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베트남전 수렁에 빠져들고, 젊은이들은 거리에서 변화와 개혁을 외치던 1960년대, 체 게바라는 그 격동기를 질풍노도처럼 살다 갔다. 그는 한 시대를 온몸으로 저항하다 숨진, 20세기의 아이콘이다. 미 시사주간지 <타임>이 20세기를 움직인 100인 가운데 체 게바라를 꼽을 만큼, 그는 20세기를 치열하게 살았던 혁명가였다.
프랑스 지성을 대표하던 실존주의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1905-80년)는 체 게바라를 가리켜 “우리 시대의 가장 완전한 인간(the most complete human being of our age)이었다”고 평했다(오스카 솔라, 페르난도 가르시아 공저, ‘체 게바라-한 혁명가의 이미지들’ 2000년판에서 옮김). 사르트르가 말하는 ‘우리 시대’란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을 비판하고, 권위적인 정부에 대해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이 지구촌의 거리를 메우던 격동의 60년대와 70년대를 가리킨다. 남미를 비롯한 전세계 곳곳에서 군부독재가 판 치고 그런 정부들을 미국이 지지하던 시대이기도 했다.
쿠바혁명은 남미를 자신의 텃밭으로 여겨온 미국에게 커다란 타격이었다. 아르헨티나의 페론 정권과 과테말라의 아르벤즈 정권이 쿠데타로 무너진 뒤 미국은 중남미를 쉽사리 주무를 것으로만 여겨왔다. 그러나 쿠바혁명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미국기업들에 땅을 빼앗긴 채 저임금 노동자로 살아온 남미 사람들에게 쿠바혁명은 희망의 불꽃이었다. 게바라는 그런 불꽃을 지핀 인물로 혁명 초기부터 전세계의 눈길을 끌었다. 1960년 8월 미 시사주간지 <타임>의 표지인물이 체 게바라였다.
***남미 민중과의 운명적 만남**
1990년대 초 동서냉전이 막을 내린 뒤 마르크스 관련서적은 도서관에서 잠을 자고 레닌이나 모택동은 잊혀져가고 있으나, 체 게바라 열풍만은 좀체 식을 줄 모른다. 2004년 9월엔 게바라의 남미여행을 다룬 영화 ‘모토사이클 다이어리’가 나오더니, 올해는 게바라의 이름을 딴 ‘체(Che)'라는 영화가 곧 선보일 예정이다. “관객의 주머니를 노리고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말처럼, 게바라의 인기가 시들하다면 이런 영화들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20대 중반의 체 게바라는 앞날에 의사가 되려던 평범한 젊은이였다. 무엇이 체 게바라에게 혁명적 열정을 심어 주었고, 그를 좌절로 몰아갔나. 우리 인간은 어떤 만남을 갖느냐에 따라 운명이 바뀐다. 만남-그것은 1970년대 유럽철학의 한 중요한 흐름이었던 철학적 인간학(哲學的 人間學)의 한 주제다. 어릴 적 학교선생이 누구였느냐, 또는 누구와 결혼했느냐는 우리 삶의 행로를 가른다. 체 게바라에게도 그런 중요한 만남이 있었다. 바로 남미의 가난한 민중과의 만남이었다. 그에게 1950년대 전반기 두 번에 걸쳐 이뤄진 긴 여행은 냉혹한 현실에 눈을 뜨도록 만든 촉매제였다.
칠레 북부 추키하마타광산을 장악한 미국기업이 현지 노동자들을 노예 부리듯 다루는 걸 목격하면서 “나는 무식한 인디오(남미 원주민)가 될지언정 미국 백만장자가 되진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남미사회 곳곳에 퍼진 가난과 질병, 사회적 모순, 가진 자의 오만과 착취, 정치적 압제 아래 고통 받는 민초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 남미여행은 영화 ‘모토사이클 다이어리’(Motobicycle Diary)로 2004년 국내에도 소개된 바 있다.
1951년 12월부터 8개월동안 체 게바라와 함께 남미 5개국 여행길에 올랐던 알베르토 그라나도(83)를 만나기는 쉽지 않았다. 쿠바에서 명사(VIP)로 통하는 그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선 무엇보다 쿠바 문공부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사회주의 통제사회 아래서 어떤 종류의 허가든 ‘허가를 받는다’는 것은 ‘시간과 인내심이 요구된다’는 걸 뜻하는 것임을 곧 깨달았다. 쿠바에서 소개로 알게된 한 미모의 중견 방송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녀는 전화를 집어들더니, “알베르토! 잘 있었어요? 멀리서 온 손님이 당신을 찾아갈 테니 그리 아세요”하며 아주 손쉽게 다리를 놓아 주었다.
