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화면으로
'실종된 개혁', 흔들리는 '참여'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밴드 공유하기
  • 인쇄하기
  • 본문 글씨 크게
  • 본문 글씨 작게
정기후원

'실종된 개혁', 흔들리는 '참여'

<시론> 노무현 집권 3년째를 맞으며

개혁을 깃발로 내세웠던 노무현 정권에서 “개혁의지”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어느새 노무현 정권은 이 사회 상류층의 논리와 정서, 그리고 목표를 자신의 것으로 삼고 있는 듯이 보인다. 해서 “실용주의”라는 말이 개혁을 대신하고 있으며, “선진”이라는 단어가 역사적 요구를 압도하고 있다.

“실용주의”라든가 “선진”이라는 용어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것은 개혁정치와 역사적 원칙과 결부되어 있을 때에 비로소 빛나는 것이지 그렇지 않다면 여기에는 모종의 반개혁적, 반역사적 의지나 음모가 개재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종된 개혁의지**

이 땅의 서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나 소외감, 그리고 박탈의 현실에 대한 정치적 분노는 의롭다. 그리고 그것은 그저 의로운 분노로 끝나지 않고, 하기에 따라서 “위엄 있는 개혁”으로 승화될 수 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은 그 대신 기득권 세력과의 어깨동무에 더욱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모양이다. 가령 이 나라 대기업의 필두에 서 있는 삼성과의 편향적인 친화력 과시는 물론이거니와, 이달 초 낙마로 끝난 교육인적자원부 부총리 인사 문제도 그런 혐의를 두기에 그다지 부족하지 않아 보인다.

최근에 일어난 후자의 경우는 노무현 정권의 개혁의지 실종과 관련해서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되새김질해야 할 것이 아닌가 싶다. 정부와 언론은 이 문제가 이른바 “인사 시스템”상의 문제 정도로 취급하고 있으나 인사의 방향과 요구를 기본적으로 확정하고 선택하는 것은 대통령의 몫이라는 점에서 그런 수준에서 논할 사안이 아니다. 대통령의 철학과 의지에 반하는 인사 시스템 가동이 아니었던 것이다.

교육문제는 지난 2004년 내내 우리 사회에 막대한 파장과 논쟁을 불러 왔다. 수능 부정시험 등의 사태도 교육관련 정책의 허와 실에 대한 개혁적 접근이 얼마나 중차대한가를 일깨웠다고 하겠다. 교육은 다만 교육영역의 현안으로 그칠 수 없게 된 것이다. 한국사회가 방향설정을 제대로 하지 못할 때, 교육은 휘청거릴 수밖에 없으며 무수한 후대세대들이 희생당하게 되어 있다.

***대통령의 교육철학**

따라서 이 문제는 우리 사회 전반의 목표와 관련해서 총체적 안목과 철학이 있어야 감당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전망을 어떻게 세우느냐의 문제이며,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의 사안인 것이다. 그런데 정작 노무현 대통령은 어떠했는가? 그는 교육과 관련해서 “대학교육은 산업”이라는 말로 교육의 인문학적 근거는 도외시한 채 기업의 요구에 맞춘 교육과정 개편이라는 논리로 이른바 “대학교육 개혁”의 가닥을 잡은 것이다.

올바른 인간과 사회를 위한 끊임없는 질문과 비판적 성찰을 해낼 수 있는 능력을 전제로 하는 산업이라면 그것은 반대할 까닭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인문학적 사색의 힘과 사회과학적 역량에 대한 시대적 천시로 대학교육의 근본이 붕괴되어가고 있다는 염려가 깊은 터에, 만일 대학을 생각 없는 기술자 양성소 쯤으로 여기고 대한다면 그것은 개혁이 아니라 개악이다.

대통령 발언의 본의가 그것이 아니었다면, 대학교육의 인문학적 위기에 대한 고민을 하면서 이를 함께 담아내는 개혁의 그림을 내걸어야 했다. 한 사회의 발전과 성숙은 다만 산업적 요구에 부응하는 과학기술로서만 아니라, 전인적 교양인으로서의 소양을 지속적으로 키워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사회의 미래는 올바른 방향으로 자신을 추슬러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교육 개혁은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 사회 전체 목표의 철학적 검증을 기초로 하는 대대적인 사안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육이 우리 사회의 계급적 서열을 재생산해내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을 탈각해낼 방도 또한 우리는 고뇌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만성적인 교육관련 부정과 논란, 그리고 과도한 경쟁주의로 병들어가는 우리 사회를 구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교육개혁에 대한 노무현 정권의 인식에는 이러한 면모가 드러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기득권 질서의 온존 내지는 확대 재생산에 기여할 뿐, 우리 사회가 지금 고통 받고 있는 정치경제적 양극화와 사회 계층적 위계질서의 극복과는 점점 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고 하겠다.

