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운회의 '대쥬신을 찾아서' <2>

뿌리를 찾아서

***들어가는 글**

① "1904년 10월 나는 우연히 문부성(文部省)으로부터 한국의 학부고문(學部顧問)으로 부임하지 않겠느냐는 교섭을 받았다. 나는 홀로 깊이 생각했다. 이 무슨 인연인가? 천세(千歲)의 문은(文恩)에 보답[應報]할 좋은 기회[好機]가 열린 것 같다. 신명(身命)을 걸고 맡기로 마음을 먹고 상월(霜月)의 차가운 바람[寒風]을 무릅쓰고 한국으로 갔다."
-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 -

② "상고시대 일본의 왕조는 끊임없이 백제와 연합했으며 신라를 공동의 적으로 보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 유대적인 숙명을 지니고 왔다는 것을 살피게 된다."
- 미즈노 유우(水野祐) -

③ "나라(奈良)는 야마토(大和)의 지명. 도읍으로 유명하다. 나라는 한국어에서 국가라는 뜻이므로 상고시대에 이 고장을 점거하여 살던 한국 출신의 이즈모족[出雲族]이 쓴 이름이다."
- 마쓰오까 시즈오(松岡靜雄) -

④ "황국진출(皇國進出)의 대방향을 정립하고 독립할거(獨立割據)할 기분을 가진 제번(諸蕃)의 무사(武士)들의 병력을 한국 정벌[정한(征韓)]에 동원함으로써 무사들의 눈을 해외로 돌릴 수 있다. … 해군과 육군의 제 기술을 실질적으로 급속히 신장시켜야 하는데 이는 정한(征韓)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 정한(征韓)으로 다른 날 황국(皇國)의 흥기(興起)와 만세(萬世)를 보장할 수 있다. … 속히 방향을 정하고 사절을 조선에 보내어 그들의 무례함을 책하고 만일 복종하지 않을 때는 죄를 열거, 조선을 정벌하고 크게 일본의 위신을 신장할 것을 바란다."
- 기또 다까요시(木戶孝允) -

⑤ "5세기 후반 유적인 큐슈 다마나(玉名)시 후나야마(船山) 고분 주변에서 무밭을 갈던 마을 아주머니에게 내가 한국의 전주(全州)에서 왔다고 하자 그 아주머니는 '고향사람이 왔다'며 큰 무 하나를 통째로 밭에서 뽑아 주었다."
- 일본을 방문한 어느 한국 선생님의 말(『조선일보』2004.12.11) -

***(1) 천세(千歲)의 문은(文恩)**

사람들은 저마다 뿌리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중국이나 미국, 일본의 시각에서 우리를 이야기합니다. 세계화(Globalization)가 중요한 이 시대에 '뿌리'니 '민족'이니 하는 말들이 무어 중요한 말일까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많을 것입니다. 그런 류의 말 자체가 시대착오적이라고 주장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물론 미국이나 중국 등 강대국 국민들이 하는 말은 아니지요.

우리 주변을 돌아봅시다. 그러면 당신은 한족(漢族)이라는 거의 불변하는 민족적 정체성을 가진 거대한 실체를 볼 수 있습니다. 모택동(毛澤東)의 말처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유일하게 살아남을 사람도 한족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한어(漢語), 즉 중국어는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사용하는 언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뿌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학문적인 '주변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현실성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안타깝지만 세계 최강대국들에 의해 둘러싸인 나라에서 중국의 이데올로기를 도와주는 이론으로 무장하려 한다면 그것은 비극입니다. 나중에 한반도가 중국의 일개 주나 성(省)으로 전락하여 '한성(韓省)'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면 그들은 아마 정신을 차릴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뿌리에 대한 얘기는 가까이는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80년대 우리나라에서는 국풍(國風)이 거세게 불었습니다. 이 때 나온 말들 가운데 "공자(孔子)는 한국인(韓國人)"이라든가 "신라의 수도 경주(慶州)가 중국의 장안에 있었다."라든가 십제(十濟) 또는 비류 백제에 대한 이야기가 넘쳐났습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저는 이 같은 생각들이 지나치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한단고기』보다는 린유탕(林語堂) 선생의 차분한 에세이집에 더 관심이 있었지요.

