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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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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7>

계집종 욱면에 관한 추측

'나무 아미타불'을 염하는 사람들의 궁극의 목표는 '왕생극락'이다. 통일신라시대에 염불만으로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열성적으로 아미타불을 염불한 끝에 마침내 서방 극락세계로 올라갔다는 계집종의 이야기가 『삼국유사』 감통편 '욱면비 염불서승'조에 전해지고 있다.

계집종 욱면(郁面)의 이야기는 통일신라시대에 아미타신앙이 널리 펴졌음을 보여주는 주요 사례로 꼽히고 있다. 그가 계집종 신분으로 염불을 하여 극락을 갔다는'사실'은 아미타신앙이 신라 사회의 상층부 뿐 아니라 하층민들에게도 광범위하게 믿어졌다는 증거로 종종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또 여성사의 관점에서 "욱면은 계집종이라는 신분이었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염불하여 결국 부처가 되었다. 축생계에서 인간계로, 인간계에서 다시 신(神)으로, 욱면은 그야말로 윤회의 윤회를 거듭하면서 한 단계 위로의 상승을 되풀이하여 결국 완전한 존재의 변화를 완성한 여성이다."(길태숙 외, 『삼국유사와 여성』, 76쪽)라고 해석되기도 했다.

<사진 1> 강원도 고성군 소재 건봉사에는 경덕왕 때의 첫 결사에 이어 19세기 들어서 세 차레, 20세기에 두 차례 1만일 아미타염불결사가 이루어지면서 옛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 그래서 다른 사찰에 없는 '만일염불원'이라는 전각이 따로 있다. @김대식

욱면의 이야기는 윤회를 모티브로 하고 있어 이야기가 전생과 후생의 두 도막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일연은'향전(鄕傳)'과 '승전(僧傳)'이라는 두 자료를 이용하여 스토리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욱면비 염불서승'조 기사는 욱면의 후생 이야기로 시작된다.

"경덕왕 시대에 강주(康州)의 신도 수십 명이 서방정토에 왕생하고자 1만일 염불결사를 맺었다. 이때 아간 귀진(貴珍)의 집에 욱면이라는 종이 있었는데 욱면이 자기 주인을 따라 절에 가서는 절 마당에서 스님을 따라 염불하였다. 주인이 욱면을 미워하여 매양 곡식 두 섬씩을 주며 하루 저녁에 그것을 다 찧게 하였다. 욱면은 밤늦도록 곡식을 다 찧고는 절에 가서 염불하기를 밤낮으로 게을리 하지 않았다. 욱면은 마당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 위에 매어 놓고 합장하여 좌우로 움직이면서 스스로 격려하였다. 그때 하늘의 외침이 있어 "욱면 낭자는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하라"고 하여 절의 대중들이 계집종에게 법당에 들어오기를 권하여 염불에 정진하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서쪽 하늘에서 음악이 들려오더니 욱면이 집 대들보를 뚫고 솟아나가 서쪽 교외에 이르러 본래의 몸을 버리고 부처님으로 변하였다. 그리고는 연화대에 앉아 크게 광명을 발하면서 천천히 떠나가니 공중에서 음악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일연은'향전'으로 욱면의 후생을 이야기한 후, 이어서'승전'으로 욱면의 전생을 보여준다.

"동량 팔진(八珍)이라는 스님은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 그는 1천 명의 신도를 모아 무리를 둘로 나눈 뒤, 한 패는 정성껏 수행을 하고 나머지는 그 수행하는 편을 뒷바라지했는데 그 뒷바라지를 책임졌던 자가 계(戒)를 얻지 못하여 세 악도 중의 하나인 축생도(畜生道)에 떨어져 부석사의 소가 되었다. 그 소가 일찍이 경전을 실어 날랐기에 경전의 힘을 입어서 윤회, 전생(轉生)하여 아간 귀진의 집 종이 되어 이름을 욱면이라 하였다. 욱면이 일이 있어 하가산에 갔다가 꿈에 감응을 받고 드디어 도심(道心)을 발하였다. …… 아간이 절에 가서 염불할 때마다 계집종도 따라가 절 뜰에서 염불하였다."

일연은 이렇게 '승전'을 인용한 다음, 이번에는 자신 이야기로 마무리짓는다.

