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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최남선: 동ㆍ서양의 문호이자 위대한 석학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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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와 최남선: 동ㆍ서양의 문호이자 위대한 석학들

CEO출신 역술인 김남용이 본 '역사의 라이벌' <39>

세계적으로 유명한 역사학자인 토인비가 저술한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 에 보면 인간의 문명은 끊임없는 환경의 도전(challenge)에 그것을 이겨내는 끈질긴 응전(response)으로 발전한다고 말하면서 그것의 구체적인 설명으로 괴테의 희곡 파우스트(Faust)를 예로 들었습니다. 인류의 역사는 과거의 기록에 그치는 넌픽션이 아니라 미래를 창조하는 픽션이라는 말이죠. 즉 역사는 과거의 기록보다 미래의 창조에 기여해야 진정한 역사라는 것을 파우스트의 창조에서 구한 토인비의 혜안은 놀랄만한 것입니다.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로 무수한 팬을 확보하고 있는 그는 문학가이자 자연연구가이자 정치가이자 또한 철학자였습니다. 위대학 철학자 쇼펜하우어도 바로 괴테 지도하에 철학에 입문하였죠. 이토록 다재다능한 인물이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면 어떤 인물로 태어났을까요.

저는 주저없이 육당 최남선을 들겠습니다. 소질검색편에서 보시면 알겠지만 괴테보다 월등한 운명요소(사주)를 갖고 태어났으며 또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분으로서 학문이 매우 깊었던 분입니다.

양주동 선생이 소개한 일화 한 토막. 어느날 최남선 선생의 집을 방문했더니 그 서재의 어마어마함에 우선 놀라 자빠질 지경이었더랍니다. 호방한 최선생이 그때 양주동 선생에게 화장실에 다녀올 동안 갖고 싶은 책 한 권만 골라 가지라고 말했답니다. 급히 화장실을 다녀오면서 “이 사람이 혹시 그 책을 가져가면 곤란할텐데” 하면서 와보니 최선생이 가장 아끼던 바로 그 향가책 한권 달랑 들고 벌써 없어졌더랍니다. 양주동 선생의 객기와 재치가 돋보이는 일화중의 하나죠.

자 이 두 분을 소개합니다.

***괴테 [Goethe, Johann Wolfgang von, 1749.8.28~1832.3.22]**

프랑크푸르트암마인 출생. 독일 고전주의의 대표자로서 세계적인 문학가이며 자연연구가이고, 바이마르 공국의 재상으로도 활약하였다. 아버지는 법률가이며 제실고문관으로서 엄격한 성격이었으며, 시장의 딸인 어머니는 명랑하고 상냥하여 아들의 좋은 이해자였다. 7년전쟁(1756∼1763) 때에는 프랑스에 점령되어 평화롭고 부유했던 괴테의 집도 프랑스 민정장관의 숙사가 되고,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계획 역시 중단되었으나, 괴테는 자유롭게 프랑스의 문화에 접할 기회를 얻었으며, 15세 때 그레트헨과의 첫사랑을 경험하였다.

1765년에 라이프치히대학에 들어가 법률을 공부하면서 자유분방한 생활을 보내다가, 1768년 각혈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요양생활을 하였다. 그 무렵에 신비주의와 중세의 연금술에 관심을 갖게 되고, 1770년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머무르면서 J.G.헤르더를 알게 되어 종래의 로코코 취미의 문학관은 철저히 분쇄당하고, 셰익스피어의 위대성을 배우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 감정의 순수성에 시의 본질을 구하려는 노력이 《들장미》의 가작을 낳게 하였다.

이 무렵 근처 마을 목사의 딸 프리데리케 브리온과 목가적인 사랑을 하였고 약혼까지 하였으나, 결국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하였다. 그 후 회한과 마음의 부담 속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게 되는데, 이 때 겪은 내적 체험이 훗날 그의 시의 주제가 되었다. 1771년 변호사가 되어 고향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하였고, 1772년에는 제국 고등법원의 실습생으로서 몇 달 동안 베츨러에 머물렀다. 이 때 샬로테 부프와의 비련을 겪고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1774)을 썼는데, 이 작품으로 일약 문단에서 이름을 떨쳤고, 독일적 개성해방의 문학운동인 ‘슈투름 운트 드랑(Sturm und Drang:질풍노도)’의 중심인물로서 활발한 창작활동을 하였다.