***청와대 인사 시스템은 대통령의 의지와 충돌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자면 논란이 되었던 “청와대 인사 시스템”이란 이러한 대통령의 견해와 의지에 대한 보완장치일 뿐, 그것을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산업적 차원의 교육 재편을 추진할 수 있는 인물에 대한 추천과 선택이라는 것이 주어진 과제일진대, 인사 시스템은 그에 부응할 수밖에 없다.

즉, 이번 이기준 전 서울대 총장의 경우처럼, 개인적 오점이 혹 없다 해도 교육개혁이 이러한 대통령의 인식 영역에 머물러 있는 한, 사태의 심각성은 여전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나마 이번에는 그런 문제의 일단이 드러나 다행스럽기조차 하다. 아니었다면, 교육부 수장의 선택과 관련해서 의미 있는 논의가 아예 진전되기 어려웠을 수도 있었다.

언론개혁의 경우에도 정부와 여당의 의지는 애매모호하다. 이미 이와 관련한 시민사회 단체의 대안들은 넘쳐날 정도로 마련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개혁을 추진하기 위한 정부와 여당의 의지나 전략은 똑 부러지지 않는다. 언론개혁을 밀고 나가기 위해 그동안 애썼던 시민사회 단체는 오늘날 허탈해하고 있다.

국가보안법 문제에 이르러서는 국민적 공감대를 확대해나가기 위한 의지나 정책적 지혜는 말할 수 없이 빈곤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평가이다. 우리 사회 내부의 반역사적 세력과의 싸움에서 개혁의 유리한 고지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치밀하고도 치열하게 추진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제도권 밖에서의 의지와 비교해보면 그 당장에 알 수 있다. 말만 꺼내놓고, 현실을 내세워 개혁관련 조처들에 대한 사회적 동력을 일으켜 세우고 추진하는 모습을 제대로 보이지 않은 것이다.

***개혁을 위한 시민사회의 동력**

개혁의 좌초와 관련해서 정부와 여당의 논법은 언제나 동일하다. 상대가 있다는 것이다. 대화와 타협을 통해 현재의 조건에서 가능한 경계선 안에서 이루어야 할 바를 이루면 그나마 그것이 나름의 성과라고 한다. 이상적 목표를 일방적으로 주장하기만 하면 되는 시민사회단체나 정치 비평가들의 입장과는 달리, 현실의 여러 가지 조건들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은 다르다는 반론이다.

일견 옳은 듯 보인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개혁추진에 대한 사회적 역량을 시민사회 단체는 희생적으로 동원해내었고 그것을 최대한 활용할 것을 주문해왔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도 되지 못했다면, 그것은 현재의 역사적 단계에서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다고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이러한 사회적 동력과 정치적으로 충분히 결합하려는 노력도 없이 사안을 대해왔다고 한다면 그것은 누구의 책임으로 돌아갈 것인가?

일부 개각과 관련해서 나온 대통령의 발언도 주목된다. 첫째, 문제가 없다 해도 상황에 따라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논리, 둘째, 2년 정도의 시간이 지나면 피로해지고 타성에 젖어 업무 수행에 문제가 생긴다는 논리. 일국의 국사를 책임져야 하는 장관 선택과 교체에 대한 대통령의 인식이 이렇다면, 그것은 개혁이라는 중대한 과제를 밀고나갈 수 있는 역량을 격려하고 지원할 자세가 애초부터 없다는 식으로 들린다. 정치적 소모품 내지는 교체부품 정도로 인식되는 장관에게서 그 어떤 충만한 개혁의지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노무현”이라는 이름의 역사적 의미와 그 무게**

지난 2002년 대선의 지점에 다시 서서 생각해보자. 당시 가장 큰 역사적 요구는 두 가지로 압축되었다. 그 하나는, 이 땅의 힘없고 소외되어 있던 서민들의 삶을 가로막고 있는 수구적 기득권 질서를 개혁하라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바로 그런 기득권 질서 유지의 본질적 세력인 내부의 냉전세력과 미국의 전쟁주의 정책에 대한 자주적 입지를 바로 세우라는 것이었다.

