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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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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규 명리학 <180>

히틀러, 그리고 제3제국 (2)

결론부터 말하면 히틀러의 성공 가도(街道)는 그가 나치의 당권을 장악한 1926년 병인(丙寅)년부터 제2차 대전을 일으키기 직전인 1938년 무인(戊寅)년까지의 12년 동안이었다. 12란 숫자는 자연 순환의 기본 주기이다.

그는 군수산업을 일으켜 그것으로 경제를 부흥하고, 영국과 프랑스, 소련을 위협하면서 연이어 영토와 세력권을 눈부시게 확장시켰는데 그것은 전쟁을 각오한 일련의 외교적 도박이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 등의 강호들은 불과 20년 전, 제1차 대전이라는 끔찍한 비극의 상흔에서 벗어나지 못했기에 반전 평화 사상이 만연해 있었고 히틀러의 발흥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것을 약점으로 삼아 그들 나라로부터 일방적인 양보를 얻어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그가 전쟁을 일으키면서부터 그의 빛나는 성공은 순식간에 그의 손아귀에서 새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히틀러의 성공과 좌절, 실패에 대해 분석해보면 그 역시 운명의 일반적인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아무리 좋은 운이라 하더라도 전체해서 24년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것이다.

24년이란 12년 기본 주기가 두 번 거듭되는 것이다.

히틀러의 경우 24년간의 운세 흐름을 대략 6년씩 네 단계, 즉 기승전결(起承轉結)로 나누어 분석해보면 확연히 드러난다. 이렇게 삶의 흐름이 단락 지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만, 다만 역사적인 인물의 경우 보다 극적이고 분명하게 나타난다.

기(起)의 단계 - 1919년 9월 12일 독일노동당에 가입한(1928년에 가서 히틀러는 당 명칭을 독일국가사회주의노동당, 일명 ‘나치’로 변경했다) 것이 상승운의 출발점이었다.

이어서 1920년 2월, 당의 선전부장이 되어, 뮌헨의 어느 맥주홀에서 유창한 연설로 2천명 이상의 청중을 모으면서 대중 정치인으로서의 두각을 나타내었다.

승(承)의 단계 - 1926 년 2월, 당 간부회의에서 북부 독일에서 경쟁조직을 이끌고 있던 G. 슈트라서를 제압하면서 나치의 당권을 완전히 장악.

전(轉)의 단계 - 나치스가 대중 정당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1933년 1월, 독일 총리로 임명.

결(結)의 단계 - 1938년 2월, 전쟁 반대파를 숙청한 후, 스스로 국방장관을 겸임하여 군부를 완전 장악한 이래 전쟁을 시작하여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에 이은 7월의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이 사실상의 운세 종말점이었다.

그리고 다음 해 1945년 4월 30일, 베를린 총통 방공호에서 자살한 것은 일종의 에피소드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사실상 히틀러 시대의 절정은 기승전결 중에서 당연히 승(承)과 전(轉)의 단계일 것이니, 1926년 병인(丙寅)년 당권을 장악한 이래, 외교적 성공을 연달아 이어가던 1938년 무인(戊寅)년까지의 12년이 된다.

따라서 1939년부터 일어난 제2차 대전은 마지막 결(結)의 단계로서 운세의 절정을 누리던 히틀러가 몰락으로 접어드는 입구(入口)에서 벌어진 일이고, 전쟁 자체가 몰락의 출발점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가 전격적으로 프랑스를 패퇴시키고 파리에 입성했을 때, 전 세계인들은 히틀러의 강성함에 경악했지만, 이는 몰락으로 가기 직전의 화려한 불꽃놀이였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을 준다.

겉보기에 강성한 것이 천년왕국의 출발점이 아니고 마지막 화려한 불꽃인 경우가 되는 것은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어렵지 않게 목도하게 된다.

결국 1942년과 1943년은 임오(壬午), 계미(癸未)년으로서 수운(水運)이니 병화(丙火)인 히틀러의 숨통을 죄는 기간이 되었고 이 기간 중에 그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패퇴하면서 급속도로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돌이켜보면 제2차 대전은 여러모로 의외성의 연속이었다. 만일 영국이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히틀러는 숙적인 프랑스를 격파하여 유럽에서의 패권을 확립한 후, 칼끝을 소련으로 향하여 결국 독소 전쟁에서 승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전혀 다른 오늘의 세계가 되었을 것이다.)

히틀러의 본심은 그의 책 ‘나의 투쟁’에서도 밝혔듯이 게르만 족이 영원히 정착할 동방 제국의 건설에 있었고, 소련의 스탈린 역시 제정 러시아의 확장정책에 충실하여 남서 방향으로는 발칸 반도, 북서로는 발트해로 진출하는 전통적인 코스를 택하고 있었기에 두 나라간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이리하여 히틀러는 전격적으로 프랑스를 항복시키는 망외의 성과를 거두자. 즉각 영국을 향해서는 유화 제스처를 지어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영국이 강경책으로 나온 것이었다. 전쟁 전까지는 극력 전쟁을 회피하던 영국이 한물 간 정객(政客)을 내각 수반으로 앉힌 후 전쟁을 지속한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던 것이다.

