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5>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김대식의 '現場에서 읽는 삼국유사' <5>

진표율사의 자취를 더듬으며: 김제 금산사

‘비원(悲願)’.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비장한 소원’ 쯤으로 새겨지지만, 불가에서는 중생을 구하려는 부처나 보살의 서원(誓願)을 일컫는다. 그 비원의 극치가 지장보살의 그것이다. 사찰에서 흔히 지장전이나 명부전에 모셔지는 지장보살은 미륵이 하생하여 성불할 때까지 중생의 제도(濟度)를 부촉(咐囑)받았다.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뒤부터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의 무불(無佛)시대에 중생을 제도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지장보살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은 지옥의 중생을 모두 구제한 뒤에야 성불하겠다고 서원하고 있어, 대승의 그 어느 보살의 비원보다 더 극진한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의 고승 진표의 신앙세계는 이런 지장보살에 대한 신앙과 미륵신앙이 뒤섞인 독특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이채롭다. 이러한 모습은 어쩌면 진표의 출가 동기와도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진표의 출가에 관하여, 송나라 승려 찬녕이 지은『송고승전』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진표의 집안은 대대로 사냥을 했다. 진표가 어느 날 짐승을 쫓다가 잠시 밭둑에서 쉬면서 개구리들을 잡아 버들가지에 꿰어 물 속에 두고는, 사냥을 계속해 다른 길로 집에 돌아가느라 개구리는 까맣게 잊었다. 이듬해 봄 사냥을 나간 진표가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 물 속을 들여다보니 그 전 해 버들가지에 꿰어두었던 개구리 30여 마리가 살아 있었다. 진표는 스스로를 책망하며 ”괴롭다. 입과 배가 저렇게 꿰인 채, 해를 넘기며 얼마나 괴로움을 당했을까?”하고 탄식하였다. 진표는 버들가지를 끊어 개구리들을 풀어주고 뜻을 세워 출가하기에 이르렀다.

진표에 관한 기사는 『송고승전』외에 일연의 『삼국유사』에도 비교적 상세한 편이어서 의해편 ‘진표전간’조와 ‘관동풍악발연수석기’조에 중복되어 나오고 진표의 제자들 이야기도 ‘심지계조’조에 실려 있다. ‘관동풍악발연수석기’조는 일연의 제자 무극이 ‘진표전간’조를 보완하려는 의도에서 덧붙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런 점에서 ‘진표전간’조와는 서로 다른 대목이 있고, 보다 자세한 대목도 있다. 출가 이후 진표의 행적을 ‘관동풍악발연수석기’조에서 살피자면 이렇다.

진표는 나이 12세에 금산사 숭제법사를 찾아가서 중이 되었는데 숭제법사가 사미계를 주고‘공양차제비법’과 ‘점찰경‘(점찰선악업보경)을 전하면서 “네가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과 지장 두 보살 앞에서 지성껏 빌어 참회를 하고 직접 계를 받아 세상에 전파하라”고 했다.

진표는 명산을 찾아다니며 수행하던 끝에, 변산의 절벽에 위치한 부사의방(不思議房)에서 망신참(亡身懺)이라는, 자신의 몸을 잊고 참회하는 수행을 하였다. 진표가 부사의방에서 3년 남짓 몸을 바위에 부딪쳐 팔뚝이 부러지고 피가 흘러내릴 정도로 수행했음에도 아무런 감응이 없었다. 이에 진표가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자 홀연 청의동자가 나타나 진표를 받아 바위 위에 뉘였다. 진표가 다시 참회수행을 계속하여 손과 팔이 꺾여져 떨어져 나갔는데 이레째 되던 밤에 지장보살이 와서 쓰다듬어 주어 손과 팔이 전과 같아졌다. 지장보살이 그제야 가사와 바리대를 주었다.

진표가 그 영험에 감복하여 전보다 갑절이나 정진하니 세 이레만에 천안(天眼)을 얻어 도솔천 무리들이 오는 모습이 보였다. 이때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나타나 미륵보살이 진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표가 신명을 돌보지 않고 지성껏 참회한 것을 칭찬했다. 지장보살은 진표에게 계율책을 주었고, 미륵보살은 자신의 손가락 뼈로 만든 패쪽 두 개를 주면서 말했다.

“네가 지금 이렇게 몸을 버리니 너는 후생에 대국왕(大國王)의 몸을 받아 도솔천에 태어날 것이다.”

