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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 김구: 건국의 갈림길, 이상과 현실의 영원한 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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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대 김구: 건국의 갈림길, 이상과 현실의 영원한 괴리

CEO출신 역술인 김남용이 본 '역사의 라이벌' <35>

60년전인 1945년 을유년 해방정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거대한 두 인물의 투쟁사, 김구의 주장대로 우리나라 스스로의 힘만으로 독립하는 이상적 자주국가냐, 아니면 이승만의 주장대로 미ㆍ소가 겨루는 국제적 헤게모니 쟁탈전 사이에서 현실적인 단독 정부 국가냐. 지정학적으로 대륙의 숨통에 해당하는 우리나라가 세계 양대 세력의 각축장으로 돌변하던 그때의 얘기입니다.

역사적 대사건에서 우리나라를 괴롭히는 것은 대국들간의 격돌에서 꼭 우리나라가 본의 아니게 개입된다는 사실입니다. 즉 우리나라는 전쟁터를 제공하는 군침 도는 훌륭한 먹이감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삼국시대때는 고구려가 중국 대륙과 직접 전쟁을 하는 관계였으니 그렇다치고 그 이후 고려 때는 원나라의 강대한 힘에 굴복한 후 일본 정벌에 길잡이로 나서는 사건이 벌어졌고 조선조때는 중국의 명ㆍ청 싸움에 어느편을 들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청으로부터 침략을 당하는 수모를 당했으며(병자호란, 정묘호란), 또 일본이 명나라를 친다고 하면서 길을 빌려 달라는 명목으로 우리나라만 쑥대밭을 만들어 놓는가 하면 (임진왜란, 정유재란), 대한제국 시에는 우리나라를 미끼로 청일전쟁, 노일전쟁을 벌여 큰 피해를 입었으니 정말 분통 터지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 해방이 되었다고 우리 국민들이 얼마나 좋아했습니까. 일제 36년을 국가 없이 노예처럼 살다가 드디어 해방!! 그러나 좋아하는 것도 잠시뿐. 이번에는 미국과 소련이 자기 세력권 안에 대한민국을 잡아두기 위해 각축을 벌이고, 그 와중에 동족상잔까지 일으키고 말았으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멍청하기 그지없는 비극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도 그 잔재가 남아 서로 눈 흘기고 적대적인 이 민족의 이 아픔, 힘 없는 나라만이 당하는 이 업보, 언제 어떻게 해결할 것입니까.

아직도 우리는 외교 정책을 펼 때마다 자주적 외교냐 아니면 국제 헤게모니 역학상 강국에 편을 들어야 하느냐로 논쟁하느라 계속 골머리를 앓고 있으니, 이상과 현실의 메꿔지지 않는 영원한 괴리 속에서 언제나 헤어나겠습니까. 싸움만 할 게 아니라 머리 맞대고 의기투합하여 이 민족을 좀 슬기롭게 끌고 나갈 지도역량들은 없습니까.

***이승만[李承晩, 1875.3.26~1965.7.19]**

본관 전주(全州). 호 우남(雩南). 초명 승룡(承龍).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하였다. 가난한 선비의 외아들로 태어나 3세 때 부모를 따라 서울로 이주, 한문을 배우다가 1894년 배재학당(倍材學堂)에 입학, 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고 그 대가로 가계를 도우며 이듬해 졸업하였다.

일본인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에 대한 복수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미국인 여의사의 도움으로 관헌의 눈을 피하는 데 성공하여 위기를 모면, 이 무렵 개화사상에 심취, 그리스도교에 입교하였다. 서재필(徐載弼)의 지도하에 설립된 협성회(協成會)·독립협회(獨立協會) 등의 간부로 활약하였는데, 특히 협성회 기관지 《협성회보(協成會報)의 주필이 되어 날카로운 필봉으로 정부 공격에 앞장섰다.

