로이카의 도전적 시도는 부패하고 비효율적인 구 시스템을 붕괴시키는 데는 성공하였지만, 이를 대체할 새로운 사회조직의 기반을 형성하는 데는 실패하였다. 러시아연방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 민주적 시장경제 체제의 급진적 도입 계획 역시 1990년대 말까지는 국내산업 생산량의 추락과 빈부격차의 심화로 귀결되고 말았다.

초기 러시아의 친서방적 대외정책의 목표는 선진산업국가들과 협력관계를 이루어 조속히 국제정치경제체제에 편입되고, 민주적 시장경제 제도의 착근을 위해 재정적ㆍ기술적 지원을 확보하는 데 있었다. 당시 러시아는 2차 대전 후 서유럽의 경제 부흥을 위해 마샬플랜이 있었던 것처럼 냉전이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택한 탈소비에트 국가들을 지원하기 위한 제2차 마샬플랜이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2차대전 이후와는 판이한 전략환경에서 그러한 기대는 비현실적인 것으로 드러났다. 자유민주주의와 경쟁하기 위한 제3의 이데올로기는 없었으며, 새로이 형성되는 지정학적 공간을 침투할 ‘새로운 적’이 등장하지 않는 조건에서 서구 국가들은 탈소비에트 공간을 대규모로 지원할 전략적 이유를 발견하지 못했다. 서구 특히 미국의 전략은 소련이 경제적으로 부강하고 민주적인 러시아로 부활하기보다는 ‘통제가능한 개도국 수준’에 머물든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선에서 ‘조용히 고사’하기를 바랐던 것(‘안정적 고사 전략’)이라고 한다면 너무 지나친 것일까. 동시에 서구는 대량의 WMD를 보유한 러시아의 지나친 취약성이 글로벌ㆍ지역 안보를 위협할까봐 노심초사하였다는 것도 사실이다.

러시아의 친서구적 대외정책 노선은 90년대 중반의 수정기를 거쳐 말기에는 ‘실용적 전방위 노선’이라는 안정된 궤도로 기착하였다. 러시아의 지배 엘리트는 근대적 계획ㆍ명령 경제에서 포스트모던의 글로벌 경제 단계로 완충장치 없이 직편입되는 것이 국내적ㆍ국제적으로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였고, 지구적 정글에 던져져 살아남아야 하는 자신의 경쟁력 및 세계화 능력을 냉철히 평가하였다. 미국을 비롯한 서구의 대러시아 전략의 핵심을 이해하였고 대응 전략을 모색하게 되었다. 자국의 역량과 한계에 대한 ‘분석과 평가’ 그리고 대응전략의 모색은 옐친 말기에 이미 성숙되고 있었지만, 21세기 러시아 국가 및 국제전략의 명확한 청사진은 푸틴의 집권 이후에 완성되고 제시되었다.

러시아연방 ‘국가안보개념’, ‘군사독트린’, ‘대외정책개념’등의 문서로 공식화된 푸틴 정부의 전략 및 정책 기조는 ‘실용적 강대국 노선’으로 정리할 수 있다. 서구가 주도하는 국제정치경제체제에 편입되어 일익을 담당하고 선진국들 및 인접국가들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유연하며 실용적인 외교노선을 견지하는 한편, 군사정치적 안보와 같은 배타적 이익의 영역에서는 러시아의 역할과 국익을 강력히 주장하는 대국주의 노선을 펼치는 것이다.

냉전 이후 지구적 세력관계에서 미국이 질서 형성자 역할을 자임하는 데 대해 러시아는 다중심적 세계질서 형성을 일관되게 주장하였다. 모스크바의 다중심적 질서 주장은 우선적으로 유럽 지역을 겨냥한 것으로 유럽은 미국과 다른 독자적 이익을 갖고 있고 그에 부합되는 고유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기대를 반영한 것이다. 모스크바는 동아시아 지역은 이미 중국이 미일동맹과 관련하여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유럽이 자신의 고유한 목소리를 높일 때, 러시아의 대미ㆍ대유럽 관계에서 운신의 여지가 커진다고 계산하고 있다. 초강대국에 대한 편승은 혼자서 가능하지만, 견제는 동일한 의사를 가진 다른 강대국들과 이익 및 의지의 결합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러시아는 편승만이 아니라 견제 역시 가능한 지구정치 세력 구도가 현재 자신의 국력과 국익에 부합된다고 본다.