두 보살이 사라진 후 진표가 금산사를 세우고자 산을 내려오니 용왕이 나타나 옥 가사를 바치면서 8만 권속을 데리고 금산사로 모시고 갔다. 사방에서 사람들이 모여들어 며칠이 못되어 절을 완성하였다. 다시 감응이 있어 미륵보살이 도솔천으로부터 구름을 타고 내려와 진표에게 계법을 주니 진표가 신도들에게 시주를 권해서 미륵장륙상을 주성(鑄成)하고 또 미륵이 내려와 계율을 주는 모습을 금당 남쪽 벽에 그려 모시었다.

‘관동풍악발연수석기’조에는 이렇게 진표가 금산사를 개창(開創)했다고 나와 있으나 ‘진표전간’조를 비롯 다른 사료들에는 진표가 금산사를 중창(重創)한 것으로 되어 있다. 진표는 금산사에 주석하다가 속리산을 거쳐 금강산으로 가서는 발연사를 창건하기도 했는데, 명주(溟州)에서는 물고기와 자라 무리가 몸을 잇대어 다리를 놓아 진표를 수중으로 모셔가서 설법을 듣고 계를 받기도 했다. 경덕왕이 이 소문을 전해듣고 진표를 대궐로 맞아들여 보살계를 받은 후 벼 7만7천석을 시주하고 왕의 친척들도 모두 계율을 받고 비단, 황금 등을 시주하였다.

진표가 몸을 돌보지 않고 참회, 정진한 것은 점찰경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진표전간’조는 진표가 지장보살로부터 계를 받고도 수행을 계속한 것은 뜻이 미륵보살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진표의 수행이 점찰경에 의한 것임에도 진표는 점찰경의 설주(說主)인 지장보살보다 미륵보살을 더 신앙했던 것이다.

오늘날 금산사에서 진표 당시의 미륵신앙 유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삼국시대 백제 미륵신앙의 근거지였던 익산 미륵사에서는 근래 발굴작업을 통해 3원 3탑의 정연한 가람배치가 밝혀져 미륵사의 설계가 미륵하생경의 내용에 바탕을 두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금산사의 경우에는, 방등계단이 미륵이 상생해 있는 도솔천을 상징하고 미륵전이 미륵이 하생하는 용화삼회를 상징한다는 학자들의 추정이 있을 뿐, 그에 대한 정확한 고증은 없다. 여기에 덧붙인다면, 익산 미륵사가 3원3탑 형식으로 용화삼회를 수평적으로 구현하였음에 비해, 금산사 미륵전은 용화삼회를 3층이라는 높이에 의해 수직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읽어 낼 수 있다는 정도이다. 그 뿐으로, 방등계단은 고려 때 혜덕왕사가 금산사를 중창할 때에 만들어졌고, 미륵전도 정유재란 때에 소실된 후 1615년에 재건된 것이고 보면, 미륵전의 원래 모습이나 초기의 가람 배치 형태는 알 길이 없다.

나는 금산사를 찾으면 으례 미륵전 위쪽 방등계단이 있는 ‘송대(松臺)’에 올라서 경내를 휘둘러보곤 한다. 그럴 때마다 발 아래로 학교 운동장 같은 절 마당이 휑뎅그렁하게 눈에 들어온다. 그 풍경은 또 엉뚱하게, 숱한 당우(堂宇)들을 거느린 해인사, 통도사, 송광사 같은 사찰의 오늘날 성세(盛勢)를 연상시킨다. 나는 금산사의 옛날이, 삼보사찰로 불리우는 그들 사찰보다 훨씬 은성하여, 온갖 이름의 당우들로 붐볐음을 알고 있지만 그러나 정작 옛 금산사의 전각 이름들은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

옛 금산사 당우들 가운데 진표와 관련된 전각들이 따로 있었던가? 어느날 문득 떠오른 물음이었다. 나는 문헌을 뒤져 금산사의 옛 당우들 이름 중에서 지장수계전(地藏授戒殿)과 미륵수계전, 그리고 진표영당이라는 전각 이름들을 찾아내었다. 진표가 지장, 미륵의 두 보살들로부터 계율을 받았던 일을 기념하고, 진표의 영정을 모셨던 그런 전각들이었으리라. 이런 전각들이 없어지고 이름들만 남아 있는 금산사는 내 마음 속에서 쓸쓸하다. 너른 마당 가 한쪽에 근래 화재로 불타서 새로 지은 대적광전이 있고, 거기서 모를 꺾어서는, 옛날 미륵전을 장엄하던 목탑의 흔적으로 복발과 보주를 지붕에 이고 있는 대장전이, 마당 건너 미륵전을 향하고 물끄러미 앉아 있는 풍경은 소슬하기만 한 것이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