여기서 그 한물 간 정객이란 바로 윈스턴 처칠이다. 처칠은 한사코 독일과의 전쟁 의지를 강조함으로써 히틀러의 원대한 계획에 커다란 그리고 결정적인 구멍이 생겨버렸던 것이다.

히틀러는 몇 번이고 영국에게 유화(宥和) 메시지를 보냈지만, 처칠의 영국은 독일이 패망하는 날까지 싸우겠다고 전의를 불태우는 것이었다.

이 바람에 히틀러는 할 수 없이 영국과의 싸움에 본의 아니게 말려들었다. 영국은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이기에 영국을 제압하려면 영불 해협을 건너야 했고 그러기 위해선 강력한 영국 해군을 제압해야 했다.

그리고 해군을 제압하려면 영국 공군을 먼저 무력화시켜 제공권을 확보해야 했기에 독일은 1940년 경진(庚辰)년 여름부터 바다를 사이에 두고 영국과 격렬한 공중전을 전개했는데, 이를 ‘영국 의 전투(Battle of Britain)'라 부른다.

결국 이 공중전에서 히틀러는 영국 공군을 제압하는 데 실패한다. 그 해 9월 을유(乙酉)월에 절정에 달했던 전투는 10월 병술(丙戌)월이 되자 병화(丙火)가 독일을 상징하는 경금(庚金)을 제압하니 히틀러는 꼬리를 내려 10 월 12일에 가서 영국에 상륙하려던 작전을 무기한 연기하게 된다.

이는 경진(庚辰)년의 경금(庚金)을 10월 병술(丙戌)월의 병화가 들어오면서 독일의 기세를 한 풀 꺾어놓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실패는 히틀러 최초의 좌절이었다.

영국을 그대로 둔 채, 다음 해 여름에 가서 히틀러는 당초의 의도대로 소련을 침공하게 되는데 영국을 제압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화근이 되었다.

독일의 소련 침공은 1941년 6월 22일 새벽 3시에 시작되었다.

이를 음양오행으로 뽑아보면 다음과 같다.

연 신사(辛巳)
월 갑오(甲午)
일 신축(辛丑)
시 병인(丙寅)

천간에는 두 개의 신금(辛金)이 갑목(甲木)을 누르고 있지만 병화(丙火)가 있어 갑목을 지키고 있다. 거기에 지지에는 사화(巳火)와 오화(午火), 거기에 인목(寅木)이 있어 불의 기운이 대단히 강하다. 이는 결국 나무가 불의 기운을 빌려 금(金)을 제압한다는 뜻이니 전쟁은 실패를 의미한다.

소련 침공전은 초장부터 실패를 예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히틀러는 프랑스에서 독일육군이 보여준 신속한 승리에 도취되어 ‘우리가 문을 박차고 들어가면 소련은 무너지게 되어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전쟁이 시작된 지 석 달이 지나 9월, 정유(丁酉)월이 되자 화운(火運)이 들어오면서 소련의 반격이 만만치 않아졌다.

그리고 10월 무술(戊戌)월이 되자 겉보기에 전세는 독일이 모스크바를 포위하는 등 위급해보였지만 사실 독일의 힘은 여기가 한계였다. 소련을 상징하는 음양오행의 코드가 무술(戊戌)인 바, 무술월이 되자 소련은 힘을 내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이 시기가 사실상 히틀러의 몰락이 가시화되는 출발점이었던 것이다.

그 이후 히틀러와 독일군은 1943년 초 스탈린그라드에서 소련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그 이후의 정세는 급전직하 독일의 패망을 향하여 흘러갔고 결국 히틀러는 베를린의 방공호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러면 다음 글에서는 히틀러의 원대한 포부에 딴지를 걸었으며 결국에는 미국을 끌어들임으로써 전략적 균형추를 연합국 측에 돌려놓은 일등공신 처칠에 대해서 음양오행을 통해 알아보기로 한다.

마지막으로 간단하지만 재미있는 얘기를 하나 들려드리고자 한다.

현 한국 정치를 이끌고 있는 두 명의 핵심 인물은 두말 할 것 없이 노무현 대통령과 박근혜 한나라당 당수이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의 태어난 날의 간지(干支)는 공히 무인(戊寅)일이다.

물론 사주 전체의 구성은 다르지만, 무인일에 태어난 사람들은 정치 방면에서 성공을 거두는 예가 대단히 많다. 그래서 두 사람이 어떤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개인적으로 만나게 되면, 아마도 금방 공통점을 발견하고 친해질 수 있을 것이다. 생일의 간지(干支)가 동일하기 때문이다.

60 갑자이니 그 확률은 1/60 인데, 기이하게도 무인일 생의 정치가가 상당히 많다. 그리고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 중에도 무인일 생이 제법 많다.

미국의 힐러리 클린턴도 무인일 생이고, 멀리는 옛 소련의 스탈린도 태어난 날이 무인일이다.

물론 노 대통령이나 박근혜씨가 스탈린과 같은 냉혹한 독재자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나아가서 사주가 같다 해도 사람의 행동은 어디까지나 그 나라의 시대 환경과 역사의 산물(産物)이기 때문이다.

다만 무인(戊寅)일 생의 정치가가 상당히 많다는 점이 재미있어서 여기에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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