브레진스키를 비롯한 많은 전략가들이 21세기 지구정치에서 경합의 주무대는 유라시아 대륙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현재 미국은 흔히 말하는 유라시아 대륙의 역외 균형자라기보다는 미일동맹과 나토를 통해 유라시아 대륙 전체에 근육을 과시하고 지도력을 행사하는 헤게몬에 더 가깝다. 모스크바의 전략가들은 한편으로 속주들을 거느린 헤게몬을 제어하는 데, 유라시아 국가라는 러시아의 지정학적 위상을 감안하여, EU 및 중국의 힘을 이용하고(합종지계), 다른 한편으로는 헤게몬의 질서 형성자 역할을 도우거나 편승하여 국익을 취하는(연횡지계) ‘견제와 편승’의 전략을 적절히 혼용하고 있다.

21세기 국가 위상에 대한 러시아의 정책 목표는 최소한 지역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지역강국으로 유럽에 EU가 있고 동아시아에 중국이 있다면, 세계 유일의 유라시아 국가로서 강대국 러시아를 자리매김하려고 한다. 러시아는 EU 중심의 유럽과 경제력이 급성장하는 동아시아를 연결하는 육상가교 역할을 떠맡아 군사력과 경제력에 더하여 운송로 및 에너지자원 제공자, 더 나아가 유라시아 대륙의 다종교, 다문명 및 다문화를 접변시키는 문명 교량국가로서의 연성권력도 겸비한 강국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푸틴 정부는 러시아를 유라시아 지역 강국으로 만들기 위해 국내 안정, 탈소비에트 지역 영향력 복원, EU과의 협력 및 연대 강화 등을 순차적으로 강조하는 ‘점진적 강화 전략’을 채택하고 있다. 먼저, 국내 정치ㆍ사회적 통합 강화를 위해 7개 연방관구제를 도입하고, 지방 수장의 상원 겸직제도를 폐지하며, 하위법의 상위법에 대한 복속을 강제하여 행정적ㆍ법적 위계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조치들을 취하였다. 특히 베슬란 학교 인질사건(2004년 9월) 이후에는 지방 수장들을 대통령이 직접 임명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러시아가 ‘근외(가까운 외국)’라고 부르는 탈소비에트 지역에 대해서는 발트3국을 제외하고는 러시아의 사활적 국익이 걸린 지역이라고 간주하고 물리력이 아니라 지역국가들의 자발적인 대러 접근을 통해 지역 영향력을 복원하고자 한다. 키르기즈스탄에서는 소련 붕괴 이후 최초로 해외 군사기지를 건설(2003년 10월)하고 타지키스탄에서는 5천명 정도의 지상군과 공군 비행단으로 구성될 군사기지 창설을 선언하였으며(2004년 10월), 카프카즈 지역에서는 그루지아의 ‘장미혁명’ 이후 미하일 사카슈빌리 새정부와 관계 재설정, 아제르바이잔과는 석유 및 가스 자원 개발 분야에서의 협력 강화, 아르메니아와는 기존 정치군사적 협력관계 유지 등에 노력을 경주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의 간섭을 달갑잖게 여기는 우크라이나, 그루지아, 아제르바이잔, 몰도바 등 소위 GUUAM 국가들이 그루지아와 몰도바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성명을 채택하고 러시아가 분리주의를 조장하고 있다고 비난한 데서 드러나듯이 러시아의 영향력 복원 정책에 대한 역풍이 만만치 않다.

유럽 지역 특히 유럽연합과는 경제적 협력뿐만 아니라 정치군사적 안보 영역의 협력을 추구해 왔다. EU와 공동으로 미사일방어체제 구축 계획, 프랑스ㆍ독일과 함께 이라크전 반대, 대테러 분야 정보 공유 등이 이루어지고 있고, 나토와 러시아간의 새로운 나토-러시아위원회(the NATO-Russia Council)의 역할 및 기능은 과거 나토의 1차 동진 이후 나토와 러시아의 관계를 규정했던 상설합동위원회(the Permanent Joint Council)와 비교하여 한층 강화되었다. 과거의 메카니즘이 19+1의 형태였다면, 새 위원회는 20개 주체의 상호작용(NATO at 20)으로 구조화되어 있어 러시아와 나토 개별 성원국들과의 직접 대화가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전략적 운신폭 확대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계정치 무대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현수준에 머물거나 약화될 것이라는 견해가 다수이다. 대부분 미국측 시각을 대변하는 ‘러시아 약화론자’들은 그 원인으로 러시아 경제의 취약성과 불안정, 러시아 군사력의 전력투사 능력 미흡, 미국과의 관계 악화 가능성 등을 들고 있는데, 그 주요 내용들과 필자의 반론을 간략히 제시하려고 한다.

