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세계에서 가장 큰 사건은 무엇이겠습니까.
1917년 10월에 시작된 공산주의 붉은 혁명은 이후 온 세계를 딱 둘로 갈라버린 실로 예상치도 못했던 거대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의 주인공은 본명이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인 레닌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수학의 천재라는 별명으로 불린 이 사람은 맏형 알렉산드르의 처형에 쇼크를 받고 혁명가로 변신했습니다. 이후 프롤레타리아트의 일당 독재를 실현하면서 주변 국가를 모두 공산화시키는 초석을 마련하였죠. 그를 계승한 피의 숙청자 스탈린 시대에 북한의 공산화, 베트남의 공산화, 또 중국의 공산화는 우리에게 가장 큰 사건이 되었습니다. 과연 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또 한사람, 모택동, 그는 동양거국 중국을 무대로 장개석과 피로 피를 씻는 처절한 내전에서 장 총통을 대만으로 쫓아내 버리고 중국대륙을 통일한 인물입니다. 보통 모택동 주석의 라이벌이라고 하면 장개석 총통을 논합니다만 필자는 오히려 그들의 관계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세력쟁탈전으로서의 대결일 뿐이라 생각하면서 공산주의 이론을 철저하게 현실화시킨 레닌과 모택동을 비교하고자 합니다.
***레닌 [1870.4.22~1924.1.21]**
본명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Vladimir Ilich Ulyanov)이며, 공식명인 니콜라이 레닌은 1902년경부터 사용한 필명이다.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의 중심인물로서 독일파 마르크스주의자 K.카우츠키의 사회민주주의에 대립하여 마르크스주의를 후진국 러시아에 적용함으로써 러시아파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킨 혁명이론가이자 사상가이다.
볼가 강변의 심비르스크에서 교육자의 아들로 태어나, 1887년 황제 알렉산드르 3세의 암살계획에 참여하여 처형된 맏형 알렉산드르의 영향으로 혁명에 뜻을 두기 시작하였다. 카잔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는 한편, 1870년대에는 플레하노프에 의하여 러시아에 도입된 마르크스주의를 연구하여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이후 혁명운동에 투신하여 체포와 유형의 세월을 거친 뒤 1900년 국외로 망명, 1903년 브뤼셀과 런던에서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당 제2차 대회에서 당원 자격문제로 마르토프와 맞서 직업혁명가주의를 관철시킴으로써 볼셰비키(다수파)가 되었다.
1905년 제1차 러시아혁명 직후 일단 귀국하였으나, 1907년 다시 망명하여 주로 스위스에 머물면서 연구와 저술에 종사하다가, 1917년 2월혁명 직후 독일이 제공한 봉인열차(封印列車)로 귀국하였다. 같은 해 11월 7일 무장봉기로 과도정부(過渡政府)를 전복하고 이른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표방하는 혁명정권을 수립한 다음, 러시아의 공산정권을 지키기 위하여 1919년 제3인터내셔널인 공산주의자 인터내셔널(약칭 코민테른)을 결성하였다. 1922년 뇌일혈 발작으로 와병, 마지막 1년은 실어증(失語症)까지 겹쳐 병상에서 지내다가, 1924년 사망하였다.
<출처 : 네이버 백과 사전>
***모택동 [마오쩌둥 1893.12.26~1976.9.9]**
중국 혁명가. 후난성[湖南省(호남성)] 샹탄[湘潭(상담)] 출생. 공산당 최고지도자로서 혁명을 승리로 이끌어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 나아가 문화혁명을 발동한 인물이다. 창사[長沙(장사)]의 사범학교를 졸업하였다. 청년 시절에는 정치단체인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5·4운동 중에 마르크스-레닌주의에 눈을 떠서 1921년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다.
1925년 5·30사건 뒤 농민운동에 전념, 토지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나 당론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27년 후난에서의 추수폭동(秋收暴動) 뒤 징강산[井岡山(정강산)]을 혁명기지로 노농홍군(勞農紅軍)을 조직하여 소비에트정권을 수립, 31년 루이진[瑞金(서금)]의 중화소비에트임시정부 주석이 되었다. <대장정(大長征)> 뒤 옌안[延安(연안)]을 항일근거지로 하여 항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제 2차 세계대전 뒤, 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 정부 주석이 되었다.
