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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한인 美유입 막으려 ‘에네껜’ 유랑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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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한인 美유입 막으려 ‘에네껜’ 유랑민화”

MBC 다큐팀 日비밀문서 첫 공개, “배일성향 지속 사찰”

일본이 조선인들의 미국 유입을 막기 위해 멕시코 한인 이민자들을 유랑민으로 전락시키고 이후에도 끊임없이 사찰해 온 자료가 국내 방송사에 의해 처음으로 발견됐다.

이같은 사실은 MBC가 한국인들의 멕시코 이민 1백주년을 기념해 특집으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3부작 <에네껜(henequen)>(기획 최진용, 연출 정길화)의 제작진에 의해 처음으로 그 실체가 드러나게 됐다. 제작진은 오는 20일과 27일 방영되는 관련 프로그램에서 일본 외무성에 보관돼 온 비밀문서의 실체를 공개할 예정이다.

에네껜은 남미가 원산지인 용설란의 일종으로, 잎에서는 섬유를 채취하고, 꽃줄기의 수액은 풀케(pulque)라는 술을 만드는 데 사용된다. 에네껜은 한인들이 관련 농장에서 처음으로 일자리를 얻게 되면서 멕시코 이민자들을 대변하는 용어로 쓰여지고 있다. 멕시코 이민사는 국내에서 <애니깽>이라는 이름으로 지난 95년과 98년 각각 영화와 뮤지컬 등을 통해 소개된 바 있다.

***MBC 다큐팀, 멕시코 이민 ‘에네껜’ 조명**

제작진이 일본 외무성 외교 사료관에서 찾은 비밀문서를 통해 확인한 바에 따르면, 일본은 당시 하와이 한인들의 증가로 인해 일본인들이 미국 본토로 유입됨으로써 미국 내에 일본인 혐오 여론이 형성되는 것을 우려했다.

이를 막고자 일본은 국권이 실추됐던 대한제국에 압력을 가해 한국인의 멕시코 이민을 빌미로 하와이 이민까지 동시에 중단시켰다. 일본은 이후 유카탄 지역으로 한인들이 집단 이주하자 주멕시코 일본 영사를 동원해 한인들의 동태를 사찰하기도 했다.

1910년 국권 상실 이후에는 한인들을 일본 영사관의 관할 아래 들도록 회유·압박하고, 유카탄 한인들의 강한 배일성향이 재미 샌프란시스코 한인 조직이나 임시정부와 연계되지 않도록 예의 주시해 온 것으로 밝혀졌다.

일제가 멕시코 이민들을 사찰하게 된 것은 1902년 이후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이 본격화하면서 비롯됐다. 주로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해 온 한인들은 파업권에 눈뜬 일본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임금을 받으면서도 높은 생산성을 보였다. 당연히 농장주들은 한인 노동자들을 선호했고, 이로 인해 하와이에 정착한 일본인들은 점차 캘리포니아 등지로 이주하게 됐다.

그러나 19세기 중반 이후 미국에서는 이른바 ‘황화론’이 유포되면서 중국인들에 대한 혐오와 기피 경향이 심했다. 미국으로서는 또다른 동양계인 일본인들의 폭증을 막기 위해 이들에 대한 이민 배제법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다. 이는 명치유신으로 탈아입구(脫亞入歐)를 이루었다고 자부하던 일본으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었다.

이와 관련해 미국 이민사 전문가 웨인 패터슨(위스콘신 노버트대) 교수는 제작진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일본 외무장관 고무라는 ‘그동안 일본은 미국·프랑스와 같다고 생각해 왔는데, 만약 미국 본토에서 일본인 배제 법안이 통과되면 중국처럼 미국인들의 일본에 대한 인식이 낮아진다’며 반대했고, 어떤 방식으로든 미국의 일본인 배제법안을 한사코 막으려 했다”며 “그 방법은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을 막아 일본인들이 캘리포니아로 건너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했다.