1898년 정부전복을 획책하였다는 혐의로 독립협회 간부들과 함께 투옥되었는데, 동지 한 사람과 탈옥을 꾀하다가 붙들려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1904년 민영환(閔泳煥)의 주선으로 7년 만에 석방되었다. 그 해 겨울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에 일본의 한국침략 저지를 호소하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 머물면서 조지워싱턴대학교·하버드대학교 등에서 수학, 1910년 프린스턴대학교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17년 안창호(安昌浩) 등과 협의하여 뉴욕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대표를 파견하고, 1919년 3·1운동 후 국내에서 조직된 한성(漢城)임시정부와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된 임시정부에서 각각 최고책임자인 집정관 총재(執政官總裁)와 국무총리(國務總理)로 추대되자 미국 워싱턴에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를 설치하고 위원장이 되어 스스로 대통령으로 행세, 점차 카리스마적인 성격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934년 오스트리아 출신의 프란체스카와 결혼한 후 1945년 광복이 되자 그 해 10월 귀국, 우익 민주진영의 최고지도자로 독립촉성중앙협의회(獨立促成中央協議會) 총재, 민주의원 의장 등을 지내며 좌익세력과 투쟁, 1946년 6월 남한 단독정부 수립계획을 발표, 그 해 한국의 독립문제를 협의하기 위하여 미국에 건너가 미국정부의 대한(對韓)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하였다.

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 이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8월 15일 취임하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였으며, 철저한 배일(排日)정책으로 일본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견지하였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공산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자신의 대통령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하여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로 개정하고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

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방법에 반대, 계속 휴전을 반대하다가 휴전성립 직전에 반공(反共)포로의 석방을 단행,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1954년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는데, 사사오입(四捨五入)의 해석논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번복, 통과시킴으로써 1956년 대통령에 3선되었다. 1958년 12월 차기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경제시책의 빈곤으로 인한 특정재벌에 대한 특혜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장례는 고국에서 가족장으로 조촐히 집행되었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저서에 《독립정신》《일본내막기》(영문) 등이 있다. 194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았다.

***김구[金九, 1876.7.11~1949.6.26]**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호 백범(白凡), 아명 창암(昌岩), 본명 창수(昌洙)였으나 구(九)로 개명, 법명 원종(圓宗), 초호 연하(蓮下)이다.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했다. 15세 때 한학자 정문재(鄭文哉)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 동학(東學)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가 되고 이듬해 팔봉도소접주(八峯都所接主)에 임명되어 해주에서 동학농민운동을 지휘하다가 일본군에게 쫓겨 1895년 만주로 피신하여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였다.

이듬해 귀국, 일본인에게 시해당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원수를 갚고자 일본군 중위 쓰치다[土田壤亮]를 살해하고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로 감형되었다. 복역 중 1898년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麻谷寺)의 승려가 되었다가 이듬해 환속(還俗), 1903년 기독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황해도 안악의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이듬해 신민회(新民會)에 참가하고,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17년 형을 선고받았다. 복역 중 감형으로 1914년 출옥하여 김홍량(金鴻亮)의 동산평 농장 농감(農監)이 되어 농촌을 계몽하였다. 3·1운동 후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경무국장(警務局長)·내무총장·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면서, 1928년 이시영(李始榮)·이동녕(李東寧) 등과 한국독립당을 조직, 총재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무력활동을 시작,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 설치와 대(對)일본전투방책을 협의하고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으며,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통솔하였고, 한국 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을 임명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는 한편,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하다가 8·15광복으로 귀국하였는데,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였으므로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대한독립촉성중앙협의회 부의장, 민주의원 부의장, 민족통일총본부를 이승만(李承晩)·김규식(金奎植)과 함께 이끌면서 극우파로 활약하였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그후 북한으로 들어가 정치회담을 열었으나 실패하였다. 그후 정부수립에 참가하지 않고 중간파의 거두로 있다가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安斗熙)에게 암살당하였다.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으며, 저서로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 출처 : 네이버 백과 사전 >

두 인물의 운명요소를 비교하겠습니다.