첫째, 러시아가 1999년 하반기 이래 지속적인 플러스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고는 하나 성장의 내용이 건실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석유ㆍ가스 부문이 수출소득의 55%, 전체 세수의 40%를 차지하는 지나친 원자재의존형 경제, 공업 생산의 증가율 미흡, 유코스 사태 등에서 보듯이 국가의 강제적 경제 개입으로 인한 외국 자본의 신뢰 저하, 중소규모 비즈니스의 성장 미흡 등이 부정적 요인으로 지적되고 있다. 특히 러시아가 사우디, 베네수엘라, 나이지리아 등의 국가처럼 에너지자원 수출로 경제를 꾸리고 일부 계층의 배를 불리는 권위주의 국가를 의미하는 ‘원유국가(petro-state)’화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크다. ‘원유국가’의 전형적인 특징은 수출, 세수증대 및 경제성장은 있으나 일자리 창출은 되지 않고 안정적ㆍ지속적인 성장기반이 마련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러시아 경제에서 에너지자원의 비중이 높다는 공통성 외에 교육 및 과학기술의 수준, 일부 첨단 산업 경쟁력 및 농업 기반, 국가형성의 역사 등에서 통상적인 ‘원유국가’들과 차별성이 더 크다고 본다. 그리고 선진산업국가들이 이미 정보기술 사회로 진입한 글로벌 경제의 조건에서 시장경제를 시작하고 있는 러시아의 조건을 과거의 NICs와 같은 후발 근대화 산업국가를 바라보던 시각으로 재단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는 것 같다. 러시아가 수입대체산업 위주의 경공업을 시작으로 세계 시장을 겨냥한 중화학 공업으로 나아가서 어떤 전망이 있을 것인지 의심스럽다. 그 발전 방식은 중국만으로도 이미 포화상태에 도달했다고 보는 것이 상식일 것이다. 러시아는 부존자원을 바탕으로 우주공학, 생명공학, 신소재 등 첨단산업, 관광산업을 비롯한 서비스업, 그리고 기업영농의 집중적 성장에 주력하는 것이 적절한 발전전략이라고 판단된다. 러시아 경제의 지속적 성장에 부정적인 요인들이 상존하지만 지적된 분야들에서 발전 전망은 결코 어둡지 않다.

둘째, 러시아 군사력의 전력 투사 능력 부족이 문제라는 것이다. 러시아는 낮은 수준의 국방예산으로 통상전력의 첨단화가 어려운 여건에서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전술핵 개발 및 전략핵 능력 증대 등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핵전력은 억지ㆍ방어용으로서는 의미가 있으나 자국의 의사관철을 위한 개입 수단은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냉전후의 갈등 및 분쟁의 속성상 핵전력이 아니라 기동성과 정밀파괴력을 구비한 전력체계의 도움 없이는 원거리는 말할 것도 없고 인접지역의 효율적 전력 투사 역시 불가능한 상황이다.

러시아가 필요한 전력을 구비할 가능성은 러시아의 군구조 개혁 및 전력의 첨단화에 달려 있다. 먼저 러시아의 군구조 개혁은 예산과 타성의 저항으로 말미암아 지지부진하였다는 평가를 받지만, 1백만명 이하로의 대규모 병력 감축과 육ㆍ해ㆍ공군 및 전략억지군으로 구성되는 4종 군편제 개편이 이루어졌다. 최근 몇 년 동안 경제상황의 호전으로 국방예산이 증가하여 전함의 약 30%만이 기동하던 최악의 상황을 벗어나 발트, 북해 및 극동 함대들의 장비들이 수선되거나 신형으로 교체되고 있고 함대는 훈련을 재개하고 있다. 다음으로 첨단무기 개발 및 획득을 통한 전력 증강 계획 역시 최근에 들어서는 탁상에서 현장으로 옮겨 가고 있다. 미국의 MD체제를 관통할 지상 배치 ‘토폴-M’ 미사일에 뒤이어 해상배치 ICBM ‘블라바-M’이 시험발사에 성공하여 올 안으로 실전 배치될 계획이다.

셋째, 러ㆍ미간의 지전략적 경합 그리고 부시 2기 행정부가 대외정책의 슬로건으로 내건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 등이 러시아와 미국의 관계악화를 가져올 두 가지 요인으로 지적된다. 먼저 탈소비에트 영토인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즈 지역이 양국의 핵심 경합지역으로 등장함으로써 양국관계 악화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이 강력히 반대하고 있는 러시아의 이란에 대한 원전 기술 제공도 문제로 지적된다.