***일제, 일본인 혐오 막으려 한인들 ‘희생양’ 삼아**

일본은 1905년 한인들이 멕시코 에네껜 농장으로 이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처음에는 이것이 한인들의 하와이 이민 추세를 돌려놓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에서인지 사실상 이를 방치하거나 조장했다. 실제로 일본은 한인들의 멕시코 이민 송출 과정에서 민간 회사인 ‘대륙식민합자회사’ 등을 통해 깊숙이 개입했다. 멕시코 에네껜 농장에 보낼 동양계 노동력을 구하던 국제적인 이민브로커 마이어스와 일본인들이 공모하여 한인 노동자들을 모집한 것이다.

이에 반해 일본의 멕시코 이주는 이미 1897년에 시작됐다. 치아파스 지방의 커피 농장 이민이 바로 그것인데, 일본은 멕시코의 여러 상황과 조건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열악하기 짝이 없던 유카탄 지역에 일본인이 가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한인들의 에네껜 농장 이민에 대해 그들이 관여할 일은 아니었던 셈이다.

그러나 일본은 한인들을 태운 이민선 ‘일 포드 호’가 출항할 때부터 한국 내 영사 조직을 총동원해 바로 실태 파악에 나섰다. 알프레도 로메로(멕시코 국립대) 교수는 “일본은 처음부터 한인들을 지속적으로 관찰했고, 그래서 한인들이 몇 명이고, 누구였으며, 또 어떻게 왔는가에 대한 내용을 일본의 문서에서만 발견할 수 있다”며 “한국은 물론 멕시코에도 없는 이같은 서류는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멕시코 에네껜 이민이 하와이 사탕수수 이민과는 비교도 안 되는 열악하고 가혹한 조건이라는 것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비판여론이 비등했다. 고종은 당시 외무 차관으로 있던 윤치호를 멕시코 현지에 보내 실태 조사를 시키고 대책을 마련하려 했다.

그러나 때는 바야흐로 을사조약 직전이었고, 일본으로서는 대한제국이 독립적으로 어떤 외교적인 문제해결을 도모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결국 하와이에 가 있던 윤치호는 일제의 교묘한 방해로 현지 실사에 성공하지 못했고, 고종은 더 이상의 추가적인 멕시코 이민을 금지해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그러자 이미 대한제국의 모든 상황을 장악하고 있던 일제는 “특정국가에만 차별적인 조항을 둘 경우 외교적으로 문제가 생긴다”며 압력을 가해 차후 이민법이 제정될 때까지 모든 나라에 대한 이민을 금지한다는 입장을 취하도록 만들었다. 웨인 패터슨 교수는 “당시 한국 외무부는 일본 정부의 강요로 멕시코뿐 아니라, 하와이 등 모든 해외이주를 중단해야 했다”며 “일본인들은 아주 영리해서 멕시코 한인 이주 사건을 이용해 한인들의 하와이 이주를 막았다”고 밝혔다.

이로써 1905년 제물포항을 떠나 멕시코 유카탄으로 떠났던 1천33명의 한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하고 고스란히 잊혀지고 버려진 존재가 됐다.

***‘에네껜’, 버려졌지만 애국심만은 높아**

하지만 유카탄 메리다 지방의 한인들은 1909년 계약기간 종료 뒤 비록 경제적으로는 열악했으나 대부분 자유로운 신분을 획득했다. 한인들은 자생적으로 국민회를 결성하는 등 드높은 단결력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두레·향약의 전통으로 상당한 수준의 자치도 실현했다.

일본은 이러한 한인들이 멕시코 유카탄 반도에 1천여 명이 넘게 거주하고 있는 상황부터가 불편했다. 때문에 현지 주재 요원을 동원, 한인들이 재미 샌프란시스코 한인 조직이나 임시정부와 연계되거나 또는 무장 항일 활동을 하지 못하도록 감시했다.

연출은 맡은 정길화 PD는 “멕시코 이민은 사실상 기민(棄民)이자 유민(流民)으로서 조국을 향해 돌이라도 던질 수 있는 버림받은 집단이었지만 이들의 항일 정신만은 엄청나게 뜨거웠다”며 “특히 이들은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 멕시코로 갔기 때문에 망국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1919년 3.1운동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이를 정신적 구심점으로 삼아 얼마 안 되는 수입 중에서 거의 10분의 1 이상을 임시정부를 위한 헌금으로 내놨고, 또 학교를 세워 무학자와 아동들에게 국어와 태극기도 가르치는 등 현재의 우리들에게 매우 중요한 교훈을 남겨주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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