이후 사회주의 개조를 지도하여 독자적인 방법으로 국내건설을 추진, 58년 전중국농민의 인민공사화(人民公社化)와 <대약진> 정책을 단행하였으나 실패하고, 59년 국가 주석의 자리를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에게 넘겨주었다. 이때부터 중국 내에서는 <마오쩌둥사상의 찬양과 마오쩌둥의 신격화가 추진되어, 65년 가을부터 문화혁명이 시작되었고, 모 주석을 찬양하는 홍위병도 나타났다. 이즈음 마오쩌둥의 후계자로 지명되었던 린뱌오[林彪(임표)] 당부주석이 인민해방군을 등에 업고 마오쩌둥을 지지하였으나 그도 71년의 린뱌오이변으로 실각하고, 얼마 안 있어 탈문화혁명의 조류가 확대되어 갔다.
76년 4월 마오쩌둥정치에 대한 대중반란인 천안문사건이 일어나고, 76년 9월, 4인방(四人幇)에 의한 쿠데타 미수사건으로 부인 장칭[江靑(강청)]이 체포되었으며, 그의 사상을 수호해 오던 화궈펑[華國鋒(화국봉)]도 물러나자 마오쩌둥시대는 막을 내렸다. 저서로 《실천론(1937)》 《모순론(1937)》 등이 있다.
<출처 : 야후! 백과 사전>
자, 이 두 사람을 운명요소로 비교하겠습니다.
① 레닌
생년월일 : 1870년 4월 22일 유시
운명요소 : 경오년 경진월 무자일 신유시(庚午年 庚辰月 戊子日 辛酉時)
② 모택동
생년월일 : 1893년 12월 26일 인시
운명요소 : 계사년 을축월 갑술일 병인시(癸巳年 乙丑月 甲戌日 丙寅時)
***1. 소질 검색**
① 레닌(庚ㆍ庚<-戊->辛)
먼저 무와 경(戊->庚)의 관계입니다.
역사의 라이벌 13, 천재 감별법에서 이 관계는 예술창조개발형의 A급천재에 속합니다. 그의 글재주는 이 소질에서 큰 힘을 발휘하였고 그의 연설 또한 바로 이 소질에 기인했으며 또 독특한 창의력과 개혁적 마인드도 바로 이 소질에 힘 입는바 크다고 하겠습니다.
또 경과 무(庚<-戊)의 관계는 기발반짝 아이디어형의 A급 천재에 속합니다. 이 소질은 파당 특히 부하들을 자기 자신의 실력 밑에 묶어두는 큰 역할도 합니다. 다음은 무와 신 (戊->辛)의 소질입니다. 이 소질도 기술창조개발형의 A급 천재에 속합니다. 즉 사주 전체가 창의, 창조 개발, 아이디어 표출 등의 소질로 가득차 있습니다.
보통 이렇게 창의력만 있는 사주는 중국에서는 통조림 사주라고 하여 재주만 부리고 돈은 주인이 몽땅 걷어가 버리는 봉사뿐인 결과를 초래하곤 합니다. 실제로 그는 나라를 공산화시키는 데는 크게 성공했으나 그것에 의한 권력은 제대로 누려보지도 못한 채 후계자 스탈린에게 모든 것을 넘겨주고 말았죠.
② 모택동(癸->乙<-甲<-丙)
먼저 갑과 병(甲<-丙)의 관계입니다. 천재 감별법에서 예술창조 개발형의 A급 천재에 속합니다. 글재주, 말재주와 개혁 마인드는 이 소질에서 나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 매우 영리한, 요령이 확실한 최고급의 소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갑과 계(甲<-癸, 癸->甲)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자료수집 아이디어형에서 준 영재급 소질입니다.
(※ 투파 십간 관계비법에서는 갑과 계의 관계는 계는 갑을 생(生)하므로 아이디어 찬스 메이커로 대접받지만 갑은 계를 설(洩)하지 못하는 고로 다소 계산, 타산에 서툴고 그저 노력만 하는 관계로 되고 맙니다. )
③ 소질 종합 판단
공산주의를 소련과 중국에 접목시키고 20세기 전체를 공산주의 대 자본주의 구도로 대립시킨 이 두 인물은 모두 창의 창조 능력에 천재적 소질을 갖춘 인물들이었습니다.
***2. 욕망 검색**
① 레닌(戊일에 辰월)
자기 주체욕, 자기 확인 욕망으로 가득찹니다. 중요한 일은 남을 시키지 못하고 꼭 자기가 해야 직성이 풀립니다.
② 모택동(甲일에 丑월)
꼼꼼 계산 욕망, 자기 소유물은 절대 남에게 주지 않는 재물 욕망이 있습니다. 또 정신적 허영 욕망, 자기가 정신적으로 최고라고 생각하는 자기 현시 명예욕이 아주 강합니다. 이것은 癸로서 천간에 투출되어 큰 동기 부여가 되고 있고 또 현실에서도 이루어 졌습니다.
***3. 본능 검색**
***본능표**
***4. 개성 검색**
***개성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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