당시 한국은 신군부(新軍府) 독재가 기승을 부리고 대학가는 시대착오적인 주체사상파(主體思想派 : 북한의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집단)가 학내를 점거하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제게는 더욱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당시 우리 뿌리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현실을 호도하는 것으로 치부될 수도 있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한국 근대사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과거 조선의 교육 식민정책에 깊이 관여했던 한국사가(韓國史家) 시데하라 히로시(幣原坦)가 한 말에 상당한 충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글을 직접 인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1904년 10월 나는 우연히 문부성(文部省)으로부터 한국의 학부고문(學部顧問)으로 부임하지 않겠느냐는 교섭을 받았다. 나는 홀로 깊이 생각했다. 이 무슨 인연인가? 천세(千歲)의 문은(文恩)에 보답[應報]할 좋은 기회[好機]가 열린 것 같다. 신명(身命)을 걸고 맡기로 마음을 먹고 상월(霜月)의 차가운 바람[寒風]을 무릅쓰고 한국으로 갔다(幣原坦,「千歲の文恩」『朝鮮學會會報』1950년 4월호)."

여기서 시데하라 히로시가 말하는 천세(千歲)의 문은(文恩)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이때까지만 해도 일본은 우리 민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민족이며 틈만 나면 우리 민족을 괴롭히는 민족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런 글을 읽으니 참으로 이상한 느낌이 들기도 하였습니다. 일단 과거 백제의 대학자인 왕인(王仁)과 아직기(阿直岐)가 학문을 전수한 이래 지속적으로 문화적인 관계를 가져왔음을 시사하는 것으로 생각하기로 하였습니다.

***(2) 대쥬신 제국사**

대학 생활 당시 우리는 우스개 소리로 일본(Japan)은 거꾸로 쓰면 Napaj가 되어 "나빠유", 즉 '나쁜 나라'라는 의미의 충청도 사투리로 말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의미 속에는 일본에 대한 경멸과 저주를 담은 말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일본어를 배우면서 더욱 놀라게 되었습니다. 어떻게 일본어와 한국어는 단어만 다를 뿐 어순이나 원리가 거의 똑같다는 점이 매우 놀라웠습니다. 제게는 긴 세월 동안 일본은 '원수(怨讐)의 나라', '강도의 나라'였는데 어떻게 한국과 일본의 말이 이토록 닮았는가 하는 점이었습니다. 한문(漢文)을 공부해보면 한문은 영어(English)와 흡사합니다. 그래서 중국인들이 한국이나 일본인보다 영어를 잘하겠지요.

저는 개인적으로 이두 문자에 관심이 많아서 '서동요(薯童謠)'나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처용가(處容歌)' '제망매가(祭亡妹歌)'등의 향가(鄕歌)들을 스스로 번역해 본 경험이 있는데 제가 일본어를 배우면서 일본어가 과거 우리의 고대문자인 이두(吏讀) 문자와 완전히 같은 형식으로 사용한다는 것에 크게 놀랐습니다. 예를 들면 일본어의 '하다'는 '爲る' 또는 'する'인데 우리말로 한다면 '爲る'는 '爲다'가 되고 'する'는 '하다'가 되는 식입니다. 과거에 우리말도 '하니'를 '爲니'와 같이 쓰기도 했지요. [그림 ①] 고교 역사부도에 나타난 동이족 [천재교육(2002)]

제가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등이 모두 같은 언어군(言語群)이니 하나의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라고 말할 분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릅니다. 로마는 5세기에 멸망하고 이후 그 영향력이 사라지지만 동아시아의 경우 중국의 영향력은 로마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며 강력하고 지속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일본어, 몽골어, 만주어 등은 중국어와는 분명히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는 것이지요.