1775년에 바이마르 공국의 젊은 대공 카를 아우구스트의 초청을 받고 바이마르로 가서 여러 공직에 앉게 되고 재상이 되어 10년 남짓 국정에 참여하였다. 이 동안 그는 정치적으로 치적을 쌓는 한편, 지질학 ·광물학을 비롯하여 자연과학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1784년, 동물에만 있고 인간에게는 없는 것으로 되어 있던 간악골을 발견하여(죽기 1년 전에 학회에서 인정되었음) 비교해부학의 선구자가 되었다. 이 무렵 괴테는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 12년에 걸친 연애를 하여, 부인으로부터 인간적 및 예술적 완성에 큰 영향을 받았으나, 1786년에 이탈리아 여행을 떠남으로써 부인과의 애정관계는 끝을 맺었다.

1788년에 바이마르에 돌아온 괴테는 조화업을 하는 가난한 집안의 딸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를 만나 동거하면서(정식 결혼은 l806년), 비로소 가정적인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이 무렵에 그는 시인과 궁정인의 갈등을 그린 희곡 《타소 Torquato Tasso》(1789)와, 관능의 기쁨을 노래한 《로마 애가》(1790)를 발표하였다. 과학논문 《식물변태론》도 이 시기의 산물이다. 1791년에는 궁정극장의 감독이 되었으며, 그 때부터 고전주의 연극활동이 시작되었다.

한편, 1789년 이후의 프랑스 혁명의 격동은 바이마르 공국도 휩쓸게 되어, 1792년에 괴테는 아우구스트 대공을 따라 프랑스로 종군하였다. 1794년부터 그는 J.C.F.von 실러가 기획한 잡지 《호렌 Horen》에 협력하여 굳은 우정을 맺었다. 이념의 사람 실러와 실재(實在:자연)의 사람 괴테와의 이 우정은 l805년에 실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10년 남짓한 시기에 괴테는 실러의 깊은 이해에 용기를 얻어 많은 작품을 완성하였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파우스트 Faust》의 재착수, 《빌헬름 마이스터의 도제 시절 Wilhelm Meisters Lehrjahre》(1796)의 완성,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 Hermann und Dorothea》(1797)의 발표 등, ‘현재에서의 완성을 지향하는’ 독일 고전주의는 여기서 확립되었다.

만년의 문학작품으로서는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Wilhelm Meisters Wanderjahre》(1829)와 《파우스트》의 완성이 최고봉을 이룬다. 전자(前者)는 당시의 시대와 사회를 묘사한 걸작이라 할 수 있으며, 후자(後者)는 한 인간의 생애가 전인류의 역사에 뒤지지 않는 깊이와 넓이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엄한 드라마이다. 《파우스트》는 23세 때부터 쓰기 시작하여 83세로 죽기 1년 전인 1831년에야 완성된 생애의 대작이며, 세계문학 최대걸작의 하나이다. 인생과 우주에 대한 지칠 줄 모르는 정열가였던 괴테는 만년에도 세 차례의 연애를 체험하였다.

또한 그의 광학 연구의 결정인 《색채론 Zur Farbenlehre》이 1810년에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뉴턴의 이론에 대한 잘못된 비판이 들어 있어 순학문적인 견지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으나, 탁월한 관찰과 견해가 많이 보이고 있다. 괴테는 문학작품이나 자연연구에 있어서, 신과 세계를 하나로 보는 범신론적 세계관을 전개하였으며, 그의 종교관은 범신론적 경향이 뚜렷하지만, 복음서의 윤리에는 깊은 존경을 표시하였다. 그의 유해는 바이마르 대공가의 묘지에 대공 및 실러와 나란히 안치되어 있다.

***최남선 [崔南善, 1890.4.26~1957.10.10]**

본관 동주(東州:鐵原). 호 육당(六堂). 자 공륙(公六). 아명 창흥. 세례명 베드로. 자습으로 한글을 깨쳐 1901년(광무 5)부터 《황성신문》에 투고했고 이듬해 경성학당에 입학하여 일본어를 배웠다.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소년반장이 되어 도일, 도쿄부립중학에 입학했으나 3개월 만에 귀국했다가 1906년 다시 도일, 와세다[早稻田]대학 고등사범부 지리역사학과에 입학하여 유학생회보인 《대한흥학회보》를 편집하여 새로운 형식의 시와 시조를 발표했다.

