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장미의 이름, 그리고 지식, 권력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장미의 이름, 그리고 지식, 권력

김민웅의 세상읽기 <63>

<장미의 이름>이라는 작품에서 움베르토 에코는 지식과 권력의 문제를 파헤칩니다. 지식에 대한 주도권을 누가 어떤 이유로 잡는가에 따라 당대의 “권력지도”가 달라진다는 점을 주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도권 변화의 흐름 속에서 역사의 내면에 잠복해 있는 진실에 대한 갈망을 드러냅니다.

중세 가톨릭 교회는 당대의 정신 그 자체이자 권력이었으며, 모든 것의 심판자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군 전쟁 이후 여러가지 충격 속에서 봉건제의 동요와 함께 서서히 흔들리게 되는데, 이런 과정에서 교회의 기존 권위를 지켜내려는 측과 이에 도전하는 세력이 맞부딪히게 됩니다.

각 지역의 수도원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여러 가지 논쟁과 쟁투로 나타나게 되면서 전환의 격동기에 들어서게 됩니다. 작품 <장미의 이름>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놓고 중세에 대한 방대한 지식과 추리 소설적 기법, 그리고 철학적 논란의 의미까지 짚어내는 내용을 박진감 있게 담아냅니다.

이태리의 한 수도원에 도착한 영국의 수도자 윌리암 일행은 잇단 연쇄살인 사건 수사에 관여하게 됩니다. 윌리암은 이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결국 교회 내부에 존재하는 베네딕트파와 프란체스코파 간의 신학적, 철학적 대립의 의미를 파고들게 되는 지점까지 가게 됩니다.

여기서 베네딕트 파는 이미 정형화되어 있는 원리에 따른 교리와 교회적 권위를 옹호하면서 기존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을 용납하려 하지 않는 입장을 대변합니다. 이에 반해 교회의 개혁과 현실에 대한 이성적, 경험적 접근을 인정하려는 프란체스코파는 시대적 비주류에 속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경험철학에 기초한 베이컨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수도사 윌리암은, 강고하게 기존의 기득권과 권위를 지키고 있는 베네딕트파의 자기방어 논리를 격파하는 논쟁을 벌이면서, 연쇄살인 사건의 뒤에 가려진 권력의 음모를 밝혀내게 됩니다. 그것은 기존의 권력을 흔들 수 있는 개혁적 지식에 대한 음험한 탄압의 결과를 뒤집는 절차였습니다.

해서 이 작품에서는 사물의 이성적 논의를 강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에 대한 접근 금지 조처와의 싸움에서, 이를 뚫고 나가려는 이들에 대한 베네딕트파 호레오 신부세력의 제거작전이 연쇄살인으로 나타나게 된 것을 윌리암은 증명해내게 됩니다. 지식에 대한 일방적 독점과 함께, 권력을 유지하는 음모 아래 새로운 지식을 추구하는 세력에 대한 억압이 어떻게 벌어지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교리적 사고에 갇혀 있는 중세 교회의 철벽을 무너뜨리는 일은 매우 위험하고 또한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건 목숨을 건 일이기도 했다는 것을 연쇄살인 사건은 확인시켜 줍니다. 그래서 이미 정해진 신학적 교리를 넘어서서 사물에 대한 이성적 이해, 즉 인간 자신의 독자적인 경험과 주체적인 판단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를 향해 가는 일은 험난한 과정이었던 것입니다.

당대의 현실로 보면 프란체스코파의 도전은 단기적 패배가 예정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이성의 도전은 교회의 권위주의적 성채를 해체하는 일에 성공하며, 역사는 혁명의 시대를 통과하게 됩니다. 지식은 권력의 기반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게 되고, 이제까지 은폐되어 있거나 질식해 있던 진실은 그 얼굴을 드러내게 됩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던 기존의 담론이 치열한 도전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반민족적 역사를 정당화해왔던 세력이 위기에 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이에 대한 교묘한 방어논리가 등장하면서 다시 주도권을 재탈환하려 하지만 도리어 역풍을 맞고 있습니다.

냉전논리를 앞세워 반민족적 행위를 정당하거나 또는 역사적 가상을 전제로 식민지 시대를 미화하려는 가공할 논리가 오늘의 현실에서 고개를 다시 들려 하다가 파산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이제 기존의 낡은 지식과 권력이 시대적 퇴장의 요구 앞에 서있음을 의미합니다.

그건 정형화된 신학적 교리로 선과 악에 대한 심판을 앞세우고 기득권을 유지했던 중세 가톨릭 교회의 운명과 닮아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새로운 진실에 대한 갈망과 새로운 지식과 권력의 변화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장미의 이름으로 말입니다.

* 이 글은 김민웅 박사가 교육방송 EBS 라디오에서 진행하는 "김민웅의 월드 센타"(오후 4시-6시/www.ebs.co.kr )에서 하는 5분 칼럼을 프레시안과 동시로 연재하는 것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