생각해봅시다. 로마제국이 유럽에 끼친 영향과 중국이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은 비교할 수 없지요. 동아시아 지역 대부분은 한자(漢字)를 사용하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 만주 - 한반도 - 일본은 중국어를 다만 필요에 따라 차용(借用)할 뿐, 중국어 자체가 이 지역 언어에 영향을 미치진 못했습니다. 조선의 세종대왕은 말할 것도 없고 일본, 몽골이나 청나라의 황제들도 자체적인 언어 개발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 중 가장 성공적인 경우가 바로 한국이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는 1980년대 초 심각한 위기 상황을 맞았지만 1985년 소위 '삼저호황(三低好況 : 저유가ㆍ원화 약세ㆍ저금리)'으로 경제가 회복되어 한국경제는 새로운 중흥기(中興期)를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오랫동안 이데올로기 문제와 남북문제에 골몰해왔던 저는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이 다소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경제는 호황(好況)인데다 올림픽이 개최(1988)되어 사람들의 관심은 오로지 "세계 속의 한국"이었고, 민주화의 물결이 넘치니 그나마 오랫동안 패러다임(paradigm)이나 이데올로기(Ideology) 문제에 골몰하였던 제가 할 수 있는 일도 별로 없는 듯하였습니다.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는 것도 별로 원하는 일이 아니었고 그저 입에 풀칠이나 하면서 "한 세월을 보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죠. 그래서 지방에서 조그만 사업이나 하면서 세월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김산호 선생의 『대쥬신제국사』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매우 놀라운 사실들이 있었습니다. 잘 아시겠지만 김산호 선생은 미국에서 만화가로 성공하여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분입니다. 그는 중국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장성(長城 : 만리장성) 이북은 과거엔 모두 가오리[고구려(高句麗)] 땅이었지요?"라는 현지인의 말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미국에서의 성공을 뒤로 하고 귀국하여 여생을 바쳐 우리의 뿌리에 대한 탐구를 하시고 계신 분입니다.

이렇게 나이가 드신 분이 열정을 바쳐서 뿌리를 찾는데 저는 오히려 열정은 고사하고 하루하루 살아가기에만 급급한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아직은 젊은 저에게 김산호 선생의 열정은 한마디로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지요. '쥬신'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림 ②] 김산호 선생의 대쥬신제국사의 한 장면

그렇지만『대쥬신제국사』를 읽어갈수록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했지만 정사(正史)에도 없는 이야기들이 지나치게 상세히 기록ㆍ서술되어 있는 데에 대하여 마음이 편하지 못했습니다. 정사(正史)는 물론 다 믿을 것은 아니지만 모두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물론 모든 기록들이 중국의 사서(史書)를 통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김산호 선생의 고충은 컸을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만 그 책이 일반인들 또는 지식인들에게 설득력이 과연 있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궁극적으로 이 내용들이 정말 사실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3) 구드리, 비밀의 화원**

그 즈음 한국방송공사(KBS)에서는 『삼국기(三國記)』라는 역사 드라마를 방영했는데 삼국시대 당시 한국과 일본 사이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매우 심도 있게 묘사하고 있었습니다. 드라마를 보면서 『삼국기(三國記)』의 내용들이 과연 사실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특히 백제와 일본 사이의 많은 이야기들은 제게는 매우 충격적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는 부여(夫餘)를 여행하게 되었습니다. 부여에 가보면 유명한 백마강(白馬江)이 있고 백마강을 바라보는 낙화암(落花岩)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곳이죠.

[그림 ③] 백마강과 낙화암

그런데 그 곳에 '구드리'(또는 구다라)라는 곳이 실재한다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구다라(くだら)는 제가 배운 일본어에서 백제(百濟)를 의미하는 것이었죠. 그리고 일본어에 구다라나이(くだらない : くだら + ない)라는 말은 '가치가 없다(시시하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나이(ない)란 '없다'는 말이죠. 그러면 "백제의 것이 아니면 가치가 없다"는 의미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구다라나이는 '下らない'로 쓸 수도 있으니 그 어원은 일천한 제 일본어 실력으로는 알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어쨌든 저는 일본(日本)이라는 나라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림 ④] 구드리의 풍경(현재 낙화암의 안쪽 조각공원)

1990년대 중반 일본(日本)을 방문했을 때 일본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있는 한국인 안내자 분(인류학 박사과정)으로부터 "일본의 고대사가 한국과 긴밀하다는 것을 모를 일본의 지식인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일본이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한국인들이 지나치게 기고만장하는 것이 싫어서 다만 그것을 피할 뿐이지요."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또한 제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왔습니다.