1907년 모의국회 사건으로 퇴학, 이듬해 귀국하여 자택에 신문관을 설립하고 인쇄와 출판을 겸했으며 다음해 잡지 《소년》를 창간하여 논설문과 새로운 형식의 자유시 〈해(海)에게서 소년에게〉를 발표하는 한편 이광수의 계몽적인 소설을 실어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09년 안창호와 함께 청년학우회 설립위원이 되고, 이듬해 조선광문회를 창설하여 고전을 간행하고 20여 종의 육전소설을 발간했다. 13년 다시 《아이들 보이》를 창간했으나 이듬해 폐간되자 다시 《청춘(靑春)》을 발간하여 초창기 문학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1919년 3 ·1운동 때는 독립선언문을 기초하고 민족대표 48인 중의 한 사람으로 체포되어 2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다음해 가출옥했다. 1922년 동명사(東明社)를 설립, 주간지 《동명(東明)》을 발행하면서 국사 연구에 전념했다. 1924년 《시대일보》를 창간, 사장에 취임했으나 곧 사임, 이듬해 《동아일보》의 객원이 되어 사설을 썼다. 1927년 총독부의 조선사편찬위원회 촉탁을 거쳐 위원이 되고, 1932년 중앙불교전문학교 강사가 되었다.

1938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만몽일보(滿蒙日報)》 고문으로 있다가 1939년 일본 관동군이 세운 건국대학 교수가 되었고, 귀국 후 1943년 재일조선인 유학생의 학병지원을 권고하는 강연을 하기 위하여 도쿄로 건너갔다. 광복 후 우이동에 은거, 역사논문 집필에 전념하다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소되어 1949년 수감되었으나 병보석되었다. 6 ·25전쟁 때 해군전사편찬위원회 촉탁이 되었다가 서울시사 편찬위원회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그 후 국사관계 저술을 하다가 뇌일혈로 작고했다.

신문화 수입기에서 언문일치(言文一致)의 신문학운동과 국학(國學) 관계의 개척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이원(利原)의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를 발견하였다. 저서에 창작 시조집 《백팔번뇌(百八煩惱)》, 시조집 《시조유취(時調類聚)》, 역사서 《단군론(檀君論)》 《조선역사》 《삼국유사해제》 《조선독립운동사(朝鮮獨立運動史)》 등 다수가 있다.

자, 이 두 인물을 운명요소로 비교하겠습니다.

① 괴테
생년월일 : 1749년 8월 28일 인시
운명요소 : 기사년 임신월 계해일 갑인시 ( 己巳年 壬申月 癸亥日 甲寅時 )

② 최남선
생년월일 : 1890년 4월 26일 술시
운명요소 : 경인년 임오월 을축일 병술시 ( 庚寅年 壬午月 乙丑日 丙戌時 )

***1. 소질 검색**

① 괴테(己->壬<-癸->甲)

우선 계와 갑(癸->甲)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기술창조개발형인데 그다지 우수하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글재주와 손재주, 과학적 두뇌 등이 바로 이 소질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하겠습니다. 극히 외향적이면서 독선적인 면이 많은 그런 소질입니다. 두 번째는 계와 기(癸<-己, 己->癸)의 관계입니다.

상사에게 헌심충의형이면서 자기 사업에도 투철한 보스형입니다. 이 소질이 그로 하여금 바이마르 공국에서 재상이 되어 그의 경륜을 펼치는 계기가 됩니다.

② 최남선 (庚->壬->乙<-丙)

우선 을과 병(乙<-丙)의 관계입니다. 천재감별법에서 이것은 기술창조개발형의 A급에 속하는 천재입니다. 괴테보다 훨씬 창의적인 소질이죠.

그 다음 을과 임(乙<-壬)의 관계입니다. 이것도 자료수집 아이디어형에서 준영재에 속하는 우수한 소질입니다. 그의 장서가 유명한 것은 바로 이 소질에 기인한 것이겠죠.

그 다음 을과 경(乙<-庚, 庚->乙)의 관계입니다. 이 소질은 빈틈없이 찬찬하면서 법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리더형의 우수한 소질이죠.

③ 소질 종합 판단

창의력에서는 최남선 선생이 매우 우수하여 돋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교유관계 등에서 괴테가 더 대중적이라고 할까요. 즉 사업가적 기질이 우수해서 유명해졌다고 하겠습니다.

***소질표**

***2. 욕망 검색**

① 괴테 (癸일에 申월)

명예욕이 아주 많습니다. 더구나 금(庚,辛)으로 천간에 투출이 되지 않아서 현실 만족이 안 되어 끊임 없는 명예욕에 괴롭습니다.

② 최남선 (乙일에 午월)

자기 표현욕이 아주 많습니다. 더구나 丙으로 천간에 투출되어 현실적으로 동기부여가 아주 만족스럽게 되고 있습니다.

***3. 본능검색**

***본능표*****4. 개성 검색**

***개성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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