“노무현”이라는 이름은 따라서 단지 하나의 정치적 개인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역사적 개인”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무의 실체였다. 기득권 질서에 속해 있던 이회창이나 정몽준과 비교할 때 노무현은 “서민과 자주 그리고 평화를 위한 일체의 개혁적 역량을 대변,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다.

노무현 정권의 성립과 그 정치적 과제는 이러한 의미에서 그 출발점에서 “반(反) 기득권”적이었으며, 이를 얼마나 성실하고 원칙 있게 개혁노선으로 풀어갈 것인가가 정권성패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기득권 질서와의 쟁투가 순탄하게 될 리 만무하고 사회적 갈등이 비타협적 내전의 양상으로까지 가라는 것은 아니었다. 때로 일정한 후퇴가 현실에서 있다 해도 본래의 원칙은 고수하면서 전술적 변화나 유연성은 인정하겠다는 것이 지지 세력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자면 노무현 정권은 개혁전략의 내용을 충분히 준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풀어가는 전략적 지혜도 부족했다. 이런 것들은 일단 경험 부족이라고 치고 이해의 폭을 넓혀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그 어떤 난관이 있다 해도 개혁의지만큼은 국민들의 뜻과 열망을 믿고 약화시키지 않겠다는 자세를 굳건히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러한 대통령의 생각과 입에 매달려 있던 여당은 갈 지(之)자로 정치적 행보의 혼란을 보였고, 기득권 세력과의 타협 내지는 적극적 유착까지도 실용주의적 선택이라는 명분 아래 정당화해버리는 논리를 펴게 된 것이었다.

***희망의 동기부여**

오늘날 한국정치와 경제가 이렇게 돌파구가 보이지 않는 파행과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는 까닭은 여러 가지로 분석될 수 있겠으나, 이 개혁과제를 풀면 이러 저러한 새로운 시대가 온다는 희망의 동기부여에 실패해버린 노무현 정권에게 그 일차적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 이게 변하면 저렇게 되겠구나 그러니 이러한 변화에 내가 좀더 적극적으로 나서야지 하는 그런 정치사회적 흥분과 기대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개혁의 열정은 차치하고라도 미래에 대한 삶의 의지조차 허약해지거나 병들어가게 된다.

“참여정부”의 핵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새로운 개혁적 변화에 대한 열망의 언덕을 넘어 펼쳐지는 미래의 들판을, 기운차게 달려보고 싶은 이 땅의 백성들이 뿜어내는 에너지를 얼마나 역사의 동력으로 삼아낼 수 있겠는가의 여부에 있다. 그 힘이 “참여”의 근본으로 뜨겁게 살아 움직이지 않으면, 언젠가의 장래에 그 동력은 거꾸로 참여정부에 대한 역사적 심판의 칼날로 변모하게 될 것이다.

***개혁은 민생경제의 정치적 근거지**

아마, 이미 그 변화는 시작이 된 지 오래인지도 모를 일이다. 개혁을 내세워 집권한 세력이 개혁을 외면했을 때 주어질 운명은 역사가 입증한 지도 또한 오래임을 망각한 것일까?

더 이상의 패착을 중지하고, 무엇보다도 사회적 양극화로 인한 이 땅의 고뇌를 걸머지고 힘없는 서민들의 눈물을 닦아내는 “깊은 성찰과 따듯한 영혼을 지닌 정치”를 향해 가야 한다. 기득권의 논리와 힘을 이겨내지 못하면, 민생과 이 땅의 평화는 지속적으로 위협받게 될 것이다.

개혁을 이쯤해서 접는 것은, 서민경제의 중심을 올바로 세우는 작업을 하기 어려운 길로 들어서는 관건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지금 그토록 강조되고 있는 진정한 민생경제의 회복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언제나 정치경제적 주도권의 향방이기 때문이다. “개혁”은 바로 이 주도권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정치적 근거지이다.

*이 글은 디지탈 말이 대자보, 미디어몹 등과 공동기획한 신년 특집기사로 게재된 것입니다.

이 기사의 구독료를 내고 싶습니다.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1,000 원 추가
-10,000 원 추가
매번 결제가 번거롭다면 CMS 정기후원하기
10,000
결제하기
일부 인터넷 환경에서는 결제가 원활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kb국민은행343601-04-082252 [예금주 프레시안협동조합(후원금)]으로 계좌이체도 가능합니다.
프레시안에 제보하기제보하기
프레시안에 CMS 정기후원하기정기후원하기

전체댓글 0

등록
  • 최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