해외주둔미군 재배치 계획(GPR) 등에서 드러나는 미국의 군사전략 변화의 핵심은 지구적 범주에서 미군 전력의 편재성과 상시 작전 가능성을 최대화하려는 것이다. 이 전략은 주요 전략적ㆍ전술적 거점들에 소규모 기동부대들을 주둔시키고 이들을 단일 네트워크화 하여 전력 단위의 결합 및 재편성의 유연성과 이동성을 증진하려는 개념에 근거하고 있다. 중앙아시아와 카프카즈는 이른바 ‘불안정의 호’에 위치하고 있고 유라시아 대륙의 핵심부에 메스를 들이밀 수 있는 지정학적 경혈들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또 모스크바가 이 지역을 자신의 고유 영향권역이라고 간주한다고 해서 러ㆍ미간에 심각한 충돌이 발생할 사안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먼저 양국은 적대관계에 있지 않고, 미군의 중앙아시아 주둔은 아프가니스탄 상황을 안정시키는 역할을 하여 중앙아시아 회교국들로의 반군지원이나 테러리스트 수출을 막아주는 순기능을 하고 있다. 모스크바로서는 중국의 중앙아시아 진출 열망에 대한 미군의 견제 역할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또 역으로 미국이 이 지역에서 군사주둔을 항구화하고 영향력을 확장할수록 이 지역에 고착되어 러시아와 거래할 목록은 상존하고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대미 영향력 역시 지속될 것이다. 러시아는 힘과 재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중앙아시아의 불안정에 대해 미국과 책임을 분담하는 것도, 중국과 분담하는 것에 비교하면,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닌 것이다. 요점은 중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초기적 침투가 미러관계의 향배에 결정적 변수가 되기보다는 지구 정치 무대에서 양국의 상호인식이 어떻게 전개되느냐에 따라 미러관계가 영향받고 또 중앙아시아 지전략적 경합의 성격도 최종적으로 규정된다고 하겠다.

다음으로 부시 2기에 접어들면서 워싱턴의 국익추구 명분이 대테러전에서 민주주의 및 자유의 증진으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러시아의 권위주의화와 관련하여 미국의 비판이 증가하면 양국관계가 악화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지난번 블라티슬라바 정상회담에서 양 정상의 설전이 그 일례로 제시된다. 워싱턴의 민주주의 증진 슬로건의 실제 의도는 두 가지로 볼 수 있는데 첫째, 더 이상 대테러전을 명분으로 갈등국면을 조성ㆍ유지할 국가가 없다는 점에서 미국은 테러나 대량살상무기 위협보다 더 포괄적이고 자의적인 판단이 가능한 영역인 인권과 민주주의 확산을 의제로 부각시킨 것이 아닌가 한다. 냉전후 새로이 형성된 국제인권레짐과 함께 민주주의의 증진이 미국의 ‘선택적 개입’을 위한 훌륭한 구실로 등장한 것이다. 둘째, 이라크를 침공하였으나 9,11테러 관련도 대량살상무기도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명분은 이라크 국민들을 후세인의 폭정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자유를 찾아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더욱 자유와 민주주의 확산을 위해 국제적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정식의 중요성이 커진다.

그러므로 민주주의 증진론은 러시아의 권위주의화를 직접 겨냥한 것은 아니다. 대테러 전쟁, 비확산 및 반확산, 에너지안보 협력, 대중국 견제 등 미국이 러시아의 협력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 대부분 미국의 사활적인 국가이익의 범주에 들어 있으며, 러시아를 제외하고 그러한 영역의 대응은 불충분하거나 불가능하며, 러시아를 대신하여 그 자리를 메꾸어 줄 미국의 동반자는 찾기 어렵다. 그러므로 중대한 안보이익들이 현수준의 미러관계를 지탱하고 있는 조건에서 러시아의 국내 정치의 권위주의화나 지역적인 인권유린 등의 문제가 미러 협력의 틀을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러시아의 민주화는 서구와의 통합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라고 보는 맥폴(McFaul)의 시각과는 달리, 러시아는 앞으로 상당기간 지금과 같이 권위주의적 국내 정치체제와 서구지향적 대외정책 및 세계경제 통합 정책 사이에 일견 마찰과 갈등 요인이 상존하는 것처럼 보이는 상태로 대외정책 노선을 유지해 나갈 수 있으며 나갈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초강대국의 야심을 버린 지 오래이며 하나의 지역 강국으로서 자신의 영향력을 유라시아 대륙의 균형자 역할로 제한하려고 한다. 국력과 자원의 낭비를 최소화하려는 러시아의 지역 전략의 효율성은 상당부분 유럽과 미국의 관계 진전 양상에 달려 있다. 서유럽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자신의 독자적 역할을 확장하면 할수록 러시아의 영향력과 운신의 여지는 더욱 확대될 것이다. 유념해야 할 부분은 러시아의 국제적 영향력은 지전략과 외교역량보다는 우선적으로 국내 문제의 전개에 달려 있다는 점이다. 외부에서 설정된 민주주의 의제보다는 경제력 증진, 인구구성의 건실화, 정치ㆍ사회적 통합성 강화, 통치시스템의 투명성과 효율성 제고 등이 더 원천적으로 지구정치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규정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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