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장애인을 진짜 장애인으로 만드는 건 사회"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장애인을 진짜 장애인으로 만드는 건 사회"

[인터뷰]"장애인의 행동 없이 세상은 절대 안 바뀌어"

"대중 매체에 장애인이 등장하는 방식은 거의 두 가지에요. <슬픈 연가>의 김희선처럼 자기 결정권이 없지만 예쁜 그림처럼 존재 자체로 비장애 남성의 사랑을 받는 장애여성이거나, <부모님 전상서>처럼 가족간의 불화원인을 제공하는 장애아동이거나.

<말아톤>만 해도 가족들이 너무 불행하게 그려져요. 장애아라도 아이로 인한 기쁨도 있는데.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저런 아이가 없는 내 삶은 얼마나 행복한가 느끼게 만들거든요. 또 비장애인들끼리 장애인으로 인해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은 있는데, 정작 장애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가는 보여주진 않죠."

박영희 장애여성공감 대표(44)는 황사주의보가 내렸던 '420 장애인의날' 마포대교 점거집회의 여파로 감기 몸살에 걸려있었다. 그녀는 피곤한 안색임에도 22일 사무실을 찾은 기자에게 '한국에서 장애여성으로 살아가기'에 대해 산더미같은 말을 쏟아냈다.

***"장애인 집회의 '점거'는 필요악...저희도 고민 많습니다"**

지난 20일 마포대교를 점거해 경찰과의 충돌 끝에 70명이 연행된 장애인이동권연대집회에 대해 한 참가자는 두 가지 인상을 전했다. 첫째는 예전같으면 어림도 없었을 장애인들의 시위에 대한 감회였고, 다른 하나는 얼마나 억눌린 게 많았으면 불편한 몸을 이끌고 나와 저렇게 싸울까라는 것이었다.

점거라는 집회 방식에 대한 안팎의 평가는 분분하다. 늘 선두에서 특유의 똑 부러지는 발언으로 좌중을 휘어잡고, 경찰과의 물리적 충돌에도 눈 하나 깜짝 않는 박영희 대표 역시 고민은 많았다.

"점거는 언론을 잡기 위한 '필요악' 같은 거거든요. 현실적으로 언론을 통하지 않으면 이슈화가 힘드니까요. 그래도 어떻게 하면 독창적이면서 평화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까 궁리를 많이 합니다. 교통체증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때문만은 아니에요. 저희도 '도대체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싶거든요."

그래도 "장애인의 '직접 행동' 없이 세상은 절대 안 바뀐다"는 것이 박 대표의 기본 생각이다. 그렇다면 최근 시각장애인으로서 훌륭한 대정부질문으로 기립박수를 받은 한나라당의 정화원 의원과 맹렬한 의정활동으로 호평받고 있는 열린우리당 장향숙 의원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어떨까?

***"장애인 의원에 대한 과도한 기대는 금물"**

"장애인 의원들이 고무적이긴 하지만, 솔직히 그들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거라고 믿진 않습니다. 장애인 문제는 교육, 노동, 폭력 모든 문제에 걸쳐 있어요. 몇 사람의 의원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기대는 금물이죠."

흔히 성과로 얘기되는 저상버스도입안이라 불리는 교통약자편의증진법에 대해서도 박 대표의 평가는 짰다. 원래 권고사항이었던 저상버스를 의무화하고 '이동권'이라는 말을 법안에 명시한 것은 성과지만, 구체적인 시행령은 아직 만들지도 않았고, 정부는 여전히 정책결정과정에 장애인을 배제하고 있기 때문에 50%도 안 되는 성과라는 주장이다. 실질적인 도입과정에서 지자체가 얼마나 예산 배정에 적극적일지도 주요 변수다.

그는 또 최근 '정신지체여성이라도 항거가 불가능하지는 않다'며 몇 년에 걸쳐 동거녀의 딸인 10대 정신지체여성을 성폭행한 남성에게 무죄선고를 내린 부산고법의 판결에서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 장애인의 현실'을 본다.

"물리적인 것 뿐 아니라 심리적인 위기 상태도 항거불능으로 봐야 합니다. 정신지체라는 장애의 특성 자체가 항거불능이에요. 외국에서는 가해자가 가해하지 않았음을 밝혀야 하는데, 우리나라 성폭력 방지법은 피해자가 피해사실을 증명해야 합니다. 이런 판결이 계속 나는 것이 너무 화가 나죠."

***"전동휠체어도 도시의 수없는 계단과 턱 앞엔 속수무책"**

우리 사회에서 아무리 장애인으로 살기가 힘들다지만 그래도 조금의 긍정적인 변화도 없을까. 박 대표는 많이 보편화된 '전동 휠체어'를 꼽았다.

"4년전에 전동휠체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제 인생에 처음 해본 일들이 늘어났어요. 하다못해 횡단보도 건너는 작은 결정조차 스스로 해본적이 없으니 오죽했겠어요. 사실 장애인 이동권 싸움이 이만큼 큰 것도 다 중증장애인들이 전동휠체어를 끌고 집회현장에 나올 수 있어서입니다."

예전에 비해 지나갈 때 힐끔거리는 사람도 많이 줄었지만 문제는 남아있다. 전동 휠체어가 아무리 장애인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해도 수시로 등장하는 건물의 계단과 턱 앞엔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자주 다른 이에게 안기거나 업히길 부탁해야 하는 장애 여성들은 어김없이 다이어트 부담에 시달린다. 무리 없이 타인의 호의를 얻어 '운반'되야 하는 이들의 다이어트 압박은 크지만 움직일 수 없으니 방법은 오로지 굶는 것 밖에 없다.