***① 이승만**

생년월일 : 1875년 3월 26일 인시
운명요소 : 을해년 경진월 계해일 갑인시(乙亥年 庚辰月 癸亥日 甲寅時)

***② 김구**

생년월일 : 1876년 7월 11일 미시
운명요소 : 병자년 병신월 기사일 신미시( 丙子年 丙申月 己巳日 辛未時)

***1. 소질검색**

① 이승만(乙<-庚<-癸->甲)

먼저 계와 을(癸->乙, 乙<-癸)의 관계입니다. 역사의 라이벌 13. 천재 감별법에서 이 관계는 예술 창조 개발형에서 A급 천재, 기발 반짝 아이디어형에서 준영재급에 속하는 창조 창의형 소질이죠.

또 계와 갑(癸->甲)의 관계는 기술 창조 개발형으로서 극히 외향적이면서 기세등등하고 독선적이며 자기 이익을 위해 집단성과를 자기에게 집약시킬 줄 아는 영리한 소질입니다.

문제 해결할 때는 도도한 말 주변과 양측의 약점을 예리하게 찌르는 수법을 사용하며 너무 나서서 설쳐대는 수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나 아니면 안 된다.”는 과도한 자기 확신, 결국 이 소질이 그를 흥하게도 (대미전략) 망하게도 (3선개헌, 3.15 부정선거) 하였습니다.

다음 계와 경(癸->庚)의 관계입니다. 이 소질은 명예심을 중히 여기는 자료수집형인데 내 이득을 위해서 남을 해칠 수도 있는 독기 있는 소질인 바 결국 자기도 피해를 보는 수가 많습니다.

여기서 을과 경은 합거(合去, 사주용어로서 서로 합이 되어 힘을 잃는다는 뜻)되어 그 힘이 약해집니다.

② 김구(丙ㆍ丙->己->辛)

먼저 기와 병(己<-丙, 丙->己)의 관계입니다. 천재감별법에서 이 관계는 기술창조개발형과 자료수집아이디어형에서 A급 천재에 속하는 대단한 소질입니다. 그의 개혁 마인드는 기술창조개발형에서, 자주독립을 부르짖던 그 마음은 명예와 정신적 자기확신을 표현하는 자료수집아이디어형에서 기인한다고 보겠습니다.

두 번째 기와 신(己->辛)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별로 좋은 관계가 아닙니다. 이 관계는 찬스를 놓치고 타인에게 이득이 넘어가게 되는 소질입니다. (결국 이 소질 때문에 그는 권력을 뒤로 하고 남 좋은 일하다 일생을 마감하는 결과를 얻었다고 보겠습니다. )

※ 투파십간관계비법에서는 신辛이 계(癸)를 생(生)하지 못하고 계가 신을 약하게 설(洩)만 하는 관계인고로 찬스도 놓치고 남 좋은 일만 하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

③ 소질 종합판단

두 분 모두 창조, 창의, 아이디어 창출 소질로서, 이렇게 재(財)가 없는 사주는 결과물을 자기가 챙기지 못하고 허명만 날리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소질표*****2. 욕망검색**

① 이승만(癸일에 辰월)

리더 욕망이 아주 강합니다. 더구나 토(戊,己)로 투출되지 않아서 끈질기게 리더 역할하려는 욕망으로 괴롭습니다.

자기 표현 욕망, 인기 욕망이 강합니다. 목(甲,乙)으로 투출되어 동기부여가 충분히 되므로 상당한 효과도 보았습니다.

② 김구(己일에 申월)

자기 표현 욕망이 아주 강합니다. 더구나 이 욕망은 공을 빨리 세워야겠다는 초조감이 배어있는 욕망입니다. 윤봉길 의거, 이봉창 의거 등에서 표현되었습니다. 또한 자기 확인 욕망. 자기 것은 꼭 자기가 확인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런 욕망도 들어있습니다.

***3. 본능검색**

***본능표*****4. 개성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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