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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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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82>

윈스턴 처칠, 대영제국의 마지막 영웅 (2)

영국군과 일부 연합군 병력이 프랑스 됭게르크 항으로부터 필사의 탈출에는 성공했지만, 장비와 물자를 다 버리고 온 터라 영국의 지상 전력은 대단히 취약한 상태였다.

영국은 사실상 고립된 처지였지만, 처칠은 민병대를 조직하는 등 각방으로 노력하면서 전쟁 의지를 국민들에게 열심히 불어넣었다. 처칠이 믿고 있던 것은 그간 아끼고 아꼈던 공군 전력이었다.

독일이 영불 해협을 건너려면 제공권이 선결 조건이었다.

독일 공군은 폭격기와 전투기를 합해 2,669대를 영불 해협 근처에 집결시킴으로써 영국의 1천여 대에 비해 수적으로 우세했지만, 영국 공군은 나름으로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영국 공군의 비밀 병기는 지금의 C3I(command, control, communication & information)에 버금가는 최첨단 통합지휘 시스템으로서, 지하 깊숙한 곳에 설치해놓고 독일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말해 영국 공군은 소프트 파워에서 앞서 있었다.

공중 전투는 1940년 8월 10일부터 개시되었으니 경진(庚辰)년 갑신(甲申)월 을유(乙酉)일이었다. 여기서의 관전 포인트는 영국은 임수(壬水)의 나라이니 그 식상(食傷)인 갑목과 을목이 영국의 힘이 되고, 독일은 경금(庚金)이니 임수와 계수가 힘이 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전투 개시일의 의미를 보면, 독일 측은 먹이를 먹기 위해 잔뜩 욕심이 올랐다는 것이고, 영국은 바로 갑신(甲申)월 을유(乙酉)일이니 최대한 힘을 쓰기 시작한 시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8월 10일 이후 연일 계속되는 공중전에서의 중요한 고비는 8월 15일로서, 양국이 모든 힘을 다해 붙었던 대규모 전투가 있었던 날이었다. 갑신(甲申)월 경인(庚寅)일이니 천간의 갑목(甲木)과 경금(庚金)이 상극(相剋)이고 지지의 신금(申金)과 인목(寅木)이 충(衝)으로서 극적인 날임을 말해준다.

즉 독일이 본격적인 공세로 나서자 이에 맞서 영국이 사력을 다하는 날임을 알 수 있다. 이 전투에서 서로의 피해가 컸고 영국은 다소 고전했으나 국면전환의 계기가 우연히 찾아들게 된다.

당초 독일의 전략은 전투기에 의해 호위되는 폭격기를 보내어 영국 공군의 비행장 시설을 공격하면 당연히 영국 측의 방공 전투기가 응전해 올 것이니 이를 통해 영국 공군의 전력을 소모시켜 자연스럽게 영국의 방어력을 약화시키자는 것이었다.

이 전략은 그리고 대단히 유효했으며 조금만 더 독일이 밀고 나갔다면 영국은 무너질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독일이 방향을 돌려서 공군 비행장 시설 대신에 런던을 폭격하기 시작하는 바람에 영국 시민들의 공포와 피해는 커졌지만, 영국 공군은 정비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되찾게 된 것이다.

왜 독일은 엉뚱한 작전변경을 택했던 것일까?

사건의 시초는 8월 23일 밤, 10여대의 독일 폭격기대가 범한 사소한 실수에서 일어났다. 본시 런던 교외의 비행기 공장과 기름 저장소를 폭격할 의도였는데, 항법 착오로 그만 런던 중심부를 폭격한 바람에 몇 명의 영국 시민이 죽거나 다치고 주택도 일부 파괴되었던 것이다.

이에 영국은 이를 의도적이라 판단하고 즉각 다음 날 밤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보복 폭격했다. 구름이 진하게 깔려 그다지 효과도 없었지만, 아무튼 베를린에 폭탄이 떨어진 것이 처음이라 폭발의 굉음이 주는 심리적 충격은 대단히 큰 것이었다.

베를린 시민들은 그들의 주거지에 폭탄이 떨어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는 독일 공군 원수의 보증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그런데 이 8월 23일이 음양오행으로 보면 대단히 재미있는데, 바로 무술(戊戌)일이기 때문이다. 무토(戊土)는 독일의 힘인 수기(水氣)를 눌러 판단 착오를 일으키게 되는 날이었던 것이다. 이른바 마(魔)가 낀 것이다. 바로 이 해프닝이 곤경에 몰리던 영국을 살려주게 된다.

그리하여 독일은 런던을 맹폭하고 영국 공군은 이를 요격하면서 다른 양상의 소모전으로 들어갔지만, 영국 공군의 피해는 현저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독일의 경우, 비행기가 피격당해 낙하산으로 탈출하면 아래가 영국 땅이거나 바다라 생환할 확률이 적지만, 영국은 홈그라운드라 조종사의 손실률이 급격히 줄기 시작한 것이다.