그 역시 이런 부담에서 자유롭지 않다. 살이 찐 것 같으면 바로 밥수저를 멀리 한다.

***"장애는 환경과 조건에 달린 것"**

"장애라는 게 그 사람의 정체성은 아니거든요. 어떤 조건과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장애 여부는 달라지죠. 저는 사실 집에 있으면 장애를 별로 못 느껴요. 그런데 밖에 나오면 아무것도 못하는 '장애인'이 되죠. 계단 앞에서는 더더욱. 수동휠체어 탈 때는 더 심했어요. 밀어주는 사람이 없으면 이동이 불가능하니까요."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에서 장애여성의 문제를 고민하던 사람들이 98년 독립해 만든 장애여성공감(www.wde.or.kr)도 이런 인식하에 만들어졌다.

장애인 6명, 비장애인 3명으로 시작한 이들은 이미 96년도에 여성장애인대회를 주최하고 97년 미국에서 열린 장애여성리더쉽포럼에도 참가하면서 기존의 장애인운동이 말하지 않던 가정폭력, 성폭력등 여성장애인 고유의 문제에 눈 뜬 상태였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그렇듯 시작은 어려웠고 막막했다.

"누구도 어떻게 하라고 가르쳐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자료도, 관심도 없었죠. '장애여성'이라는 말도 저희가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주변에서도 장애운동을 약화시키고 이분화시킨다느니 여성들끼리만 모여서 대체 뭐하자는거냐는등 말이 많았습니다."

돈이 없었던 이들은 우선 한달에 5만원씩 갹출해 세미나를 진행했다. 영화도 보며 장애여성의 몸을 탐색하고 장애인으로 사는 길을 함께 모색한 이들의 노력은 이듬해인 99년 장애여성잡지 <공감>을 탄생시키는 작은 결실을 맺는다. 언론에도 소개되는등 호응이 좋았고, 후원회원들이 늘기 시작했다. 이들은 여세를 모아 2000년 12월 서울 고덕동에 사무실도 얻고 2001년에는 부설로 장애여성성폭력상담소도 차렸다.

***"언제나 세상을 올려봐야 하는 사람들의 관점 보여주고 싶어"**

2002년에는 다큐도 찍었다. 가족으로부터 독립해 스스로 삶의 중심이 되길 선택한 중증장애여성 3명이 이야기다. 서로의 빈 곳을 채우면서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담은 '거북이 시스터즈'는 2003년 여성영화제에서 상도 탔다. 박 대표도 다큐 주인공 중 한 사람이다.

"거북이라 이름 붙인 이유요? 이 사회와 다른 속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라보는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낮은 자세의 사람이 바라보는 세상, 언제나 위로 올려다봐야 하는 사람의 관점이요."

현재 공감에는 장애여성 실태조사 연구팀, 소식지 편집팀, 회원 스스로 만든 시나리오로 직접 배우가 돼 공연을 하는 '춤추는 허리' 연극팀이 있다. 최근 공감은 장애여성 독립생활센터를 설립해 아름다운 재단으로부터 '활동보조인 교육 및 파견사업'을 위탁받아 진행하고 있다.

"공감의 큰 화두는 '독립'입니다. 최근 장애인 성매매가 이슈로 등장하는데, 이들에 대한 대안이 없어요. 장애인시설은 안전한 장소가 아닙니다. 오죽하면 성매매를 하던 장애여성이 활동가들에 의한 탈출을 거부하겠어요. 갈데가 없다고 말이죠. 장애여성들이 지역에서 스스로 혹은 그룹홈같은 공동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국가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거침없이 말을 쏟아내면서도 잘 웃는 박 대표의 활달한 성격이 타고난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61년 강원도 동해시에서 1남4녀중 장녀로 태어났다. 묵호항에서 시멘트 수출업을 하던 아버지 밑에서 집안 형편은 어렵지 않았지만, 혼자서 몸을 가눌 수 없는 박 대표를 업어서 통학시켜줄 여력은 없었다. 학교생활은 초등학교 2년으로 만족해야 했다.

***"집에만 갇혀 살다 사람들 만나니 얼마나 밝아졌는지..."**

"어렸을 적 친구들과 동생들이 하나둘씩 학교에 갈 때 전 늘 집에 혼자 있어야했죠. 25살 수동휠체어를 마련할 때까지 외출은 꿈도 못 꾸고 집안에만 있었습니다. 동생들 교과서, 책, 신문...눈에 띄는 글이란 글은 모조리 찾아 읽으며 견뎠지만 암담했죠. 어떤 꿈도 꿀 수 없고...죽음에 대한 고민도 많이 했어요."

멈춰진 시간 속에 갇힌듯 했던 박 대표의 삶은 라디오에서 우연히 듣게 된 천주교 장애인 모임의 존재를 알게 되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사랑의 고리라는 이름의 모임에서 수많은 장애인과 비장애인들을 만났어요. 같이 수련회도 가고 상담도 주고받고 이러면서 조용하고 소극적이었던 제가 적극적이고 밝은 성격으로 변했어요. 어쨌든 사람들 만나는 게 너무 좋았죠. 말 잘하고 글 잘 쓴다는 인정도 받고...행복하게 보냈어요."

검정고시를 통해 방송통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방송통신대 국문과에 휴학중인 박 대표는 현재 공감 활동은 물론 글 기고와 인터넷 라디오 방송으로 눈코뜰 새 없는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장애운동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세상과 호흡하는 방법을 터득한 그는 "장애인을 진짜 장애인으로 만드는 것은 당사자가 아니라 그를 둘러싼 사회"라는 주장을 온 몸으로 증명하는 듯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