당시 저는 도쿄대학(東京大學)을 홀로 거닐면서 일본 최고의 지성이라는 도쿄 대학생들에게 '한국을 아는가' 라고 물어보니 어이없게도 대개의 학생들이 한국이 어디 있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방학이 시작되는 기간이니 온통 유럽으로 갈 생각으로 들떠 있는 듯했습니다. [그림 ⑤] 일본 도쿄대학(東京大學)을 상징하는 아까몬(赤門)

기가 막힐 일이었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은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긴 세월을 일본을 증오하고 일본의 일거수일투족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일본 최고의 지성이라는 학생들이 한국에 대해서 모른다니,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도쿄의 거리를 거닐면서 일본은 여러모로 우리나라와는 닮은꼴의 나라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떤 때는 마치 서울의 거리를 거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일본말을 하여 당황스러울 지경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제3국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가장 비슷한 사람이 한국인과 일본인이라는 말이 문득 생각나기도 했습니다. 제게는 긴 세월 동안 일본은 '원수(怨讐)의 나라', '강도의 나라' 였는데 이 알 수 없는 친근감(親近感)은 도대체 어디서 오는 것일까? 제 자신도 답답해지고 있었습니다.

나라(奈良)를 갔을 때 그 '나라'라는 이름이 우리말로 '나라'와 동일하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교토(京都)나 여러 고대 유적들을 보면서 알 수 없는 친근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마치 일본은 물건을 하나도 버리지 않은 오래된 역사의 창고처럼 우리가 오래 전에 잃어버렸던 어떤 것들이 제 눈앞에서 파노라마처럼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미즈노 유우는(水野祐)교수의 책『일본고대의 국가형성(日本古代の國家形成)』(講談社 : 1978)에서, "상고시대 일본의 왕조는 끊임없이 백제와 연합했으며 신라를 공동의 적으로 보고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민족 유대적인 숙명을 지니고 왔다는 것을 살피게 된다."라는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고대의 숙명들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남아서 이 두 민족을 괴롭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언젠가 읽은 책에서, 일본은 고려가 몽골과 연합하여 일본 정벌에 나선 것을 두고두고 한국침략의 이유로 들곤 한다는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일본 고대 조정에서는 신라와의 관계가 악화되기만 하면 세깡론(征韓論 : 정한론 - 한국을 정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들끓었다고 합니다. 그 근거는 『일본서기(日本書紀)』의 진구황후(神功皇后)의 신라정벌 설화라고 합니다.[日本歷史敎育者協議會『天皇制』50問 50答 (혜안 : 2001)] 대학원 수업시간에 일본 외교사 전공 교수님이 "근대 일본 지식인 치고 세깡론자(征韓論者 : 정한론자)가 아닌 사람이 없다"라고 하신 말씀이 자꾸 뇌리를 스치고 있었습니다.

도대체 한국과 일본, 이들의 뿌리는 무엇인지, 이들의 무의식 속에 있는 민족적인 갈등과 분노의 원천은 무엇인지, 그리고 '천세(千歲)의 문은(文恩)'은 뭐고, '백제와 일본은 민족 유대적인 숙명을 지니고 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의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가운데 후금(後金), 즉 청나라 황제의 성(姓)은 '아이신 자오뤄(愛新覺羅)'라는데 이 말의 의미는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라'는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신'은 금(金)을 뜻하는 알타이어이지만 그 말을 '신라를 사랑하고 잊지 말자'라는 한자음을 빌려서 표현한 것이죠. 결국 이 말의 음과 뜻을 합해서 해석해 보면 '경주 김(金)씨'라는 뜻이 됩니다.]

[그림 ⑥] 청의 영역

이것을 알게 되자 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이 모든 역사의 미스터리에 대해 무관심한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제 가슴 속에서는 도대체 '쥬신은 누구'이며 그들은 한국인과 일본인들과 어떤 관계를 가진 사람들인지에 대해서도 끝없이 해답을 재촉하여 이 문제들이 제게는 어떤 숙명적 과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다시 여러분과 함께 아득하고도 먼 역사 여행을 떠나려고 합니다. 다행스러운 것은 중국의 이야기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멀고먼 옛날에 떠나온 고향의 노래를 부르는 흥겨운 마음으로 떠나 봅시다. 물론 이 여행의 가이드가 시원치가 않다는 점이 여러분 마음에 걸리실 것입니다. 어느 분은 제 약력(略歷) 어디를 보아도 역사(歷史)와는 상관이 없다는 말을 하시는데 그 말도 사실이거든요.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