이런 양상의 전투에서 또 다시 극적인 날이 찾아오게 되니 바로 9월 15일이었다. 을유(乙酉)월 신유(辛酉)일인데, 천간의 을목(乙木) 하나를 신금(辛金)과 지지에 있는 두 개의 유금(酉金)이 공격하고 있다. 목기(木氣)가 힘이 되는 영국에게 있어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다.

양군의 손실은 엄청났으나 이 날을 고비로 전세는 영국 측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실점(失點) 위기를 넘기면 기회가 온다는 말과 같이 그 날 이후 급속도로 전세는 영국 측으로 기울었고 독일은 지치기 시작했다. 결국 대규모 공중전은 독일이 고삐를 늦추면서 마무리 국면으로 들어가서 10월이 되자 전투의 가쁜 숨결은 멎어들었다.

결국 10월 12일, 병술(丙戌)월 무자(戊子)일에 가서 영국 공군을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한 히틀러의 명령에 의해 상륙 작전은 무기 연기되었으니 사실상 영국의 찬란한 승리였다. 경금(庚金)인 독일에게 있어 병화(丙火)가 들어오니 불이 금을 극(剋)해서 어려워졌고, 거기에 무토(戊土)의 날이니 독일의 예봉(銳鋒)이 꺾였다는 의미가 된다.

이 대규모 공중전투에서 전후 밝혀진 바에 의하면 영국은 915대의 전투기를 상실했고, 독일은 1,735대의 폭격기와 전투기를 상실했다.

전투 기간을 살펴보면 처음 본격 전투가 시작된 8월 15일이 경인(庚寅)일이고, 그로부터 30일에서 하루가 더 지난 신유(辛酉)일이 절정이었으며, 그 뒤 한 달이 채 못 되는 10월 12일에 전투가 종결되었으니 사실상 이는 60 일, 즉 한 갑자(甲子) 기간동안의 전투였다.

승리한 처칠은 하원(下院)에 나가 "인류의 싸움터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소수의 사람으로부터 큰 은혜를 입은 예는 없었다."라는 명연설로서 영국 공군의 무훈을 치하했다.

독일이 60일 한 갑자의 사이클로서 공격을 멈춘 것은 나름대로 현명한 판단이었다. 세상사의 흐름을 보면 공세로 나가서 60일이 지나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그 때가 그만 둘 때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고집을 피워서 강행하면 일의 최초 개시일로부터 90일이 지나서 커다란 역공(力攻)이나 역풍(逆風)을 맞이하여 곤경에 처하게 되는 법이다. 그 좋은 예가 바로 1950년의 한국 전쟁이다.

김일성은 6월 25일 남침을 개시한 이래, 30일이 지난 7월 25 일, 신유(辛酉)일에 낙동강 방어선까지 진출했는데, 이후 다시 30일 뒤인 8월 24일까지 부산을 함락하지 못했을 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 UN군의 인천 상륙으로 역공을 당하면서 곤경에 처한 것이다.

그 이후 한국전쟁은 사실상 미국과 중국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전쟁이란 것은 서로의 의지가 충돌하는 격렬한 과정이건만 고래의 전사(戰史)를 살펴보면 이상하게도 30일이나 60일, 또는 90일의 정수배, 그리고 음양오행의 기본 순환 주기인 60 갑자(甲子)에 의거하여 전투가 종결되거나 전세가 역전되고 있다.

또 길게는 3년에서 6년, 이런 식으로 음양오행의 기본 단위에서 마디가 주어지니 음양오행이란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 필자는 늘 감탄을 금하지 못한다.

돌아가서 히틀러는 영국이라는 화근을 남겨둔 채, 전쟁을 소련 쪽으로 틀었는데 결국 영국을 제압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문제가 되어 전체 국면을 그르치게 된다.

처칠은 나라가 맞이한 절대 위기 시국에서 전 국민을 북돋아서 영국의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을 뿐 아니라,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십분 활용하여 마침내 미국마저 전쟁에 끌어들이니 사실은 큰 구도에서 이미 승리는 결정되고 만다.

즉 영국과 미국, 그리고 소련이 편을 먹고 독일은 약체 이탈리아나 일본이 있긴 했어도 전세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처칠은 그러나 1945년 을유(乙酉)년, 그로서는 가장 좋지 못한 을목(乙木)의 해에 총선에서 패배하는 바람에 종전을 보지 못하고 수상 직을 사임하게 되니 그 또한 운의 흐름이라 하겠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처칠이야말로 그다지 좋지 못한 운명을 타고 났어도 부단한 노력으로 거인(巨人)의 반열에 오른 진정한 용사이자 대영제국의 대미(大尾)를 장식한 영웅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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