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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사도세자: 어떻게 이런 일이...

CEO출신 역술인 김남용이 본 '역사의 라이벌' <33>

“섧고 섧도다. 모년 모월 모일 ...”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경의 왕후)가 한중록(恨中錄)에서 부군이 부왕 영조에 의해 뒤주 속에 갇혀 죽은 참변과 당시의 살얼음판 같던 당쟁 문제 등을 순 한글의 유려한 문장으로 묘사하였습니다만 도대체 이 어찌된 일입니까.

조선조에서의 비극 중에는 왕족끼리의 처참한 살육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조선 초기, 왕자의 난에서는 이방원(태종)이 이복동생인 방번, 방석을 죽이지를 않나, 수양대군(세조)이 조카인 단종(노산군)을 사약으로 마감시키지를 않나, 또 이번에 논할 영조는 친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놓고 그 혹독한 더위에 굶겨 죽였으니 참 인륜도, 천륜도 왕통 앞에서는 통하지 않나 봅니다.

영조는 연잉군 시절, 태생의 열등감(무수리 최씨에서 태어났음)을 안고 심리적 고통을 무수히 겪으면서 자라났습니다만 등극하고부터는 훌륭한 실적을 무수하게 올리면서 백성들로부터 명군으로 칭송받았으나 이 사도세자 사건만큼은 도대체 납득이 가지 않는 처참한 사건이었습니다. 동생도 아니고 조카도 아닌 친자식을 크나큰 고통 속에 죽게 만든 것은 어떠한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비극 중의 비극이었습니다.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벌열(나라에 공로가 많고 벼슬을 많이 지낸 집안. 벌족)의 움직임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에서 비롯되었다지만 이후 그 불행은 일생동안 그를 괴롭히는 망령이 되고 말았습니다.

***영조[英祖, 1694~1776]**

숙종의 2남으로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 1699년(숙종 25) 6세 때 연잉군에 봉해지고, 1721년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1721년 왕세제 책봉은 경종이 숙종을 이어 즉위한 그 해에 노론 4대신이 왕의 건강이 좋지 않고 아들이 없는 것을 이유로 그를 왕세제로 책봉할 것을 먼저 발의하고, 소론측은 시기상조론을 펴 반대했으나 노론의 뜻대로 책봉은 실현되었다. 그러나 이후 노론이 대리청정으로까지 몰아가자 소론이 역공의 명분을 얻어 이 일에 앞장섰던 노론 4대신을 탄핵하여 귀양보냈다(신축옥사).

이듬해 1722년에 소론은 기세를 모아 노론이 삼수역(三守逆:경종을 시해하기 위한 3가지 방법)까지 꾸며 경종을 시해하려 하였다고 주장하여 노론 4대신을 비롯한 60여 명을 처형, 170여 명을 유배 또는 치죄하였다(임인옥사).

노론과 소론 사이의 치열한 정쟁 속에 즉위한 영조는 붕당의 대립 자체를 완화, 해소하는 것을 왕정의 큰 과제로 삼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붕당이 아니라 국왕이 명실상부하게 정국을 주도하여야 요·순의 시대처럼 탕탕평평의 치세가 실현될 수 있다는 왕정관을 명백히 표시하면서 이에 따르는 자들만을 등용하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729년에는 노론 ·소론 가운데 자신의 탕평책을 따르는 온건파들을 고르게 등용하여 정국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기유처분). 이 때는 노론 ·소론 사이에 균형을 맞추는 인사정책을 폈으나 점차 능력 위주로 전환해 가면서 왕권을 지지하는 탕평세력을 구축해 갔다.

탕평론은 요 ·순 임금의 경지를 이상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군주 스스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노력을 최대로 기울여야 하는 조건을 안고 있었다. 그리하여 영조는 학식있는 신하들과 강론하는 자리인 경연(經筵)을 재위 52년간 무려 3,458회를 열었다. 연평균 66회에 달하는 이 횟수는 조선일대에 최다 기록이었다.

영조는 스스로 검약 ·절제의 생활로 일관하는 한편, 재위중에 여러 차례 금주령과 사치풍조 금단의 조치를 내렸다. 요 ·순의 치세를 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탕평정치는 백성에게 고통을 주고 있는 여러 가지 폐단들을 고치는 개혁적 조치들을 많이 단행했다. 먼저 양반관리, 사족들이 백성들에 대해 사형(私刑)을 많이 행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하여 형정을 쇄신하기 위한 여러 가지 조치들이 취해졌다. 압슬형, 낙형을 각각 폐지하고, 1740년에는 얼굴에 글자를 새기는 형벌[刺字]을 금지하였다.

영조의 삼대 치적으로는 탕평 ·균역 외에 준천(濬川), 즉 청개천(淸溪川)을 준설한 것이 꼽힌다. 도성 가운데를 흐르는 개천을 오랫동안 준설하지 않아 홍수 때 범람이 잦아 1760년에 준천사(濬川司)를 세우고, 수만금을 출연하여 인부를 사서 흙을 파내는 대역사를 진행시켰다. 1773년 6월에는 개천의 양변을 돌로 쌓아 흙이 내려가지 않도록 하였다.

백성들의 사정을 직접 보고, 듣기 위해 재위 25년째 이후 50여 회나 궁성을 나와 거리 행차를 하였으며, 경희궁 건명문(建明門)에 신문고를 달게 하였다.

1762년에는 세자에 대한 지나친 기대와 벌열의 움직임에 대한 과도한 경계심으로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이는 참사를 빚기도 하였다.