"그렇게 염불한 지 9년이 되는 을미년 정월 21일 욱면이 염불을 하다가 지붕을 뚫고 사라졌는데 소백산에 이르러 신 한 짝을 떨어뜨려 그곳에 보리사를 세웠고, 산 아래에 육신을 버렸기에 제2보리사를 지어 거기 불전(佛殿)에 '욱면등천지전'이라는 현판을 붙였다. 지붕 용마루에 뚫린 구멍은 열 뼘 가량 되었으나 폭우나 폭설이 와도 젖지 않았다. 그 뒤 어떤 호사가가 그 이적을 기념하여 금탑 한 개를 만들어 구멍난 반자 위에 앉히었다. 욱면이 떠나간 후 귀진 역시 자기 집이 이인(異人)이 의탁해서 태어난 곳이라 하여 집을 희사하여 절을 만들어 법왕사라고 하고 밭과 경작인들을 거기에 부쳤다.……"

<사진 2> 건봉사 부도밭. 건봉사에는 1904년에 세워진 '염불만일회 연기(緣起)비', 1908년의 '제2미타회 연기비' 등이 있고, 본 절에서 떨어진 휴전선 인접지역에 통일신라시대 아미타염불결사를 기념하는 '소신대 등공탑'이 있으나 이들은 모두 20세기 초엽에 세워진 것들이다.

근래 이 사건과 관련하여 새로운 사실이 하나 밝혀졌다. 학자들이 『금강산 건봉사 사적』에서, '승전'에서 인용된 것과 같은 내용을 찾아내어 욱면 전생의 무대가 강원도 건봉사였음을 밝히게 된 것이다. 『금강산 건봉사 사적』에는, 신라 경덕왕(재위 742~765년) 대에 원각사(지금의 건봉사)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염불결사가 만들어져, 장장 1만일에 이르는 기간을 염불수행한 끝에 승려 31인이 육신등공(肉身騰空)하고 이들을 뒷바라지했던 시주 913명이 왕생극락했다는 사실이 실려 있다. 팔진 스님의 1만일 염불결사가 경덕왕 대였다는 『금강산 건봉사 사적』 기록은, 욱면의 일이 경덕왕 대에 일어났다는'향전(鄕傳)'의 기록과 연대적으로 충돌하고 있다. 그러나 몇몇 학자들은 팔진 스님의 1만일 염불결사가 경덕왕 대의 일이며 욱면의 사건은 그 60여 년 뒤인 헌덕왕(재위 809~826년) 대의 을미년(815년)에 일어난 것으로 보아 '향전(鄕傳)'의 연대에 수정을 가하고 있는데, 나는 이 설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이 같은 사실의 발견과는 별도로, '욱면비 염불서승'조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나왔다. 강원대 신종원 교수가 '욱면비 염불서승' 조를 새로이 번역하면서 세세히 주석을 가하는 과정에서, 욱면이 "마당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 위에 매어 놓고 합장하여 좌우로 움직이면서 스스로 격려하였다."라는 대목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그는 "이 대목은 종래 욱면의 지극한 신앙심에서 나온 고행 정진(精進)하는 모습을 설화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아, 쉽게 수긍은 가지 않지만 별로 문제삼지 않았다."고 지적한 후, "그러한 고행이 자의에 의한 정진의 한 형태였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고는 욱면의 '고행정진'이, 사실은 주인 귀진에 의해 자행된 사형(私刑)이었으며 "욱면이 주인에게 손바닥을 꿰이는 등 모진 형벌을 받고 죽은 사실이 …… 망신(忘身) 염불 형태로 윤색되어 전해졌다"고 결론지었다. 그러한 윤색의 결과, 주인이 계집종에게 사형을 가해 숨지게 한 사실이, 아미타불을 믿음으로써 산 몸으로 서방의 극락정토에 왕생한 것으로 그릇 전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 서게 되면 '욱면비 염불서승'조를 전면적으로 새롭게 읽을 필요가 생긴다. 예컨대 아래와 같이 읽을 수도 있는 것이다.