알베르토 그라나도의 집은 아바나 시내 동쪽 고급주택가들이 자리한 마리아나오 지역이다. 함께 간 쿠바인 통역이 “1959년 쿠바혁명이 일어나기 전 이 지역에 살던 쿠바 부자들 대부분이 미국으로 떠났다”고 설명해준다. 그라나도의 집 2층 거실벽엔 체 게바라의 초상화가 내걸려 있다. 아래는 그와 나눈 얘기를 간추린 것이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명작”**
=지난해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나왔는데, 보기에 잘못된 점은 없었는지...
“흔히 영화는 다큐멘터리(기록필름)와는 다르다는 얘기들을 한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도 영화이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큰 줄기에서 사실왜곡 없이 잘 만들어진 영화라고 본다”(필자는 뉴욕의 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영화가 끝이 나자, 관객들은 박수를 치면서 영화가 주는 진한 감동을 나타냈다).
=영화 속에서 체 게바라가 칠레 북부 광산지역에서 만난 노동운동가 출신의 여인에게 외투와 돈(20달러)를 준 게 사실인가.
“그렇다. 칠레 북부 추키하마타 광산지역에서 있었던 일이다. 체 게바라는 혁명의 원칙에서는 엄격했고 거기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자들에겐 가혹했다는 소릴 들었지만, 정이 많은, 마음이 따뜻한 사내였다”(쿠바혁명 사령관 시절의 체 게바라는 함께 싸우는 전사들에게 흐트림이 없는 엄격한 자세를 요구했다. 그 무렵 체 게바라는 남긴 기록들을 살펴보면, 그는 혁명가로서의 강철의지(iron will)와 규율을 매우 중요시했다. 그래서 규율을 어긴 자들에겐 심한 벌을 내렸고, 몇몇을 처형하기도 했다. )
=체 게바라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가 언제인가.
“날짜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체 게바라가 1965년 초 산업부장관에서 물러난 지 얼마 뒤의 일이다. 그때 우리 두 사람이 술잔을 부딪치며 술을 마시는데, 체 게바라가 이렇게 말했다. ‘우린 아직 자본가들의 습관을 버리지 못했어. 술 마시는 버릇하고 여행 다니는 것 말일세’ 그러나 체 게바라는 애연가였지, 술을 즐겨 마시는 체질은 아니었다”
=그때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로 간다는 얘긴 하지 않았는가.
“그런 중요한 기밀에 관련된 얘길 내게 할 수는 없었겠지... 다만 이런 얘길 했어. ‘이제 얼마 있다가 나는 당신을 놔두고 혼자 여행을 떠날 거야’ 그때 이미 체 게바라는 볼리비아로 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지만, 나는 몰랐다. 나중에 그가 볼리비아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뒤에야 ‘아! 그때 그 말이 그런 뜻이었구나!’ 하고 깨달았다”
***“쿠바혁명은 체 게바라의 꿈이자 나의 꿈”**
그라나도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생화학 전공자. 게바라가 혁명주체세력의 일원으로 쿠바 산업부장관으로 있을 때인 1961년 그를 쿠바로 불렀다. 처음엔 아바나 국립대학에서 생화학을 가르쳤다. 1965년 산티아고 드 쿠바에 의과대학(정식이름은 오리엔테 메디칼센터)의 공동 창립자다. “카스트로와 게바라가 학교설립에 큰 도움을 주었다”고 그라나도는 밝힌다.
=체 게바라가 가끔씩 생각이 나는가?
“가끔씩이 아니라 날마다 생각이 난다. 잠자다 꿈에서도 게바라를 만난다. 그는 나보다 나이는 어렸지만, 내 인생을 바꾼 인물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내가 지금처럼 쿠바에서 살고 있지 않을 것이다”
=체 게바라의 이념을 어떻게 봐야 할까. 그가 공산주의자였나, 아니면 휴머니스트로 봐야 하나?
“나와 마찬가지로 체 게바라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 굳이 말한다면 사회주의적 휴머니스트(socialistic humanist)라 해야 할 것이다. 50년대와 60년대 많은 남미의 젊은이들은 민초들의 고단한 삶을 아랑곳 없이 자기들 배만 불리는 친미독재정권들을 미워했다. 따라서 정치에 비판적이었다. 그런 터에 쿠바에서 사회혁명이 일어나자, 쿠바는 우리 남미의 꿈이 됐다. 그것은 체 게바라의 꿈이기도 했고, 나의 꿈이기도 했다”
필자 이메일: kimsphoto@yahoo.com
(사진설명) ‘쿠바혁명은 체 게바라의 꿈이자 남미의 꿈이 됐다“고 말하는 알베르토 그라나도.@김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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