***장헌세자[莊獻世子, 1735~1762]**

자 윤관. 호 의재. 휘 선. 이복형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요절하자 세자에 책봉되었다. 1749년(영조 25) 영조의 명을 받고 15세에 대리기무(代理機務)를 보았다. 1762년 김한구와 그의 일파인 홍계희·윤급 등은 세자의 장인 영의정 홍봉한이 크게 세력을 떨치자 홍봉한 일파를 몰아내고 세자를 폐위시키고자 윤급의 종 나경언을 시켜 세자의 비행 10여 가지를 들어 상변(上變)하게 하였다. 이에 영조는 대로하여 나경언을 참형하고, 세자에게 마침내 자결을 명령하였으나, 이를 듣지 않자 뒤주 속에 가둬 죽게 하였다.

영조는 곧 뉘우쳐 사도(思悼)의 시호를 내렸고, 1777년(정조 1) 그의 아들인 정조가 장헌(莊獻)으로 상시하였으며, 1899년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특히 정조가 불행하게 죽은 그의 아버지를 기린 여러 행적은 유명하다.

< 출처 : 네이버 백과 사전 >

두 사람의 운명 요소를 비교합니다.

① 영조

운명요소 : 갑술년 갑술월 을해일 정해시(甲戌年 甲戌月 乙亥日 丁亥時)

② 사도세자

운명요소 : 을묘년 무인월 무술일 갑자시 ( 乙卯年 戊寅月 戊戌日 甲子時 )

***1. 소질 검색**

① 영조 (甲-甲->乙->丁)

먼저 을과 정(乙->丁)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역사의 라이벌 13, 천재감별법에서 예술창조개발형의 A급 천재입니다. 창의력과 창조력이 탁월하며 개혁적 능력이 돋보이는 소질입니다.

그 다음 을과 갑(乙<-甲)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사람이나 지식 이용 능력이 매우 높은 소질입니다.

② 사도세자 (乙<-戊-戊<-甲)

먼저 무와 갑(戊<-甲)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매우 좋지 않은 관계입니다. 특히 윗사람에게 불복종적인 태도를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무례반항형의 전형입니다. 또 자가기 대장 노릇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권력지향적 소질이죠. 이 소질이 결국 반대파의 중신들로 하여금 겁을 먹고 악착같이 그를 옭아넣게 되는 소질이라 하겠습니다. 또한 무와 을(戊->乙, 乙<-戊)의 관계는 매우 꼼꼼 세심하다고 할까, 성과물을 챙기는데 매우 확실 확고한 소질입니다.

만일 세자가 조선조 창업 초기에 왕위에 올랐다면 태종+세종의 성질을 아울러 갖춘 훌륭한 군왕이 되었을 것이나 이미 신권이 기득권으로 자리한 조선조 중기 이후에는 그의 이 소질은 오히려 자기를 해치는 악재로 작용하고 만 것입니다.

※ 투파 십간관계 비법에서는 무와 갑의 관계에서 갑은 무를 강하게 극剋하나 무는 갑을 약하게 분分하는 관계로서 고분고분하게 극을 당하지 않고 반항하므로서 分하게 됩니다. 또한 무와 을의 관계에서는 을목은 무토에게 아무 작용도 못하고 (원래 목극토木剋土해야 하지만 이 경우 무작용임) 오히려 무가 을을 조정 調整(강하면, 설洩하고 약하면, 생生해 줌) 해주므로써 재물에 아주 강한 집념을 보이게 됩니다.

③ 소질 종합 판단

영조가 개혁 창의 기타 인간 이용 능력이 좋은 반면 사도세자는 보통 말하는 재관(財官)사주로서 사업가적 능력과 권력지향적 소질이 돋보여 더욱 정치가적 소질의 인물입니다.

***소질표**

***2. 욕망 검색**

① 영조(乙일에 戌월)

재무, 재물 욕망이 있습니다. 천간에 토 (戊,己)로 투출되지 않았으므로 속으로 꼼꼼하게 챙기는, 다소 꽁한 욕망으로 자리매김합니다.

두 번째는 보스 관리 욕망이 있습니다. 이것도 천간에 금(庚,辛)으로 투출되지 않았으므로 속으로, 뒤에서 사람을 옭아매는, 편집광적인 욕망으로 변합니다.

② 사도세자(戊일에 寅월)

보스가 되려는 욕망이 강합니다. 특히 천간에 목(甲,乙)으로 투출되어 강한 동기부여가 되고 있습니다.

③ 욕망 종합 판단

영조의 권력욕망이 무의식 속에, 잠재의식에 들어가 있어서 남이 잘 알아보기 힘들면서 더욱 집요한 반면, 사도세자의 욕망은 의식에 이미 표출되어 당당하게 권력지향적입니다. 이 점이 영조의 질투심의 원인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3. 부자관계 검색**

① 영조(戌월에 丁亥시)

자녀 중 하나에게는 아주 잘해줍니다만 한 자녀에게는 극(剋)을 당합니다. 즉 같이 살면 오히려 영조가 큰 해를 받습니다.

② 사도세자(寅월에 乙卯년)

부친과는 1:1 또는 자기가 형 노릇을 해야 되는 관계로서 부친 덕이 없는 사주입니다. 모친과는 모친을 마음 속으로 위하는 사주입니다.

③ 부자관계 종합판단

영조의 자녀와의 관계가 나쁘므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났다고 보겠습니다.

***4. 본능 검색**

***본능표**

***5. 개성 검색**

***개성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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