"욱면이 주인을 따라 절에서 염불하기를 어언 9년, 욱면은 염불에 빠져 주인집 일을 소홀히 하게 된다. (이 점은 일연이 "내 일 바빠 큰댁 방아"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고 주석을 달았던 데에서도 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마침내 주인 귀진의 분노가 폭발하여, 욱면은 뭇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 절 마당에서 손바닥이 뚫려 노끈에 꿰이는 린치를 당하기에 이른다. "욱면 낭자는 법당에 들어가서 염불하라"는 하늘의 외침이란 린치를 보다 못한 주위 사람들의 동정 섞인 만류였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해서 린치가 중단되고, 욱면은 법당에 들어가게 된다."

이렇게 읽노라면, "욱면이 집 대들보를 뚫고 솟아나갔다"는 대목 또한 무심히 넘길 수가 없다. 욱면이 '대들보를 뚫고 솟아나갔다'는 표현은, 욱면이 취했던 어떤 행동을 극화시켰던 것일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어떤 행동이 있었던 것일까?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상상력을 발동하여 이렇게 새겨볼 수 있다.

"욱면은 법당에 갇히게 된다. 그 때 그를 딱하게 여긴 누군가가 갇혀 있던 욱면을 탈출시키는데 그 방법이 바로 지붕을 뚫고 빠져나가는 것이다. 지붕을 뚫고 탈출한 욱면이 소백산 쪽으로 도망을 가다가 도중에 짚신짝을 흘리게 되고, 거기서 얼마 더 가지 못하고 마침내 소백산 밑에서 쓰러져 죽는다."

만일 욱면이 그렇게 죽었다면, 주인인 귀진이 난처한 입장에 몰리게 되었을 것이다. 염불 수행으로 왕생극락하겠다던 사람이 염불하려는 자기 집 종을 박해하여 죽게 만들었으니,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을 것은 물론이다. 이에 귀진이 사건을 무마하려고, 고육책으로 자신의 집을 내놓아 법왕사라는 절로 만들고 자신의 논밭과 경작인들을 거기에 부치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과정에서 욱면이 린치 당하고 갇힌 끝에 지붕을 뚫고 도망가다 죽은 사실이, 서쪽 하늘로 날아올라 극락정토로 갔다고 미화된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욱면이, '염불하느라 직분을 소홀히 했던 종'이 아니라 '산 몸으로 서방 극락정토에 왕생한 이인'으로 추켜진 것은 혹시 아닐까?

***'욱면비 염불서승'조의 현장 지명에 대하여(별도기사로 처리)**

일연은 '욱면비 염불서승'조에서 '향전'과 '승전'을 구별하여 인용하면서 자신의 견해는 나중에 붙이는 조심스러운 고증 태도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 점은 지명에 대한 고증에서도 드러난다.

<사진 4> 영주 시내 쪽에서 바라본 소백산. 영주나 봉화 쪽에서 바라보면 소백산이 마치 그 일대를 감싸안고 있는 듯한, 무슨 병풍처럼 느껴진다.

욱면의 사건이 일어났던 무대와 관련하여 일연은 경덕왕대'강주'(康州)'라고 하면서, "지금의 진주(晉州)이다. 어떤 데에서는 '康'을 "剛'으로 쓰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지금의 순안(順安)이다."라고 주석을 달고 있다.

어떤 『삼국유사』 번역본에서는 이 주석의 첫머리에 나온 대로 강주를 지금의 진주(晉州)로 해석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일연이 말하는 순안(順安), 즉 지금의 경상북도 영주(榮州)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이유는 '욱면비 염불서승'조 본문에 등장하는 소백산, 하가산(지금의 학가산) 등의 지명으로 미루어, 이 사건 무대를 영주 지방으로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증 동국여지승람'을 보더라도, 제25권 영천군(榮川郡)조에 "본시 고구려의 내이군(奈已郡)이다. 신라 파사왕이 취했고, 경덕왕이 내령군(奈靈郡)이라 고쳤고, 고려 성종이 강주단련사(剛州團練使)로 고쳤고 현종은 길주에 귀속시켰더니, 인종이 순안현령(順安縣令)이라 고치……"라고 되어 있음을 볼 때, 고려시대의 강주(剛州), 순안(順安)은 조선시대의 영천(榮川), 그러니까 지금의 경북 영주(榮州)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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